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다가 한 구절을 발견한다.


  그 구절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그 구절뿐,


  그런데 그 구절이 왜 이렇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 때문이 아닐까.


  많은 일들이 동영상으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동영상 중에서 한 장면이 멈춘 듯, 마치 사진처럼 남아 있기도 한다.


그런 사진처럼 남아 있는 장면.


좋은 장면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황학주가 처음 펴낸 시집을 다시 복간한 시집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시는 다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래야 시다.


한 시대가 지났다고 잊혀져서는 안 된다.


이 시집에서도 많은 시들이 다시 지금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단단한 벙어리를 깨고'란 시에 나오는 이 구절이 가슴 속에 들어와 박혔다.


'평화보다 잘 찍힌 불행은 역사에 많다'(황학주, '단단한 벙어리를 깨고' 중에서. 23쪽)


평화. 평화가 유지될 때 우리는 평화를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중국에서 태평성대라던 요 임금 때 누가 임금인지 모르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그냥 평화롭기 때문에 특정한 장면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 그런데 불행은?


불행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불행은 우리의 눈을 잡아 놓는다. 그래서 불행은 사진으로 남는다.


평화보다 잘 찍힌 불행이라는 표현에서 그런 불행들은 결코 우리를 스쳐지나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여러 일들 중에 기억에 오래 남는 것들... 그런 장면들이 하나의 사진처럼 남아 있게 되는데...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들으라고 했다가 온몸이 들려 끌려나가는 장면. 불행은 평화보다 잘 찍힌다.


이 시 구절이 확 들어온 이유가 이런 장면들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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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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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깨달았다. 아, 이 소설들을 한 편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각 소설들이 독립적이지만 읽다보면 연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 주인공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어린 여자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여자까지, 여자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잘 표현되고 있다.


제목이 된 소설 '도덕적 혼란'부터 보면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그녀는 도덕적이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남의 어려움을 쉽게 넘기지도 못한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남자와 함께 산다. 여기에 그 남자의 공식적인 아내에게서 이런저런 간섭을 받는다. 마치 우리나라 옛날 '첩'처럼. 


소설을 읽다보면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착하다는 말을 넘어서서 이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의 아들들이 온다고 주말 내내 나가 있어야 하기도 하고, 그 아이들에게 이것해라, 저것해라 하는 부인의 간섭을 받는 삶이라니...


하지만 여자는 자기 할 도리를 다한다고 한다. 남자는 그러한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다. 간섭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여자에게 미룬다고 보면 된다. 자신이 나서서 정리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지니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여자 (작중 이름은 '넬'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는 '넬'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삶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물론 부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하고 있겠지만) 여기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결코 능동적이지 않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수동적이라고 볼 수도 없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넬.


그러니 도덕적 혼란이다.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모른다가 아니라,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도덕적인 굴레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통이란 말이 폐지된 사회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예전 도덕이 강요된다. 남자에게는 그럴 수 있지라고 넘어가는 일들도 여자에게는 비난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넬'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도 남자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래브라도의 대실패'에서 아버지가 등장할 뿐. 


이 소설집의 대부분은 여성 화자가 중심이다. 그리고 여성들의 삶이 중심을 이룬다. 직장을 가졌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상태. 여기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여성이 처리해야 하는 상황. 


이혼 문제마저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남자와 함께 살면서 그 사람의 감정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생활. 그런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


어린 시절에는 동생을 보살펴야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돌보고, 아이를 낳으면 다시 아이를 양육해야 하고, 이제 나이 든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여자의 삶.


소설집 첫 작품이 '나쁜 소식'인데,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이 주인공이다. 첫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다.'(26쪽)


여기에 마지막 작품인 '실험실의 소년들'에는 엄마가 남겨둔 종이에 "완벽하게 아름다운 날!!!'(382쪽)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그들의 삶에 고난이 많았을지라도 그들 역시 아름다운 날들을 지나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날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삶에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날이 아니라, 아름다운 날들이 더 많은 그런 삶들을 여성들이 누려야 한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여기에 이제 여성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임을 말하면서 이 소설집은 끝난다. '나쁜 소식'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여성이다. 그 점을 마지막에 실린 '실험실의 소년들'에서 '소년들의 운명은 이제 내게 달려 있다'(384쪽)고 여성 서술자가 말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이제 여성은 남성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된다. 


결국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집에서는 여성이 삶의 주체로 우뚝 섬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편 따로 떼어서 읽어도 무방하지만 전체를 다 함께 읽는 것이 훨씬 작품을 이해하는데 좋겠단 생각이 드는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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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다. 백석과 보낸 며칠간이라니... 제목만 보고, 백석 시를 읽고, 그 시를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시간을 지녔으리라 생각했다.


 좋은 시를 만나면 그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마음 속에 담아두려 하고, 좋은 시인을 만나면 그 시인의 시를 계속 찾아서 읽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백석이란 시인은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의 시를 구하기 쉽지만, 예전에는 재북시인이라고 해서 우리가 읽어서는 안 되는 시인이었다.


  그런 시인과 더불어 며칠을 지냈다니 시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시집을 펼쳐 제일 먼저 읽은 시는 제목이 된 '백석과 보낸 며칠간'. 백석 시도 적절하게 인용되어 있고, 그러한 백석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좋은 시를 읽었을 때, 좋은 시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그러한 마음이 절절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백석과 보낸 며칠간 가난한 내 영혼에서 / 볍씨 같이 싹 트던 맑은 눈' ('백석과 보낸 며칠간'에서. 79쪽)


좋다. 이렇게 시를 읽으며 '맑은 눈'이 트이면 얼마나 좋을까. 시집을 읽는 이유가 그것일 수 있다. 척박한 세상에서 맑음을 찾는 마음, 그 마음이 시집을 찾게 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시 중에서 이 시, 누군가에게 이런 센서 등이 되거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맑은 눈뿐이 아니라 맑은 마음까지도 지닌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를 보자.


            센서 등


  저 소녀 성능 좋은 센서 등, 소년이 다가가자 환히 켜져

  소녀의 웃음은 빛난다. 소년이 떠나면 곧 꺼질 것이다.

  나도 꽃 피는 봄이면 내 마음도 탁 하고 켜져 오래 환했다.

  옛날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센서 등, 아버지가 기술자로

  울산공단에 오래 있다 돌아오는 발소리 동네 입구를 울리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어머니는 탁 켜져 목련꽃보다

  화사하게 빛이 났고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 각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가졌기에 사람이 나타나거나 사라지면

  환히 켜지거나 캄캄하게 꺼지기도 해, 불야성의 도시라도

  사람이 쉼 없이 자동으로 꺼졌다 켜졌다 하기에 아름다워

  지금도 누가 다가가는지 멀리서 탁 하고 켜진 환한 얼굴이 보여


김왕노, 백석과 보낸 며칠간, 천년의시작. 2022년. 76쪽.


아름다운 시다. 소녀만이 성능 좋은 센서 등이 아닐 테다. 소년도 역시 성능 좋은 센서 등이다. 아니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성능 좋은 센서 등이 된다. 그가 오면 그를 위해 빛을 내는 센서 등. 그가 없을 때는 그를 기다리며 빛을 감추어두고 있는 센서 등.


누군가에게 이런 센서 등이 된다는 것, 사랑하는 일이다. 꼭 누군가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반응하는 그런 센서 등을 지닌 사람.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존재들에게 빛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 그렇게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세상, 그것이 시인이 바라는 세상이고,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어떤 시에는 마음이 찡하기도 하고 ('황발이'80-81쪽) 어떤 시는 세상을 살아낸 뒤의 내 모습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아직도 아름다운 일몰이여'-26쪽, '장엄한 일몰'-106쪽)


무엇보다 우리도 빛을 낼 수 있음을 시를 통해 알 수 있으니 그것이 즐거운 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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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로 만나는 아프가니스탄 푸른사상 교양총서 19
박일환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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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얼마 전에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있다. 탈레반이라는 이름도 많이 들어본 조직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우리나라를 돕던 사람들을 망명이라는 이름 대신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로 오게한 것.


그들은 우리나라에 자리잡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에게는 낯선 나라다. 그냥 전쟁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나라, 탈레반이 불교 유적을 파괴한 나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알고 있을까? 잘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와 관계가 없지 않다. 그러니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보다는, 문학과 영화를 중심으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문학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알려진 작품들이 많지 않아서 이 책에 소개된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생소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문학과 영화를 내용 중심으로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 작품들에 나타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알려주고 있다.


소련과의 전쟁, 탈레반 집권,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다시 탈레반 집권. 현대에 이르러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에서 벗어난 시기가 많지 않다.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했지만 종족별로 갈등이 있으며, 이러한 갈등이 봉합이 안 된 상태에서 소련과 미국의 진주가 있었고, 이 틈을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이 파고들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탈레반이 집권하고 있고, 탈레반은 여성들의 활동을 금지(공식적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아프가니스탄 소설과 시를 통해 그 나라의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고,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본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시각이 지닌 문제점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그럼에도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또는 다른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을. 그래서 여전히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계속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아프가니스탄 소설이나 영화들이 대부분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만큼 그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세계 시민들에게 알리고 아프가니스탄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함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제 우리나라에 온 특별기여자들 가운데서도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또는 주제로 한 작품활동을(시든 소설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등등) 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예술도 우리 사회에서 자유롭게 발표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생소한 아프가니스탄의 문학과 예술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영화 소개한다. [학교 가는 길]이다. 이 영화를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란 감독이 만들었지만 배경은 아프가니스탄이고,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아이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참고로 이 영화는 하나 마흐발바프라는 영화 감독이 만들었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고 한다. (이 책 153쪽 - 159쪽 참조)





영화 볼 수 있는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vblXsh0h5w0


https://www.youtube.com/watch?v=jNVJuqVrk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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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를 읽으면서는 딱 한 낱말, 이 말에 꽂혔다. 그리고 이 말이 바로 표지 사진과도 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녹명(鹿鳴') 사슴이 운다. 또는 사슴의 울음소리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니 이런 말은 없다. 한자가 다른 말들만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녹명'이라는 말을 '공명(共鳴)'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까 했지만, 약간 다른 느낌을 준다. 공명은 공감이라는 말과 비슷하다면 녹명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이 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다. 솥이 여럿이란 말은 음식을 홀로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함께 나눈다는 말이다. 녹명이 바로 그런 말이라고 한다.


'녹명은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함께 나누기 위해 다른 사슴들을 부르는 울음소리랍니다. 대개 짐승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혼자 먹고 남는 것마저 숨기기 급급한데 사슴은 울어 울어 친구들을 불러 함께 나눈다네요. 녹명은 저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말입니다.'(김인호, '2023 이곳만은 꼭 지키자'-구례 산동 사포마을 다랑이논 선정-, 85쪽)


정말 아름다운 말이다. 이런 녹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많이 있다.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다른 존재들에게 따스함으로, 표지 사진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있고도 따뜻함으로 다가가겠다.


삶창이 지금까지 해온 일이 바로 이런 일 아니겠는가 싶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나만 갖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갖자고 하는.


그래, 좀 있는 사람들, 이 녹명이란 말 좀 듣고 명심했으면 좋겠다. 함께 나눌 때 기쁨은 배가 된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이번 호는 이 한 낱말로 꽉 찼다. 그것이면 됐다. 곧 각 정당에서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확정될 테다.


국민을 위한다고 나오겠다는 사람들,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을 거다. 적어도 자신들이 먼저 먹이를(사슴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면) 발견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나왔을 거다.


자신이 발견한 먹이를 함께 먹자고, 그렇게 사람들을 부르겠다고, 녹명(鹿鳴)을 실천하겠다고. 그런 사람들인지 아닌지 우리가 판단해야겠다.


사슴처럼 함께 먹자고 우는 사람일지, 하이에나처럼 남이 먹다 남은 음식 더 먹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일지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지녀야겠다. (하이에나에게는 미안하지만 통념이 그러니 하이에나가 용서해주길)


'녹명'이란 한 낱말. 바로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말이다. 지금 우리에겐 하이에나가 아니라 사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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