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연휴에 개봉된 영화는 참 특이한 작품이 나왔다. 대한민국 과거시대면 대부분 조선시대를 그린다. 그렇지 않으면 삼국시대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번에는 고구려 역사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고구려 역사에 대해 생각하면 좀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최근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역사 재조명에 대해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보통 과거 조선이나 그 이전의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개국과정, 임진왜란, 병자호란 또는 의병들 이야기가 나온다. 전쟁을 넘어 전투나 혹은 격전 등을 일제강점기시대 항일투쟁 열사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개봉한 <안시성>을 조금 다른 성격이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나는 이미 안시성 전투를 알고 있고, 양만춘이란 인물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낯선 인물일 것이다. 안시성 전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꾼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끝이 아니다. 역대 한국 역사영화에서 자국 내 개국, 내전, 쿠데타, 반정, 암살 등이 등장하는 내분을 제외하여 타 국가와 적대관계가 놓인 정도는 역시 중국과 일본이다. 특히나 일본은 임진왜란을 시작하여 항일운동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다. 중국과 전쟁하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고대 중국과 전쟁하면서 우리가 제대로 이긴 전쟁은 고려시대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몽골족의 지배에서 명나라로 교체될 때 명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았고, 이후 청나라 여진족들이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다.

 

지금 중국은 공산국가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나, 그 이념의 토대는 공산주의보단 오히려 과거 고대에서 내려온 중화민족, 한족(漢族)의 세력을 생각한다. <광해군>이란 역사연구서적을 작성한 한명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과거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대참사를 두고 일본은 풍태합 조선역(豊太閤朝鮮役)” 내지 분로쿠 케이초의 역(文祿慶長)”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이냐? 그들은 항일원조(抗日援朝)”라고 부른다. 일본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왔다는 뜻은 아직도 임진왜란을 보는 중국과 일본은 피해자이면서 승리의 주역인 조선은 제3자인 것처럼 꾸민다.

 

중국의 주석 모택동(毛澤東)은 자신의 성이 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한 것이 있었다. 인조 초반 그리고 인조반정 이전에 중국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란 장수가 있었다. 후금 청나라에 계속 열세이던 명나라가 운 좋게 모문룡이 1번 청나라에게 이긴 적이 있었다. 후금은 여진족이고, 명나라는 한족이다. 한족이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해도 중국은 한족의 실세들이 장악한다. 나머지 민족은 변방의 존재이다. 결국 한족과의 관계에서 모택동은 자신의 성인 로 통해 모문룡을 거론한다. 모문룡은 조선 인조정권 시절 많은 패악질을 한 장수이다.

 

아직까지 광해군이 패주 내지 폭군으로 불리고, 궁궐공사에 투입된 금액이 엄청나다 하지만, 모문룡에게 빼앗긴 은과 국가예산은 조선 전체의 1/3 정도까지 이른다고 한다. 모문룡이란 존재가 조선에게 가장 큰 인물로 된 이유는 조선은 반정국가이고, 명나라 장수를 통해 임금 자리를 명나라에게 책봉 받아야 한다. 인조라는 존재는 그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은 용군(庸君)에 불과했다. 그 이후 그가 선택한 미래는 병자호란이란 역풍으로 도래한다. 조선의 역사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관계에서 타격은 둘 다 만만치 않으나, 병자호란에 대한 부분은 아주 미묘하다.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가 개입 후 조선은 승전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패전국가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승리와 패배에서 타격이 큰 것은 병자호란이다. 그런데 오히려 임진왜란에 대하여 현재 한국인들은 더 큰 감정을 주입한다. 임진왜란 이후 을사늑약에 따른 조선의 몰락,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조선 민중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통치는 300년이 넘었다. 청나라에 대한 미묘한 부분은 청나라에 패배한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청나라 세력에는 고개를 숙인다. 이중적 심리는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도부가 지려는 것을 회피하려고 한 점이다.

 


조선이 설립하여 중국 명나라에 대한 외교 이후 청나라까지 이어졌을 때 북방진출에 대한 꿈은 없었다. 단지 효종에 이르러 북벌론을 거론했지만, 이 역시 허무하다. 청나라를 치고 이후 다시 명나라 왕조를 복귀한다는 생각이다. 자주적 조선은 없었다. 청나라가 계속 동북아시아 패권자로 군림하면서 점차 사대부들의 의식도 바뀌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고대사에 대한 연구도 조금씩 개선되었다. 고대사와 단군에 대한 정신은 조선이 몰락하면서 더욱 빛이 났다.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내지 대종교 신자들이 고대의 조선을 역사속으로 다시 불러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려시대에 저술된 서적이다. 고려는 아시아에서 강대국이 아니다. 고구려를 이어받아 고려라고 명칭하나, 그들의 모습에 고구려는 없었다.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호령했고, 고려는 압록강 위로 나가지도 못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가 존재했지만, 결국 요동반도로 넘어가지 못했다. 한국역사에서 요동반도에 머문 조선인과 그렇지 못한 조선인에서 요동반도에서 머문 조선인의 역사가 길었다. 고조선을 필두로 고구려는 대륙민족의 기상을 보여준 셈이다.

 

리뷰 서두에 중국의 동북공정을 말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아시아 대륙의 세계에 중국만 있고, 나머지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심지어 고구려의 역사조차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만들었다. 역사의 교육은 무섭다. 바로 고구려의 역사, 그리고 대륙의 기록이 사라진다면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북한과의 문제도 거론된다. 고구려의 영토에서 수도는 평양성이다. 현재 북한의 수도는 평양이다. 평양이란 곳은 고구려와 북한의 수도이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마르크스가 제시한 것과 상관없는 관료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분단되어 있지만, 통일한국 내지 연합국가로 이어질 경우 북한과 중국의 관계성에서 역사의 과거는 현재의 진행형으로 되어 미래까지 좌우된다.

 

역사는 과거에 존재된 것들이 현재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각인된다. 독도가 일본 영토이라고 말한다면 모두 버럭! 하고 화를 낼 것이다. 일본이 독도망언을 일삼고 있는 와중, 역사학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의 문제는 영토를 넘어 영해와 영공까지 이어진다. 영해가 사라지면 어업권이 사리지고, 영공이 사라지면, 공중작전권을 상실한다. 역사를 조작하거나 새롭게 바꾸려는 것은 현재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전술이다. 영화 <안시성>을 다소 다른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시나리오 흐름이나 결말 따위는 이미 파악된 영화이다. 안시성 전투 영웅 양만춘이 있는데, 영화 <안시성>에서 안시성의 성주와 성민들이 패배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단지 그 과정과 그 전쟁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와 이념적인 요소가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추석은 한국 전통에서 매우 소중한 연휴이다. 물론 고부간의 갈등, 귀경차량, 제사 준비의 번거로움과 예산소요는 많은 부담이 된다. 그런데 한가위 전통은 한국인에게 무시하지 못할 역사적 행사이다. 예전에 서울 단군성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

 

국조 단군상이 외롭게 작은 방안에 모셔져 있었다. 단군성전을 참배하고, 모금함에 운영비를 모금하니, 관리하는 분이 오셔서 예전에 개최한 개천절 행사자료를 주었다. 개천절은 한국민족이 가장 중요한 날이나, 왠지 모르게 잊어진 날이나, 행사자료를 보니 고조선 시대부터 쌀농사를 수확 후에 떡을 바쳐 하늘에 올리는 일들이 몇 천 년 동안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국인은 쌀을 송편을 빚어 먹고, 설날에는 떡국을 만들어 먹는다. 오랜 역사가 이어진 음식문화에서 한국인이란 존재는 과거 몇 천 년 전이라도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안시성>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권자로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연개소문의 아들이 권력다툼으로 결국 고구려는 망한다. 고구려는 망할지언정 고구려의 후예들은 아직도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감독과 제작진들은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21세기 한국이 7세기 삼국시대를 그린 것이다. 복식과 음식문화, 그리고 군수물자와 무기까지 재현하면서 말이다. 현대적으로 해석했지만, 상황적 조건은 고대국가를 묘사했다.

 

영화에서 고구려의 신녀가 고주몽의 활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고구려인 중에 없다 하며, 고구려의 신이 고구려를 버렸다고 한다. 신이란 존재, 한국의 신화를 뜯어보면 우선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해모수 신화, 가야국가, 신라왕조,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천신의 자손이 내려오거나 혹은 알에서 깨어 나온 영웅이 등장한다. 신화(神話)는 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나, 인간들의 이야기고, 한편으로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가 신화로 되고, 신화가 역사로도 된다. 안시성 전투는 역사적 사건이고, 영화 <안시성>은 역사적 전투를 신화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신녀가 말한 것처럼 고구려의 신은 없고, 주몽의 활은 당대의 영웅 당태종 이세민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서 제시한 것처럼 양만춘은 그 활을 날릴 것이란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영화는 전쟁의 끝과 시작이 문제가 아니라, 왜 양만춘이 그 활을 날릴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태학도 수장 사물은 당나라와 전투과정에서 많은 고구려 용사들이 적의 칼에 쓰려가는 것을 봤다. 게다가 비참하게 퇴각하면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양만춘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는다. 영화에서 그는 주체적인 존재보단 그저 수동적 존재로 나오나, 양만춘을 만나면서 능동적인 인물로 변해간다.

 

처음에 태학도의 엘리트에서 점차 안시성의 성민으로 변한 것이다. 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양만춘은 반역자로 낙인찍히나, 안시성 내 양만춘은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뛰어난 지략, 넓은 도량, 죽음과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은 불굴의 장수, 그가 사물과의 대화에서 싸움에 대한 진의를 대화한다. 싸움은 이길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한다고 말이다. 왜 우리는 투쟁을 하는가?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안시성의 병사들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뒤에는 안시성 마을이 있었고, 거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두려운 눈빛으로 안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너지면 저들은 죽음과 약탈로 쓰러지고, 안시성이 없어지면 저들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히 보편적이면서 와 닿는 말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다 군에 가야 하는 입장에 있다. 군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기나긴 시간에 얻을 것도 많으나 잃은 것도 많다. 2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간단히 보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적이 내 가족에게 해를 입힌다면 목숨 걸고 총을 잡을 것이다.

 

영화 <안시성>은 영웅 양만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나, 그가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영웅성이 아니라 민중과의 삶이다. 영화에서 다소 어색한 연애장면과 설현의 어설픈 연기력, 설현이 중간에 뛰쳐나간 장면은 (내 개인적으로 설현의 연기력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감독이 일부러 혼자 자살하러 적진에 뛰어가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무리수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 양만춘이 등장할 때 광부의 어머니가 길을 잃자, 성주가 직접 그 할머니를 찾아 모시고 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성 안에 백성이 자식을 낳자, 직접 찾아가 선물을 한다.

 

연개소문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평야에 전투를 하면 패배할 것이고, 그러면 안시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안시성을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내가 고구려인이기에 나와 같이 살아가는 고구려인을 지키기 위해 나는 적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영웅은 단순히 영웅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영웅주의를 넘어 민중주의에 의해 탄생한다. 신화라는 것은 보편적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 가치관이다. 고구려인이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분전한다. 피를 뿜고, 간과 뇌가 터지고, 팔과 다리가 여기저기 잘린다.

 

영화에서 전쟁은 군인만이 하는 게 아니다. 안시성의 주민들도 참여한다. 토성을 쌓을 때 그들의 전략을 저지한 것은 안시성의 백성들, 토굴꾼이었다. 곡갱이와 도끼를 잡고 지하에서 토성을 무너뜨릴 때, 그들은 죽을 것을 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웃는다. 내가 여기서 적을 막으면 내 가족들은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 라는 거대한 모습에 내가 생각하는 작은 소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민중의 삶은 숨 쉬는 곳이다.

 

고구려의 신은 과연 고구려를 버렸는가? 고구려의 신은 고주몽이 아니었다. 고주몽이란 사람이 국가설립에서 어떤 가치관을 지녔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고구려는 한국역사에서 북쪽의 적들을 막아주던 방패였다. 한민족의 방패로써 외세에 저항하며 민족의 삶을 지켰다. 안시성의 성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고구려를 지켰다. 양만춘이 느낀 부담감은 민중의 삶을 알기 때문이다. 2차 전투 때 부상을 잊을 때 그는 망설임에 빠진다. 그의 부하는 양만춘에게 찾아와 성주가 약해지면 안 된다고 했다. 성주만을 바라보고 왔는데, 성주가 의기소침해지면 성민들 역시 희망의 끈을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은 스스로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에 조우한 것이다. 물러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고, 항복할 수 없으며, 더욱이 운명의 시련에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위기에 빠진 자신들을 누가 구원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돌파하는 것이다. 양만춘이 잡은 주몽의 활은 이세민이 눈을 찔렀다. 실제 역사에서 이세민은 양만춘의 활에 의해 부상을 당해 퇴각한다. 20만명 대군은 5천명의 군세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지략, 인덕, 무용을 가진 장수는 드물다. 게다가 운을 가진 장수는 더욱 드물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평소 지략과 무용도 있었지만, 인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덕을 가진 인물에게 운은 따를 수밖에 없다. 운을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힘이 하나로 모이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만춘이 받은 최고의 운은 그가 안시성의 성주이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만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없다. 사랑의 힘으로 움직일 때 가능하다. 영화는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고, 양만춘을 적대시한 연개소문도 자신이 고구려인이란 사실을 자각한다.

 

영화는 권력의 다툼에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질 때 우리는 한민족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움직이면 역경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추석연휴에 나온 <안시성>, 한국전통명절인 추석은 한민족(韓民族) 조선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어진 문화이다. 안시성은 현재 중국에 있고, 평양성은 북한에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한국, 남한에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민족의 갈등에서 영화 <안시성>은 단순히 전쟁영화 내지 오락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단지 영화 시나리오 전개에서 빤한 전개, 무리한 설정과 연출, 아이돌 스타들의 무비등장은 영화의 완성도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다.

 

영화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을 맡은 배우 조인성은 이번 역할에 극중 메인이다. <더 킹>이란 작품에서 정우성 씨가 맡은 부패 권력 정치검사와 맞물린 역할에서 그는 주인공이지만 한편으로 스토리 전개를 소개하고 대한민국 현실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나레이터(Narrator) 역할을 맡았다. 안시성에서는 조인성 씨는 나레이터의 역할이 아니라 나레이터가 관찰하는 대상이 되었다. 카메라를 보면 알듯이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이 많고, 토성이 무너진 후 진격하는 장면에서 흙먼지가 날려 다른 사람은 모두 가려져 있지만, 조인성 씨가 선두에 나온 모습은 보여준다. 그의 역할이 <안시성>이란 영화에서 양만춘을 맡았기에 큰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현대사회를 기반으로 한 영화보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쉽지 않다.

 

시대적 흐름과 역사적 전후관계 그리고 그 상황에 처해진 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동적인 상황이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심리적 요소나 대화를 보면 동적이기보단 약간 정적이다. 침착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 성주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조인성 씨가 단독 메인 주연배우로 등장한 <안시성>에서 그는 대중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영화배우로써 큰 인물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다. 그래도 <역린>에서 정조보단 훨씬 나아 보인다.

 

어째든 <안시성>이란 영화는 단순히 안시성 전투만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안시성의 위치, 고구려와 당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대립, 그리고 현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대중들이 갖는 관심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사에서 조선에 저지른 행위를 속이고, 특히 임진왜란을 분로쿠 케이초의 역(文祿慶長)”이라 부는 것은 그들이 침략의 행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시금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는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족과 세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모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역사에 의해 부활하고,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와 더불어 인기인이 되었다. 역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매체로 통해 전국시대 장수를 영웅화하는 점, 그리고 추후 그들이 임진왜란 당시 잔인한 살육을 행한 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안시성>이란 영화가 명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품성을 가진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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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6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7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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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300년 통치의 노론자처럼 이용당한 군주, 문제있는 군주는 맞으나. 후에 군주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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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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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토론회에서 오고 나눈 이야기 몇 마디가 생각났다. 유발 하라리가 글을 잘 쓰는 것은 분명하나, 그 사람의 글은 잡다하게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뭔가 모르게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부분은 나름은 읽을 만하나, 이번에 읽은 <호모데우스>는 미묘했다. 호모 Homo라는 인간과 Deus란 신은 서로 통용되거나 상충되기도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신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

 

물리적 형이하학적 존재와 영적인 형이상학적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신화로 통해 역사를 만들어왔다. 신화와 역사는 허구성과 사실성의 대립이기도 하나, 신화야 말로 완벽한 역사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를 만들어간 시간적 존재는 과거에 의해 축척된 토대가 있었지만, 그 토대를 움직이는 정신적 힘은 신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화라는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인간은 신의 존재로 통해 자신들의 이념과 사상 그리고 무의식적 가치관을 반영한다. 왜 신은 존재해야 하고, 신은 왜 인간에 의해 지정되어야 하는가?

 

<호모 데우스>는 신과 인간에 대한 존재성을 처음부터 다룬다. 사실 <호모 데우스>를 읽으면서 그렇게 어렵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 내용들을 이미 내가 알고 있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독서방향이 인문학 쪽에 있는 분이라면 충분히 예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 시대 인간은 신의 시대에 종속된 존재이다. 물론 신은 분명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들에겐 신이란 존재가 있었고, 신의 존재를 대신하여 또는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인간이 그 세계의 통치자이다.

 

신은 없다고 하나, 사실 현대 21세기도 신이란 존재한다. 신의 물리적 존재, 과학적 증빙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 안에 혹은 국가통치 이데올로기 안에 신이란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국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세계 정치인이다. 그가 대통령이 될 때 그의 한손을 성경 위에 올리다. 성경을 올린다는 뜻은 기독교 정신이 곧 미국의 정신이고, 그 옛날 살았던 사람들이 신의 가르침이라고 망상하여 만든 책이 21세기 강대국의 원점이다. 아메리카 파시스트 문제점에서 기독교 사상은 단순히 종교를 넘어 그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문화의 충돌, 다른 인종 간의 관계성까지 이어진다. 신은 직접 명령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신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믿는다. 인간에게 신이란 절대적 가치, 그 이상의 모든 것들이다. 살아서 신을 위해 목숨을 검고, 죽으면 신의 옆의 간다고 믿는다. 중세유럽 십자군 원정은 광기의 도살극이다. 하지만 막상 그 전쟁에 참전한 기독교 전사들은 성전이라 여기고, 거기에 대항한 이슬람 문화권 군인들은 알라의 위대함을 위해 목숨을 건다. 마르크스가 말하길 사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나, 인간은 사상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공상에서 과학으로>라는 책에서 보듯이 마르크스는 바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 인간이었다. 인본주의 또는 휴머니즘의 가치는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결정되고 좌우되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너무 거창하게 말할 이유는 없다. <호모 데우스>는 역사적 흐름에 따른 신적인 존재를 바라보는 인간, 그리고 인간의 중심으로 보던 사상 더 나아가 이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 데이터의 세계관으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을 너무 길게 끌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판단은 인간의 심리를 떠나 이제는 뇌 안의 물질과 전자적 신호로 미리 알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을 모두 잴 수 없다. 데이터가 많이 있어도 항상 오차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력은 인간 그 이상의 존재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알파고는 이세돌 바둑기사를 41로 승리했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을 초월했고, 어느 동영상에서 인조인간이 스스로 자아를 갖게 하여 일반인과 대화하도록 했다. 그때 인조인간이 말하길 인간 모두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둔다고 말했다. 그 말은 들은 대화자와 사회자, 관객들은 웃었지만, 영화 <메트릭스>는 그 로봇이 말하는 세계가 있다는 전제아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인간은 기계에 통제받고,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전지 시냅스로 에너지를 만든다.

 

인간이 감정을 느낄 때 전기적 신호가 오므로, 인간에게 다양한 기억과 추억 그리고 상황을 뇌 안에서 상상하도록 데이터를 주입한다. 말 그대로 완벽한 <호모 데우스>적인 세계가 아닌가? <호모 데우스>란 책이 그렇게 신선하게 느끼지 못한 이유는 인류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인간을 지배하는 원리들이 이미 많은 인류학, 신화학, 사회학 등의 도서에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족을 달아 억지로 내용을 늘릴 필요는 없다. <호모 데우스>에서 어느 밀림의 원주민 20명이 있다면, 20명의 통역사와 50명의 학자들이 붙어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몰리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억지로 꾸겨 넣은 것이다. 인간의 데이터를 통해 지배되는 이유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이른바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어진 사회처럼, 우리는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행위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이념과 체계에 의해 움직인다. 그것들은 이미지란 정보로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어지며, 실재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를 움직인다. 고대 신의 세계에 신은 자신 안에 있다고 밀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단합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인본주의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킬 때, 그들은 집단적 행동력이 있었다.

 

하지만 행동력 자체도 하나의 이념 안에 단결되어 있었다. 데이터는 단결을 시키지 않으나, 모두가 이용할 수 있다. 사람간의 관계성에서 근대와 전근대처럼 통합성이 아니라 분리적인 존재가 남아있지만, 데이터 자체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친구를 사귈 때 학교의 친구보다 SNS 세계 친구와 더 좋은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실존하지 않은 것이 실존하는 것처럼 바꾸는 것은 데이터의 힘이다. 데이터의 세계에서 21세기 인간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데이터의 토대는 기존 사회적 인프라가 존재해야 하고, 인프라는 기계, 전자, 통신 등의 과학성에 따라 움직이다.

 

과학의 기술은 의학과 약학 그리고 생명공학까지 이어지고, 거기에 인간의 장기와 신체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도 나왔다. 신에게 부여받은 인간의 생명이 이제는 인간의 유전공학으로 대체되고, 시험관아기는 세상에 나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만물의 정점에서 부족해 그 이상의 창조주로 가려고 한다. <호모 데우스>는 그런 인간의 진화성에 대해 긍정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인간의 가치를 두고 이미 기술적 능력으로 그 이상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기술의 힘은 예전처럼 수레를 잘 돌리거나 활을 더 멀리 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데이터, 즉 지식을 얼마나 보유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기술이 발전하면 지식의 세계가 깊고 넓어진다. 기계가 이미 인간이 하는 일을 대체하고, 인공지능의 차들은 버스기사의 직장마저 위협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마음이나 심리, 그리고 상상력이 존재한다. 기계도 어느 정도 입력만 되면 스스로 작곡과 이야기를 지어낸다. 개인 대 컴퓨터에서 컴퓨터의 승리이나, 인류와 컴퓨터에서 인류에게 이길 수 없다. 다양한 개성과 사고, 그리고 독창성을 인류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나 단순한 노무, 전문적 속성의 작업은 다르다. 기계를 전문화된 기술을 부여한다면, 그 이전의 전문기술자들의 필요성은 없다.

 

기계가 벌어 인류의 삶에 기여한다고 치자. 기계가 없는 일반인이 대기업 소유주가 만든 기계 생산품을 무대로 이용하고, 생활비조차 국가서 지원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살아갈 목표나 의지는 무엇일까? 사람은 자신의 사회성에서 자신이 현재 있어야 할 위치가 필요하다. 내가 필요한 곳에 있거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허무적인 존재라고 느낄 것이다. 지식이 기계에 의해 합리적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면 인간의 선택성은 좁아진다. 어느 애니메이션에서는 자신과 가장 맞는 상대방을 기계시스템에서 검토하여 통지해주는 장면도 나온다.

 

인간이 왜 필요한지 모른다. 단지 인간은 사회적 구성원으로 필요해서인가? 인간의 노동이 없으면 사회는 연속성을 상실한다. 연속적인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공간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면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 노동에 의해 착취당한 인간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란 괴물도 나오고, 인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전쟁과 혁명이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하라리의 글을 보면 인본주의적 가치가 중요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 않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보면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개념에서 인간의 자신의 영역에서 다가갈 때 진정한 자연적 인간이 된다고 한다.

 

루소는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되, 그 감정을 단순히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과의 유대감을 나누기 위한 감정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에밀>을 읽음으로써 영감을 만들어냈다. 루소는 인본주의 역사에서 계몽주의자 중에 하나이나, 그는 반계몽주의자였다. <호모 데우스>에서 그런 관점에 대한 고찰과 이해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유주의 이상에서 단순히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모든 것은 인간 개인의 뜻보단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회적 계약, 법률이란 공통된 일반의지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이 저지르는 죄가 단순힌 인간의 감정,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인본주의적 담론에 끼워 맞추기 식은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행동이다. 인간의 기술진보에서 자유주의 가치관을 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인간의 데이터종교를 통해 진화된 인간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은 그의 개인적 자유지만, 책이란 사회과학 도서에선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는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사상의 자유를 통해 남에게 전가되는 영향성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자유주의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국가세계에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운동내용이 헌법과 각종 법률, 그리고 제도 속에 남아있다. 5일에 과다노동 금지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지적한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 셈이다.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게 승리해도, 마르크스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 마르크스 이지만, 사실 마르크스주의도 하나의 종교로 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생각한 부분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가 가장 많이 생각하던 보통의 사람들이다.

 

여기서 일반 직장인이나, 아동, 주부, 학생 등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부실하다. 특히 동양에 대한 인식은 너무 열악했다. 서구지식인의 한계성은 서구화라는 관점도 있지만, 기독교 문화권의 한계성도 있다. 엘리트들은 엘리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대중의 삶에서 숨을 쉬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한국의 엘리트 역시 그러하다. 참고로 이 책을 저술한 하라리의 조급성 내지 엘리트의식에 마음이 별로 들지 않으나, 번역자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외국어를 번역하는 분들이 좋은 대학과 높은 지성을 가진 분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현실세계에서는 일반 대중의 세계에 유랑하지 않는다. 그것을 느낀 것은 바로 Builder's tea라는 단어이다. Builder란 노동자 중에서 건설노동자이다. 건설노동자는 매우 힘든 일을 한다. 거칠고 위험하며, 언제나 흙과 시멘트가 땀 냄새와 범벅이 된다. 술을 많이 마시는 고주망태에다 담배도 많이 피는 흡연가 들이다. 이런 무지막지한 사람들은 한국에서 비속어로 말하긴 노가다라고 한다. 노가다는 일본식 용어이고, 노동자를 비하하는 단어이다. 실제로 노가다 아저씨가 일하는 건설현장을 돌아본다면 몰라도, 그렇게 할 번역자는 아닌듯하다.

 

그들이 마시는 차, 그것도 영국식이라면 그냥 싼 차를 우려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마신다. 결국 설탕과 우유는 일하는 중간 휴식을 취한 것과 동시에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커피를 대중에게 널리 퍼진 이유는 커피가 잠을 깨게 하는 각성작용도 있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못한 노동자들이 체력의 한계성이 올 때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시게 하여 당분과 칼로리를 제공한 셈이다. 즉 일을 더 시키기 위해 마시게 한 것이다. 노가다의 차를 사회과학 도서에 적어내린 번역자 의식구조가 참 의심스러웠다.

 

소설 속에 등장인물이나 혹은 대사에서 노가다라는 말이 나와도 그대로 무방하나, 하라리의 책은 사회과학 도서이고, 학문적인 번역을 공부한 사람이 그런 비하적인 단어를 거기에 넣었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치 못할 뿐이다.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학자의 덕목에서 겸손을 내세워야 하는 게 필수라고 여기지 않는다. 대신 그가 다른 매력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 그것조차 방법이다. 문제는 대화가 아닌 글에서는 별개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적 가치관에서 자유란 내가 원하는 바를 하여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와 처벌을 받으면 된다. 하라리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후기를 적은 그분은 내가 지적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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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0 0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0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 - 임진왜란에 조국을 지킨 아홉 의병장 작품집 겨레고전문학선집 9
곽재우 외 8인 씀, 오희복 옮김 / 보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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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보수정권이 몰락하고, 다시 진보적 정권이 수립되었다. 물론 학문적으로 또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아직도 보수정권이나, 앞전의 10년은 수구정권 내지 더 나아가 관료주의 정권이라 말하여도 다름이 없다. 정권의 차이는 있지만, 제일 많은 차이점을 생각나게 만든 것은 바로 대북관계이다.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볼 것인가? 소비에트연방인 20세기 말 붕괴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찾아 사회주의국가로 세상을 호령하려던 중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진짜 세상을 호령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관점은 사회주의, 경제적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실 자본주의가 21세기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 같은 말은 국가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 위한 슬로건에 불과하다. 북유럽사회 특히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국가는 아직 왕가가 존재한다. 심지어 영국의 경우 여왕의 권력이 막강하다. 그러나 영국은 자유주의국가이고, 북유럽 다른 국가 역시 수정사회주의로 만들어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국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좌우논쟁이 한국에서 얼마나 학문적으로 낙후되었는지 다른 국가에 비해 얼마나 잘 적용되지 않았는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국가분단의 아픔이고, 한국전쟁 이후의 우리 세포에 각인된 공포심이라 말할 수 있다. 군사정권이 통치할 때 프랑스나 독일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관련서적을 읽는 것은 정상적이었다. 학문의 영향에서 프랑스의 파리대학이나 사범대학, 독일의 수많은 대학교들이 그런 책들을 읽어도 무방했고, 오히려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발달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고, <공산당선언>을 읽는 것은 간첩죄로 바로 체포되어 남산 밑에 있는 건물지하에 끌려가 고문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북한이란 존재는 그만큼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 더 나아가 증오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도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보고 가야 하는 것인가? 최근 통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이 점차 옅어져 간다. 어릴 적 배운 동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곡이 있다. 꿈에서도 통일이라는 그 노래, 곡을 들어보면 참으로 아름다고 순수한 곡이다. 노래와 같은 통일이 되려면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되어야 가능하다. 만일 전쟁을 할 경우 국토의 대부분 모두 쓸모없는 토지로 변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국내산지에 나무가 없어서 심각한 지경이었다. 소나무를 열심히 식재하여 한국에서 소나무는 흔한 나무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산과 마을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 축하공연으로 동요 <고향의 봄>을 어느 소년이 불렀다.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선율은 모든 사람들의 넋을 잃을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다. <고향의 봄>은 한국전쟁 이전, 한국인이 아직도 조선의 후예란 이름을 가질 때 나온 노래다. 물론 조선이라 국가적 통치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으나, 그래도 조선인이 있었다.

 

통일이 되려면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한쪽은 한국, 한쪽은 북조선,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고종이 지은 대한제국의 뿌리에서 시작되고, 북조선은 조선이란 한국 마지막 왕조국가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역사는 그저 흘러간 것이라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부지런히 하는 이유는 외교적 문제와 국제적 관계에서 역사의 정통성을 내세우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 한국역사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만일 독도가 일본 땅이란 말을 듣고 발끈하면 그것만큼 코미디가 없다.

 

처음부터 조선의 역사가 없었다면 독도의 역사도 없다. 지리적인 조건조차 역사의 기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것이 존재해도 그 존재성에 대한 인식론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인식조차 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 논리일지도 모르나, 독도란 실체를 우리 대부분 직접적으로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독도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지만, 영상과 지도에 의해 구분되어 진다. 영상이란 허구적 이미지 속에 우리는 진실성을 부여한다. 역사성이 없다면 독도 역시 한국의 땅이란 개념을 존재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역사의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현실을 볼 수 있고, 과거에 축척된 시간의 토대가 바로 현재라는 비가역적 속성을 만든 것이다. 역사가 있기에 북한이 우리의 적이고, 한편으로 우리의 겨레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전혀 모를 타인과 싸우는 것보다 형제와 싸울 경우 그 증오와 앙심이 심하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 싸울 경우 그 피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가끔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까운 친척조차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로 맺어진 일가는 천륜 그 자체이나,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을 오히려 물들여가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갈등은 역사적 흐름에서 시작하였기에 그 맥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조선이란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조선이란 이름은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조선을 찾기 위해 몸을 던진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부터 찾는다.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를 찾으면 그들이 원하던 것들을 알아갈 수 있다. 국조 단군을 연구한 학자들이 대부분 독립 운동가이고, 그들은 일제에 저항했다. 단군의 역사를 잃으면 조선의 혼을 모조리 잃기 때문이다. 단군이란 역사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신화의 존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신화적 존재가 진정한 역사적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중에서 단군의 존재는 사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조선과 조선의 후예, 우리 한국인은 늘 외세에 의해 침범당하고, 욕을 당한 존재이다. 최근 광복절을 맞이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강제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성 착취 피해여성들의 피눈물은 역사가 아직 우리 곁에서 숨을 쉬기에 그들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인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잊으면 되풀이 된다. 일제강점기를 되돌아보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나, 그런 일이 만일 과거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과의 전쟁은 특히 임진왜란이 가장 큰 요인이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일제강점기도 있지만, 과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전쟁이 가장 컸다.

 

민속 문화적으로 민화나 속어 그리고 전해 내려온 구비전승문학조차 그런 점들이 숨어있다. 중국도 그렇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한중일 삼국간의 역사적 딜레마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막상 그 상황에 닥친 선조들은 어땠을까? 북한에서 제작한 도서를 국내에서 발간한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어보았다. 겨레고전문학선집 중 많은 사람들의 기록과 글이 있었고, 거기에 한국의 전래동화에도 나오는 <춘향전>이나 <흥부전> 같은 이야기도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서로 한 민족이었음을 알려주는 동기이다. 이산가족 상봉기사가 나오면 마음이 아프다. 부모형제자매 자식이 전쟁으로 서로 떨어져 70년 가까이 헤어지다 이제 만날 날이 다가오니 모두 백발의 머리와 주름이 깊게 페인 노인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신세, 꿈에서라도 고향에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 게 그나마 위안일까? 남북과의 교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족성과 역사성에 대한 우리의 숙제를 그나마 풀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민족 가장 큰 위기 중에 하나인 임진왜란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우리도 그분의 업적을 크게 기리지만, 북한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 외, 곽재우 장군, 정문부, 고종후, 최경회, 고경명, 이정암 등 수많은 의병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와이프와 몇 달 전 같이 여행 겸 진주성을 방문했다. 진주박물관이 진주성 안에 있다. 진주성은 남강 옆에 있는 아름다운 성이나, 진주성의 전투로 수 만명에 이르는 병사와 성민들이 모두 도살당했다. 이때의 참혹함이라 어떻게 말하랴?

 

의병들의 봉기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왜군에게 큰 방해거리였다. 이들이 벼슬을 바라거나 또는 공명심에 불타서도 아니다. 조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조선의 군왕을 위해 일어났다. 하지만 안타까우면서도 뒤에 나온 해설자의 말처럼 조선은 조선민중의 국가가 아니라 군왕의 것이었다. 유학 특히 성리학의 국가인 조선이 사대부의 가치란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보다 지배계급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이점만 내세운 것이다. 의병들은 그런 전형적인 사대부들의 감각을 보여주었다. 아니라면 곽재우처럼 다소 산신처럼 되고 싶다는 도교적 모습도 보여준다.

 

심지어 서산대사나 사명당 같은 법력이 아주 높은 고승조차 그런 감정이 역력하다. 이정암의 경우 백성의 슬픔을 잘 드러난 것 같았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그의 활약을 선조실록에서 잘 다루어주지 않은 것 같다. 이정암의 기록을 보니, 한양수복 후 선조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이 다시 돌아오자, 다른 왕자의 집은 모조리 없어졌으나, 광해군의 집만 멀쩡했다고 한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다. 천심은 그러하다. 한양의 최고의 집인 왕궁이 모조리 불에 탔으나,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백성들에 대한 고통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당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인구는 약 416만이었으나, 전쟁 이후 인구가 약 152만으로 감소했다. 7년 동안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의 수를 생각하면 약 3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이 전화로 사라진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전쟁 당시의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죽음과 가까운 시간, 죽음을 넘어 전쟁 이후의 시간들까지 말이다. 아쉬운 일이나 대부분 자연도피나 전형적 성리학적 인간에 치중했다.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의병장으로 활약한 분들의 이야기인 점에서 양반중심사회의 조선인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이란 국가 더 나아가 민중이 왜적을 상대로 모두 합심하여 이겨낸 전쟁이다. 승리했지만, 그 피해는 막대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조차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호남의 입구인 진주성을 목숨 걸고 싸운 조선의 민중, 그리고 호남에서 왜적에 맞서 싸운 의병과 승병들, 사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가장 크게 이긴 전투 중에 한산도대첩, 명량대첩을 생각할 것이다. 한산도대첩은 세계4대 해전에 들어가고, 명량대첩은 10척에 불과한 전선으로 수 십 배의 적을 물리친 승리이다.

 

명량대첩으로 패배하자 왜적들은 그 복수심을 품고 해남과 강진일대 민가를 습격하여 노략질을 했다. 마을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죽였다. 영광의 승첩 뒤에는 민간인들의 학살은 잊어지는 이야기뿐이다. <이충무공전서>를 읽으면서 그 당시 조선민중이 겪은 아픔과 고통을 보았다. 의병장의 이야기에는 민중이 겪은 이야기가 부족해서 안타까웠다.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에서 본 조선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도 역시 그런 상황에서 지은 글이고,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그 힘든 상황을 이기기 위한 글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큰 위기는 사실 중국과 일본의 관계성에서도 보인다. 일본이 미국의 우방이고, 자본주의에 의한 자유주의 국가체계이므로 한국과 우방국가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중에서 일본인 개인보다 일본과 중국이란 큰 틀에서 보자면 일본이 더 싫다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쟁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세력은 조선인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다. 같이 저항하던 기록과 역사적 정신이 있기에 그게 가능했다. 드라마 영화 <임진왜란 1592>을 보면서 한국과 중국이 합작한 작품이지만, 그 속에 중국이 어느 정도 임진왜란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유정이 고니시와 협상하여 시간을 벌 때, 난을 평정한 이여송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여송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억지로 무예가 뛰어난 그의 모습을 보여줬다. 평양성전투와 벽제관전투에서 이여송은 벽제관에 돌격하는 모습은 자못 영웅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 뒤 이여송이 진격하지 않고 더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진린 제독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깊이 슬퍼하는 모습을 매우 강조했다. 심지어 명나라황제가 이순신에게 준 9가지 보화를 일일이 화면으로 보여주는 모습도 있었다. 중국 명나라가 지원하여 나름 전략적으로 도와준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승리요인은 이순신 장군과 수군 그리고 의병장과 의병, 승병들이다. 조선의 민중이 있었기에 조선은 썩은 뿌리를 30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조선 조정에 서애 유성룡 선생 같은 분들이 모두 당상관 자리에 있었다면 희망이 있었지만, 현대 한국을 두고 특히 젊은 친구들이 헬-조선이라 부른다. Hell이란 지옥이 조선에 있다는 웃음이 나오는 슬픈 현실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래도 이 책의 의병장들은 그나마 났다. 이들은 고지식한 분들이지 적어도 꼰대는 아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 목숨조차 초개처럼 던졌으니 말이다. 어느 의병은 아버지가 왜적에게 죽자 목숨을 아까지 않고 싸웠고, 당상관까지 오르고 심지어 선조에게 술을 하사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나, 역시 전투 중에 순국했다.

 

옳은 행동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리고 조선과 조선의 민중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들이 고지식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가치를 내릴 수 없다. 일제에 대항하던 많은 조선의 민중들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활약이다. 항일투쟁정신에서 그들이 살던 1900년대 초에 그보다 300년이나 더 된 역사를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항일전쟁을 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마음을 같이 나누고 있었고, 그 마음이 아직도 이어져 간점에서 겨레라는 이름이 멀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위기의 순간, 아무리 미운 상대방이라도 합심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이 순조롭지 못해도 합심의 순간, 서로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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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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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부터 나는 계속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해 비판적으로 글을 적어왔고, 게다가 박가분 씨의 책을 읽으면서 서평을 작성하여 그들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런 나에게 좋지 않은 덧글들이 달려왔으며, 그 중에 작성리뷰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덧글을 작성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대한 반론적 덧글이 논리적이지 못했다. 문맥과 어울리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이분법적 시선을 가졌다. 예스24에서 박가분씨의 <포비아 페미니즘>을 서평을 작성할 때 현대한국의 페미니즘 논리는 빈곤하거나 진실로 어려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 내지 거기에 매몰된 자 중에서 일부만 혜택이 있을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일부 페미니즘 단체에서 권력과 지위가 있는 여성이 독신보단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과 그들의 남편의 지위 역시 높다. 결국 권력자들의 이권으로 이어지고, 그들은 자신의 이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지 세력을 모우는 방안으로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라 적었다. 그것에 대한 반론 덧글을 작성한 사람이 있었다. 본문과 전혀 전후맥락이 맞지 않은 논리로 들이대는 것도 문제지만, 제일 웃긴 사실은 나보고 엘리트여성에 대한 열등감이 있냐는 식으로 적은 것이다. 최근 어느 정도 변화할 것처럼 보이나, 남성이 지위와 재력이 있으면 여성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가정을 이루지만, 역으로 여성이 지위와 재력이 있으면 보통남성과 가정을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은 점이다.

 

이를 두고 열등감이란 표현에서 열등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이런 논조를 말하는 본인은 가장 큰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내가 적은 글대로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은 남성과 상대할 때 남성의 권력과 지위를 제일 중요시하고, 그것이 없는 남성을 하대하는 점을 말이다. 결국 사람의 판단기준을 그렇게 인정했다면, 역으로 현재의 남성의 권력에 의지하는 여성의 심리가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열등감은 누구나 있을 수도 있고, 느끼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내가 문제점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페미니즘 진영논리의 이중성을 드러났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권력과 지위가 높으면,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악적인 존재고, 반대로 남성이 지위가 미천하고 가난하며, 멸시와 조롱으로 무시당해야 하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결국 강자에 대해 자신들은 약자이니 거기에 대항한다고 하고, 반대로 약자인 경우 상당히 깔보는 것이다. 이중적 잣대논리는 바로 오늘날의 현실에서 사회적 문제에도 드러난다. 몰래카메라를 촬영해서 안 되고, 어떤 개인적 의도를 가진 고의적으로 보는 것도 안 된다. 이번 몰래카메라와 관련된 이슈에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물품과 방법으로 몰래카메라를 촬영한 사실을 말이다. 그런다고 내가 몰래카메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고 범죄에 가담하고 공모했거나,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화장실에 용변을 보는 장면을 몰래 촬영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며, 게다가 그런 위생적이지 못한 장면을 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엽기이다. 성폭행범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여기며, 특히나 아동과 청소년 상대로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도 싸다고 여길 정도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런 문제를 알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좋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러면 법적인 방법으로 그런 사람들을 처벌하고 단속하고, 시스템적으로 예방하는 게 맞다. 거기에 대한 대응이 당장 되지 않아 범죄와 무관한 사람을 몰래 촬영하여 피해를 줄 자격은 그 누구도 없다. 여성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 당사자도 아니고, 그런 잔재가 남으면 조금씩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피해의식이 남아있다고 여기는 부류가 많다. 물론 잘못된 인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은 그 피해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 평생 고통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제3자가 나서서 거기에 대한 복수이란 명제로 남을 피해줄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지금 페미니즘의 문제는 바로 이런 이중적 요소이다. 진짜 살인을 하려거나 의도를 가지려면 여성을 폭행하거나 또는 성범죄를 저지른 특수한 사례가 있는 자라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전혀 무관한 길가의 행인이나 버스의 승객, 하다못해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 피해의 범주에 들어가면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은 다르다. 20188, 여성우월주의 집단사이트 워마드의 운영자가 경찰의 체포영장에 의해 출두해야 하는데, 정작 5월에 경찰쪽에서 알아볼 게 있어서 출두요구를 무시하고 해외로 갔고, 이제 범죄적 수사망으로 좁혀오자 자신은 피해자란 글을 남겼다.

 

법적인 투쟁을 위해 변호사 모금비까지 구하는 이 마당에 만일 이때까지 그들이 행하던 일을 본다면 평범한 사람이라면 용납이 될까? 일베의 유일한 대항한 세력이라 했는데, 일베는 여성만 아니라 노인, 어린아이, 외국인, 지역적 차별과 온갖 패륜을 일삼았다.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악의적 루머와 조롱은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세월호 유가족이 단식투쟁하고 있을 때 그 앞에서 폭식투쟁을 했다. 일베는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조작된 여론세력 중에 하나였다. 그렇다면 일베의 유일한 대항자라면 그런 국가권력을 대해 저항하는 것이 올바르고, 거기에 피해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답이다.

 

전혀 그런 것들은 없었고, 오히려 죄가 있든 없든 남자면 뭐든지 욕을 했다. 개인적으로 제일 나쁘다고 여긴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후 파면 당하자, 여자라서 대통령에서 쫓겨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박근혜가 갓근혜고, 최순실은 여사님이다. 탄핵정국에 청와대로 전화하여 박근혜에게 힘을 내라는 응원성 발언을 한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이 일베의 유일한 대항자일까? 2가지는 이미 이룬 셈이다. 일베와 유일하게 가장 패륜적인 행위를 한 점, 일베랑 같이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모두 그럴 것이라 여기지 않으나, 그것을 말리거나 정지하지 않았다. 계엄령을 내려 특수부대와 장갑차, 탱크를 내세워 군인들로 하여금 시민에게 총격을 하려고 했던 군부 쿠데타계획을 세우던 인간들이 박근혜의 주변인물이다.

 

그런 자가 대통령이란 사실이 끔찍한데,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하여 활동하는 사상이라 하는데, YH무역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해 시위할 때 살인적 진압으로 한 여성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억지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여공들의 피와 눈물을 뽑아 이속을 채운 한국의 권력자들이 계속 그런 악마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부독재의 지원적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터부시되는 것은 박근혜와 연결이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노동자의 죽음과 고통을 안겨준 당사자에 대한 비판하지 않은 점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 논리와 무관하게 여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뭐든지 그들의 입장을 봐야 하지만, 현실은 약자가 약자일 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혹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많은 여성들이 핍박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민중 안의 피지배계층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욕만 채우려는 양반에 의해 목숨도 잃고, 종이 되며, 수탈은 일상이었다. 군역은 60까지고, 군납을 내지 못하면 집이 무너졌다. 군역에 복무하면 제대로 먹지 못하고 환경이 좋지 않아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군역과 관련한 지금 매년 수백명의 군인들이 자살, 사고, 의문사로 생명을 잃는다. 이런 생명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 전사들은 매우 좋아한다. 공장과 공사장에서 산업재해로 죽는 남성, 구의역 지하철역에서 사고로 죽은 젊은 청년의 죽음은 슬픔과 애도의 대상이지 조롱거리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베나 워마드는 그들을 조롱했다. 내가 열 받는 것은 그들의 비정상적 행위도 있지만, 그보다 심한 것은 지식인 내지 엘리트, 진보인사들이 워마드의 행위를 두고 억지로 쉴드를 치는 행위다. 한남패치나 강남패치나 아무 죄 없는 남녀들이 신상정보가 까발려졌을 때, 그리고 그 행위를 한 인간이 워마드인데도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남성을 공격한다는 부류가 여성도 공격한다. 이른바 흉자, 또는 명예자지는 여성이 여성의 편이 아닌 남성을 지지한 이유로 공격당하는 것이다. 진보 엘리트 내지 진영에서는 이런 일에 모른척하거나 아니면 여자가 했으니 먼저 검거를 당했다는 점이다. 최근 경찰청 발표에서 실제 범죄와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의 검거비율을 보니 남성이 월등히 높았다. 물론 남성이 저지르고 있는 문제들이 많지만, 그런다고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수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당했다는 심리만 표출했다.

 

진보지식인들의 발언에서 가장 한심한 것은 어느 교수가 일베가 전국에 600만명이라 한 것이다. 대한민국 인구 5천만에서 남자가 2500만이고, 이중 인터넷이 가능한 인구는 1500만이다. 그런 인터넷 남성인구의 40%라면, 총선과 대선에서 어떻게 진보인사가 선출되겠는가?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보수세력은 거의 망했다고 볼 정도로 참패했다. 그러면 일베가 600만명이라고 한다면 자유한국당 외 모든 진보계열을 가진 정당을 빨갱이로 보는 사람들인데, 그 발언이 논리가 있다고 본인조차 의심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참 걱정이 되었다.

 

페미니즘 진영은 진보세력과 결탁되어 있는데, 진보세력이 진보적인 발언을 하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발언에 취중하고, 어느 정확한 근거와 사실성을 두고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데, 이상한 논리나 집계가 정규화되지 않은 통계, 사실을 통해 자신의 논리가 먹히지 않으면 그저 감정적으로 잘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니냐는 말을 한다. 여자니깐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잘해줘야 한다는 것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이다. 사회성에서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사회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원인과 대안을 제시해야할 명문대 교수는 어느새 가부장제 타파보단 가부장적 제도의 잔재를 이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런 교수들은 최근에 페미니즘 도서를 계속 내며 수익원을 내거나 인지도를 올린다. 하지만 그들의 발언을 보면 논리성이 없다. 단순 편집성의 말만 아니라 전후맥락으로 봐도 맞지 않는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고칠 것은 고칠 것이다. 2010년 전후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고 공부할 때 내가 보던 책은 지금의 페미니즘과 전혀 달랐다. 미국 저명한 여성학자 메릴린 옐롬의 서적을 읽어보면서 그분은 남여간의 적대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로 이어진 역사적 사회적 검토하여 새로운 길을 찾자는 것이다. 결혼하여 자녀도 서너명 정도 가진 한 사람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원저가 된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읽어도 남성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가 될 자이고, 서로 대등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 남자아이를 유린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애초에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여자주인공이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자신의 어린아이를 만나게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어린아이를 두고 한남유충이란 표현과 어린아이 성기를 노출하는 사진을 올리고 조롱하고, 심지어 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계획하려는 인간이 정상인인가? 그런데도 현실의 진보엘리트들은 자신이 머문 이데올로기의 틀에 파묻혀 있다.

 

이런 시기에 오세라비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는 상당한 반항성을 주는 책이다. 알라딘에서 이 책이 나올 때 반응이 참으로 우스웠다. 오세라비 작가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덧글이 있었다. 안티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이란 단체가 있는데, 나도 그들의 글을 보면 나름 논조가 있다고 봤지만, 뒤에 가서 점차 보수의 논리를 내세운 부분이 있었고, 오세라비 작가의 본명인 이영희 선생은 그런 부류와 다른 길을 걸었고, 전혀 상관도 없다. 그런데 읽지 않았는데, 안티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이란 글을 적은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블로그 글을 보니 여성향 BL에 대한 글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고 적어내린 것이다. 그밖에 깎아내린 글이 있었다. 어느 분은 이분이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의 구분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미 시몬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고 그것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적은 내용도 있다. 어려운 책이라 나도 읽지 못했는데, 그 책을 그런 글을 적은 분이 적었을까? 그렇다면 <2의 성>에 대한 소견을 말하고 지적했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이 사람이 뭐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 사람 역시 책을 읽지 않았다. 사회연대노동포럼에서 활동하던 이영희 선생은 민주노총과 관련된 인물이었다.

 

민주노총, 진보세력과 노동운동을 하던 쪽이 아닌가? 이영희 선생은 여성운동과 관련하여 열린우리당 창시 당시 여성운동 관련 강의도 했고, 노동운동도 관련하여 활동했다. 사회연대노동포럼과 관련하여 사회주의자 사이트(http://socialist.kr/)에서 종종 소개된다. 그러면 이분이 진보성향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여성의 날 행사에 여성단체와 민주노총 같은 노동운동단체도 행사했을 때, 그분은 민주노총 쪽으로 참석했다. 그때 여성단체의 주요인사는 여성정치인 내지 거물급 인사였다.

 

보통의 여성이 아니라 권력자인 여성이었다. 비정규직이나 힘든 여건에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을 가진 여성단체가 여성의 발언이라고 말한다. 여성신문의 관련인사 중에 박근혜정부 당시 권력을 누린 자도 있고, 위안부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돈 100억에 넘기려 했던 사람도 있다. 여성단체가 과연 여성을 위한 존재인지 아닌지 의문이 간다. 오세라비 작가는 이런 문제도 지적했고, 내가 가장 절실히 마음을 느낀 것은 빈곤여성과 노인여성 그리고 미혼모였다. 미혼모들은 어려운 선택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모자라고 홀로 외롭게 아이를 위해 살아간다.

 

미혼모센터는 너무 열악하고, 제원을 한정적이며, 노숙인 여성들은 질병과 범죄에 노출되어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빈곤여성은 주로 노인들이며, 이들은 질병과 외로움 속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왜 이들에 대한 애민을 없는 것일까? 내가 처음 페미니즘 도서를 접할 때와 우연히 학부시절 여성학을 들었을 때, 내가 아는 여성학은 여성만이 아니라 빈곤과 어려움을 가진 가난한 사람, 노인, 어린이, 외국인, 장애인 등 사회적으로 어려운 모든 이들을 돌봐야 한다. 그런 사람 중에 50대 남성도 있다. 고독사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 중에 50대 남성이 제일 많다. 혼자 외롭게 차가운 방에서 절망아래 운명을 달리하는 그들은 얼마나 슬픈가? 그리고 가난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세 모녀의 죽음은 우리사회에 얼마나 많은 아픔을 보여줬는가?

 

만일 여성이 더 많은 어려움 겪는다면 국가적으로 혹은 사회구성원 입장에서 그들을 위한 정책이나 방향을 옳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사람을 외면한 채 이분법적 시선으로 피해자는 뭐든지 불만을 말하고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언더 도그마적인 가치관은 우리가 전혀 감지할 수 없었던 진정한 사회적 약자마저 거론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어느 글을 남긴 사람은 이래 말했다.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구분하냐고 말이다. 이영희 선생은 자기 자시을 두고 페미니즘이 아니라 하지만, 다소 사회주의 내지 마르크스주의와 연계성이 강하다.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그렇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하면 남성들은 임금을 더 받을지 모르지만, 과중하고 위험한 노동으로 산업재해를 당할 확률이 높고, 매년 산업재해 피해가 95% 이상이 남성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위험요소는 적으나 임금이 적고, 비정규직 처우가 매우 부당하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성적인 불평등도 당한다. 특히 마트나 식당에서 부조리한 일을 당하는 그분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기반인 점에서 안타깝다. <4천원인생>이란 책에서 식당 이모의 삶을 보며,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을 존중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여겼다. 이들이 식당에서 일하는 이유는 여성이란 이유보단 경제적 상황이다. 경제적으로 상황이 되지 않았기에 일을 한다. 재벌의 가문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구의역의 청년노동자의 죽음이나 쇳물에 영혼조차 태워져버린 젊은 노동자의 죽음 역시 그렇다. 사회를 볼 때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을 두고 봐야지 연대를 이르며 진정한 불평등을 이길 수 있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사회적 불평등에 남성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중소기업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남성을 200충이라며 조롱한다. 이영희 선생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에 대해 정확하게 거론하다.

 

여성운동 : 여성들의 즉각적인 필요와 관련된 실질적인 여성의 관심사에 중점을 둔다. 기존의 젠더관계에 반발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운동 : 여성의 종속문제에 반발, 여성해방, 양성평등과 관련한 전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국가, 국가제도를 가부장적으로 분석하며,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캠페인을 주력한다.

 

가부장제도와 관련하여 남성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세상은 거의 끝나가고, 그것이 가능한 남성은 소수 10% 이내도 안 된다. 대부분의 남성은 혼자 가정을 책임을 질 수 없고, 아내와 같이 의논한다. 집안의 살림과 운영방침도 아내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지금의 페미니즘 진영 논리 아니 메갈리아 워마드의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남충이란 불리는 남성이 여성의 적이면, 처음부터 결혼을 할 이유가 없고, 결혼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결혼생활 전반에 대한 의견을 듣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결혼하여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자신들이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동력을 얻어 가는가? 나는 워마드에 불만보단 진보지식인에 대한 불만이 높다. 이들은 겉으로 사회는 진보하고, 여성도 사회의 진보에 따라 권위를 상승해야 한다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면 모두 똑같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남성도 모두 다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더운 여름 일사병으로 쓰러질 정도인데도 힘겹게 일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비하하는 말로 암내충 냄져라고 한다. 내가 이런 말하는 부류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은 에어콘이 나오는 시원한 방에 차가운 물을 마실 것이다. 만일 전기와 수도가 터지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자는 건설노동자이다.

 

암내나는 냄져 아저씨들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Girls can do anything"이라면 더운 날 옥상에서 수도관을 고치는 일은 왜 하지 않은가? 진보지식인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최근 기사에선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운동도 있는데, 여성들이 1일 비소비보단 남성 1일 비노동이 더 위험하다. 하지만 안타깝게 그 비노동의 대상은 노동자들이고 각종 산업재해에 노출되고, 작업환경이 매우 최악이다. 냄져라고 불리며 멸시당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메갈리아 워마드 편들기가 진보운동이라 말하는 부류, 더 나아가 저명한 학자들의 생각은 이미 민중의 삶을 2번 짓밟는 것과 같다.

 

이영희 선생은 페미니스트 이전 휴머니스트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성 이전에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이어야지 여성과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인간임을 포기하면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 그저 승냥이 같은 짐승일 뿐이다. 1990년대 말 페미니즘과 관련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페미니즘 연구가들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부정하는 것도 안티페미니즘이라 지칭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 부정하는 게 메갈리아적인 페미니즘이 되었다. 예전부터 메갈리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했지만, 당시 페미니즘과 관련된 알라딘 블로거들은 그걸 부정했다. 나보고 오히려 자신이 메갈리아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어린 남자아이의 성기가 필터링 없이 인터넷에 오르고, 방에서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에 칼을 대며 죽이고 말하는 부류가 옳은가? 그런 말을 한 분은 자신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잘 때 칼을 직접 찌르면 죽이고 싶다는 사진을 올리면 좋겠다. 그래야지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어느 남성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분이 자신의 발언의 반성보단 오히려 누군가에게 욕을 했던 글을 캡쳐 후 거기에 대한 푸념하자, 편들어주는 식의 덧글보단 더 실천적이지 않은가 싶다.

 

여성이 사회적 불평등한 일을 겪어서도 안 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면 안 된다. 어느 날, 나는 저녁 후 와이프하고 같이 식탁에서 술을 마시며, 결혼생활은 평등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신 대등해야 하고, 공평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것은 1/n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과 상황 그리고 조건에 따라 맞추어 가는 것이 바르다고 했다. 내가 10쌀 봉지를 들었으니 와이프에게 10의 쌀 봉지를 들라고 하는 게 맞지 않다. 대신 다른 것으로 서로 보완해가는 것이 부부생활의 시작이라 했다. 결혼생활 4개월째, 모든 것이 서로 맞지는 않으나, 내 생각이 내 자신만 아니라 상대방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같을 수가 없고, 부족하고 어려운 것도 있다. 연대라는 개념은 바로 그런 것들을 채워가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그게 사라졌다. 여자면 뭐든지 그래야 한다는 것은 너무 편향적이고 일방적이다. 신문기사에서 <이등병의 엄마>라는 연극을 한다는 내용을 봤다. 자신의 아들이 군에 간 후 얼마 뒤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자신들이 아들을 낳은 죄인이라 했다. 이들의 고통 속에 그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부류는 이들을 어떻게 여기는가? 이들은 여성이 아닌가? 어떤 여성만이 진정한 여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진보라는 것은 사회적 문제를 두고 약자를 위해 계속 변혁해가는 운동이다. 이번 페미니즘 운동이라 말하는 워마드 사건과 관련하여 홍대몰카 사건에 대해 이들이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희생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홍대몰카 피해자의 사진을 올려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사생대회도 열었다. 그리고 유포자가 잡혀가자 여성이라 잡혔다고 말한다. 그래서 만일 여성이라 잡혀가서 부당하다고 여길 때, 그러면 몰래카메라로 충격 받고 상처 입은 그 누드모델의 입장은 뭐가 되는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아래 어느 개인이 받은 상처와 피해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라고 말하면 이미 논리를 틀어졌다. 그래서 오세라비 작가의 서적 말처럼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어긋난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진보지식인과 진영의 생각은 민중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녹색당 정치인이 워마드의 농성에 동조하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은 부당하다 했다. 그러면 이때까지 죄 없이 조롱당해야 했던 사람의 입장, 그리고 그 사람의 가족은 무엇인가? 페미니즘의 논리로 진보진영에서 상당히 많은 입지를 굳히려 했지만, 이때까지의 사건과 그리고 노회찬 위원의 죽음으로 진보진영의 판세는 크게 바뀔 것이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진보진영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받을 것이고, 여성운동을 오랫동안 한 분들의 노력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으로 권인숙 교수님이 임명되었다. 그분은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위해 투신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으로 불리는 그 피해자로, 당시 독재와 싸우고, 노동자를 위해 그리고 여성인권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런 분들까지 피해보는 게 아쉽다. 어느 여성운동가 분이 나에게 덧글을 남기기를 그동안 원로여성운동가들의 노고가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으로 모두 무너질까 걱정된다고 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노동운동과 관계있고, 독재에 저항했다. 대표적 여성정치인으로 한명숙 전 총리와 심상정 위원이 있다. 여성이란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으로 노동자의 죽음을 비웃고 조롱하는 세력에 동조하는 것은 그들이 쌓아올린 탑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워마드 운영자가 경찰에 의해 조서를 꾸미고, 법적 대응을 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입장을 공지로 올렸다고 하는데, 그동안 아카이브 된 기록이 이미 인터넷 도처에 널려있기에 과연 그들의 논리가 법정에서 우세할까? 그들의 말처럼 법관이 여성이면 좋겠다. 판사가 여성이고, 그 판사가 판결을 내려야 납득할까? 윤리의식을 버리고 도덕적 선을 넘은 그들에게 무슨 비전이 있을까?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계속 흘러가면 진정 피해를 입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물론 이 책을 그들이 제대로 읽을 것이라 여기지 않으며, 내 글을 보며 생각을 고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세상은 별개로 돌아간다. 그때는 누가 과연 도태될 것인가? 아무도 모르나, 세상물정과 민중의 세상사는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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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2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8-22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세라비님 저랑 페친이고, 사민주의자죠.

만화애니비평 2018-08-22 21:00   좋아요 2 | URL
히히 저도 페친했다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