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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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정보라의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는 중독성이 없고 부작용도 없는 완벽한 진통제 NSTRA-14가 등장한 세계를 그린다. 이 세계에선 더 이상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없다.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자 자발적으로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는 신흥 종교 '교단'이 그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에 의해 형과 함께 교단에 맡겨져 자란 '태'는 NSTRA-14를 제조하는 제약회사를 상대로 테러 사건을 벌인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투옥된다. 제약회사 대표였던 '경'의 부모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태'가 일으킨 테러 사건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경'을 피해자라고 부르지만, 어릴 때부터 오빠와 함께 신약 실험 대상으로 이용되었던 '경'으로서는 '태'가 부모를 없애준 것이 오히려 고맙다. 


또 다시 '교단'에 의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태'를 심문한다. '태'는 자신의 형 '한'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한'이 숨어 지내는 호수가 근처 별장으로 데려간다. 한편 '경'은 회사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헤어진 '현'과 재회한다. '경'의 부모가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직원이었던 '현'은 대표의 딸인 '경'을 모시다가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되었다. '현'과 헤어진 후 혼자 힘으로 살았던 '경'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본다. 


이 소설은 등장 인물 대부분의 이름이 외자라서 성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오빠가 있는 것을 보니 여자, 형이 있는 것을 보니 남자 - 이런 식으로 문장에 드러나 있는 정보를 단서로 삼아야 성별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마저도 오해였던 걸 깨달은 대목이 (나에게는) 두 번 있었다. 한국어로는 오빠나 형이라는 단어를 보고 해당 인물의 성별을 짐작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오빠나 형이나 '(older) brother'인데, 영어로 번역된 글을 읽으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하다. 


획기적인 진통제가 개발되어 사용화된 가상의 미래를 상정해서 쓴 소설이지만, 지금 당장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로도 읽혔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뛰쳐 나와 교단에 투신하는 어머니, 교단의 가르침에 세뇌되어 죄를 짓고 감옥 신세를 지는 아이들, 부모의 돈벌이에 이용되는 또 다른 아이들과 돈만 많이 벌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정부와 대중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요즘 유행한다는 마약이 NSTRA-14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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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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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도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지>, <소녀 연예인 이보나>, <마고> 등을 쓴 한정현 작가의 첫 산문집이다. 한정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해서 산문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기대한 대로 좋았다. 저자가 첫 산문집의 테마를 '환승'으로 정한 건, 평생 남에게 자랑할 만한 특기가 없었던 저자가 환승만은 잘했기 때문이다. 


일단 저자는 '이름 환승'을 잘했다. 저자는 어릴 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정현' 대신 스스로 지은 난희라는 이름을 썼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에서 내내 '한정현'으로 불리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필명으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팬픽을 썼다(정확히는 좋아하는 아이돌이 아니라 좋아하는 아이돌을 대신하는 다른 아이돌에 대해 썼지만...). 


전공은 영어인데 주변 사람들(정확히는 전 애인들)의 영향으로 인문학과 사회학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뉴질랜드에 정착할 마음을 먹은 적도 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한국과 일본을 수시로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직업은 소설가이지만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한줄기로 난 길을 걷다가 다른 길이 눈에 들어오면 그 길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달까. 


이런 저자의 삶의 방식은 저자의 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자의 소설에는 여성,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이민자 같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가 많이 나온다. 저자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회가 가라고 떠미는 길을 걷는 대신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을 스스로 택한다. 아무도 길을 내주지 않으면 직접 길을 내기도 하고, 그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기꺼이 길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저자가 그동안 발표한 소설의 창작 비화도 나오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소설만큼 애정하는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어 읽는 내내 즐거웠다. 뉴질랜드 유학 시절 배수아 작가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하셔서 나도 읽어보려고 한 권 주문했다. 이 책에 언급된 책과 영화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고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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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이돌 - 누가 당신의 소년을 죽였을까
서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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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디 아이돌> 시즌3. <디 아이돌>의 PD는 겉보기엔 능력 있는 대기업 계열 방송국 직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액수의 빚을 지고 있다. 어느 날 <디 아이돌> 시즌3 최종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양준우 연습생이 촬영장에서 지급된 간식 상자 속 곤약 젤리를 먹고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디 아이돌> 시즌3 방영이 중단되고, 순위 조작을 대가로 거액의 돈을 받을 예정이었던 PD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양준우 연습생이 사망한 원인이 곤약젤리에 든 독이었음이 밝혀지고, 현장에 있던 연습생 10명이 용의선상에 오르자 곤경에 처해 있던 PD가 이런 아이디어를 낸다. 국민 프로듀서들이 투표로 최고의 아이돌을 뽑는 형식을 모방해, 국민배심원들이 투표로 범인을 색출하는 리얼 추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 <디 아이돌 특별 편 : 소년 단죄>가 시작되고, 이 악마의 기획이 전국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든다. 


서귤 작가의 소설 <디 아이돌>은 정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의 최종 후보자 11명 중 1명이 독살 당한다. 범인은 나머지 10명의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짐작되는 상황. 기존 추리 소설의 문법을 따르면 용의자들 각각의 살인 동기를 추궁하고 알리바이를 파악하는 데 치중해야 할 텐데, 이 소설은 그러지 않는다. 용의자들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방송국, 연예기획사, 스폰서, 가족, 팬 등의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그린다. 


어쩌면 이는 아이돌의 특성과도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아이돌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방송국 입장에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수단이고, 연예기획사 입장에선 판매를 위해 제작한 상품이며, 스폰서 입장에선 매출을 높이는 도구다. 가족에게는 생계 부양자, 팬에게는 대리 애인. 이들에게 용의선상에 오른 아이돌 각자의 실제 생활이나 인간으로서의 감정이나 생각은 상관 없다. 방송만 잘 되면, 회사만 잘 되면, 물건만 잘 팔리면, 돈 잘 벌고 욕구만 해결해 주면 그만이다. 


비판적인 어조로 썼지만, 나 또한 아이돌의 팬이고 <디 아이돌>과 비슷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본 적도 있다. <디 아이돌 특별 편 : 소년 단죄>의 기획을 들었을 때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실제로 제작되면 볼 것 같다. 최애가 나오면 욕하면서 본방 사수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 속 인물들(특히 팬들)을 욕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점에서 나와 이 사람들이 얼마나 다를까. 아이돌 입장에선 나와 이 사람들이 달라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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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장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5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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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사망한다. 남자의 이름은 K. K는 15년 전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K는 자신의 사망 보도 이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살면서 한 여자의 이름과 얼굴을 빌려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여자는 K가 쓴 소설을 읽고 작가 행세를 하면서 지냈다. K가 사망한 날 아침, 여자는 죽은 K의 책상에서 K가 남긴 서류 봉투를 발견한다. 여자는 K가 남긴 서류 봉투를 K의 딸이 재직 중인 대학 연구실에 가져다 놓는다. 


K의 딸은 연구실 문 앞에 놓인 서류 봉투를 보고 깜짝 놀란다. 봉투에 적힌 이름이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그의 이름인 '손승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 '강재인'이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든 서류를 본 K의 딸은 그것이 15년 전 사망한 아버지 K가 쓴 글이란 걸 알게 된다. 대체 누가 왜 이런 글을 자신의 연구실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15년 전 사망한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정녕 없는 걸까. 


천희란의 소설 <K의 장례>는 남성 소설가 K의 두 번에 걸친 사망과 이를 통해 연결된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이름'이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소설가 K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 반면, K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두 여자는 각각 전희정, 손승미라는 가명을 쓴다. 전희정, 손승미는 가짜 이름(가명)이기도 하지만, 남이 지어주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진짜 이름'이기도 하다. 


두 여자의 차이점은, 전희정이 자신의 이름만 스스로 짓고 작품 활동은 K에게 의존한 반면, 손승미는 자신의 이름도 스스로 짓고 작품 활동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했다는 점이다. 특히 전희정은 K가 쓴 소설로 유명 작가도 되고 돈도 많이 벌지만, 자기 스스로 이룬 성취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대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손승미는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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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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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랜드는 어릴 때 삼촌의 저택에서 지도 한 장을 보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것은 지중해를 둘러싼 나라들의 언어를 전부 배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외국어 공부에 몰두한 그는 번역가로 커리어를 쌓다가 출판사 사장이었던 아내의 뒤를 이어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그렇게 번역인으로 출판인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줄 알았던 그가 어느 날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가족이 있는 트리에스테를 떠나 자신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런던으로 간다. 


런던에서 레이랜드는 돌아가신 삼촌이 자기 앞으로 남긴 저택에서 지내며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본다. 그는 어린 시절 강압적인 아버지와 피상적인 학교 교육에 질려서 가출을 감행했다. 호텔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며 외국어를 공부했고,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번역가로 데뷔했다. 기자인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아내를 따라 아내의 고향인 트리에스테로 갔다. 그곳에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키웠고, 현재 그의 딸은 의사, 아들은 변호사가 될 예정이다. 즐거운 삶이었지만, 몇 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예전만큼 즐겁지 않다. 


삼촌의 책상에서 '이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번역하는 일은 그만하고 너 자신의 글을 쓰라'는 내용의 편지를 읽은 후로 레이랜드는 남은 생을 자신의 글을 쓰는 데 바쳐야 할까 고민하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가운데 레이랜드는 이웃인 케네스 버크와 친구가 되고, 감옥에 갇혔을 때 통역해준 것을 계기로 러시아어 번역가 안드레이와 교류하게 된다. 오랫동안 신세 진 런던의 출판인 크리스티 모자에게 신세를 갚을 일도 생기고, 소설가 프란체스카 마르케세, 메리 앤과도 재회한다. 


<언어의 무게>는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된 원작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가 16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는데, 그 반전이 인터넷서점 책 소개에 떡하니 나와 있는 걸 보면 반전이 아닌가 보다(반전을 모르고 읽었던 나로서는 반전을 읽고 충격이 상당히 컸기에 반전이 무엇인지 이 글에 적지 않겠다). 반전을 알기 전에는 시한부 판정 후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반전을 알고 나서는 어떤 '죽음'이 존엄한 죽음인가에 관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배우자가 심각한 병에 걸려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경우 다른 배우자가 고의로 사망시킨다면 살인인지 존엄 상실인지에 관한 논쟁이 여러 번 등장한다. 레이랜드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서 남은 생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다량을 섭취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약을 준비한다. 이 경우 후자는 극단적 선택일까 아니면 존엄 상실일까.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는 것과 목숨이 다하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또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온 레이랜드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동안 자신이 내렸던 선택들을 반추한다. 만약 자신이 가출하지 않고 아버지와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호텔 경비원으로 취직하는 대신 철도원이 되었다면.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내를 따라 트리에스테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아내의 뒤를 이어 출판사 사장이 되지 않았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기 전에 출판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면... 


레이랜드 앞에 선택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지만, 레이랜드는 그중 몇 가지만을 선택했다. 선택의 결과 레이랜드의 삶은 이렇게 되었지만, 선택하지 않은 것의 결과로도 레이랜드의 삶은 이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생은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 선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후회할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닐까. 이제 더는 어제도 내일도, 삶도 죽음도 생각하지 않고 눈 앞의 소설에만 집중하는 레이랜드를 보니, 얼마 전에 읽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본 "다른 인생은 없다, 지금을 살아라'라는 경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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