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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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대단한 선택


클레어 키건 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문장들은 일견 건조하게 느껴진다. 따로 떼어내서 보면 실제로 그래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한데 모여 단락을 이루고, 그 단락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면 놀랍게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태연하고 무심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니 누구보다 섬세하고 애정 어린 사람의 손길임을 문득 깨달았을 때와 같은 느낌일까. 그러므로 건조하게 느껴진 건 선입견으로 가득한 내 첫인상의 극히 일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애정 없음일 뿐 저자의 애정 없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수사 없이도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저자의 저력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다. 또한 중첩되는 문장도 불필요한 문장도 찾아볼 수 없이 모든 문장이 유기적으로 짜인, 지극히 경제적이고 효율이 극대화된 글이 바로 키건의 글이 아닌가 한다. 신형철이 말한 '정확한' 글쓰기의 실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키건의 작품엔 노트에 옮겨두고픈 명문도 많다. 무엇보다 압축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의 힘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아, 살면서 동시대에 이런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리라.


그래서일까. ’맡겨진 소녀’에 이어 나는 책장에 일 년 넘게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책들도 무시하고 최근에 책장에 꽂힌, 작년 출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 책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어젯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맡겨진 소녀’가 사소한 일상의 조각을 한 폭의 감성적인 수채화로 담아냈다면,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제목과 달리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다룬다. 내용 면에서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떠올렸다. 모두 수치스럽고 가슴 아픈 인간 역사의 단면을 중심 소재로 삼아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소설화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그리고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18-20세기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합세하여 ‘타락한 여성들’이라는 명분으로 미혼모를 포함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층 여성들을 집단 수용하여 강제 노동시키고 학대했던 ‘막달레나 세탁소’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공교롭게도 수녀원이었다. 성스러워야 할 장소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되었다. 수녀들은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학대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흔적도 기록도 없이 어머니를 잃어야 했다. 아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죄'라는 명목을 들이대어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죄와 판단은 더 큰 죄악이 되었다. 한 사람을 보호하고 교화시키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살인한 결과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지울 수 없는 피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은 빌 펄롱, 때는 그 어느 겨울보다 추웠던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빌 펄롱은 석탄을 보관하고 배달한다. 한파가 몰아쳐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래봤자 아내와 다섯 딸로 이뤄진 한 가족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또 큰 빚을 지지 않을 정도로 삶을 겨우 지탱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에겐 여유로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며 그는 요즈음 뭔지 모를 공허를 느낀다. 


빌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빌은 뒤늦게 어머니에게 자신이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빌은 미혼모의 아들이다. 비록 어머니는 하녀 신세로 살아가는 저소득층에 속했고, 아버지는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지만, 빌은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 기억을 평생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를 끝까지 보호해 주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살 수 있게 해 준 미시즈 윌슨을 은인으로 여긴다. 미시즈 윌슨은 빌의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을 때에도 그녀를 내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그건 은혜였다. 특히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버렸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빌은 그렇게 자라고 결혼도 해서 딸을 다섯이나 낳았다. 


하지만 빌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흔적도 없이, 아무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디론가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빌의 어머니도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아일랜드 정부의 손아귀에 잡혀 수녀원의 탈을 쓴 막달레나 세탁소에 수용되어 학대를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시즈 윌슨은 조용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어쩌면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일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단한 선택이었지만, 결코 큰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사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시즈 윌슨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빌의 어머니도 빌도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지 않을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의 선택이 그녀 자신에겐 사소했을지 모르지만, 빌의 어머니와 빌에게는 인생 전체였다. 


빌이 느끼는 공허가 어쩌면 부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석탄 배달을 하러 수녀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소녀를 보고 난 이후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졌을 것이다. 석탄 창고에 갇혀 밤새 추위에 떨다가 빌에게 우연찮게 발견된 그 소녀는 학대받는 아이였다. 막달레나 세탁소에 잡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평행우주 속 빌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빌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정도면 살 만하다고 여기며 감사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 소녀를 본 순간 자신의 평안한 삶이 결코 평안해선 안 되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듯하다. 빌은 크리스마스의 즐거움도 잊은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몰래 수녀원을 다시 찾아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사소하지만 대단한,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 주민들을 마주친다. 빌은 잠시 자신의 행동이 맞는 것인지 갈등하고 망설이기도 한다.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져 염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꿋꿋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낀다. 공허가 사라짐을 느낀다. 비로소 은혜로 비롯된 삶의 향방을 발견한 것이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두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합작이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민들의 암묵적 묵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빌은 몰랐지만, 그의 아내 아일린은 동네 주민들처럼 수녀원의 은밀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딸 다섯이 그곳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로 만족해했다. 그들은 그들 사정이고, 내 딸은 내 소관이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일린은 빌을 제외한 많은 주민들을 대표하는 이름이지 않을까, 하고 나는 해석해 본다. 작품에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빌이 그 소녀와 함께 집에 들어섰을 때 아일린의 표정과 반응이 궁금하다. 그리고 조용히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빌일 수 있는지, 혹시 아일린이나 동네 주민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불의를 묵인하는 건 사소하다. 정의를 지키기 위한 작은 선택을 하는 것 또한 사소하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대단한 일이다. 큰 파급효과를 낸다. 불의를 묵인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을 돌리고 정의 앞에서도 눈을 돌리게 된다. 눈을 둘 데가 없어 그저 허공이나 바닥만 쳐다보게 된다. 방어적이고 사적이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작은 선택을 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타자를 살려내는 일에 몸을 던진다. 그것이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상관없다. 살리는 일이면 된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이라도 좋다. 살릴 수 있다. 나의 사소한 선택은 대단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두 작품을 내리읽으며 그녀의 문장들 속에서 사흘을 보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글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문학의 힘을 다시금 믿게 된다. 


책을 다 읽고 책 앞부분에 적힌 헌사와 그 뒤에 따라오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발췌한 몇 문장도 다시 읽었다. 읽히지 않았던 것들이 읽혔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아졌다. 행간이 이해가 되고 왜 그 글이 거기에 쓰여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왜 크리스마스 시즌인지, 왜 그해 12월엔 까마귀의 달이 되어야만 했는지도 덩달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클레어 키건 읽기

1. 맡겨진 소녀: https://rtmodel.tistory.com/1740

2. 이토록 사소한 것들: https://rtmodel.tistory.com/1741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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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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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칼의 예리함

클레어 키건 저, '맡겨진 소녀'를 읽고

여백이 많은 글은 독자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 두는 저자의 배려이자 독자가 그 여백으로부터 숨은 의도를 찾아낼 것이라 믿는 저자의 믿음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은 속도감을 내기에 적당하지만 그것보다는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길뿐더러 글의 여백을 강화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단문으로 가득하면서 여백이 많은 글을 만났다.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이후 처음 느끼는 이 압도되는 기분. 나의 내면은 고요해지고 청명하게 깨어난다. 마치 이제껏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나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을 검색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단 두 작품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아쉽지만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전작 읽기 작가 명단에 조용히 한 명 더 추가한다.

'아이를 맡아 기르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원제는 'foster'이다. 한국어 제목은 '맡겨진 소녀'로 되어 있다. 실제로 작품은 한 소녀가 잠시 친척 집에 맡겨져 짧은 여름을 보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동사 한 단어를 한국어 제목으로, 그것도 직역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작품은 소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이긴 했다. 그런데 한국어 제목은 '맡아 기르다'라는 원제가 나타내는 의미보다 그 동사가 실행한 대상인 '소녀'에 집중되는 효과를 낸다. 마치 소녀에게 어떤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그 소녀가 어떤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필요한 추측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이건 번역이란 행위 자체의 한계일 것이다. 

한국어 제목이 자아내는 추측과는 달리 이 작품은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한 소녀의 짧은 일상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낸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기발함이 강조되는 현대소설이나 웹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뻔한, 식상하고 상투적인 일상을 그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 클레어 키건은 이토록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보편적인 인간의 깊은 감성을 터치한다. 함축적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간결하지만 가볍지 않은 문장들은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놓치기 쉽고 쉬이 무시되곤 하는 한 가닥의 감정선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잡아낸다. 세월에 무뎌진 과도가 잘 벼려진 칼도 해내지 못한 폐부를 깊숙이 찔러 쪼개는 느낌이랄까. 그저 한 끝 더 나아갔을 뿐인데, 여전히 사소한 것들을 건드릴뿐인데 나는 이런 문장들 앞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무너짐이라니. 나는 다시 겸손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예배자가 되어 읽기와 쓰기의 신성함 앞에 무릎을 꿇는다. 

도스토옙스키를 재독하고 클레어 키건을 초독하는 이런 일상. 나의 ‘동수’를 살찌우는 밑거름이 되리라.

#다산책방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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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변현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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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자만심의 실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다시 읽고


재독이 주는 유익은 깊이와 풍성함에서 찾을 수 있다. 초독과 재독 사이에 바뀌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일 뿐 책은 그대로다. 그러나 재독 할 때마다 나는 책의 동일함보다는 상이함을 더 크게 느낀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풍성함), 이미 보았던 것들은 재해석되어 (깊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는 데에서 경험하는 익숙함과 반가움,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는 낯섦과의 뜻밖의 조우.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놀이가 바로 재독, 곧 깊이와 풍성함의 향연이다. 


현재 나에게 그 대상은 도스토옙스키이고, 나는 가능한 멀리 보면서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평생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두 번 읽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도 꽤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 그 끝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나에게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기념을 할 테다. 그러나 지금은 느리지만 부지런히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글로 남기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함께 읽어나가는 독서모임 가족들 덕분에 나는 재독의 즐거움과 '함께 읽기'의 기쁨을 한꺼번에 누리고 있다. 나중에 지금을 돌아보면, 살면서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소중한 나날들로 기억하게 되리라.


초독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나는 이 작품을 빠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재독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나 두 번째 작품, '분신'보다 분량은 증가했으나 페이지 당 머무는 시간은 오히려 더 짧았다. 읽기도 훨씬 수월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 작가로 재기하기 위해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 그래서 중기 작품으로 구분된다는 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가 '분신'으로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의 극적인 과거 이력을 감안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대중적이고 기본적인 코드를 많이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보다 서사가 돋보인다. '놀랍게도' 이 소설에는 뚜렷한 줄거리가 존재한다 (초기작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고 어쩌면 진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어지는 소설의 기본적인 구성이 보인다. 문제가 주어지고 갈등과 위기가 닥치지만 마침내 해소가 되고 결국 문제도 해결되고 마는 소설의 전형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당시 재기를 노리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가짐을 짐작해 본다. 그에게는 아마도 '타협'이라 부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고려한 결단이지 않았을까. 그의 초상화를 보니 그의 얼굴에서 왠지 초조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다른 하나는 앞선 특징 때문에 부득이하게 맞이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대중성이 고려된 작품은 예술성 측면에서는 긴장이 풀어질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날 것 그대로 해부하여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낀이나 '분신'의 골랴드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당황스러움의 정도가 약하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해부를 덜 마친 채로 수술대 위에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치밀한 분석과 통찰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주 코믹한 상황이나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가려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은 아마도 '분신'의 골랴드낀이 도스토옙스키에게 남긴 상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도스토옙스키적인 소설이다. 주절주절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도스토옙스키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광대 같은 인물, 그리고 그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소가 깃들고 뼈가 심긴 독특한 유머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처럼 입체적으로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어찌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의 전개와 수습, 그리고 그 이면에 흐르는 인물들 내면의 변화 역시 지극히 도스토옙스키적인 명불허전의 터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다운 면이 도드라지는 부분은 포마 포비치라는 인물의 캐릭터 설정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포마 포비치는 작품 속에서 가시적인 문제의 핵심으로 소개된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 소설 화자인 '나'는 성인이 되어 어릴 적 자랐던, 쓰쩨빤치꼬보 마을에 위치한 아저씨의 집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포마 포비치라는 식객으로 인해 아저씨와 아저씨의 집이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었고, 난데없이 아저씨가 자기 가정교사교사와 결혼을 하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확실했고 '나'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문제를 확인하고 포마 포비치의 실체를 알아낸 후 쫓아버리는 방식을 써서라도 아저씨를 구하고 싶었다. 아저씨가 말한 가정교사라는 여자가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었고, 갑작스러운 결혼 제안의 배경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나'가 아저씨 집을 다시 방문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스토옙스키가 표현한 대로, 포마 포비치는 '기형적인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라고 소개하면 아마도 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독 땐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저씨와 포마 사이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재독 땐 포마의 캐릭터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포마에게서 ‘분신’의 골랴드낀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분신’은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사람들’로 단번에 얻은 대중적 명성을 다 갉아먹은 장본인이지만, 향후 거의 모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신병적인 인물들의 원형이 탄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분신’이 더 중요한 위치를 선점한 것으로 보인다. 베스트셀러가 아니지만 도스토옙스키 문학사에서 근원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품인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포마에게서 골랴드낀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나는 믿는다.


건강하지 못한 자존심, 심각한 자존감의 결여, 지나친 열등감, 무기력한 패배감,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 등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의 원형이 골랴드낀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포마에게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골랴드낀과 포마는 다른 인물이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골랴드낀은 어느 곳을 가나 무시당하고 비웃음을 사는 인물이지만, 포마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환대 (어쩌면 경배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야 할 지도)를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애와 지나친 자기 비하가 모두 자기중심적인 교만에서 기인한다는 통찰에 입각한다면, 골랴드낀과 포마 역시 겉으로 드러난 표현형은 반대일지 모르나 그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나 중심적인 옹졸하고 편협한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같은 뿌리를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반대의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기생하려는 욕망’에서 찾는다. 포마와는 달리 골랴드낀은 비록 하급관리직이었지만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아파트도 있었고 거기에 딸린 하인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더라도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포마는 식객일 뿐이었다. 직장은 물론 거주할 집조차 없어 남의 집에 빌붙어 살며 매 끼니를 얻어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기생할 필요가 없던 골랴드낀과 그래야만 했던 포마의 근본적인 차이는 경제적 독립의 유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자존감이 결여되어 시종일관 모욕받는 순간을 살아가는 듯한 포마 포비치.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 그는 기생할 숙주를 찾아야 했고, 장군 부인이라고 소개되는, 아저씨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빨판을 들이대며 첫 번째 제물로 삼았다. 마침 이 장군 부인은 쓰쩨빤치꼬보 마을 지주인 아저씨를 근거 없이 미워하고 있었고, 마침 그렇게 미움받는 아저씨는 미련할 정도로 착했다. 아, 이 오묘한 조합이라니! 교활하고 영악한 포마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포마는 광대 짓을 시작으로 조금씩 자기 세력을 구축해 나갔고, 기어코 숙주보다 더 비대해지기에 이르렀다. 그 집의 모든 하인들까지 그의 세력 아래 무릎 꿇었고 그를 찬양하게 되었다. 그는 마치 신적 지위에 오른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품 속 화자인 ‘나’를 포함하여 실제로 포마의 거짓된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장군 부인의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지지는 포마에겐 천군만마였기에 그 집의 주인인 아저씨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포마의 기만적인 횡포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포마는 이런 기형적인 힘의 위계질서를 십분 활용하여 점점 더 기형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이런 기생충의 박멸은 숙주의 전적인 의지에 달렸다. 포마는 식객일 뿐 그 어떤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마라는 기생충이 거대해진 이유는 오로지 아저씨가 용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위기와 절정은 아저씨의 청혼과 맞물린 채 벌어지는 해프닝인데, 놀랍게도 아저씨의 분노와 무력으로 인해 쫓겨났던 포마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전환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포마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해결사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이 놀라운 발상을 다시 보며 나는 이번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포마가 기만으로 구축했던 그 모든 힘이 모든 문제를 야기했었지만, 그 힘이 그대로 역이용되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버린 것이다. 물론 포마에겐 이 문제의 해결도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의 연장선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 사건 해결을 두고 자신의 복수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문제는 해결되어 이 작품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황당하고 엽기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 빛나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쫓고 있노라면 나는 다시금 도스토옙스키의 통찰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흥미 위주의 소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고, 대중적인 시도를 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도스토옙스키라는 진한 향이 배어있지만, 나는 도스토옙스키 중기작의 문을 연 이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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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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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지


에밀리 브론테 저, '폭풍의 언덕'을 읽고


일주일 남짓 나는 거의 매일 한 시간 가까이 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초 영국 요크셔에 위치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로부터 4마일 정도 떨어진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다녀왔다. '워더링 (Wuthering)'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방언이고, '하이츠 (Heights)'는 '높은 곳'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그 뜻과는 별 상관없이 어떤 장소를 지칭할 때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참고로 내가 거주한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쉐이커 하이츠 (Shaker Heights)였고, 캘리포니아에 살 때 옆 동네는 아시엔다 하이츠 (Hacienda Heights), 라 하브라 하이츠 (La Habra Heights), 롤랜드 하이츠 (Rowland Heights)였다). 둘을 합친 '워더링 하이츠 (Wuthering Heights)'는 자연스레 '바람이 거세게 부는 높은 곳'으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작품의 원제가 되었다. 


한국어판 제목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의역의 결과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한국어판 제목도 원제를 그대로 살렸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폭풍의 언덕'은 폭풍이 부는 그 어떤 언덕이라도 될 수 있지만, 그래서 낭만성과 막연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워더링 하이츠'는 작품의 주 배경이자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저택으로써 구체성과 고유성을 갖기 때문이다.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잔상도 '폭풍의 언덕'이 아닌 '워더링 하이츠’이고, 막연한 풍경이 아닌 그곳의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굳이 폭풍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석을 시도한다면, 그곳은 폭풍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분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제목이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폭풍이 외부에서 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 속 폭풍의 근원은 자연이 아닌 한 사람이다). 그 폭풍은 '사랑'보다는 '증오' 또는 '복수'에 가깝고, '선'보다는 '악'이, '낭만'보다는 '욕망'이 도드라진 실체로써 인간의 어떤 내면이나 특정한 감정을 나타내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진다. 그 이름은 '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이자 모든 불행과 악행의 시작인 사람.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히스클리프의 등장과 죽음으로 그려진다. '워더링 하이츠'의 본체는 곧 '히스클리프'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원제를 ‘히스클리프’라고 했다면 작품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마치 증오하고 복수할 대상이 존재할 때만 생기가 도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그 대상(들)이 존재했던 주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워더링 하이츠이기도 하고, 그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을 느낄 만큼 깊은 관계를 가졌던 캐서린 언쇼를 처음 만난 장소이자, 그가 기록된 삶을 살기 시작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던 장소 역시 워더링 하이츠이기에, 이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워더링 하이츠가 가장 적절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작품을 읽기 전에 짐작했던 막연한 인상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도 바로 이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리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작품을 절반 정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보기 좋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작품은 낭만과는 무관한, 오히려 광기어린 한 사람의 지독한 이기심 내지는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한 사람의 냉혹한 분노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한 사람은 히스클리프이다. 


작품 후반에 히스클리프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는 자신의 모든 분노, 증오, 복수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때문에 불행을 넘어 파멸에 이른 사람이 한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 것처럼 당당했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 고아이자 이방인으로 캐서린을 제외한 모두에게 푸대접을 받는 등 차별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불행으로 밀어 넣을 필요까진 없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순수한 표현들은 종종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19세기 초라는 시대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그는 그 시절 그 공간 덕분에 캐서린이라는 한 사람을 영혼 깊숙이 사랑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성숙하지 못했고 더욱 비뚤어져갔다. 캐서린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채 수년간 타지로 떠나버리고 만다. 


어느 날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이미 결혼해 거주지를 드러시크로스로 옮긴 캐서린에게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는 어린 시절 그를 가장 학대했던 힌들리가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가 살기 시작한다. 그가 그곳으로 간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복수. 피를 부르는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힌들리와 도박을 해서 야금야금 그로부터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빚더미에 앉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힌들리는 정신쇠약까지 걸리며 점점 자멸하게 되고, 히스클리프는 드디어 워더링 하이츠의 실제 주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가 계획한 복수가 가시적인 열매를 맺은 첫 번째 사례였다. 


히스클리프가 증오한 대상은 두 저택의 모든 어른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마치 복수를 위해 사는 사람 같았고, 늘 자신을 피해자로 여겼던 듯하다. 그의 과도한, 인정할 수 없지만 스스로는 절제하고 있는 듯한, 분노는 결국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캐서린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나는 이 시기가 리스클리프에겐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보란듯이 정반대의 길로 향한다. 더욱 비뚤어져간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르러 남은 거라곤 더욱 망가지는 길밖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히스클리프는 그 이후 어른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모두 파멸시키기로 작정한 듯한 사람으로 변모해 간다. 


이 작품을 히스클리프를 중심으로 보면 그의 복수극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장점도 많이 가진다. 물론 히스클리프를 제외하면 모든 등장인물들이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총 세 세대에 걸친 여러 다른 인물들 사이의 사랑과 일상 이야기는 이 작품을 충분히 매력적이게 한다. 특별히 캐서린 언쇼가 죽는 날 태어났던 그녀의 딸 캐서린과 힌들리가 남기고 간 아들 헤어튼, 그리고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워더링 하이츠의 하인 조셉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작품 역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상이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잘 그리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와는 달리 에밀리 브론테는 이 작품에서 서사와 대화 위주의 전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두 작가의 공통점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도스토옙스키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찰과 분석과 통찰로써, 에밀리 브론테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적인 흥미를 느끼며 책장을 넘기고 싶은 독자라면 나는 이 작품을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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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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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을 기꺼이 껴안는 삶

조르주 페렉 저, ‘보통 이하의 것들’을 읽고

처음 읽는 조르주 페렉. 그에게 ‘일상의 글쓰기’라는 타이틀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 소개된, 다분히 실험적이고 집요하여 당황스럽기조차 한 그의 글들은 넌지시, 그러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 대부분의 일상을 이루지만 익숙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어느새 일상에서 탈락되고 배제되어 버린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후반전이 빛날 수 있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일까.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 장소들, 공간들이 다르게 보였다. 

페렉의 글이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들을 기억나게 해서 여기 소환해 본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의 ‘주목할 만한 일상‘을 읽고 쓴 감상문의 앞부분이다. 일상에 눈을 돌린 작가들의 글은 한결같이 조용히 마음 깊은 곳을 터치하는 것 같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는 일상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목하라고 외친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우리들의 삶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들의 현재가 살아 숨쉬는 곳, ‘지금, 여기’의 무대, 즉 우리들의 일상을 알아채고 느끼고 누리라고 말한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마치 자신의 인생을 재방문하듯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한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항상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는 삶의 터전. 비록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아무나 볼 수 없고, 또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조각들. 이는 곧 신비,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일 것이다.” 

문득 어른으로 성숙해졌다는 지표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눈이 깊은 자의 시선은 어디를 향할까.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 낯선 영화 같은 찰나가 아닌 묵직하게 삶을 차지하고 있는, 빛바랜 일상이 아닐까.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페렉의 낯선 글쓰기 덕분에 평범하고 익숙했던 내 삶을 낯설게, 하지만 더욱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미지의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내 손에 쥐어진 보석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다. 

페렉이 말한 대로 최소한의 경험과 적극성을 갖고 작은 행운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한가로이 산책을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로부터 배제되었던 익숙한 것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며 보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저 높고 빛나는 곳을 향한 눈을 낮추어 겸손하고 경건한 자의 마음으로 내 소소한 일상을 기꺼이 껴안는 삶을 살고 싶다. 페렉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을 결코 제대로 알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들과 친분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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