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퓨테이션: 명예 1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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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였던 엠마 웹스터는 여성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기 위해 정치에 투신해 노동당 하원의원이 되었다. 현재 엠마는 불법 촬영물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디언>지의 표지를 장식할 기회가 오고, 법안 홍보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엠마는 촬영에 응한다. 하지만 표지가 공개된 후 사람들의 반응은 엠마의 예상과 달랐다. 대중은 엠마가 인터뷰에 설명한 법안의 내용보다 엠마의 립스틱 색깔과 하이힐의 높이에 관심을 보였다. 


네티즌들은 물론이고 엠마의 지역구에 사는 유권자들마저 엠마가 노동당 정치인답지 않다고 등을 돌렸다. 여성들은 엠마가 페미니스트답지 않다고, 남성들은 엠마가 여성 인권만 챙기고 남성 인권에는 무심하다고 비난했다. 쏟아지는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진 엠마는 예전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다. 그 결과 딸이 불법 촬영물 유포 가해자로 몰리고, 엠마 자신도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과연 엠마는 정치인으로서, 엄마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벼랑 끝에 놓인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까. 


세라 본의 소설 <레퓨테이션 : 명예>는 촉망받는 여성 정치인이 언론과 대중의 집중 포화를 받으며 추락하는 과정을 실감 나게 그린다. 사실 요즘은 인터넷과 SNS가 워낙 발달해서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닌 일반인도 자칫하면 소설에서 엠마가 당한 일과 비슷한 일(악플 세례, 스토킹, 협박 등등)을 당할 수 있다. 심지어 '불명예도 명예'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만한 일을 하고(예를 들면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이나 사생활 팔이하는 연예인들) 그걸로 인기를 유지하고 돈을 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엠마가 좀 더 뻔뻔했으면, 덜 착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가디언>지의 표지가 공개되고 사람들이 비난할 때 "내가 얼마나 예쁘고 매력적이면 저럴까"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전 남편이 애 엄마가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고 비난할 때 변명 대신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와서 직접 챙겨주라고 응수했다면 어땠을까. 호감이 있는 남자에게 예의를 차리는 대신 솔직하게 호감을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늘 겸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착하게 굴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엠마를 점점 더 나쁜 길로 이끈 건 아닐까. 


1권을 순식간에 읽었고 이제 2권을 읽을 차례인데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너무나 기대된다. 영상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궁금하다. 작가님의 전작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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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4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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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우크라이나에는 유대인 거주 지역이 따로 있었다. 유대인 거주 지역은 또 다시 주민들의 경제 수준에 따라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아다의 아버지는 하층민 거주 지역인 게토 출신으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서로 다른 구역을 오가는 중개인의 지위에 올랐다. 아다는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부유한 유대인들의 눈에 아다의 아버지는 여전히 게토 출신 하층민일 뿐이다. 


아다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버지가 죽고, 그의 가족들이 아다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때부터 아다는 작은 아버지의 아내인 라이사 숙모와 그의 딸 릴라, 아들 벤과 함께 산다. 나이가 비슷한 벤과는 친남매처럼 매일 같이 놀고 항상 붙어 다닌다. 해리를 처음 본 날도 벤과 함께였다. 유대인 가문 중에서 로스차일드 다음으로 부자로 소문난 솔로몬 시너의 손자 해리 시너를 처음으로 본 날. 그날 이후 아다는 해리만을 사랑한다. 


아다를 좋아하는 벤은 아다가 해리를 좋아하는 것이 싫다. 부자인 해리는 가난한 아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싫다. 이들의 삼각관계는 파리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이때는 해리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우크라이나에선 부유한 유대인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던 해리는 프랑스에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은근한 배제와 차별을 당한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을 무시하는 프랑스인들보다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아다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문제는 해리에게는 아내가 있고 아다에게도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다의 남편은 사촌인 벤이다. 사실 아다와 벤의 성도 시너이기 때문에, 아다와 벤, 해리는 모두 친척 관계다. 벤은 해리보다 먼저 아다를 사랑했고, 친척이기 때문에 외모도 닮았는데,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해리를 좋아하는 건 잘못이라고 아다를 설득한다. 하지만 아다가 해리를 좋아하는 건 단지 부유해서만은 아니다. 그러나 해리가 부유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이렌 네미롭스키의 소설 <개와 늑대>는 세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을 그린 로맨스 소설로도 훌륭하지만, 20세기 초 유럽의 유대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서도 가치가 상당하다. 소설에서 아다네 가족은 점점 더 심해지는 포그롬(유대인 박해)을 피해 프랑스로 이민을 가지만, 파리에서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당하고 차별받으며 힘든 생활을 한다. 도피와 방랑이 일상이기 때문에 돈과 물질을 숭배하고 혈연에 집착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다는 개처럼 길들여진 남자 해리도, 늑대처럼 자유로운 남자 벤도 아닌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는다. '그림, 자식, 용기. 이거면 살 수 있어. 그것도 아주 잘 살 수 있어.'라고 다짐하는 아다의 모습이 너무나 밝고 희망찬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렌 네미롭스키는 1940년 이 소설을 출간하고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삶을 지속할 수단과 목적과 의지가 있어도 처한 환경이 부적합하면 무용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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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장면들 -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
민바람 지음, 신혜림 사진 / 서사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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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리말 사전을 사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을 쓴 민바람 작가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국어학과 한국어교육학, 한국학을 전공했고 한국어강사로 10여 년을 일했다. 한국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을 텐데, 정작 순우리말 사전을 가지게 된 건 한국어강사 일을 그만둔 후의 일이다. 선물 받은 순우리말 사전을 읽으며 저자는 우리말인데도 외국어보다 낯설다는 사실과 읽을수록 힘이 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서 마음에 든 순우리말 낱말을 활용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분명 우리말인데 듣거나 읽어본 적 없는 낱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철이 지나 불필요해진 물건을 뜻하는 '가을부채', 마음속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단단히 해둔 다짐을 의미하는 '마음고름', 잠을 자려고 눈을 붙이는 일을 비유한 '눈썹씨름', 남이 보지 않는 데에서 젠체하는 호기를 가리키는 '이불활개' 등 풀이를 들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낱말들. 이런 낱말들을 모르는 채 한국어 공부는 다 했다 여기고 외국어 공부에만 몰두했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이런 낱말들도 재미있지만, 낱말들과 함께 풀어낸 저자의 사는 이야기도 따뜻하고 푸근하다. 불안정하고 경쟁이 심한 직장에 다니면서 저자는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다. 병원 신세를 지는 일도 여러 번 있었고, 성인 ADHD와 우울증, 사회불안장애 등을 진단받기도 했다.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한탄스러웠던 적도 있지만, 덕분에 삶의 모습이 한 가지가 아니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배우기도 했다. 단어가 있다는 건 "많은 이가 이미 같은 생각을 지나왔다는 것". 병명이 있다는 것 또한 이미 많은 이들이 같은 증세를 겪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도,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책에 나오는 낱말 중에 나는 '가을부채'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부채의 전성기는 여름이지만, 여름이 지났다고 해서 부채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다음 해의 여름을 대비해 넣어두었다가 더위가 시작될 즈음 다시 꺼내 부치는 것이 부채다. 사람에게도 전성기가 있고, 그 때가 아니면 찾는 사람이 적을 수도, 수입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전성기가 지났다고 해서 다시 전성기가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전성기가 오지 않아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저자의 파트너 진 님의 말을 빌리면 "그런 캐릭터도 괜찮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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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츠가이 4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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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의 작가 아라카와 히로무의 최신 연재작 <황천의 츠가이>는 밤과 낮을 양분하는 운명을 타고난 쌍둥이 유르와 아사의 이야기를 그린다. 시골에서 태어난 쌍둥이는 어릴 때 헤어졌다. 시골에 남아 부모님 대신 할머니를 모시며 살았던 유르는 마을을 떠난 줄 알았던 부모님과 아사를 찾기 위해 도시로 간다. 좌우 님을 츠가이로 거느리는 츠가이 구사자가 된 유르는 데라와 하나의 협력을 받아 가족을 찾는다. 


3권에서 유르는 카게모리 저택을 찾아가 아사와 재회했다. 아사로부터 자신은 해(解), 유르는 봉(封)의 능력을 지녔다는 말을 들은 유르는 아사와 헤어져 데라의 은신처로 간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흉악한 츠가이인 데나가 아시나가의 차지가 되어 있었고, 유르 일행은 데나가 아시나가와 대결을 벌인다. 인간 중에서도 어린 아이를 잡아먹기 좋아하고, 1200년 동안이나 봉인되어 있었던 데나가 아시나가가 대결에 임하는 태도는 절박하다. 


대결의 결과로 유르 일행은 데나가 아시나가의 주인 타데라 겐과 만난다. 알고보니 겐은 데라의 이복 동생으로, 10년 전 유르의 부모님이 마을에서 도망치는 걸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선대 타데라, 즉 자신의 아버지임을 밝힌다. 유르 일행은 겐이 유르의 부모님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겐에게 잘해준다. 이 대목은 가족 드라마 같지만, 데라의 집을 벗어나면 유르를 노리는 츠가이들이 득시글득시글하다. 과연 5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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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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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올가는 한때 작가를 꿈꿨지만 현재는 대학 교수인 남편 마리오와 남매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오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으니 올가와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마리오가 말한 '사랑하는 여자'란 몇 년 전 마리오와 일 때문에 가깝게 지냈던 여자, 가 아니라 그 여자의 딸이다. 올가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줄 알았던 마리오가 자신과 아이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한편, 이제 막 미성년자 신분에서 벗어난 여자(애)와 사귄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집을 나가고, 올가에게는 엄마 말을 지겹게 안 듣는 아이 둘과 남편이 데려온 개 오토만이 남는다. 평생의 사랑인 줄 알았던 남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에게 떠난 것만 해도 슬프고 괴로운데, 그가 남긴 아이들과 개까지 돌봐야 한다니 미칠 노릇이다. 그 순간 올가는 고향에서 '불쌍한 여자'라고 불렸던 이웃 여자를 떠올린다.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그 여자도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빠져서 집을 떠난 후 미쳐버렸다. 올가 자신의 미래가 그 여자일 줄이야. 


소설 후반까지도 올가는 마리오의 배신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인다. 살림을 내팽개치고 아이들과 개를 돌보지 않으며 자기 몸조차 못 씻고 못 먹인다. 홧김에 그동안 한심하게 여겼던 이웃 남자에게 자기 몸을 허락하기도 하고, 외출을 했다가 가스 불을 끄고 나오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천천히 이성을 되찾으면서 마리오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과연 그는 내가 이렇게 울고불고 매달릴 정도로 괜찮은 남자일까. 


올가가 마리오의 배신을 알고 괴로워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머리로는 딸 뻘인 여자에게 빠져서 가족을 내팽개친 남편이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그를 원하는 올가를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이해가 되었다(아아 사랑이란...). 그랬던 올가가 점점 정신을 차리고 남편과 자기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지금의 남편의 커리어를 만들어준 것이 올가이고, 올가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살게 한 것이 남편임을 깨닫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버려진 사랑>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쁜 사랑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다른 두 작품인 <성가신 사랑>과 <잃어버린 사랑>은 모녀 간의 이야기인 반면 <버려진 사랑>은 부부 간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성가신 사랑>과 <잃어버린 사랑>을 다 읽고 나서는 기쁨이나 후련함 같은 감정을 못 느꼈는데 <버려진 사랑>을 다 읽고 나서는 기쁘고 후련했다. 옛 남자는 새 남자로 잊을 수 있어도, 엄마와 딸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런 의미에서는 다른 두 작품보다 읽기 편한 내용이었다(TV 드라마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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