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장강명 지음, 이내 그림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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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책 한번 써봅시다]를 읽었다. 부제는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이다. 책 읽기는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도 한번 언젠가 책을 낼 수 있다면’이라는 기대와 희망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단행본으로 예쁘게 편집된 책에 내 이름 석자가 적힌 표지를 마주한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그 책이 어떤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동안 수많은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의 놀라운 필력과 참신한 표현력과 기발한 소재에 감탄하며 역시 책은 아무나 쓰는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아주 오래전에 어느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에 그가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소회가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나름 나도 언젠가 책을 내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는데, 내가 우러러본 작가들은 대부분 유년시절부터 엄청난 독서량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고백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타국 작가들의 작품이며 나이가 들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작품을 그 어린 시절에 탐독했다는 부분에서는 좌절감마저 들었다. 어쩌면 작품상을 받은 마당에 젠체하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장강명 작가의 책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되살려주는, 용기를 뿜뿜 나게 해주는 내용이 많았다. 책에서 작가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 책을 내려고 하면 이런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요즘 누가 책을 읽기는 하나?,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을 책을 뭐하러 돈 들여서 종이 아깝게 내느냐?’ 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독서 경향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저자가 얼마나 유명한지가 판매의 척도를 가른다. 무명작가가 쓴 책이 아무런 홍보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란 참으로 요원한 일이다. 그렇다보니 나까지 책을 내서 이 혼잡한 출판계에 또 하나의 쓰레기를 양산해 낼 필요가 있을까란 자성을 하게 된다.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장강명 작가는 꼭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고 쓰기를 즐기는 이들이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여 길게 논술한 책들이 많이 편찬되어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의 생각을 인내롭게 살펴볼 수 있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요즘은 혼자 있어도 할게 많다. 특히나 인터넷의 발달로 다양한 재미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정리가 되지 않을 때 OTT서비스를 통해서 밀린 드라마와 영화의 몰아보기를 할 수 도 있고, 유튜브로 각종 정보를 섭렵하거나 흥미 위주의 기사를 접하며 시간을 때울 수도 있다. 심심한데 잠깐 들어가볼까 하다가, 자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몇 개만 훓어본다는 게 그만 한 시간도 넘게 이것 저것 넘기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너무나 많고 다양한 콘텐츠 덕분에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TV를 봐도 한 채널을 보지 못하고 이리 저리 채널만 돌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금방 몸에 젖어들어 책을 읽다가도 스마트폰으로 이것 저것 둘러보기 일쑤이다. 인터넷으로 길들여진 조급증과 산만함은 텍스트로 길게 쓰여진 누군가의 스토리를 따라가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현대문물의 유혹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쉽게 빠져들기에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책 읽기는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작품은 하나의 읽기와 쓰기를 즐기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 우리가 더 이상 감각적인 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장려해주고 있다. 장 작가님 덕분에 글쓰기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본능적인 욕구들을 채우지 못하면 몸이 신호를 보낸다. 그것이 고통이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속이 쓰리고 머리가 어지럽다. 화장실을 억지로 참으면 방광이 아파 온다. 호감 가는 사람과 따뜻하고 우호적인 대화를 며칠씩 하지 못하면 옥시토신 분비량이 줄어들고 어두운 정서에 휩싸인다. 재미있는 영화를 한창 보는데 컴퓨터가 갑자기 꺼져버리면 답답해서 화가 치솟는다. 다 인간의 본성이다. 

창작의 욕망을 억지로 누루면 어떻게 될까. 나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공허감이 바로 그 결과라고 생각한다. 요즘 한국 사회는 어느 연령대, 어느 세대를 봐도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객관적인 조건이 나쁘지 않은데도 공허함을 토로하는 젊은이도 있고, 중년에 이르러 허무함을 못 견디겠다며 뉘늦게 일탈하는 이도 있다. 그런 정체성 위기는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이 만들어내는 일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할 때 온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지금 내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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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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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작가의 [초급 한국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0번째 작품이다. BTS를 비롯한 다른 연예인들의 영향으로 한류의 인기가 어마어마해진 나머지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이 늘어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베트남을 여행갔을 때 현지 가이드로 함께 한 앳띤 여학생이 베트남에서 한국어학과를 나와서 삼성에 취직하는 것이 하나의 드림 중의 하나라는 말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전해주었다. 남한과 북한 국민 통들어 7천만 정도만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국어를 다른 사람들이 배우려 한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그만큼 경제력이 올라갔기에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사람치고, 그러니까 거의 전국민이 외국어에 대한 각자 나름대로의 소심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스마트 기기로 간단한 통시통역이 가능한 시대이지만, 아직도 어학원이나 어학기기와 어학교재에 대한 광고는 끊임없이 나온다. 외국어 하나 정도 유창하게 하는 것은 큰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이고, 국민 전체가 사대주의에 전염된 것처럼 영어를 잘하는 사람 앞에서는 음메 기죽어 버린다.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 그곳에서 자라난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사실 모국어를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모국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도 매번 철자법이 이게 맞는건지, 띄어쓰기는 맞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어느 정도 맞았다고 해도 문맥상 자연스러운지 살펴봐야 한다. 소설에 나온 것처럼 주어와 목적어와 서술어의 순서를 꼭 맞출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말이 되도록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글쓰기는 그래도 수정이 가능하지만 말하기는 수정이 불가능하다.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다. 그래서 말이 많다보면 누구나 실수를 하기 쉽다. 과묵한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상대방과 가까워지기 어렵다. 하고 싶은 말을 여러번 곱씹다 보면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이다. 


언어란 단순히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시간 촘촘히 쌓여온 문화의 산물이기에 서로가 나누는 말과 글 속에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들이 배어 있다. 그래서 타국의 언어를 배우다 보면 그 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알게 되고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문지혁’이 이민 작가가 되기 위해 초급 한국어의 강사로 살아가며 겪게 되는 과정들은 결국 철자법과 문법이 엉망이더라도 ‘문지혁’이라는 주인공을 탄생시킨 초급 단어 ‘엄마’로 귀결되었다. 옹알이를 하며 가장 먼저 내뱉은 ‘엄마’라는 말이 이제는 그의 삶에서 영원히 퇴출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초급 한국어의 강사가 아닌 모국어의 나라로 돌아온 것이다. 


“거기는 낮이겠네. 여긴 밤이고, 니가 볼 땐 어제야. 있잖아, 니가 미국에 간 뒤로는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겠어. 내가 늘 과거에 남겨지는 느낌이라서 그랬나 봐. 넌 어느새 저만큼, 미래에 가 있는데. 인생에도 시차라는 게 있을 거고, 오늘 니가 말한 건 우리 사이에 그만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과거의 목소리는 여기까지만 듣는 걸로 해. 어머니한테 잘하고. 안녕.(69)”


“한국에서는 시간은 ‘시간’이라는 단어 하나뿐이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세 가지 단어로 구분했다. 아이온(aion), 크로노스(chronos), 그리고 카이로스(kairos). 아이온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무한하고 신성하고 영원한 시간, 그러므로 신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양적이고 균질한 시간,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의미한 시간,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이다. 마지막 카이로스는 질적이고 특별한 시간, 구별되고 이질적이며 의미를 지닌 시간, 말하지만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아이온에 둘러싸인 채 크로노스 속을 살아가는 존재다. 무심하지만 규칙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시간 감옥의 죄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에는 가끔씩 크로노스가 찾아오는데, 이를테면 화살이 날아가거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전과 이후가 갈라지고,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따라서 시간을 묻는 방법을 두 가지여야만 한다. 

1. 크로노스를 물을 때: 지금 몇 시에요?

2. 카이로스를 물을 때: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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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의 색 오르부아르 3부작 2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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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르메트르의 [화재의 색]을 읽었다. [오르부아르]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에두아르 페리쿠르의 누이 마들렌 페리쿠르가 주인공이다. 전작에 비해 만만치 않은 벽돌책이지만 이미 등장 인물들을 어느 정도 알기에 금방 몰입이 되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에두아르와 마들렌의 아버지 마르셀 페리쿠르의 장례식 장면부터이다. [오르부아르]에서는 에두아르가 꽤 부잣집 아들이구나라고만 추측했는데, [화재의 색]에서 묘사된 페리쿠르 집안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재벌에 해당되는 엄청난 부자였다. 거대 은행업으로 부를 쌓은 페리쿠르 씨의 장례식에는 대통령까지도 참석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엄숙한 순간에 마들렌과 이혼한 프라델 대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폴이 3층 유리창 앞에서 몸을 던지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할아버지의 관 위에 떨어진 손자 폴은 병원으로 실려가고 마들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화재의 색]에는 마들렌과 그녀를 둘러싼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로 아버지 페리쿠르 씨의 신임을 받았던 페리쿠르 은행의 권한 대행 귀스타브 주베르, 두 번째로 마르셀 페리쿠르의 동생이자 무능력한 국회의원인 샤를 페리쿠스, 세 번째로 마들렌의 시중과 말벗이 되어준 하녀 레옹스, 마지막으로 폴의 가정 교사이자 마들렌의 내연남 앙드레 델쿠르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 폴의 갑작스런 투신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마들렌은 장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폴이 영구 장애를 입은 채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오로지 아들이 삶의 활력을 되찾기를 바라며 간절히 간호하지만, 도대체 왜 아들 폴이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몸을 던진 것인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주베르는 마르셀의 권유로 마들렌과 재혼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마들렌의 거부로 페리쿠르 은행의 거부가 될 것이라는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동안 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국회의원직을 유지해온 샤를은 마르셀의 죽음으로 낙동강 오리알 처지가 되고 유언장에 그에게 남긴 유산이 얼마되지 않자 불같이 분노한다. 페리쿠르 씨의 유산은 대부분 딸 마들렌과 손자 폴에게 남겨졌다. 아들의 사고로 심약해진 마들렌에게는 레옹스가 항상 옆에서 큰 위로가 되어준다. 그리고 내연남이자 폴의 가정교사인 앙드레는 주요 신문의 칼럼니스트가 되고자하는 열망을 갖고 있어 마들렌이 주선으로 페리쿠르 씨의 장례식 기사를 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폴의 투신으로 놓쳐버리게 된다. 


이렇듯 마들렌의 주변의 가까운 인물 4명은 마들렌이 아들 폴에게 집중하던 차에 그녀의 유산을 노리고 엄청난 배신을 하게 된다. 마들렌은 순식간에 거의 모든 재산을 잃게 되고, 옳긴이가 언급한 것처럼 ‘몽테 크리스도 백작’이 되어 하나 하나 복수의 장을 만들어간다. 주베르와 레옹스, 샤를과 앙드레의 몰락을 지켜보며 속이 다 시원해지는 개운함도 있었지만 이미 결론이 어느 정도 예상되기에 전작과 다른 약간의 식상함이 느껴졌다. [오르부아르]에서 보여준 주인공들의 기구한 사연과 그로 인해 삶이 피폐해져가는 과정 중에 불쑥불쑥 되살아나는 생의 기운들이 이어지기를 바랬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보다 복수극이 펼쳐지는 전개에 더 중심을 둔 것 같다. 그럼에도 저자의 3부작 중에 마지막으로 [우리 고난의 거울]이라는 제목의 에두아르의 꼬마 연인 루아즈가 주인공이라는 작품이 기대된다. 원작은 출판되었던데 어서 번역본이 나오기를...


“당신의 소설을 통해 어떤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르메트르는 이렇게 답변한다. <깊은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는 소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개개의 소설들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활동입니다. 문학은 독자들의 세계관을 확장시켜 줌으로써 그리하는 것이죠. 나는 어떤 거창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소설가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내 생각을 감추지 않으며, 내 작품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 내가 전달하고 싶어 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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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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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를 읽었다. 오랜만에 벽돌책을 읽었다. 촘촘한 자간과 줄간격으로 시작부터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막막함이 밀려왔지만 얼마되지 않아 그것이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을 읽고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 그의 또 다른 저작들을 살펴보니 예전에 서점에서 보았던 제목이 떠올랐다. ‘오르부아르’는 무슨 뜻일까 무심코 넘어갔었는데, 원 제목은 [Au Revoir La-Haut]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뜻이다. 분량이 상당하다 보니 등장인물이 무지 많아서 이름이 헷갈리지 않을까(러시아 작가들의 책이 주로 그렇듯이)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주인공은 알베르 마야르와 에두아르 페리쿠르 두 명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프랑스 청년이다. 그리고 두 청년의 비극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악역 앙리 도네프라델, 에두아르의 아버지 페리쿠르 씨, 에두아르의 누이 마들렌 페리쿠르가 주요 인물이다.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제1차 세계대전 종식을 열흘 앞두고 야망에 불타는 프라델 대위의 계략으로 갑작스런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알베르는 적진으로 직격하던 도중 독일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을 것이라 생각한 첩보병 두 명이 프라델 대위 때문에 죽게 된 것은 아닐까란 의문을 갖게 되고 그 모습을 뒤편에서 지켜보면 프라델은 자신의 추악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알베르를 포탄이 터져 생긴 구덩이에 밀쳐넣게 된다. 구덩이 근처에 또 다른 포탄이 터지며 모래 더미가 구덩이를 덮게 되고 알베르는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진다. 전투 중 다리에 총을 맞은 에두아르는 그래도 살아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퇴각하던 도중 구덩이 위에 총부리 올라온 것을 보고 그 안에 누군가 생매장 당한 것은 아닐까 구덩이를 파내기 시작하다. 에두아르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알베르. 하지만 그 순간 포탄의 파편이 에두아르의 하관을 날려버리게 된다. 이렇게 에두아르와 알베르의 인연은 시작된다. 

에두아르로 인해 살아난 알베르는 에두아르를 살리기 위해 극진한 간호로 보살피지만 에두아르는 고통 속에 울부짖는다. 프라델의 방해로 후송조차 되지 못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에두아르는 가족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를 거부하고 결국 알베르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신분을 바꿔치기 한다. 에두아르에게 외젠 라리비에르라는 이미 죽은 병사의 이름을 전해준다. 새로운 이름을 가진 에두아르, 그리고 에두아르의 가족에게 그의 전사 소식이 전해진다. 알베르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에두아르의 가족에게 그가 얼마나 용맹한 군이이었는지 알리는 편지를 보내는데, 에두아르의 누이 마들렌은 에두아르의 시신을 찾고 싶어 알베르가 가장 두려워하던 프라델 대위와 함께 비밀리에 시신을 찾고자 찾아온다. 이 일을 계기로 프라델과 마들렌은 결혼하게 되고 엄청난 야심을 가진 프라델은 대단한 부호인 장인 페리쿠르 씨의 힘을 빌려 무너진 가문을 재건시키려고 한다. 프라델이 마들렌과 결혼하며 정재계의 비호를 받으며 시작한 사업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죽고 여기 저기에 묻힌 조국의 전사들을 위한 묘지 조성 사업이었다. 국가적인 시책으로 도움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프라델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 위해 각종 비리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160-180cm의 군인들의 시신을 130cm의 관에 구겨넣으려 했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프라델의 욕심이 지나쳐 여러 잡음을 내던 차에 정부에서 파견된 늙은 관리 조제프 메를랭의 의해서 그의 죄목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고 프라델은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다. 이와 동시에 모르핀과 헤로인으로 삶의 활력을 이어가던 에두아르는 갑자기 알베르에게 죽은 병사들을 위한 기념비 사업을 벌이자고 말한다. 알베르는 소심한 윤리적 사고로 반대하지만 에두아르는 일사천리로 사업을 전개시키려고 한다. 결국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카달로그를 만들어 엄청난 할인을 해주는 혜택을 빌미로 전국 각지의 지방 단체에 다양한 장면을 묘사한 기념비 제작을 홍보하고 선입금을 받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치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처럼 프라델의 죄값을 치르게 되지만 뒤늦게 아들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페리쿠르 씨와 에두아르의 비참한 만남은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기극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지만 그들의 청춘과 온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만행은 도대체 누구에게 단죄받아야 하는 것인지 허탈함만을 남긴다. 불과 100년 전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과 작가의 만들어낸 허구가 뒤섞여 추리소설과도 같은 긴장감을 자아내지만 순수 문학과도 같은 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와 정황들은 피에르 르메트르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이 아닌가 싶다. 전쟁의 참혹함이 남긴 엄청난 후폭풍의 과제들을 나약하고 상처받은 인간의 모습으로 간신히 회복해나가려 부단히 노력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감사하게 된다. 작가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장 블랑샤르의 말 “신께서 우릴 다시 만나게 해주시길 바라는 하늘에서 만나요. 나의 사랑하는 아내여, 천국에서 다시 봐요.”를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된 것처럼, 억울한 죽음과 희생의 삶을 살아온 이들의 넋을 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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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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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읽었다. 하루키의 신간을 동네서점 버전으로 어디서 살 수 있을까 찾던 중에 인스타그램을 서핑하다가 자동으로 뜨는 광고그램에 ‘카페 동경 앤 책방’에 입고 되었다는 포스팅을 보고 후다닥 달려갔다. 들어가서 책이 진열되어 있는 맨 첫 공간에 하루키의 신간이 쌓여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진저라떼(무지 좋아하지만 메뉴에 있는 카페가 극히 드문데)를 주문하며 책도 함께 결제했다. 표지는 역시 동네서점 에디션이 훨씬 멋지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후 이렇게 다양한 작은 서점이 생겨나고 출판사에서는 인터넷이나 대형서점이 아닌 작은 동네 서점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매력적인 표지를 디자인하여 구매력을 상승시키는 다양한 시도가 썩 괜찮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읽고 난 후에 컬렉션으로 진열하기에도 괜찮으니까 말이다. 

조금은 쌀쌀한 난방이 시원치 않은 카페 동경 앤 책방에서 갓 나온 신간을 알싸한 생강의 맛을 우유 거품의 부드러움으로 감싸주는 진저라떼를 호호 불고 마시며 첫 단편을 읽었다. 역시나 하루키는 에세이보다는 천상 소설이다. 에세이를 읽다보면 가끔은 하루키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독특한 시선을 느낄 때가 간혹 있는데, 소설은 역시나 하루키다 라는 ‘인정’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번 소설집에는 ‘돌베개에’, ‘크림’,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사육제(Carnaval)’,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일인칭 단수’ 이렇게 8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8개의 단편 모두 화자는 ‘나’로 하루키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비춰진다. 그리고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간혹 ‘나’의 직업이 작가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소설이면서도 에세이 같은 느낌도 든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있다보면 재즈와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소설의 배경으로도 여러 곡들이 등장하기에 하루키처럼 재즈와 클래식에 조예가 깊다면 아마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들어가기에 훨씬 더 수월하리라 생각된다. 나는 재즈에도 클래식에도 그리 큰 관심이 없었기에 하루키의 작품에 나오는 곡들은 실제로 들어보지 않는다면 거의 모를 것이라는 게 매번 아쉬웠다. 이번 단편집에서 알토색스폰을 부르는 찰리 파커에 대한 판타지 같은 이야기와 슈만의 사육제를 모티브로 한 내용이 참으로 신선했다. 

무엇보다도 하루키는 팝송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비틀스에 대한 기억으로 풀어낸 ‘위드 더 비틀스’의 내용은 하루키만의 소설이 갖고 있는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이 단편에서 하루키는 오래전 사귀었던 여학생과의 일화를 전해준다. 비틀스의 음반을 가슴에 두 팔로 꼭 안고 걸어가는 다시는 마주치지 못한 어떤 소녀에 대한 기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비틀스가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해에 하루키는 처음으로 여학생과 교제를 시작했고 우연히 그 소녀를 데리러 집에 갔다가 그녀의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녀의 오빠는 유전적인 영향으로 갑작스럽게 몇 시간의 기억이 사라져 버리는 증세를 고백하며 ‘나’와의 어색한 대화를 이어간다. 그녀의 오빠는 ‘나’에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톱니바퀴’의 일부를 낭독해줄 것을 부탁한다. 십팔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나’는 그녀의 오빠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충격적인 옛 여자친구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질문: 두 번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는 그들 인생의 어떤 요소를 상징적으로 시시하는가?(120)>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48-49)”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169)”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먼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181)”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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