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
오생근.조연정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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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시

 

남진우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본문 108 쪽 )

 

남진우 시 , [ 죽은 자를 위한 기도 , 1996 ]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중에서 ㅡ

 


 

빗방울이 수직으로 세상을 가두는 주말 저녁 .

거리를 걷는 행인들은 온몸으로 수직에 맞선다 .

내리 꽂히는 점들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하고

주변을 검게 지운다 . 빈 칸이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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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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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ㅡ 손홍규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돌이켜보는 건 , 그이를 상실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심코 떠나보내던 순간의 자신이었다 . 갔다 올게 하는 목소리에 응 하고 무심히 대답했던 자신에게 왜 그때 직접 배웅을 해주지 않았는지 ,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는지 ,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는지 ,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는지 , 그토록 사소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지 않았는지를 무섭게 따져보기 마련이었다 .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후회가 잡초처럼 자라나 무성했을 테고 마음에 드리워진 빽빽한 그늘이 빠져나와 주위에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
(본문 57 , 58 쪽 ㅡ손홍규 ,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ㅡ 
그들은 청년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청년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 사랑에 실패하고 원한을 품었던 ,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 절망해버렸던 그 청년은 그들의 내부에서 그들과 함게 늙었다 . 그들은 깨달았다 . 자기 내부를 헤매는 이 불길한 청년과 때때로 조우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음을 . 청년과 그들은 헤어진 게 아니라 함께 거주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힐난하고 할퀴면서 수십 년을 견뎌왔음을 . 
(본문 64 쪽 )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자기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 여기가 다르지 .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유예 기간을 겪어야만 진정한 슬픔에 이르게 되지 . 상실한 사람의 부재를 거듭 느끼면서 ㅡ 먹을 사람은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밥상 위에 수저 한 벌을 올려놓았다가 혹은 방구석에서 그이의 유품임이 분명한 잡동사니를 발견했을 때처럼 최초의 상실 이후에 되풀이해서 똑같은 상실을 겪어야 한다는 걸 , 한 번 상실하게 되면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는 걸 깨달으면서 점점 더 깊은 슬픔에 이르게 되니 말일세 . 단순하고 우둔한 사람에게도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네 .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 그것은 오히려 고통을 겪는 사람이 획득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네 . 나도 그렇고 자네들도 그렇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입으로만 곡을 했지 어디 진짜 뜨거운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있던가 .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두 눈가에서 용암처럼 눈물이 흘러나와 귓속에 고이지 않던가 .
...... 그 아이는 말이야 , 지금 상을 치르는 사람 같지가 않았어 .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상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곱씹으며 노를 젓다가 지금 막 깊은 슬픔의 기슭에 닿은 사공처럼 노를 내려놓았지 . 아이는 단번에 깊은 슬픔에 이른 거야 . 무언가를 상실한 순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버린 거지 . 아이의 두 눈에서 용암 같은 눈물이 흐르는 걸 자네들도 보았잖은가 . 저 탁자 앞에 앉은 채로 수십 년을 살아버렸어 .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발버둥하다 겨우 알게 된 것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아이는 저기 앉은 채로 알아버렸어 . 
...... 아우님들 , 저녁이라네 . 밤의 정강이라고도 할 수 있지 . 여기 적당히 어둡고 캄캄한 밤의 슬하에서 불 밝힌 주점에 어울려 앉아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자네들이 있어 기쁘다네 . 먼 훗날 그 아이가 돌아오면 우리가 되어 여기 이렇게 앉아 술잔에 술을 따르겠지 . 어쩌면 이미 돌아와 우리 사이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네 . 그 말을 하고 노인은 실수인 것처럼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
(본문 65 , 66 쪽 )
그의 감정도 언제나 합금이었다 . 순수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 그는 살아야 했고 어떤 감정이 엄습하면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전혀 다른 감정을 쥐어짜낸 뒤 엄습하는 감정을 방어했다 . 그런 과정에서 감정들은 뒤엉켜 하나가 되어 동시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고 이렇게 합금처럼 태어난 감정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것을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말은 괴물일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서서히 괴물이 되어갔다 .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 그리고 남들처럼 꿈을 꾸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는 순간이 왔다 .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 
(본문 68 , 69 쪽 )

진짜 어머니의 손님이 왔는데도 그 손님이 너무나 허깨비 같아서 부주의하게 그 옆을 돌아가다가 손님의 어깨를 친 적도 있었다 . 분명히 살아 있는 손님인데 헛것이 눈에 보이는 거라 여겼다 . 어머니와 아내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면 둘 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고 혹은 넋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때의 아내는 어머니가 불러들인 손님 같았다 . 그들은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다가 알아버린 사람들 같았다 . 삶이란 본질적으로 비극이라는 사실을 . 
(본문 71 쪽 )

치매가 심해진 시어머니 앞에 앉아 넋두리를 풀어낸 적은 있어도 소소한 일상을 살아온 이력에 버무려 간식을 먹듯 나누어 먹을 사람이 그의 곁에는 없었다 . 그는 너무 외로웠기 떄문에 외롭다는 걸 잊어버렸고 그걸 잊어버렸기에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절망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 밤마다 감옥을 나서는 꿈을 꾸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감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쓸쓸해하는 종신형 죄수처럼 . 
(본문 100 , 101 쪽 )

그는 아들과 남편이 어떤 방식으로 다투었는지 , 아들이 한사코 제 아비와 달라지려 애쓸수록 사실은 얼마나 제 아비와 똑같아지는지 , 그래서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제 아비와 똑같다는 걸 꿈어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남편이 하던 것처럼 방문을 발로 차고 말은 하지 못한 채 씩씩대다가 집을 나가 버렸다고 고자질을 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아갔다 . 말을 마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는데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저 가슴 바닥에 수천만 톤이나 남아 있는 것 같아 서러워졌다 . 그는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에 견주면 모래밭에서 모래 한 알 골라낸 것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 해야 할 말이 까마득했고 그제야 조금은 남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조금 울었다 . 말 대신 눈물을 흘렸다 . 눈물 한 방울은 천 마디의 말에 버금갔다 . 눈물 두 방울은 십 년에 걸친 사연에 버금갔다 . 시어머니가 엉덩이를 끌며 그에게 다가왔다 . 악아 , 왜 우니 응 ? 울지 마라 악아 . 돈이 없니 ? ...... 이거 , 우리 며느리가 준 돈이야 . 우리 며느리가 나 맛난 거 사먹으라고 준 돈이야 . 우리 며느리 피 같은 돈이다 . 너 써라 . 울지 마라 .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 울지 마라 , 악아 . 사람이 돈을 울려야지 돈이 사람을 울릴 수는 없는 거다 . 울면 못 써 . 니가 우니까 나도 울고 싶잖니 , 응 ? 시어머니는 방긋 웃었다 . 그는 혼란스러웠다 .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 같았다 .
(본문 103 쪽 )

그는 두려운 눈길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 , 제가 누군지 아시는 거죠 ? 정신도 멀쩡하신 거죠 ?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시는 거죠 ? 알기 때문에 결국 거기로 가신 거죠 ? 어머니 ......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 여기서 얼마나 더 늙어야 해요 ?
(본문 104 쪽 )

사소한 일을 감당하지 못해 남편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 겨우 그것 때문에 이 사람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 그가 정말로 외롭고 불안할 때 남편에게 기댈 수 없게 될까 봐 서글펐다 .  남편은 벽에 기대어 두다리를 쭉 뻗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남편의 두 손은 가슴팍에 얹혀 있었다 . 아직 그가 젊었던 어느 날 남편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허공에 대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 그는 깜짝 놀라 방구석으로 기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 남편은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 같았다 . 한참을 그러더니 지금처럼 벽에 등을 기대며 스르르 주저앉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그는 남편 곁으로 다가가 서랍장 모서리에 부딪혀 까지고 피가나는 남편의 손등을 닦아주었다 . 잠든 남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 이른 아침 , 잠에서 깬 남편은 멍하니 앉았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 슬픈 꿈을 꾸었어 .
(본문 106 , 107 쪽 )

여자에게는 밥그릇도 국그릇도 수저도 단 한벌뿐이었다 . 먼 친척인 이 집으로 세 들어 온 뒤 시장에서 새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 거기에 밥을 푸고 국을 담고 숟가락질과 젓가락질을 하며 끼니를 때워 왔다 . 어쩌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전적으로 여자에게 속한 것들이었다 . 여자는 남자가 깨끗히 비우고 간 그릇과 수저를 씻으며 눈물이 나오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 어쩌면 멀지 않은 날 그 남자와 첫날밤을 치르면서 느껴야 했던 혼란을 이미 그 순간에 느끼는 중인지도 몰랐다 . 여자만의 것이었던 그것들에 남자의 숨결이 지나가버렸고 이제 그것은 여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 남자가 손대고 입댄 그것들로 다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란했다 .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 
(본문 111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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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01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비가 내렸는데, 그장소님 생각이 조금 났어요.
저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그장소님은 비오는 날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요.
오늘은 바람이 무척 세게 붑니다.
기분 좋은 일들 가득한 3월 보내세요.^^

[그장소] 2018-03-01 17:57   좋아요 1 | URL
2월이 설 연휴 때문에 더욱 짧게 느껴졌어요 . 비가 오고 날이 좀 더 춥게 느껴지는 하루네요 . 3월이라니 ..벌써 말이죠!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 건강한 날들 보내고 계신거죠? 저도 문득 문득 서니데이님 생각을 해요!^^

2018-03-0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8-03-01 18:09   좋아요 1 | URL
아... 파블! ㅎㅎㅎ 낼까지 아직 시간이 있어서 고민 중예요 . 아마 안되겠지만요 .^^ 시원한 낙방을 즐기려면 신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ㅎㅎㅎ

저도 1. 2월 독서 기록은 그닥이네요 . 책은 늘 읽는데 요즘은 자주 심드렁해요 . 뭐 슬럼프 같다고 느끼지만요 . 곧 벗어나겠죠? 서니데이님도 컨디션 별로 셨다니 어쩌나 싶네요 . 3월은 좀 맑음 이시길 기도해봅니다~^^

페크pek0501 2018-03-01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 분, 언젠가 큰 상을 받을 줄 알았어요. 어디 연재한 것을 묶은 책을 봤는데 참 글을 잘 쓰신다 싶었죠. 소품 같이 짧은 글도 산뜻하게 잘 쓰시더라고요.

[그장소] 2018-03-01 19:08   좋아요 1 | URL
이분 소설들이 읽는 맛이 있었어요 . 그래서 이번 수상에 반가웠는데 ..이 작가 님 ^^ 헌데 이번 단편은 좋은 문장은 많은데 확 와닿는 뭔가가 ...저는 찾기 어려웠어요 . 그게 단편의 한 면이려니 하지만요 . 그냥 현상을 보듯 읽어내려 가는 게 맞나 고민이 되던 소설였고요 . ^^
제가 넘 복잡하게 생각이 많았던 걸까요?

페크pek0501 2018-03-01 19:18   좋아요 1 | URL
저도 뭐뭐 문학상 탄 작품이 별로라고 생각한 적 많고 오히려 후보작이 괜찮은 적 많았어요. (좋은 소설이란 게 참 어려워 잘 모르겠어요.ㅋ)

[그장소] 2018-03-01 19:38   좋아요 1 | URL
그쵸~ 심사위원이 아니니 뭐랄순 없겠지만 , 아무리 애정하는 작가여도 느낌이 덜한 작품은 늘 있는 거 같아요 . 자선작이나 후보작이 더 좋을때.. 저도 그래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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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ㅡ 손홍규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기억을 걷는 사람들의 시간 

ㅡ 
그들은 청년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청년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 사랑에 실패하고 원한을 품었던 ,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절망해버렸던 그 청년은 그들의 내부에서 그들과 함게 늙었다 . 그들은 깨달았다.자기 내부를 헤매는 이 불길한 청년과 때때로 조우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음을 . 청년과 그들은 헤어진 게 아니라 함께 거주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힐난하고 할퀴면서 수십 년을 견뎌왔음을 . 
(본문 64 쪽 )


말 소리는 없고 흑백의 화면만이 느리게 돌아가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 빛 바랜 주점의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훑는 , 시선처럼 감고 도는 필름을 보듯 왼쪽 팔에 상장을 단 청년이 울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지나가고 늙은 노인이 시커먼 구멍같은 입을 뻐끔대듯 움직이는 장면을 보면서 마치 내가 변사 辯士 처럼 풍경에 소리를 입히듯 읽어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 무채색이다 . 검고 회색이고 얼룩같은 흰색들이 점점이 벗어 놓은 옷처럼 걸터 앉은 화면의 그림자 뭉텅이에 소리를 나 혼자 입혀 낸다 . 

허깨비 같은 노인의 바람 빠진 무성음을 뒤로 한 시대가 , 한 가정이 천천히 주저 앉는다 . 삶의 터전이 버섯구름을 일으키며 황폐해지는 것만 같고 , 시간은 거꾸로 흘러 더는 날아갈 게 없는 탱화의 낡음처럼 쩍쩍 갈라지고 흩어지는 걸 천천히 지켜보는 심정으로 . 공기중으로 색들이 모두 날아갔다 . 나도 꿈을 꾼 듯 허망하다 . 누군가의 일생이 이토록 가볍고 하찮다니 ... 

반전도 없이 그나 그이나 남자나 여자의 시간이 척박한 생활터에서 과거로 갈마들어가는 걸 숨을 멈추고 지켜본다 . 어디도 새롭지 않은 낯익음이 바로 여기 지금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 죽음과 늙음 , 시들음과 생생함으로 가면 갈 수록 남루한 인간의 낮은 곳을 이렇게 보여주는 구나 하면서 . 느낌만 아련하게 남고 서사는 한마디로 정리하지 못하는 단편 .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사나운 꿈을 꾼 것 같은 오후가 지나가고 있다 . 


그는 두려운 눈길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 , 제가 누군지 아시는 거죠 ? 정신도 멀쩡하신 거죠 ?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시는 거죠 ? 알기 때문에 결국 거기로 가신 거죠 ? 어머니 ......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 여기서 얼마나 더 늙어야 해요 ?
(본문 104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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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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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ㅡ 서미애 , 엘릭시르

' 아빠 그거 알아 ? 우리가 보는 저 별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거래 . 그러니까 저 빛은 별의 마지막 인사인 거야 . '
(본문 8 쪽 )

책을 읽어 내려가며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우리 윤이 생각였다 . 윤이 아빠는 우리가 한참 젊던 날들에 내게 낚시를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 잔잔한 물을 앞에 두고 등 뒤론 무성한 수풀들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 멀리 던져 놓은 낚시대의 끝을 소리없이 오래도록 바라보던 시간 ,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붕어를 잡았을 때 상처 없이 낚시바늘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려주던 사람 , 내게 팔딱이는 작은 비린 것의 생명력을 첨으로 체감하게 해주던 그런 사람이었는데 우리 윤은 아빠가 그런 낚시를 가르쳐주었을지 그게 갑자기 궁금해졌다 .

수정이와 우진 , 그러니까 수정이의 아빠가 겨울 산 깊고 높은 곳에서 저만치 먼 발 아래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듣는 풍경을 오롯이 상상하고 있자니 나의 가정家庭 에 또 다른 가정 假定 들이 회한으로 스치며  어둔 하늘 모서리를 별빛처럼 가물없이 사라져가는 걸 느낀다 .
수정이는 우진의 삶에서 별처럼 그렇게 사라져갔다 . 그 아픔을 아내와는 다르게 일에 몰두하는 걸로 이겨내려한다 . 아픔을 이겨내는 저마다의 방법은 모두 다르다 . 그런 우진에게 또 닥친 불행 . 암으로 고통받던 시간도 이겨냈다고 믿었던 아내는 재발 사실을 말해주지도 않고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날려 버리고 만다 .

슬프게도 수정과의 추억은 헤아리지만 아내와의 추억은 헤아릴 만큼 많지 않다는 걸 깨닫는 우진 . 거기에 더해 유언처럼 아내가 남긴 말은 후폭풍처럼 그의 삶을 송두리째 들썩이게 한다 . " 왜 죽었지 ? 우리 수정이 ? " 돌아보니 수정이 왜 죽었어야했나는 돌이켜 볼 짬이 없었다 . 슬픔 속으로 침잠하느라 왜를 잊었다 . 아내마저 떠나고 돌아보니 벌을 받았으리라 생각한 범인들은 모두 경미한 죄값을 치르고 풀려나 여전히 잘 살고 있었다는데 , 그들을 추적하는 우진에게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들 . 진실의 얼굴은 늘 냉정하고 잔혹하다 .


" 아빠 , 그거 알아 ? 저 우주는 73 % 의 암흑 에너지와 23 % 의 암흑 물질 , 그리고 나머지로 이루어져 있대 . "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 별이 아무리 많이 보인다고 해도 압도적으로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어둠이었다 . 문득 우진은 낯선 단어들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
" 암흑 에너지 , 암흑 물질이라는 게 뭐야 ? "
" 과학자들도 모른대 .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 그래서 암흑 물질이라고 부른다는데 ? 아마 정체를 알게 되면 새로운 이름이 붙여질 거야 . 아무튼 암흑 물질이 있다는 것만 밝혀냈는데 노벨상을 받았다고 했어 . "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 ...... 별과 별 사이 텅 비어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 곳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하고 , 그걸 과학으로 증명해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
(본문 32 쪽 )


불행은 암흑 물질일까 , 그렇다면 그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암흑 에너지일까 , 진실은 압도적으로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의 한 면일까 ...... 삼년 전의 진실이 암흑 속의 별빛처럼 뒤늦게 발견된다 . 진실은 늘 어둠처럼 거기 있었지만 보려고 하지 않으면 이름조차 알 길 없는 무엇이 되듯 . 모두에게 소환되는 삼년 전의 사건과 세영이 밝히는 충격적이고 어이 없는 진실 앞에 우진은 돌아서고 ......

책갈피로 쓴 엽서에 한 소녀가 고양이와 나란히 앉아 밤하늘 별과 달빛으로 가득한 곳에 있는 그림을 뒤늦게 알아채고 한참 바라봤다 . 책장을 덮고 든 첫번째 생각은 역시 , 내겐 아직 초롱초롱한 별같은 딸아이의 눈을 볼 수있다는 사실이었다 . 책 속 주인공 우진에겐 더 없이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 그러면서 인간이 타인의 불행에 안도하는 습성에 환멸도 함께 찾아든다 .

세영은 수정이가 행복해 보여서 짜증이 났던 거였단다 . 그게 사람을 죽일 이유가 된다는 것이 몹시도 두렵게 다가왔다 . 인성이 여물지 않은 아이들이란 우진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세영의 아버지인 재혁을 보면 어른 역시나 여전히 성장을 시켜가야 하는 부분이 인성이란 생각도 들었다 .  이 책이 왜 장르물로 나온 걸까 그랬는데 읽으면서는 표현력에 빠져들어 있다가 정신이 들면서 서늘한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 이 책도 윤이에게 권해 봐야지 . 요즘 아이들의 날 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책이었으니 .

윤에게 오늘 밤 산책을 하자고 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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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5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8-02-25 23:37   좋아요 1 | URL
ㅎㅎ 그렇죠? 스티커와 세트였던 엽서 ~
안그래도 지금 이어서 달리고 있어요!^^
 

#A면서C이기도한_벗님
#꽃이핀아몬드나무_엽서
#케냐AA와콜롬비아블랜드드립커피
#레드향
#문학과지성사_카드책갈피
#그리고
#굴드의물고기책
#리처드플레너건
#문학동네
#직접만든떡까지
#고마워요💕


열심히 읽어 볼게요 .
굴드의 물고기 책 ~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도 읽어야 하는데 ... ㅎㅎㅎ
부지런 떨라고 채찍을 가장한 당근을 보내주신 벗님 .
꽃이 핀 아몬드 나무 엽서를 따라 온게 분명한 책과 이런저런 선물들 .
늘 감사해하고 있단 거 아시죠 ?
아무 날도 아니어도 주고 받는 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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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5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8-02-25 23: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선물 버려주기 좋은 장소^^? 아~ 핫~ 완전 웃겼어요 .
모두도 오직 하나 ( 이거 형용모순? ) ㅎㅎㅎ

AgalmA 2018-02-25 23:51   좋아요 1 | URL
˝특별한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삶보다 일상을 특별하게 보는 삶을 더 귀하게 여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정은우 작가 애정하시니 거기서 인용ㅎㅎ

[그장소] 2018-02-25 23:56   좋아요 1 | URL
ㅋㅎㅎㅎ 벌써 다 보셨어요 ? 우와~ 우와 ♡

AgalmA 2018-02-25 23:59   좋아요 1 | URL
뭐 이렇게 빨리 끝남ㅜㅁㅜ! 아쉬워서 직접 여행가야 될 판ㅎ!
여행공작단에서 들었던 내용도 많더군요^^

[그장소] 2018-02-26 00:0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좋을 그림 생각하고 보면 조금 서운한 이번 책 . ㅎㅎ 저도 앉은 자리에서 훌렁 훌렁 다 봤으니 말 다했죠 ?
블로그에서 보기도 했고 오디오 클립으로 듣기도 한 내용이라 낯설지 않고 . 그러고 보니 잊힐리는 없겠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