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언어 - 상 - 논어와 함께 노자, 열자, 장자 읽기 고전 아틀리에 3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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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제자 백가는 유가와 별개로 보고 따로 떼어서 논합니다. 사실은 제자백가도 그 안에 속한 입장들이 판이하게 다른 철학체계들이기 때문에, 제자백가라는 말 자체가 백가쟁명의 유의어구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자 최기종 선생은 제자백가 중 많이 알려진 학파들 중 도가의 시조, 중조 세 분을, 유가의 대표 경전 <논어>에 비추어 재해석하려 듭니다. 어찌보면 수천 년 동안 갈라져 싸웠던 중국의 대표 사조 둘이, 한국의 박학한 지성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국면을 우리 독자들이 비로소 목격하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장은 도가의 여러 태두들을 개략적으로 살피는데, 수천 년 동안 후학과 논자들에 의해 쌓인 해석과 평가에 기반하기보다, 그들 혹은 그들의 제자들이 정리해 남긴 원전에 근거하여 도가의 정수를 분석합니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제1장만 차분히 읽어 봐도 도가 평설에 대한 핵심이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이며, 동시에 이제 어떻게 현대적으로 유(儒)와 선(仙)이 합일하는지 그 치밀하면서도 조화로운 논증 과정에 압도될 것입니다. 

제2장은 <도덕경>에 대한 강설입니다. 한자 원문을 톺아보며 그 글자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새기는데, 인간사랑에서 전에 펴낸 고 신동준 저 <춘추전국의 제자백가>라든가, <도덕경>, <열자> 등도 원문과 해석, 평론, 시론을 한 권에 모두 담은 편제입니다. 그 책들을 흥미롭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최기재 선생의 이 탁월한 책도 매우 새로운 관점에서 진지하게 탐독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건 예를 들어 p67 같은 곳을 보면, 고대(혹은 신화로만 엿볼 수 있는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세계, 남아시아 등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또 중원에서는 다른 어떤 철학자가 활동하였으며 굵직한 정치적 사건으로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요약하여, 대체 <도덕경>의 집필 추정 시기와 다른 고대의 시간들은 서로 얼마나 떨어졌는지 살필 수 있게 배려한 대목입니다. 옛날이라고 해서 다 똑같이 곰삭은 옛날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p104 이하를 보면 도덕경 중 재영백포일(載營魄抱一)하여... 로 시작하는 유명한 구절이, 한문 원문과 함께 깊은 뜻이 상고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너희가 어린이의 마음을 회복해야 천국에 들 수 있다고 했는데, <도덕경>의 이 대목도 "어린아이와 여인처럼 해야 현묘한 덕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저자는 요약합니다. 한국 토착 종교인 동학과 증산도의 경우 말세를 논하면서 학대받은 여인들의 한(恨)이 체제의 석양을 부른다는 식으로 이른바 개벽을 읊었는데, 도덕경에서 구태여 여인의 마음을 들고 나온 것도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개 유가는 여인네와 소인배는 함께 말을 섞을 상대가 못된다는 식으로 남성 우월 스탠스를 잡는 게 보통이니 이런 점에서도 두 학파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겠습니다. 

최기재 선생은 여기서 유와 선의 대조점 하나를 선명하게 짚습니다. 즉 그는 노자가 어린이를 두고 어른이 마침내 도로 돌아가야 할 순수와 무구의 원형으로 권면한 것과 대조적으로, 공자는 자(子)가 입신양명을 통해 그 부(父)와 가문을 빛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으며, 또 사람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되기 몹시 힘드므로, 학이지지, 즉 후천적으로 갈고 닦아 궁극의 도에 수렴한다고 보았는데, 이런 것만 보아도 어린이는 빈 그릇에 학식을 채우고 덕성을 빛내어 선학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존재이지 타의 모범이 될 그 무엇은 아니라고 보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처럼 유가와 도가는 곳곳에서 대조되는 사상의 가지를 쳐 나가는데, 최기재 선생의 박식한 해석을 따라가는 재미가 독자 입장에서는 쏠쏠합니다. 

경전의 원문들만 분석되는 게 아니라, 책 곳곳에는 저자의 상념과 통찰을 담은 아포리즘이 담겼습니다. 예를 들어 p321을 보면 "삶은 길을 걷는 여행이다"라는 서두 다음에, 롱펠로, 몽테뉴, 셰익스피어와 호라티우스의 금언들까지 소개하며 독자의 깊은 성찰을 유도합니다. 동과 서를 넘나드는 학문의 성찬에 독자자가 황홀해지는 대목이며, 이 글은 <열자>의 자생자화(自生自化), 자형자색(自形自色)... 으로 시작하는 구절 끝에 덧붙은 코멘트입니다. 황제(黃帝)가 나라를 다스린 방법은 화서지몽(華胥之夢)이라고 요약되는데(p329) 물 흐르듯 백성과 화합하는 게 정치의 정도이며 어떤 잔기술의 발휘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뿐이라는 게 요지입니다. 지언거언(至言去言), 지위무위(至爲無爲)라는 구절은 <열자>의 유명한 고사, 갈매기를 잡으려는 마음을 가지니 벌써 갈매기들이 알고 해안을 미리 싹 떠나버렸다는 신비로운 이야기에서 유래했는데. 역시 도가의 핵심을 우화적으로 잘 표현한 듯합니다. 

열자와 논어를 오가며 저자가 독자를 일깨우는 포인트 중 하나는 "삶의 균형을 찾자(p370 등)"는 것입니다. 유명한 지음의 고사, 즉 연주자 백아와 평론가 종자가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도 <열자>가 그 출전입니다. 반면 <논어>에는 익자삼우, 손자삼우라는 잘 알려진 구절이 나오는데 마음이 따스해지는 <열자>에 비하면 매우 공리적이고 다분히 타산적인 느낌도 드나 이 역시 바른 인격을 함양하는 노력의 일환이니 배울 바가 많습니다. p376을 보면 <열자> 중 인력과 천명의 고사가 2018년 서울시립대 논술고사에 출제된 점을 들며 출제자의 의도를 분석하는 대목도 있는데, 확실히 이 책은 수험생들이 논술 대비용으로 읽어도 유익할 듯합니다. 

하권은 <장자>가 통으로 다뤄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독자로서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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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운이 좋아지는 잠재의식의 비밀
김문형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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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모든 외부 요소를 일일이 통제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소기의 성과가 나지 않는 게 더 흔한데,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은 불운, 비운을 탓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정적일 때 나를 도와 주었으면 하는 행운도, 수십 년 넘게 성실히 살아 온 나의 노력이 축적되어야 이를 바랄 만한 자격이 생기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김문형 작가님은 매일같이 어떤 유익한 습관을 들여 이를 실천함으로써 나의 운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며, 이를 위해서는 잠재의식 단계에서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제안합니다. 

저자님께는 어려서부터 친한 사이였던 J란 분과 오랫동안 교유(p41)했다고 합니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보통 친한 이들끼리는 비슷한 대학, 비슷한 직장 입사에까지 길이 나란히 나곤 하는데, 아쉽게도 J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자께서는 인생에서 다소 고전하는 듯 보이는 J님에게 "더 노력해서 나은 직장을 다닐 것"을 권했는데, 아마도 이 말이 친구분께는 (설령 의도가 좋았다 해도) 스트레스 혹은 자존에 상처로 남았겠다며 후회한다는 말씀도 책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친구분께서 부친상을 당한 후에는 전에 없던 의욕을 내어 자격증 공부에 전념하시더니 기어이 대기업 입사를 뚫으셨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처럼 어떤 마음을 먹기만 하면 종래 자신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독자로서 혼자 생각해 봤는데, 김문형 작가님의 평소 충고도 그에 악의가 없다는 점을 친구분께서 충분히 아시고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평소부터 축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내게 해 주는 말을 고깝게 듣지 말고,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이를 듣고 개선의 기준으로 삼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또, 남한테는 행여 실례가 될 수도 있으므로 괜한 간섭으로 들릴 말은 자제해야 할 듯합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까?(p61)" 서로 어지간히 친해지면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 돌아오는 대답은 "에이, 전혀요." 같은 게 보통이겠습니다. 학창 시절 보물찾기 한 번 당첨되지 못했다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별 수 없군, 하며 안도하곤 하는 우리들인데... 저자는 이런 "부정편향성"을 마음 속에 기본으로 깔면 운수가 더 나아지기란 무척 힘들다고 독자들에게 이릅니다. 그 근거도 재미있는데, 다른 맹수나 날랜 초식동물들에 비해 육체적으로 나은 점이 없는 인간은 타 동물들을 보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주변에 "난 재수가 없어"라며 비관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게, 인간의 유전자 안에 그런 속성이 새겨졌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워런 버핏은 투자의 대가입니다. 그의 투자는 처음에 "왜 저런 종목에?"라며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해도, 나중에 가면 기어이 옳았다는 걸로 판명이 납니다. 주식판에서 누가 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시장에는 워낙 변수가 많기 때문에 이런저런 잔계산만 잘한다고 투자에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워런 버핏 같은 사람은 운이 억세게 좋은 것인가? 저자는 일단 그렇다고 합니다(p65). 그런데 버핏이 운이 좋은 데에는, 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온 비결은, 남들이 모르는 게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의 성공은 자신만의 원칙과 규율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의 변함없는 노력과 헌신이 운을 부른 것이다." 이런 일상에서의, 매일 같이 꾸준히 반복된 노력이 행운을 부르고, 어쩌면 유전자 단위에까지 변화를 이끈 것 아니겠습니까? 야생 동물과 마주하며 그저 패배자의 본능으로 비관만 하던 유인원은 모두 도태되고, 과감하게 다른 시도를 해 보던 개체는 멋지게 생존에 성공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유연한 사고방식, 문제 해결 능력, 목표 지향적 사고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p140)." 하지만 아무리 책상 앞에 좋은 말을 써붙여 놓고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도, 그동안 몸에 밴 습관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이의 매일같은 실천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마음의 집중을 통해 잠재 의식 수준에서의 변화를 끌어올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상상력과 시각화(p152)를 동원하고, 매일같이 웃는 습관을 들이며(p157), 긍정적인 에너지, 감사하는 태도를 지켜 나가며 나의 작은 부분까지 바꾸라고 충고합니다. 직관의 힘(p198)도 중요한데, 이런 직관이 평소에도 높은 적중률로 발휘되려면 역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야 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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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클래식 리이매진드
루이스 캐럴 지음, 안드레아 다퀴노 그림, 윤영 옮김 / 소소의책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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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을 썼던 옥스포드 출신의 수학자가 쓴 이 판타지 소설은, 알고보면 치밀하게 구성된 구조 안에 인생의 쓰디쓴 진실, 시사를 반영한 언어 유희, 수학-논리학적 패러독스의 우화적 설명 등이 촘촘히 녹아들어간 이지적인 고전입니다. 정확하고 꼼꼼하게 이뤄진 번역이 뒷받침되어야 이런 원작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이 책은 게다가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일러스트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재미는 재미대로 느껴 가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혹시나 머리가 들어가도 어깨에서 걸릴거야. 어깨 없이 머리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야? 아, 차라리 망원경처럼 몸이 접힐 수 있다면!(p29)" 앨리스답게 천진스러우면서도 재치있는 대사입니다. 누가 생각해도, 어깨 없이 머리만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소용을 따지기 전에 그런 상태가 물리적으로 가능이나 할지가 걱정이지만 말입니다. 저는 망원경처럼 몸이 접힐 수 있는 엄청난 편익을 망상하면서 그 앞에 "차라리"라는 불만, 양보의 부사를 붙이는 게 더 재미있고 엉뚱했습니다(영어 원문도 대체로 비슷합니다). 앨리스는 아마 그런 기능이 생긴다면, 몸은 아마 보기에 좀 볼품없어질 것이며 그런 큰 희생(!)은 감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 듯합니다. 어린 소녀다운 생각입니다. 

학습이 아직 불충분하게 이뤄진 어린 나이이지만 앨리스는 지금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자신의 주변 상황이 매우 황당하다는 정도는 충분히 압니다. 말도안된다, 터무니없다 같은 말을 수시로 내뱉으면서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의 룰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려 들고,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 역경을 극복하려 애쓰는데, 어떤 현실 도피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상한 현실에 너무나 열심히 적응하는 나머지, 이상한 나라의 네이티브들이 얘를 더 신기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외국어인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들도 느끼는 거지만, tale과 tail처럼 발음만 같을 뿐인 이의어가 때로는 기묘한 상황에서 서로 만나 희한한 어이러니를 빚는 걸 보고 놀라거나 우스워할 때가 있습니다. p63에 그 유명한 대목이 나오며, 적절하게 역주가 삽입되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이 고전은 이런 맛에 읽는 것입니다. 

아, 성장, 성장이란 무엇인가? 때로는 아프고 괴롭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겪고 치러내야 할 통과의례입니다. 아직 어린 앨리스는, 자신처럼 성장이 한참 남은 애벌레에게 묻습니다. "아직 겪어보지 못하셨겠지만, 언젠가는 번데기가 되고 언젠가는 나비가 되실 거잖아요. 그때가 되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겠어요?(p94)" 이렇게 말하는 앨리스 자신은 (지금) 아마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본인도 더 자란 틴에이저가 되고 처녀가 되고 누군가의 신부가 되고 어머니가 될 때 조금도 뭔가가 이상하다고 안 느낄 거면서 지금 어린 소녀로서의 기분만 갖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책임하네요!(ㅋ) 이런 앨리스의 질문이 가당치않다는 듯 "전혀!"라고 망설임없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애벌레의 말투도 웃깁니다. 얘는 애벌레답지 않게 무슨 낭만이라는 게 없네요. 

예수 그리스도도 남을 평가하지(judging)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 역시도 평가받을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사실 모자 장수도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지가 이상한 나라에 살다보니 미감이 이상해져서 앨리스가 그리 보여 "너 머리 좀 잘라야겠다?"라고 한 것일 뿐이겠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시대에 살다 온 앨리스는 "처음 본 사람한테 대뜸 인물평부터 하는 게 대단히 무례하네요!"라며 모자 장수한테 쏘아붙입니다(p134). 모자 장수는 모자 장수답게 앨리스의 이 말에 뜬금없는 수수께끼로 응수합니다. "큰까마귀랑 책상이 닮은 이유는?" 큰까마귀와 책상이 닮았는지도 우선 동의 못 하겠는데 그 이유를 대라니? 아마 질문의 의도는 닮은 점을 찾아보라는 것이겠습니다. 

이 다음 말이 정말 재미있는데 앨리스는 "적어도 나는 내가 의미하는 걸 말하며, 의미하는 걸 말하니, 말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은 같은 거에요."라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의 영어 공부 중에서, mean이 어떤 때에는 곧 say, tell의 뜻과 같아진다고 느꼈는데, 영어의 mean은 진정으로 발화자가 의도하는 바이며, say, tell 등은 어쩌다 삐끗해서 말이 잘못 나온 것까지 다 포함입니다. 법학에서 말하는 표현주의와 의사주의의 대립과도 비슷합니다. 앨리스의 대사 중에 "적어도"라는 한정어가 붙은 걸 보십시오. 자기는 표현과 내심이 언제나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압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렇지 못하죠. 

찰스 도지슨(=루이스 캐럴)은 명백히 에르빈 슈뢰딩거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입니다. 생전에 슈뢰딩거는 자신의 고양이 비유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릭터 중 하나인 체셔 고양이에 영향 받았다고 명확히 밝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p172에 나오는, "머리가 차츰차츰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형집행인이 들어오자 완전히 사라진 고양이"를 묘사한 대목은, 누가 뭐라해도 슈뢰딩거가 든 그 비유의 세밀화 버전입니다. 읽을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며 도지슨 역시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확률분포상의 존재"에 대해 양자역학을 전혀 모르면서도(택도 없죠), 뭔가 천재답게 일찍부터 영감이 왔던 건 아닌지 저 혼자서 추측해 봅니다. 고전은 이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우며, 독자를 신기하고 이상한 나라로 이끕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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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법정 - 미래에서 온 50가지 질문
곽재식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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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 처리, 당사자 사이의 공방을 보면 그 사회의 축소판을 구경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구나, 평화롭게 잘 작동하는 듯 보였던 이면에서 이런 분쟁상이 존재했구나 등등... 만약 미래의 법정을 미리 구경할 수 있다면, 그 법정에서는 어떤 일들이 다뤄지고 또 심판은 어떻게 내려질까요? 

이 책에는 마치 법정물소설, 혹은 SF처럼, 등장인물들이 실제 사건 속에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거나 싸우기도 하며, 미래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그냥 하나의 소설로 읽는 편이 낫겠으며,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읽힐 것입니다. 다만 소설 속에 수시로 작가가 끼어들어, 미래상이 이러이러하게 펼쳐질 전망이니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이런 쪽으로 생각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과 설명이 나옵니다. 

누구나 나 자신, 혹은 나의 아이가 키도 크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의 외모, 자질, 적성 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며 이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지 않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p58). 주어진 조건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엄연히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소중한 조건들이며 다만 이 조건 하에서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지금의 통념입니다. 그런데... 

이제 크리스퍼 기술 등을 써서 호조건으로 바꿔 놓는다면 그 역시도 인간 삶의 조건 개선, 발전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자연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무모한 시도로 볼지는 현재로서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외모나 지능의 개량이 아니라 유전병, 신체 장애 등의 치료라면 이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어야 할까요? 허용과 금지의 기준 경계는 언제나 모호합니다. 만약 전면적으로 모든 게 허용된다 해도 한정된 자원을 분배할 때 누구한테 우선적으로 혜택을 줘야 할까요? 지불의사와 능력 기준이라면(=돈 많은 사람 위주라면) 아마 사회가 붕괴할 것입니다.    

베텔게우스는 항성 간의 크기 비교 짤방 같은 것 때문에라도 대중에 널리 알려진 별입니다. 이 베텔게우스 별 근처에 우연히 들른 이미영과 김양식에 대해 우주 검찰에서 곧 기소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얻고 로봇 변호사(대리)가 등장하여 자기네 서비스를 이용할 것을 권하는 듯 촐싹거리는 투로 설명합니다(p110). 이 대목은 여러 모로 흥미로웠는데, 일단 우주 검찰 같은 게 따로 있어서 전체 질서를 관할하기는 한다는 거겠습니다. 지금 지구 같은 작은 별에도 질서가 하나로 세워지지 않아 나라 간 전쟁이 끊일 날이 없는데(단일 질서가 바람직한지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그 광활한 우주 한 구석에서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잡아가기는 한다는 게... 

다음으로는 이런 사소한 개인의 범죄(?)까지도 누가 관찰하고 잡아내는 기술적 감시 시스템이 있다는 뜻이겠고요. 마지막으로 관(官)과 결탁하여 사건 있는 곳에 사설 구급이나 렉카, 혹은 흥신소처럼 한 발 먼저 찾아와 수익을 올리려는 업체가 있는 걸 보니 미래에도 자본주의가 잘만 작동하는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여튼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시려는 바는, 서로 다른 문명이 충돌 여지가 있을 때 과연 어느 편의 규범을 어느 정도까지 침투시키고 조정해야 할지 그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겠고, 이는 먼 미래의 문제라기보다 지금 우리들이 겪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법의 무지(ignorance of the law)가 보호되지 않는다는 원칙은 미래에도 변함이 없나 봅니다.  

인공지능이 빚는 저작권 침해 역시 현재의 난제입니다. 인공지능의 핵심 원리는 바로 딥러닝인데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켜 그로부터 패턴을 뽑아내게 합니다. 그런데, 그 방대한 데이터는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모두, 기성 작가들이나 화가들, 사진작가들의 표현력과 구도 포착 센스와 독특한 심미안으로 이룬 성과들인데, 이제 이것들을 기계(컴퓨터)에 투입하여 원료로 소모하고 그를 통해 기계적 창작을 대량으로 이룬 후 금전적 이익은 AI 운영 주체에 귀속된다면 이는 칼만 안 든 강도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실제로 몇 달 전에 일어난 미국 헐리웃 작가 파업도 이런 이유에서 일어났습니다. 물론 창의성이라고는 1도 없는 엉터리 작가라면 기계한테 일거리를 빼앗겨도 할 말이 없겠으나 진짜 작가의 진정한 비선형적 창작 의욕에마저 그 싹을 밟는다는 게 문제이겠습니다. 

기억조작은 아마 PKD의 <기억을 도매가로 팝니다>가 이 문제를 다룬 원조 SF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연 기억이 조작될 수 있는지 기술적 가능성은 일단 논외로 하고, 기억은 결국 개인의 존엄과 정체성을 이루는 본질이라는 데 인식이 미치면 세상에 이처럼 윤리적으로 델리키트한 이슈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저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폴 버호벤의 영화 <토털 리콜>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나아가 생각을 조종당해 저지른 범죄의 처벌가능성을 논하는 대목도 매우 심오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인데 가상의 사연 속에서 캐릭터들로 하여금 다투고 옹호하는 형식에서 다루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읽으면 아주 유익할 것 같습니다. 이슈가 50개나 되기 때문에 독자가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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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후쿠오카 : 유후인.벳부.키타큐슈 - 최고의 후쿠오카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가이드북, 최신판 ’24~’25 프렌즈 Friends 33
정꽃나래.정꽃보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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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프렌즈 시리즈 중 일본 여러 지역, 즉 도쿄, 교토, 오사카, 홋카이도 등을 집필한 정꽃나래, 그리고 정꽃보라 두 분이 지은 후쿠오카 편 최신판입니다. 이 책에는 후쿠오카뿐 아니라 유후인, 벳부, 키타큐슈 등도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p56을 보면 "후쿠오카에 갔을 때 꼭 사와야 할 명물들"이 소개되는데 그중에 보면 니와카센베가 있습니다. 센베는 한국에서도 나이 든 세대가 많이들 먹는 과자이며, 책에 보면 "니와카"가 특이하게도 二◯加라고 표기됩니다. 이는 오타가 아니며, にわか라고 읽는데, 環, 輪(환, 륜. 둘 다 동그라미를 뜻함)이라는 글자를 わ라고 읽는 용법이 일부 관행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우리식 "전병"하고는 많이 다르죠. 옆 페이지 아래에 하카타노온나도 나오는데 책에 설명이 나오는 대로 양갱을 독일식 케이크인 Baumkuchen 안에 넣은 것입니다. 지명인 하카타(博多)에 おんな(온나. 여인)이 붙은 어원입니다. 

어느 도시에나 높은 구조물을 지어 그곳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삼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관행입니다. p88을 보면 아타고신사가 나오는데 이 역시 특이하게도 신사(神社)가 고층에 위치해서 이름이 그리 붙었습니다. 일어로는 진자 비슷하게 읽죠. 이 후쿠오카 편은 책 맨뒤에 맵북이 따로 붙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설명된 사항에 대해, 혹 맵북에도 표시가 되었다면 그 맵북 중의 쪽수를 같이 적어 놓습니다. 따라서 지금 현지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두 군데를 함께 참조할 때 더 요긴한 정보가 취득될 것입니다. 후쿠오카 타워는 저 뒤 p210에 소개됩니다. 

아무리 볼거리가 많아도 교통이 불편하면 그런 관광지는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 하면 후쿠오카 같은 이름난 큰 곳 말고도 인지도가 낮은 작은 지역에까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혹 그렇지 못한 곳이라 해도 제한된 인프라나마 합리적으로 운용하고, 정보를 정확하게 게시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하고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며, 제발 한국 정부 당국이나 지자체에서 속히 개선해야 하는 과제이겠습니다. p133을 보면 각종 교통패스가 소개되는데 이런 걸 잘만 활용하면 훨씬 저렴하기까지 한 비용으로 후쿠오카 곳곳을 편하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p174 이하에는 다이묘와 텐진이 소개됩니다. 다이묘는 과거 일본 각 지역의 영주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그저 특정 지역의 고유명칭일 뿐입니다. 텐진은 중국의 그 톈진(天津)이 물론 아니며 한자까지도 天神(천신)이라서 완전히 다릅니다. 다녀오신 이들은 다 알겠지만 이 지역에는 편집숍, 부티크가 참 많은데, 일본은 오랜 역사 동안 그저 남한테 침략을 잘 안 당해서 유적들만 많이 남은 게 아니라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최신 트렌드를 선도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참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도 노포 백화점이 될 만한 곳이 많았지만 현재는 상당수가 문을 닫았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백화점이라고 하면 주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고가품을 취급하지만, 이 책 p194를 보면 나오는 다이마루 같은 곳은 (책의 설명에 따르면) "1953년에서부터 후쿠오카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져 온 곳"이라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이런 서민향 백화점도 있으며, 아마 예전 한국 백화점은 이런 곳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물론 신세계나 롯데는 대개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입니다. 

후쿠오카 자체가 규슈 섬 북단에 자리했으며 당연히 해변을 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후쿠오카에도 딸린 섬들이 있고 여기도 볼만한 데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p226에 나오는 시카노시마(志賀島)입니다. 책에는 어린이들이 이곳 중 우미노나카미치 공원을 좋아한다는 설명이 처음에 나옵니다. 바다를 일본어로 "우미"라 부르는데, 이 이름은 해중도(海中道)를 거의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海와 中道 사이에 の가 들어가긴 하지만). 프렌즈 시리즈의 최고 장점인 맛집 소개가 여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여길 스쳐지나간 적 있는데 맛집이 이렇게 있는 줄 몰랐으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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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인, 벳부, 키타큐슈는 후쿠오카의 교외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렌즈 시리즈는 언제나 그렇지만 주제가 되는 지역, 도시, 나라 말고도 그에 인접한 타 지역까지 함께 소개해 주는 센스가 돋보이죠. 키타큐슈는 후쿠오카 시처럼 같은 후쿠오카 현에 소속되었으며, 유후인과 벳부는 오이타현 소속입니다. 벳부는 벳푸라고 우리가 더 잘 아는 바로 그곳이며 사실 후쿠오카보다는 오이타 시의 교외라고 봐야 맞겠습니다. 책 말미에는 후쿠오카 근방 머무르기 좋은 호텔이 여럿 소개되었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관광지라고 해도 그를 잘 소개한 가이드북이 따로 있어야 뭔가 마음도 놓이고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을 하나하나 챙기는 알찬 여행이 됩니다. 온라인 정보는 물론 최신 사정을 알기 위해 반드시 참조해야 하겠으나, 현지에서 수시로 보기에는 불안정할 때가 많아서 책이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이 책 덕분에 언젠가는 다시 한 번 후쿠오카를 찾고 싶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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