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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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린드버그는 비행기로 대서양을 착륙 없이 단독으로 횡단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업적인데 그때 당시, 특히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에 열광하며 찬사를 보냈을지 짐작도 안 된다. 오늘날로 치면 스포츠 스타나 할리우드 배우를 능가하는 인기와 명성을 누렸을 것이고, 어쩌면 그러한 인기와 명성을 발판 삼아 정계에 진출했을지도 모른다(트럼프처럼?). 필립 로스가 2004년에 발표한 <미국을 노린 음모>는 찰스 린드버그가 1940년 미국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다는 설정의 가상 역사 소설이다. 

미국의 영웅인 린드버그는 사실 나치 추종자이고 반 유대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틀러를 만났고, 히틀러에 대해 "그는 의심할 여지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 독일 국민을 위해 큰일을 하고 있다."라고 코멘트했다. 1939년 일지에는 "뉴욕 같은 곳에는 이미 유대인이 너무 많다. 소수의 유대인은 나라를 강하고 특색 있게 만들지만, 유대인이 너무 많으면 무질서해진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유대인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라고 썼다. 1941년에는 미국을 떠밀어 전쟁에 몰아넣으려는 가장 유력한 집단 가운데 하나로 유대민족을 거론했다. 

소설은 그런 린드버그가 고립주의와 친 파시즘을 표방하며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을 공약에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필립은 보험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비서로 일하는 어머니, 그림을 잘 그리는 형을 둔 아홉 살 소년으로, 린드버그가 당선되기 전까지는 주민 대부분이 유대인인 마을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린드버그가 당선된 후 아버지의 직장 생활에 이상이 생기고, 그림밖에 모르던 온순한 형이 달라진다. 사촌 형 앨빈과 이모 이블린의 신상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소설에 따르면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전 세계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지만, 필립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맞벌이를 해서 겨우 네 식구가 먹고사는 평범한 가정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몰라도, 필립과 필립의 형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도 아니고, 유대인보다는 미국인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 하지만 린드버그 당선 이후 이들 가족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급기야 직장에서 해고되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린드버그를 둘러싼 정치적 변동이 생길 때마다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목숨의 위협을 당한다. 

총 548쪽에 달하는 소설이지만 생각보다 빨리 읽은 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워낙 극적이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정치 경험 없이 인기에 힘입어 당선된 지도자가 힘세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굽신거리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등 돌리는 상황이 너무나 미국의 구 정권 같고 한국의 현 정권 같다. 본격적인 정치 소설이 아니라 필립의 성장 소설처럼 읽힌다는 점도 좋았다. 여러 일들을 겪으며 타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마음을 키울 수도 있었던 필립이 두렵고 불편해도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걸 배우는 결말도 감동적이고 교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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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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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인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노숙인답지 않게 트렌치코트를 입고 매일 같이 맥도날드에 나타나 영자 신문을 읽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서 방송에도 나왔다고 한다. 나는 그 방송을 보지 못했지만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이름이 워낙 인상적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봤을 때 읽어보고 싶었다. 아니, 알고 싶었다. 맥도날드 할머니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지금도 종종 회자되고 이렇게 소설까지 나왔는지 궁금했다. 


이 소설은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진 실존 인물의 생애 중에서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을 토대로 작가가 상상한 내용을 덧붙여서 완성되었다. 공중파 방송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신중호 PD는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맥도날드 할머니에 관한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선다. 매일 밤 같은 시각에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정동 맥도날드에 나타나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신문이나 책을 읽다가 새벽이 되면 사라진다는 할머니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할머니를 직접 만나보니 할머니보다 '레이디'라고 부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용하는 어휘나 행동하는 모습이 단정하고 우아했다. 이런 '레이디'가 벌써 7년째 정해진 주거지 없이 거리를 떠돌며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대학도 나왔고 직장 생활도 했다는 걸 보면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아온 게 분명한데 어떤 사연으로 인해 노숙인으로 전락했는지도 궁금했다. 자칫하면 자신도 늙어서 거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고 불안했다. 


한편 자신을 취재하러 온 신중호 PD를 만난 맥도날드 할머니는 자신의 고요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모처럼 대화할 만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 반갑고 즐겁다.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진 1940년생 여성 김윤자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교회에서 만난 어느 집사님이 매달 보내주는 20만 원을 아껴 쓰면서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케이크를 대접하기도 한다. 


밤에는 주로 맥도날드에 있다면 낮에는 일본문화원에서 오래된 일본 영화를 본다. 세상을 떠난 여배우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하고, 과거의 꿈들과 현재를 비교하며 상념에 빠지거나 후회하기도 한다.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파멸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가 떠오르기도 했다. 실존 인물의 삶을 매체로 재현하는 것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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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도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4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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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최근작들을 읽고 조해진 작가의 팬이 된 경우라면 이 책을 읽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가 그랬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이 지금도 막 밝고 경쾌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작들을 읽으면 호의나 희망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는 편인데,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는 단절이나 절망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떠올랐다. 작가님이 이 시절에 이런 분위기를 선호하셨는지 아니면 그 당시 한국 문학이 대체로 이런 분위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책에는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저자의 데뷔작 <여자에게 길을 묻다>를 비롯해 일곱 편의 중, 단편이 실려 있다.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쓰인 작품들이라서 (2024년인) 지금 읽으면 약간의 시차가 느껴질 수 있다. 폭력에 대한 묘사 면에서 특히 그랬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에는 폭력이 일상의 배경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소설이 몇 편 있다. 남자친구는 여자친구를 때리고, 아버지는 자식들을 때리고, 교사는 학생들을 때리고, 상사는 여직원들을 희롱한다. 다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이의를 제기하는 쪽이 이상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이런 야만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조해진 작가와 연결되는 작품들도 있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청년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의 이야기를 그린 표제작 <천사들의 도시>는 프랑스로 입양된 입양아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감독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 소설 <단순한 진심>의 원형 같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결혼 이민을 왔으나 현재는 주방 가구점에 사는 신세로 전락한 고려인 여성이 나오는 단편 <인터뷰>는 폐업한 가구점에서 몰래 생활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여름을 지나가다>와 유사한 모티프를 지닌다. 


데뷔작 <여자에게 길을 묻다>에선 저자가 이 때에도 소통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거인증에 걸린 언어 장애인 여성을 데리고 속초로 향하는 '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는 8년 간 동거한 남자와 최근에 사별했는데,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사회에 나와 매일 같이 노동을 해야 했던 힘든 시기를 말없이 함께 견딘 그를 잃고 막막해 하는 상태다. '나'와 동행하는 거인증 여성은 때로는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은 짐 같고 때로는 존재만으로 의지가 되는 친구 같은데, 어쩌면 이는 목숨이나 인생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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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후쿠오카 - 행복의 언덕에서 만난 청춘, 미식 그리고 일본 문화 이야기
오다윤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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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이 방문하는 일본의 도시 중 하나이다. 그런 후쿠오카에서 여유 있게 한 달 정도 살아보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일을 직접 해본 사람이 있다. 바로 <한 달의 후쿠오카>의 저자 오다윤 작가이다. 저자는 2023년 1월 18일부터 2월 19일까지 총 33일간 후쿠오카 한 달 (약간 넘게) 살기에 도전했다. 


이 책은 한 달 살기 시작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매일의 기록이 일기처럼 정리되어 있다. 한 달 살기를 계획할 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 숙소가 아닐까 싶다. 일본에서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숙소 종류로는 먼슬리맨션, 유스호스텔, 게스트하우스, 캡슐호텔 등이 있는데, 저자는 일본의 고급형 캡슐호텔 체인인 '나인아워즈 하카타 스테이션'을 이용했다. 평균 1박 2만 5천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호텔급 시설, 개인 라커룸, 투숙객 전용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저자는 도쿄대 대학원 연구생으로 유학했고 5년간 도쿄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 문화에도 해박하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연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가 후쿠오카 출신이라든가,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두 주인공이 후쿠오카로 짧은 여행을 떠났을 때 방문한 장소, 멘타이코(명란젓), 모츠나베(곱창전골) 등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음식들이 실은 한국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점 등 다양한 정보를 알려줘서 재미있고 유익했다.


저자는 후쿠오카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규슈에서 가까운 소도시(기타큐슈, 이토시마, 야나가와)나 다른 현(나가사키, 유후인, 벳푸)도 열심히 여행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여행지는 후쿠오카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근교 여행지라는 이토시마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한가로운 해변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보니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하와이'라는 저자의 찬사에 저절로 공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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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입니다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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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만, 앞날 일만 생각할 때일수록 그리움은 따뜻하다."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입니다>는 일본의 에세이스트 겸 만화가 마스다 미리가 자신이 평소에 신경 쓰는 사소한 것들을 짧은 글과 만화로 소개하는 형식의 책이다. 책 초반에 감자 샐러드, 몽블랑, 아이스크림, 달걀 샌드위치 등 음식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 중 하나인 몽블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흥미로웠고, 달걀 프라이가 들어간 달걀 샌드위치를 선호한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할 뿐 미니멀리즘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서점에 가면 정리정돈 책 보는 걸 좋아하는 것, 쾌적한 장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을 때면 집 근처 무인양품에 들어간다는 것이 나와 똑같아서 신기했다. 타카라즈카 팬인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뭔가를 열광적으로 좋아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내 장르의 찐덕후인 친구들 보면서 하는 생각이라서 웃겼다('나는 찐덕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찐덕후라던데...). 


마스다 미리 책답게 옛날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저자는 고등학생 때 동네에 하겐다즈 매장이 처음 생겼고 무인양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시급이 500엔이라고 해서 놀랐다(참고로 저자는 1969년생이다). 나는 2005년에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시급이 3천 원도 안 되었건만. 80년대에 슈퍼 계산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들은 계산기 치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슈퍼에서 계산기로 물건값을 계산했던 것 같다. 요즘은 슈퍼도 보기 힘든데... 


"아름다운 존재는 거리 곳곳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게, 아름다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은 "어머나, 아름답네"라고 하겠죠. 나는 신호등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거리 신호등이 전부 '빨강'이 되는 순간입니다. 파란색으로 바뀌기 전의 한순간. 다양한 사람의 작은 아름다움이 거리에 흩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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