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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9 - 3부 1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9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이전에 안 읽은 부분에 돌입해서 몹시 흥미진진하다.
독립운동의 정체기랄까, 물 밑에선 움직이고는 있지만, 가시적 성과는 없고 사람들만 상해 나가는 시기.
이제 익숙해진 등장인물들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인 것 같다.
간도를 벗어나 귀국한 서희 일행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는 과정.
뭔가 진척이 없는 독립의 길, 강탈된 나라에 점점 익숙해지는...
서울 상가들의 한 달 넘는 동맹 철시, 1030호의 상점들이 참여한 독립에 대한 염원.
서희 주변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다수가 형무소에 수감되고,
개화라는 바람이 불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신분에 대한 차별은 서글프게 존재한다.
이상현이라는 캐릭터는 식자의 무능. 그것으로 그치고 마는 건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답답하기도 하고.
용이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한복이는 동생이라는 혈연을 이유로 군자금을 전하는 일에 관여하게 된다.
조준구는 서희 앞에서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평사리 집을 돈 오천원에 판다. 원래 그의 집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비굴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는 모습, 복수의 마무리라고 하지만, 읽고 있는 나도 최서희도 힘 빠지는 지점이 아닌지.
- 믿을 수가 없다. 이자는 누가 머라 캐도 믿을 수 없단 말이다. 처처음에사 만세만 부르믄 독립이 될 줄 알았제. 그러크름 말들 하니께. 흥!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겍이라. 되는 기이 머가 있노, 하낫도 되는 기이 없단 말이다. 우리댁 나으리만 해도 안 그렇건데? 이십 년을 넘기 기다리도 아무 소앵이 없었은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기는커녕 사람 얼굴조차 가물치 콧구멍 아니가. 함흥차사라 함흥차사. 되지도 않을 일이라믄 진작 말 일이제. 식솔들만 생고생을 시키고. 좌우당간에 충신이 되든 역적이 되든 군사를 몰고 와서 쌈을 해야 무신 결판이 나제. 만판 만세 불러봐야 소앵이 있나. 목만 터지제. 목만 터지건데? 모가지는 날아 안 가고? 그거를 두고 개죽음이라 하는 기라. 나 겉이 무식한 놈이사 군대쟁이 영문 모르고 나섰지마는. - 12
- 그 주술 같은 것에서 풀려나기는 월선이 죽은 후부터였지만 용이는 임이네에 대한 애증을 이제 모두 넘어서버린 것이다.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대상에서 그 미움마저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용이의 삶, 삶의 종말, 생명의 불씨가 꺼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 91
- 1894년 갑오경장은 형식이나마 천인의 면천 조치를 취했고 이어 동학란이란 거센 바람도 신분제도, 그 오랜 폐습을 완화하는데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뿌리 깊은 천인들의 애사가 일조일석에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역인, 광대, 갖바치, 노비, 무당, 백정 등 이들은 변함 없는 천시화 학대를 받는 것이었고, 양반이 상민을 대하는 것 이상으로 상민들은 그들 천민 위에 군림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백정이라면 거의 공포에 가까운 혐오로 대하였으며 학대도 가장 격렬했었다. 문둥이나 송충이처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이 지켜야 하는 분수를 어겼을 적에 가차없는 사형이 가해지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불문율이기 때문에 백정은 아닐지라도 백정의 사위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불문율이란 대개의 경우 대중의 충동적 행위였으니까. - 191
- 여한과 미진, 울분을 풀 길 없는 밤이었다. 관수나 석이에게도 그랬었지만 서희라고 후련한 밤이었을까? 여한은 마찬가지, 이제 서희는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조준구가 걸어오지 않는 이상 보복은 끝난 셈이다. 간도 땅땅에서 이를 갈며 맹세한 보복은 사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더 가혹하고 더 잔인하고, 보다 더 철저한 것이었을 것을. 관수나 석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살찐 암탉 같았던 젊은 날의 조준구, 여전히 살찐 암탉이지만 늙은 닭이 되어버린 조준구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끝날 원한이 이렇게 싱겁게 끝난 것이며, 아니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199
- 서희는 남편 길상에게 대하여는 언급을 아니한다. 그런 만큼 괴로운 것을 혜관은 안다. 친일을 더해야겠다, 친일을. 그 말은 확실히 혜관을 감동시킨 것이다. 용정촌에 군자금을 보낸 행적을 은폐하기 위해 위장을 한다는 뜻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말은 서희의 괴로움, 서희의 갈등, 서희의 냉정, 서희의 총명을 웅변 해주었던 것이다. - 234
2024.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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