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데시벨 존스(소설 속 등장 인물)를 찾아라'로 할까 잠시 고민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록밴드 '앱솔루트 제로스'를 통해 약 30초 가량의 인기를 누린 데시벨 존스의 이름이 우연히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라는 경연 참가자 후보 목록 가장 마지막에 실린 것을 본인이 알게 된 날, 전 지구인들은 이 대회 소식을(이런 대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포함해) "동시에" "가장 친숙한" 방식으로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 즈음에 최종 경연이 끝나고 이야기도 함께 막을 내린다.

솔직히 이 소설을 어떤 태도로 읽어야할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지루하고, 딱히 흥미가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기분으로 300페이지대에 진입하고 나니 이 감정의 정체를 찾아내고 싶어졌다(번역본 기준으로 이야기는 딱 417페이지에서 끝난다). 나는 SF를 좋아하고 음악도 두루 좋아하는데, 게다가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대중문화 레퍼런스가 책장 곳곳에서 팡팡 터져나오는 작품을 어째서 이렇게 무감하게 읽고 있는지 근본적인 원인이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월리를 찾아라》를 떠올렸다.

어릴적 나는 이유를 모르게 《월리를 찾아라》를 상당히 좋아했다(비록 내가 사랑하는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는 왜 우리가 백인 남자를 쓸데없이 찾고 다녀야 하냐며 볼멘소리를 했지마는). 이 책이 내게는 막내 삼촌네 집에 가야만 잠깐씩 읽을 수 있는 신문물이었는데 지상파 채널에서 방영해주던 TV판도 즐겨 봤다. TV 만화를 보면서는 째깍째깍 초 시계가 흐르는 동안 브라운관 화면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월리를 찾는 식이었다. 이후 성인이 되고 이 책을 틈나는 대로 모았다. 아마 시리즈별로 해서 모으다 만 게 총 6권쯤 된 것 같은데(듣기론 저작권 문제 때문에 한국어판은 나오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다) 사놓고는 그냥 꽂아만 두다가 올해 초에 런던 체류 생활을 접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전부 챙겨다 조카들에게 가져다 줬다. 그러고는 조카들이랑 같이 엎드려서 월리를 찾는데 어릴 때와 달리 이젠 내게만 월리가 너무 쉽게 나타나 못 찾은 척 시침을 떼느라 진땀을 뺐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말하자면 내가 '월리'를 찾으며 느낀 재미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같은 논리 요소만을 따지자면 읽을 거리가 없는 이야기다. 내 초반의 접근이 일종의 독서 실패를 낳은 것처럼. 대신 작가 캐서린 M. 발렌티가 그려낸 세계를, 그의 시선을 쫓아가며 부지런히(매우!) 머릿속으로 함께 따라 그려가며 읽어야 하는 이야기다. 제목 역시 이러한 일환으로 붙인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이 이야기를 별안간 재밌게 읽게 되었느냐? 하면 신묘한 우주의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렇진 않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만으로 눈앞에 바로 보이는 월리가 더 꽁꽁 깊숙한 곳으로 숨어드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대신 일종의 검토서를 쓰는 마음으로 이 책을 누가 읽으면 좋을까를 열심히 고민해 보았다. 그 고민의 결론을 이 책의 제목을 이용해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우선, 이 물이 풍부한 행성 지구의 지성체들을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단어를 아는 개체와 모르는 개체로 나눈다. 그런 다음 이 단어를 알게된 지 오래지 않은 개체를 추려본다. 알게된 지 오래지 않는다는 건 호기심의 샘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임을 뜻한다(즉 다분히 상대적인 기준이다). 이 집단이 내 생각에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가장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이들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대중문화 레퍼런스 다루기에 능하고 수다스러운 닐 게이먼이나 닉 혼비 같은 남자 작가들의 이름이 몇 떠올랐다. 그리고 이 책의 끝에서 세 번째 페이지에서 만난 이름 '더글라스 애덤스'가 내게는 이 그룹을 대표하는 네임태그 같은 인사다. 이제는 내게 다소 권태감을 느끼게 하는 이름들이라고 할까. 아직 그들의 책을 미련 없이 내다버릴 만큼은 아니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를 통해서 캐서린 M. 발렌티라는 이름이 새로이 “어떤” 여자 작가들을 대표하는 네임태그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SF를 사랑하고, 대중문화에 관해서라면 밤낮 없이 떠들어댈 수 있는 아주 수다스러운 여자들이 보이지 않는 연대라는 끈으로 묶인 그룹으로, 파편화되지 않은 패거리로 인식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안에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넘치도록 담겼으면 좋겠다. 그 즈음이면 나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때 즈음이라면 이걸 다시 읽을 차례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테니까. 아참, 방금 이 그룹을 대표하는 이름은 그냥 '조 월튼'으로 바꿨다. 미안합니다, 캐서린…(?)

코로나 19의 여파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취소된 2020년의 5월, 팬들에게는 그 허전한 마음을 이 책 《스페이스 오페라》로 달래보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그런 국가별 음악 경연이 있다는 것도 이 작품을 통해서야 말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스페이스 오페라》는 여러모로 어딘지 "있지도 않은" 향수를 자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덕분에 10년 전쯤 뭣도 모르고 뛰어든 밴드(1달만에 그만둠) 합주 연습 때문에 들은 이후 아주 오랜만에 '건즈앤로지스'의 음악을 찾아 들었다. 여전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더 멀어져가는 중이지만, 어느덧 좋아하는 것들 속에 놓여 지내게 된 삶 속에서 건즈앤로지스의 음악과 이 책 《스페이스 오페라》는 내가 얼마나 "내가 재밌는" 것만 하며 재밌게 지낼 수 있었는지를 또, 앞서 그러기 위해서 셀 수 없이 겪고 쌓아올린 시행착오와 성취를 깨닫게 해줬다는 점에서 제법 즐거운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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