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사계절 1318 문고 78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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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작가의 [합*체]는 경쾌하다. 키 작은 아이들의 키 크는 프로젝트로 봐도 좋지만, 그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으니, 청소년들에게 부담 없이 읽으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 [맨홀]은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쉽게 읽으라고 권하기 힘들다. 경쾌함, 발랄함과는 거리가 먼 질척거리면서 계속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고, 소설에서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고, 이런 인물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는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성찰의 힘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갈고 닦아야 한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그 점을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알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사는 엄마, 여기에 함께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죽도록 아빠를 증오하게 되는 남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빠가 죽는다. 소방관이던 아빠는 화재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죽는다. 우습다. 다른 사람을 구하는 직업을 지닌 아빠,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빠가 가족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의 표상이 집안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표상이 된다. 그런 아빠가 죽었다. 구원이다. 구원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빠는 죽어서 영웅 소리를 듣는데, 이제 가정을 폭력으로 휘감던 폭력이 사라졌는데, 평화가 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폭력에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가슴에 메울 수 없는 구멍만 파 놓은 상태. 엄마는 계속 무력한 상태고, 누나는 집을 나가 자신만의 생활을 한 상태.


어린 시절 누나는 이를 연극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은 연기를 한다고 했다. 그 상황을 나름대로 극복하려는 모습이지만, 이것은 극복이 아니라 봉합이다. 즉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그냥 상황을 넘기는 모습. 그러니 기회가 되자 연극을 한다는 명목으로 집을 나간다. 탈출이다. 극복이 아니라 탈출.


그래도 누나는 남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다. 누나는 자신의 가슴에 뚫린 맨홀에 뚜껑을 닫아버렸다. 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메워버렸다.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고, 연극을 통해서 즉 누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객관화 할 수 있는 힘을 서서히 얻었다.


이런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어렸을 때 아빠에게 반항하는 누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아빠로 인해 마음에 구멍이 생겼지만, 누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구멍을 메우고 뚜껑을 닫아버릴 수 있었다.


그런 힘을 연극이 주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제 삶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빠에게 한번도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또한 주인공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늘 어정쩡한 자세로, 이도 저도 아닌 자리에서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태에서 주인공의 마음에는 큰 맨홀이 생겼다. 결코 메울 수 없는, 뚜껑으로 덮어버릴 수도 없는. 주인공은 사람의 몸에 구멍이 몇 개냐고 질문하지만, 이는 물리적인 구멍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구멍 외에도 마음에 뚫린 구멍, 결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구멍은 메울 수 있다. 그 구멍을 제대로 응시한다면. 그건 제 삶을 성찰하고 실천했을 때 간능해진다. 그래야 하는데 주인공은 결심은 하지만 실행은 못한다. 말을 하려고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늘 끌려다닌다. 남에게도 그렇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구멍으로 늘 빨려들어간다.


그 결과가 뜻하지 않는 살인이다. 의지로 행한 살인이라면 나았으려나? 아니다. 살인으로 가는 길은 이미 자신의 구멍에 침식당한 경우다. 주인공은 스쿠터의 맨 뒷자리에 간당간당 앉아가면서도 손을 놓고 떨어지는 장면을 상상하면서도 단 한번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실행할 의지가 없다. 아니 의지가 맨홀에 갇혀버렸다. 그 맨홀 뚜껑을 스스로 열고 스스로 닫고, 메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냥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자신이 이유 없는 폭력의 희생자이면서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어야 하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맞서는 경험을 한번이라도 했어야 하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주인공을 통해서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나가 연극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주인공이 살인까지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하나? 폭력에 시달리던 가족들의 모습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폭력을 당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다. 그나마 누나에게 마음을 여는 주인공은 어린시절 누나와 함께 폭력을 당하면서 서로 의지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경험을 계속 이어나가 폭력에 맞서는 방식으로 또는 폭력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감싸고 위로해주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가정폭력을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해결하려고 하면 절대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누나는 집을 나가는 것으로 해결을 한다. 그렇게 남아 있는 주인공에게는 그 상황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구멍 속으로 자신을 던져넣는 길밖에는 남는 방법이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겉돌게 되는, 겉으로는 성실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구멍은 철저히 뚜껑으로 가리고 있는 주인공을 남들은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매번 후회하고 반성하고 다르게 살리라고 결심하지만 막상 현실에 닥쳐서는 예전과 같은, 그것도 자신이 미워했던 아빠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엄마가 아들이 무섭다고 하는 말에는 바로 이런 진실이 담겨 있다. 가장 큰 폭력이 사라졌지만 그 가족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자신들이 폭력에 맞서지 않을 때 폭력은 재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끝까지 여운을 남긴다. 어떻게 해야 마음 속 구멍을 메울 수 있을까? 그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그런 구멍을 어떻게 발견해낼 수 있을까?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구멍들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폭력이 얼마나 많은 마음에 구멍을 내는지, 그 구멍들이 메워지지 않고 구멍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 우리는 그런 보이지 않는 구멍을 찾아 메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참 힘든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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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자리'를 찾아보면 '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라고 나온다. 그러니 수자리는 군인이라고 보면 된다.


  나라가 있으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헌법 39조에 국방의 의무라고 해서 1항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2항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이런 군인들이 있는 곳이 군대인데, 군대가 좋은 경험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죽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이 있겠는가. 군대에서 갖은 고생을 했기에 군대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말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이와 비슷하게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이 제대하고 나서도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꾼다고 한다. 악몽이라고... 얼마나 군대가싫었으면...


이와 반대로 '군대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이 있는데,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지내보면 조금 성숙해진다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이때 사람된다는 말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이니... 하여튼 군대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군대에 관련된 헌법에 있는 2항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는 이 구절...


불이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전에(지금도 그럴지도)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았다. 무엇이 불이익일까?


쉽게 군대 가산점이 있으니 불이익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경제활동을 하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졌느냐 하면 아니다. 


요즘에야 병사들 월급을 인상해준다고, 병장 월급이 200만 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지만, 2-30년 전만 해도 병장 월급이 1만 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최소한의 용돈을 주고 젊은이들을 군대에 잡아놓았던 시절.


헌법에 위배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군대에 있는 1년 6개월 동안 그에 합당한 보수를 국가가 지불해야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에 맞는다.


여기에 군대에서 자행되던 온갖 폭력들, 반인권적인 행위들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이익이다.


구타라는 말, 지금은 그것이 범죄로 인식되어 거의 없어졌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얼차려'라고 해서 구타는 일반적이었다. 오죽하면 '구타 없는 부대'를 만들겠다고 하는 사단장이 있었겠는가. 그것이 구호로만 그친 경우가 많았지만.


소원수리라고 해서, 군대에서 일어난 비리, 억울함 등을 호소하는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눈 감고 아웅하는 그런 요식 절차였다. 편지까지 검열당하는 군대에서 누가 용감하게 군대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반인권적인 행위는 헌법에 위배된다.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가 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은 시인이 군대에 가는 과정부터 군대 생활, 제대, 그리고 예비군과 민방위에 편입되는 과정을 거쳐 아들에게 신체검사 통지서가 오는 것으로 끝난다.


한 사람이 군대에서 겪는 일이 모두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예전 군대가 이랬다고, 지금은 안 그런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군대였으면 좋겠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거의 없으니 (예전에 코스타리카가 군대 없는 나라라고 했는데, 더 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군대가 적어도 이 시집에 나온 행위들을 더이상 하지 않는 군대였으면 한다.


'양조장집 아들은 무종을 받았고 / 산업과장 아들은 폐결핵이란다 / 무종을 받고 폐결핵이면 / 군에 가지 않는단다' ('신체검사' 중에서 17쪽)


이 구절은 다음에 '이 땅의 젊은이면 가야하는 군대'('영장' 중 20쪽)과 어긋난다. 원칙적으로는 다 가야하지만, 이상하게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앞의 신체검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반인권적인 내용을 보자.


'우리를 서로 마주 향해 세우더니 / 앞에 선 전우의 빰을 치란다' ('소등 이후' 중에서 48쪽)

'5초안에 식사를 못 마쳤다고 / 식기를 입에 물고 오리걸음 연병장을 수도 없이 돌았네' ('식사시간 '중에서 58쪽)

'사실을 사실대로 쓸 수도 없는 / 군사우편 서신검열 우리들 편지' ('첫 편지' 중에서 66쪽)

'내무반에 돌아오면 사나운 내무반장의 / 가학적 기합이 기다리고 있었다 /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성적(性的)인 학대를' (내무반 내무생활' 중에서 112쪽)

'현역병 제대는 무기한 연기되고 / 제대특명 조치는 금지되었다' ('제대명령을 기다리며' 중에서 149쪽)


이런 일들이 당시의 군대에는 비일비재했다. 헌법에 있는 말들은 그냥 말일뿐인 세상.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그렇지 않아야 한다. 군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 시집이었다. 한 편의 이야기. 이제는 할 수 있는 군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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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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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그 중에서도 과학적 지식이 많이 필요한 소설. 그냥 재미로 읽어도 되지만 과학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어라 이 소설의 개연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수많은 경험들을 기억하고 조직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일한 존재일 수가 없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이 소설에서는 수축과 확산이 나온다. 수축은 우리가 지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이라면 확산은 자신을 널리 분산시키는 가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났는데, 수축은 실제 인간, 즉 가상 세계에 접속하지 않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확산은 가상 세계에 접속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확산된 상태에서 인간은 어느 곳에든 갈 수가 있는데, 그런 확산 상태가 수축이 되면 실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수축이 될 때 누가 실제 인간이냐는 문제는 남는다. 즉 확산된 존재인 '나'는 수많은'나들'이기 때문이다.


이 '나들' 중에 살아남은 '나'가 수축된 나이고, 이런 나가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확산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을 수없이 확산시킨다는 것은 다른 존재들을 수축시킨다는 의미가 될까?


함께 확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구를 둘러싼 버블이 우주로부터 지구를 가려버렸다. 제목이 '쿼런틴(Quarantine)'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는 격리되었다. 왜? 인간들이 지나치게 확산해서 우주의 생명체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인간들은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기도 한다. 수축된 인간, 자각이 돌아온, 지금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인간은 많은 확산된 인간들의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 우리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인 것이다.' (343쪽)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든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들' 중에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나'를 제외하고 많은 부분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져버리게 되니, 이를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과연 인간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을까 궁금했다. 하나의 세포가 바로 '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세포들이 모여 '나'를 구성하고 있으니... 또한 우리 몸에서 수많은 세포들이 죽어가고 새로 태어나고 하니, 이 소설에서 아주 빠른 시간 동안에도 많은 '나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우리 몸 세포들이 죽어가는 과정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수축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일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을 지워버린 현재의 나라는 생각. 현재의 나는 미래를 알 수가 없고, 현재도 알 수가 없다. 현재는 경험하고 그것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축된 인간은 현재의 인간이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동안 많은 부분들을 묻어버리게 되니, 이는 다른 죽음을 바탕으로 지금의 나가 존재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왜 버블이 필요할까? 인간을 격리하는 버블을 왜 설정했을까? 인간의 확산이 다른 생명의 죽음을 불러온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버블을 누가 설치했을까?


소설은 버블이 설치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닉의 관점으로 진행이 된다. 닉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 과정에서 수축과 확산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버블을 누가, 왜 설치했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버블이 인류에게 필요할까? 소설은 버블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해석이 되는데, 그것은 인류의 무한정한 확산이 다른 생명체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한 격리는 필요하다. 이때 격리를 가둬둠으로 해석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 둠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한다.


인류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 사라지는 생명들도 있음을, 그렇다고 무조건 격리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인류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생명들의 죽음을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영역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거리,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말하는 '쿼런틴(버블로 상징되는)'이 아닐까 한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읽었고, 이렇게 양자역학이나 또다른 과학 지식에 무지해서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읽기를 멈추려는 생각도 했는데, 소설을 그냥 소설로 읽자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니,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로워졌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나들'이 중첩되어 존재한다는 생각, 우주는 단일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도 생각하면서, 또 엉뚱하게도 [장자]의 '호업몽(胡蝶夢)'도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말이 뭔데? 하면서 읽었다.


아마도 이 소설을 곱씹으면서 읽으면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많은 '나들'이 지금의 '나'라는 사실, 이런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 많은 '나들'이 사라져야 했음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나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혼란에 불과할 뿐이라고, 적당한 수축, 즉 격리가 있어야 한다고, '나'를 많은 '나들'로부터 수축해서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많은 '나들'을 다 없애라는 것은 아니다. 이 '나들'이 '나' 속에 융합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으니...


다만 지나친 확장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생명체에게도 좋지 않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덧글


소설을 읽으면서 '아바타'도 생각났고, 홀로그램도, 또 서유기의 손오공도 생각이 났으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나들'이 있을까, 이 공간과 시간은 유일무이한 존재인가? 아니면 공간과 시간이 다양하게 이곳에 중첩되어 있는가 등등... 복잡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모르겠으니, 어쩌겠는가 그냥 소설로 읽을 수밖에.


궁금해서 인간의 몸에 세포가 몇 개나 있을까 찾아봤더니, 인터넷의 특성에 걸맞게 많은 수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차이가 너무 심하다. 30조에서 60조까지 벌어지니... 실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세포 수마저도 잘 모르니, 인간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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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엄재국, 정비공장 장미꽃. '문' 중에서. 애지. 2006년. 100쪽)


  이것이다. 꽃 하면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왔을까 했더니 열려 있음에서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귀엽다고, 순수하다고 한다. 왜? 바로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말이 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하고, 가사에도 이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아름다운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우열을 가르는 말이 아니라, 꽃을 아름답다고 하니, 사람 역시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사람도 꽃이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려면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을 활짝 연 사람에게는 벌이 찾아드는 꽃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열려 있음, 이것은 곧 나의 것을 다른 존재에게 준다는 말이다. 내 것을 가져가시오. 맘껏 가져가시오. 이것이 바로 열려 있음이다. 꽃은 자신을 통째로 내어준다. 그래서 꽃은 아름답다. 또한 그런 사람도 아름답다.


시 제목이 '문'이다. 문은 열려 있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한다. 하지만 문의 기능이 무엇인가?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안과 밖의 소통 창구. 


문은 닫혀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늘 열려 있기만 해도 안 된다. 열릴 때 열리고, 닫힐 때 닫혀야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이 늘 활짝 열려 있지는 않다. 꽃도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열린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문'이라는 시에서 아이를 꽃에 비유하고 있다. 아이의 말은 벌이다. 꿀을 발라 나르는 벌들. 그렇게 아이는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함께 선사하고 있다.


엄재국 시집을 읽다가 만난 구절. 


"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마음을 열어야겠다. 꼭꼭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환대할 수 있게 활짝 열린 문처럼. 


어쩌면 시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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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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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분서갱유(焚書坑儒)


학창시절, 중국 역사를 배울 때 분서갱유에 대해서 배운다.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묻었다고. 이는 지식의 탄압이다. 결코 성공하지 못한. 이 분서갱유는 아무리 탄압을 해도 지식을, 교양을, 학문을 막을 수는 없다는 역사적 증거로 언급이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조차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다른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분서갱유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학문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사상의 다양성.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또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각자의 사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임을, 분서갱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서갱유를 서양에서 실천한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 그 역시 나치에 반대하는 책들과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작품들도 불태워버렸다. 나치는 바로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나치가 성공했는가?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패한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같은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진시황과 히틀러의 실패. 이는 사상의 자유는 억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꼭 책만이 아니다. 말을 막는 사회 역시 성공할 수 없다. '입틀막'이라는 말이 나오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예전 역사를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 자신들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장면2  학년말 학교 풍경과 수능 국어 시험


학년말 시험이 끝나면 또 수능이 끝나면 많은 학교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학교 운동장에 트럭이 오고, 그 트럭을 향해 학생들이 교과서를 들고 나른다. 들고 나른다는 표현보다는 트럭에 교과서를 내던진다.


폐휴지로 팔려가는 교과서들.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학년말에 교과서들은 트럭으로 직행한다.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할 수 있을까?


교과서의 용도는 시험이나 입시에만 해당하는 걸까? 그런 교과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학생들은 달달 외운다. 교과서가 없으면 교사에게 지적을 당하거나 점수를 깎이기도 한다.


진리추구를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추구를 하는 책이다. 수많은 사상들이 실려 있는, 다양한 생각을 만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추게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를 위하여, 대학을 위하여 하나의 정답만을 좇게 하는 책이다.


다양성은 없고 오직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책. 그런 책은 시험이 끝나면 더이상 필요가 없다. 현대판 분서는 점수와 관련이 있다. 자발적인 분서다. 태우지는 않으니 분서(焚書)가 아니라 갱서(坑書)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교과서 버리기는 책의 쓸모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책은 시험과만 관련이 있을 뿐 - 고전이라 불리는 많은 문학 작품, 철학 책 등등이 시험을 위해서 요약되거나, 문제풀이용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태울 필요가 없다. 책에 대한 환멸을 자연스레 심어주면 책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 귀찮은 존재다.


이런 관점, 태도를 교과서가 심어준다. 마찬가지로 수능에서 국어 시험이 그렇다. 오로지 점수를 올리기 위한 글읽기다.


문학 작품, 실려 있어서 삶의 다양성을 체득하는 읽기로 나아가지 않는다. 문제풀이, 오로지 정답은 하나, 인물의 행동이나 작가의 생각은 하나여야 한다.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면 안 된다. 그러면 틀린 답이 된다. 다른 답이 아니라.


이마저도 수능 국어 시험에서는 문학 작품을 많이 다루지 않는다. 비문학이라고 해서 문학이 아닌 다른 글들이 지문으로 채택이 된다. 아예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그 글에서는 정답이 단 하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그나마 다양한 삶이 표현되어 있는 문학은 수능 국어에서도 찬밥이다. 다양성은 시험과는 상극이다.


굳이 분서갱유를 할 필요도 없다. 학교 교육을 착실히 받고, 대학에 진학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책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에 나오는 방화수처럼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장면 3  브레드버리의 [화씨 451]


책을 불태우는 사회, 불태우는 직업이 있다는 얘기는 책의 효용성을, 책이 삶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다. 책을 무시하는, 책의 존재 자체가 귀찮아진 세상에서는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화씨 451]에서는 책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억압하면 할수록 그들은 책을 암기한다. 자신들이 책이 된다. 소설에서는 책 사람들이라고 나온다. 


"사악한 정치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찰스 다윈이고,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이고, 이 사람은 아인슈타인, 그리고 여기 바로 이 사람은 아주 관대한 철학자인 앨버트 슈바이처입니다. 몬태그, 여기 있는 우리 전부가 아리스토파네스, 마하트마 간디, 석가모니, 공자, 토마스 러브 피콕, 토마스 제퍼슨, 링컨입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임이기도 하고." (232쪽)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을 보존하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종이책을 보존하면 발각이 될 염려가 있다. 그러니 이를 통째로 외울 수밖에. 사람들이 각자 책이 된다.


그리고 그 책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책을 전수해준다. 문자가 아닌 음성으로. 물론 사라지는 책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종이책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방화수들에게 모두 불태워지면 그보다 더한 피해는 있을 수 없으니...


"... 우리 아이들에게 입으로 책을 전해 기다리게 하고, 또 그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물론 그런 과정에서 잃는 것도 많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강제로 듣게 만들 순 없소. 자신들이 필요할 때 와야 하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고, 왜 세상이 날아가 버렸는지 궁금해하면서, 결코 오래 걸리진 않소." (233쪽)


몬태그라는 방화수가 책을 보존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 바로 [화씨 451]이다. 화씨 451도는 책이 불타 없어지는 온도라고 하는데 (과학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지는 말자고 한다. 당시 작가는 소방서에 문의해서 그런 온도로 제목을 정했다고 하는데, 온도의 정확성이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불태워지는 종이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소설에 등장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책을 불태우는 사회가 소설 속에만 존재할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닫힌 사회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지속되어온 현실이 아닐까. 지금은 이렇게 대놓고 책을 불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집 벽면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텔레비전처럼, 이미 너무도 많은 기기들이 우리를 책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자연스레 우리는 생활에서 책을 불태우고 있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서, 학교를 떠나서는 다른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서 책을 만나지 않게 한다. 굳이 소설에서처럼 방화수를 등장시켜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소중히 여기고 책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서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에서 아무리 책을 불태우고 탄압을 해도 책 사람들처럼 책과 함께 하는 존재들이 있듯이.


이 소설을 다른 방면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소설에 나오는 방화수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또 소설에서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이 시대는 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1950년대에 나온 소설인데,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놀랍다. 놀라운 소설이다. 디지털 디지털, 입틀막 입틀막 하는 시대에 이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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