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말들 - 언어덕후가 즐거운 수다로 요리한 100가지 외국어의 맛
구로다 류노스케 지음, 신견식 옮김 / 유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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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몇 개의 외국어를 배울 수 있을까. 몇 개는 고사하고 하나라도 잘했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구로다 류노스케의 생각은 다르다. 어려서부터 외국어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후 현재는 슬라브어 학자이자 언어학자로서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전공인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등의 슬라브어 외에 영어에도 능통하지만, 전공이 아닌 언어나 사용 인구가 적은 언어에도 관심이 많다. 이 책은 그렇게 접한 백 가지 언어에 대한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들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처럼 사용 인구가 많은, 이른바 메이저 언어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불가리아어처럼 상대적으로 사용 인구가 적은 언어에 대한 내용도 있고, 디베히어, 라오어, 레토로망스어, 링갈라어 등 이름조차 낯선 언어에 대한 내용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소수 언어, 비인기 언어를 배우면 강사는 물론 교재를 구하기도 힘든 어려움이 있지만, 강사나 교재를 구하는 과정 자체가 공부가 되고 추억이 되며, 경쟁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로 인정받을 가능성도 높다.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나 지역을 방문했을 때 환영받을 확률도 높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1980년대 말에 러시아어 통역사로 사할린섬을 방문했을 때 사할린 거주 한인을 만났던 일을 들려준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인이 철수한 뒤에 남은 사람들로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잘했다. 저자는 이들이 일본과 일본어에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우려와 달리 이들은 일본인과 일본어로 말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내색을 보였다. 공통의 언어로 역사를 극복하고 인연을 만든 귀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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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삶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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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아를 성찰하는 내면 일기보다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는 외면 일기, 즉 바깥 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일종의 사회 탐구 프로젝트를 실천했는데, 그 일환으로 출간된 책 중 하나가 1985년부터 1992년까지의 기록을 담은 <바깥 일기>이고, 다른 하나가 1993년부터 1999년까지의 기록을 담은 <밖의 삶>이다.


<바깥 일기>에서는 저자가 사는 신도시에 새로 생긴 기차역과 그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 주를 이룬 반면, <밖의 삶>에서는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가는 대중매체 속 현대 사회의 모습에 대한 관찰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예가 리얼리티 쇼의 흥행이다. 저자는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리얼리티 쇼가 생겨나면 허구는 사라질 테고 그러다가 그렇게 연출된 현실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면 허구가 되돌아오리라"고 예측했는데(15쪽), 이 예측이 맞는지 틀린지 현재로서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공감이 된다.


이 책이 집필된 1990년대 중후반에는 국제적인 규모의 분쟁이나 사건이 많았다. 걸프전, 보스니아 내전,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 다이애나 비 사망, 유럽연합 출범과 유로화 사용 등이다. 1993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폭탄 테러에 대해 기술하면서 예술이 생명보다 소중한지 묻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유기된 동물의 안위를 걱정하는 뉴스를 보면서 노숙자의 복지를 생각하는 대목도 있는데,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웠다기보다는 사건의 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지극히 아니 에르노다운 시각으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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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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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어도 사람마다 관찰하는 것이 다르고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관찰하고 인식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에르노의 산문집 <바깥 일기>는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저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 기록을 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아를 성찰하는 내면 일기보다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는 외면 일기, 즉 바깥 일기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에 더욱더 적합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에 걸쳐 '바깥 세상'을 관찰한 기록을 담고 있다.


저자의 시야에 들어온 것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전철역 실내 주차장에 적힌 낙서, 객실 안에서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을 깎는 청년, 엄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는 아이, 계산을 틀려서 관리자에게 야단맞는 상점 직원 등 저자가 속해 있는 시공간과는 다른, 2024년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어떤 모습은 저자의 시선을 통해 비범하고 특별해진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 운동복 차림의 모녀를 보면서 저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다. 두 손이 화학 약품으로 망가진 아프리카계 남자를 보면서 저자는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손이 누구 덕분에 고운지 상기한다.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저자가 다니는 전철역이나 기차역은 가난한 학생이나 노동자, 운전하지 못하는 여성이나 노인, 아이들이 주로 이용한다. 상점이나 슈퍼마켓은 일부의 상인이나 노동자를 제외하면 이용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자기 차가 있는 남성이나 부유층, 지식인 계급은 대중교통수단을 잘 이용하지 않고 상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일도 거의 없으며, 그러니 역이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인이나 거지를 마주칠 일도 드물다. 그러면서 가난은 사라졌다고, 빈부 격차나 양성 불평등은 옛날이야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는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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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
양영희 지음, 인예니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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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코리안 영화감독 양영희의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그의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는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의 뒤를 이어 한국에 출간된 양영희의 책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는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요소를 더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재일코리안 2세로 태어나 조총련 활동가 부모 슬하에서 오빠 둘을 북한으로 보내고 외동딸 아닌 외동딸로 살았던 저자의 생애를 알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러므로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를 읽기 전에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부터 읽어보기를 권한다.


미영은 1964년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코리안 여성이다. 조총련 활동가인 부모의 뜻에 따라 일본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조선학교에 다니며 조선말을 배웠지만, 같은 나이대의 일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패션과 유행에 관심이 많고,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어 장차 극단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고교 졸업 후 미영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조총련 계열 학생들이 다니는 도쿄의 조선대학교에 진학한다. 하지만 미영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졸업 후 당이 배치한 직업에 종사하며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라는 소리를 들어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학교 행사에서 김일성 찬양 영화를 보던 미영이 그 영화의 구성이며 내용이 얼마 전에 본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히틀러 찬양 영화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냉소하는 대목이다. 일본에 사는 데다가 문화 예술 애호가라서 일반인보다 훨씬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미영의 눈에는 조총련 사회가 주입하는 사상의 모순과 한계가 뻔히 보인다. 반면 미영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은 미영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조총련 사회의 관습이나 문화에 세뇌되어 그것의 비합리성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도 거부하지 못한다.


미영을 보면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미영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보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주입된 생각이나 태도를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드는, 기묘하고 복잡한 장면이었다.


이 소설은 미영의 대학 4년간을 그린 성장 소설인 동시에 구로키 유라는 일본인 남성과의 연애를 그린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 미영은 조선대학교 근처에 있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학생인 구로키 유와 만나는데, 이는 일본인과의 교제를 금기시하는 학교 분위기와 어긋나는 일이었다. 미영은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과 사귀는 걸 금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면서도, 미영이 "나는 미영이 자이니치든 조선인이든, 그런 건 신경 안 써"라고 말하는 유에 대해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인간에게, 그리고 관계에 있어 역사란, 사회란, 정치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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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 이브토로 돌아가다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사람의집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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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작은 도시 이브토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실제 체험을 글로 쓰는 작가로도 유명한데, 그가 생애 초기의 기억을 형성한 장소인 이브토는 그의 글의 주요 무대이자 배경으로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브토 시에서 공식적으로 아니 에르노를 초청한 것은, 그가 첫 책을 출간한 지 40년 만인 2012년의 일이었다. 이 책은 그때의 강연을 기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니 에르노는 강연에서 자신의 화두는 결국 "글을 쓰면서 어떻게 나의 출신 세계를 배반하지 않을 것인가?"였다고 고백한다. 아니 에르노는 이브토에서 식료품 점 카페를 운영한 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아니 에르노의 부모는 농사를 짓거나 공장 노동자가 될 운명이었으나 하나뿐인 딸을 중상 계급 이상으로 키우기 위해 상인의 삶을 택했다. 아니 에르노는 부모의 바람대로(정확히는 어머니의 바람)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대학 학위와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중상 계급 이상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출신 계급에 속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출신 언어와 지향 언어가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했고,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접하며 자신의 체험과 성취가 계급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개인적 체험과 역사적 경험의 관계를 살피는 글쓰기를 시도하며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해부하는 동시에 개인의 삶을 재단하고 통제하는 사회의 폐부를 찔렀다.


이 책은 그러한 아니 에르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작가로 데뷔한 지 40년 만에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고 열렬한 성원 속에 강연을 하게 된 작가의 기쁨과 흥분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아니 에르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사진, 친구에게 보낸 편지 등의 자료가 실려 있는 점은 새롭다. 기존 번역서의 의역 또는 오역을 정정하는 내용이 담긴 주석이 다수 실려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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