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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변현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평점 :
기형적 자만심의 실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다시 읽고
재독이 주는 유익은 깊이와 풍성함에서 찾을 수 있다. 초독과 재독 사이에 바뀌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일 뿐 책은 그대로다. 그러나 재독 할 때마다 나는 책의 동일함보다는 상이함을 더 크게 느낀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풍성함), 이미 보았던 것들은 재해석되어 (깊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는 데에서 경험하는 익숙함과 반가움,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는 낯섦과의 뜻밖의 조우.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놀이가 바로 재독, 곧 깊이와 풍성함의 향연이다.
현재 나에게 그 대상은 도스토옙스키이고, 나는 가능한 멀리 보면서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평생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두 번 읽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도 꽤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 그 끝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나에게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기념을 할 테다. 그러나 지금은 느리지만 부지런히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글로 남기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함께 읽어나가는 독서모임 가족들 덕분에 나는 재독의 즐거움과 '함께 읽기'의 기쁨을 한꺼번에 누리고 있다. 나중에 지금을 돌아보면, 살면서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소중한 나날들로 기억하게 되리라.
초독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나는 이 작품을 빠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재독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나 두 번째 작품, '분신'보다 분량은 증가했으나 페이지 당 머무는 시간은 오히려 더 짧았다. 읽기도 훨씬 수월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 작가로 재기하기 위해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 그래서 중기 작품으로 구분된다는 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가 '분신'으로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의 극적인 과거 이력을 감안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대중적이고 기본적인 코드를 많이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보다 서사가 돋보인다. '놀랍게도' 이 소설에는 뚜렷한 줄거리가 존재한다 (초기작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고 어쩌면 진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어지는 소설의 기본적인 구성이 보인다. 문제가 주어지고 갈등과 위기가 닥치지만 마침내 해소가 되고 결국 문제도 해결되고 마는 소설의 전형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당시 재기를 노리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가짐을 짐작해 본다. 그에게는 아마도 '타협'이라 부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고려한 결단이지 않았을까. 그의 초상화를 보니 그의 얼굴에서 왠지 초조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다른 하나는 앞선 특징 때문에 부득이하게 맞이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대중성이 고려된 작품은 예술성 측면에서는 긴장이 풀어질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날 것 그대로 해부하여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낀이나 '분신'의 골랴드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당황스러움의 정도가 약하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해부를 덜 마친 채로 수술대 위에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치밀한 분석과 통찰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주 코믹한 상황이나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가려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은 아마도 '분신'의 골랴드낀이 도스토옙스키에게 남긴 상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도스토옙스키적인 소설이다. 주절주절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도스토옙스키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광대 같은 인물, 그리고 그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소가 깃들고 뼈가 심긴 독특한 유머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처럼 입체적으로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어찌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의 전개와 수습, 그리고 그 이면에 흐르는 인물들 내면의 변화 역시 지극히 도스토옙스키적인 명불허전의 터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다운 면이 도드라지는 부분은 포마 포비치라는 인물의 캐릭터 설정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포마 포비치는 작품 속에서 가시적인 문제의 핵심으로 소개된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 소설 화자인 '나'는 성인이 되어 어릴 적 자랐던, 쓰쩨빤치꼬보 마을에 위치한 아저씨의 집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포마 포비치라는 식객으로 인해 아저씨와 아저씨의 집이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었고, 난데없이 아저씨가 자기 가정교사교사와 결혼을 하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확실했고 '나'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문제를 확인하고 포마 포비치의 실체를 알아낸 후 쫓아버리는 방식을 써서라도 아저씨를 구하고 싶었다. 아저씨가 말한 가정교사라는 여자가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었고, 갑작스러운 결혼 제안의 배경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나'가 아저씨 집을 다시 방문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스토옙스키가 표현한 대로, 포마 포비치는 '기형적인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라고 소개하면 아마도 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독 땐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저씨와 포마 사이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재독 땐 포마의 캐릭터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포마에게서 ‘분신’의 골랴드낀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분신’은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사람들’로 단번에 얻은 대중적 명성을 다 갉아먹은 장본인이지만, 향후 거의 모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신병적인 인물들의 원형이 탄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분신’이 더 중요한 위치를 선점한 것으로 보인다. 베스트셀러가 아니지만 도스토옙스키 문학사에서 근원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품인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포마에게서 골랴드낀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나는 믿는다.
건강하지 못한 자존심, 심각한 자존감의 결여, 지나친 열등감, 무기력한 패배감,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 등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의 원형이 골랴드낀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포마에게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골랴드낀과 포마는 다른 인물이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골랴드낀은 어느 곳을 가나 무시당하고 비웃음을 사는 인물이지만, 포마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환대 (어쩌면 경배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야 할 지도)를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애와 지나친 자기 비하가 모두 자기중심적인 교만에서 기인한다는 통찰에 입각한다면, 골랴드낀과 포마 역시 겉으로 드러난 표현형은 반대일지 모르나 그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나 중심적인 옹졸하고 편협한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같은 뿌리를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반대의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기생하려는 욕망’에서 찾는다. 포마와는 달리 골랴드낀은 비록 하급관리직이었지만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아파트도 있었고 거기에 딸린 하인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더라도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포마는 식객일 뿐이었다. 직장은 물론 거주할 집조차 없어 남의 집에 빌붙어 살며 매 끼니를 얻어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기생할 필요가 없던 골랴드낀과 그래야만 했던 포마의 근본적인 차이는 경제적 독립의 유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자존감이 결여되어 시종일관 모욕받는 순간을 살아가는 듯한 포마 포비치.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 그는 기생할 숙주를 찾아야 했고, 장군 부인이라고 소개되는, 아저씨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빨판을 들이대며 첫 번째 제물로 삼았다. 마침 이 장군 부인은 쓰쩨빤치꼬보 마을 지주인 아저씨를 근거 없이 미워하고 있었고, 마침 그렇게 미움받는 아저씨는 미련할 정도로 착했다. 아, 이 오묘한 조합이라니! 교활하고 영악한 포마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포마는 광대 짓을 시작으로 조금씩 자기 세력을 구축해 나갔고, 기어코 숙주보다 더 비대해지기에 이르렀다. 그 집의 모든 하인들까지 그의 세력 아래 무릎 꿇었고 그를 찬양하게 되었다. 그는 마치 신적 지위에 오른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품 속 화자인 ‘나’를 포함하여 실제로 포마의 거짓된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장군 부인의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지지는 포마에겐 천군만마였기에 그 집의 주인인 아저씨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포마의 기만적인 횡포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포마는 이런 기형적인 힘의 위계질서를 십분 활용하여 점점 더 기형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이런 기생충의 박멸은 숙주의 전적인 의지에 달렸다. 포마는 식객일 뿐 그 어떤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마라는 기생충이 거대해진 이유는 오로지 아저씨가 용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위기와 절정은 아저씨의 청혼과 맞물린 채 벌어지는 해프닝인데, 놀랍게도 아저씨의 분노와 무력으로 인해 쫓겨났던 포마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전환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포마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해결사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이 놀라운 발상을 다시 보며 나는 이번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포마가 기만으로 구축했던 그 모든 힘이 모든 문제를 야기했었지만, 그 힘이 그대로 역이용되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버린 것이다. 물론 포마에겐 이 문제의 해결도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의 연장선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 사건 해결을 두고 자신의 복수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문제는 해결되어 이 작품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황당하고 엽기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 빛나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쫓고 있노라면 나는 다시금 도스토옙스키의 통찰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흥미 위주의 소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고, 대중적인 시도를 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도스토옙스키라는 진한 향이 배어있지만, 나는 도스토옙스키 중기작의 문을 연 이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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