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3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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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우러나는 향긋한 차(茶) 같다고, 이 책을 소개하고 싶어요.

느릿느릿 심심해보여도 묘하게 끌리는 이야기예요.

우선 주인공이 17세 여학생과 75세 할머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이제껏 제가 본 만화책 주인공과는 완전히 달라서 신선하고 좋았어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주인공이라서 만화가 주는 판타지는 떨어질 수 있지만 은근한 감동이 있어요.

제목부터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인데, 아마 툇마루에 관한 추억이 있다면 주목하게 될 거예요.

학교에서 아웃사이더로 지내는 여학생과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조합.

툇마루는 옛날집에서나 볼 수 있는 공간이에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일 처음 지나가는 곳.

꼭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걸터 앉기에 좋은 툇마루.


주인공인 두 사람의 첫만남부터 조금씩 친숙해지는 과정이 로맨스와는 결이 다르지만 설레는 요소들이 있어요.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이나 스트레스가 크다면 이 책으로 힐링할 수 있어요.

목적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는 순수한 관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취향이 같다는 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해요.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걸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팬클럽이나 동호회에 가입하는 거고.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들은 BL을 남들 몰래 혼자서만 좋아하다가 우연히 동지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BL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던 두 사람이 조금씩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이 책의 줄거리예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를 어쩌다 읽게 됐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달라진 건 있어요.

이 책을 읽고나면 항상 다음 권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

새삼 툇마루가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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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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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 찔린 기분이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침입자들>에게 침입을 당한 것 같아요.

도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요.


"누구나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지."

     - 영화 《칼리토》중에서 (9p)


주인공 '나'는 마흔다섯 살의 3년차 택배기사예요.

우연히 구직사이트에서 '택배기사 구함'과 함께 숙소제공이란 문구를 보고 연락했던 거예요.

택배 소장은 50대 남자였고, 키 178 정도, 까맣고 거친 피부, 깡마른 몸 때문에 어쩐지 왜소해 보였고, 필리핀의 바나나 농장에서 20년쯤 어학연수라도 하고 온 것 같았어요.

그는 자신을 뭐라 부르든 상관 없다고 했고, 나는 '바나나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맡게 된 지역은 행운동. 그래서 나 역시 이름 대신 '행운동'으로 불리게 됐어요.

동료들 중 서른다섯 살의 말 많은 심주창의 별명은 '코알라'라고 지었어요. 코알라는 스물네 시간 중에 스물세 시간을 자는데, 그는 얘기하는 데 스물세 시간을 쓰는 것 같아서.

그밖에도 조 따꺼, 낙성대 아파트, 인헌동이 까데기 동료들이에요. 까데기란 터미널과 물류센터에서 구역별로 물건을 분류해서 간선차에 싣는 작업을 뜻해요.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내 숙소는 컨테이너.

한 달이 지나도록 동료들과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던 건 내 성격 탓이었어요. 인간관계라면 이미 끊어진 예전의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코알라였어요. 코알라 주창이가 나한테 붙인 별명은 '돌부처'였어요. 항상 말도 없고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빙그레 웃기만 한다고.

오호라, 역시 별명은 사람의 특징을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맛이 있어요.

그러나 특징 한두 개로 그 사람을 정의내릴 수는 없어요. 돌부처 같은 나도 가끔은 화를 참지 못해서 터뜨릴 때가 있거든요.

세상에나, 택배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몸이 힘든 건 참아도 진상 떠는 고객은...

사실 이 소설의 묘미는 주인공 '나', 바로 '행운동'의 말빨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말을 잘하는 차원이 아니라, 참으로 절묘한 비유와 살짝 비꼬는 말투가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어요. 

그 상대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의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티키타카에 빠져들어요.

너무 빠져서 깜박 잊고 말았어요. 뭐지, 이 상황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직업을 전전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여서......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남들보다는 아니었지만 남들처럼은 고단했던 것 같고.

견디게 해준 건 소설이었다. 위대한 작가들부터 무명작가들의 소설까지.

그 속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를 만났다. 

... 아무튼 이 소설은 그래서 오마주다. 챈들러와 켄 브루언, 그리고 내게 영향을 준 소설, 영화, 미드, 팝에 대한.

인용한 이유는 그래서다.

... 이 소설이, 당신이 삶을 견디는 데 먼지만 한 위로라도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 뿐이다."  (340-343p)


이 글은 정혁용 작가님이 읽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이 말은 꼭 남기고 싶네요.

"당신의 소설은 유쾌한 위로를 줬어요." 

무엇보다도 '행운동' 씨의 말빨은 사막 같은 현실의 오아시스, 팍팍한 삶은 계란 다음에 마시는 사이다 같았어요.

만약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주저없이 <침입자들>을 뽑았을 거예요. 그야말로 먼지만 한 위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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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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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 찔린 기분이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침입자들>에게 침입을 당한 것 같아요.

도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요.


"누구나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지."

     - 영화 《칼리토》중에서 (9p)


주인공 '나'는 마흔다섯 살의 3년차 택배기사예요.

우연히 구직사이트에서 '택배기사 구함'과 함께 숙소제공이란 문구를 보고 연락했던 거예요.

택배 소장은 50대 남자였고, 키 178 정도, 까맣고 거친 피부, 깡마른 몸 때문에 어쩐지 왜소해 보였고, 필리핀의 바나나 농장에서 20년쯤 어학연수라도 하고 온 것 같았어요.

그는 자신을 뭐라 부르든 상관 없다고 했고, 나는 '바나나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맡게 된 지역은 행운동. 그래서 나 역시 이름 대신 '행운동'으로 불리게 됐어요.

동료들 중 서른다섯 살의 말 많은 심주창의 별명은 '코알라'라고 지었어요. 코알라는 스물네 시간 중에 스물세 시간을 자는데, 그는 얘기하는 데 스물세 시간을 쓰는 것 같아서.

그밖에도 조 따꺼, 낙성대 아파트, 인헌동이 까데기 동료들이에요. 까데기란 터미널과 물류센터에서 구역별로 물건을 분류해서 간선차에 싣는 작업을 뜻해요.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내 숙소는 컨테이너.

한 달이 지나도록 동료들과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던 건 내 성격 탓이었어요. 인간관계라면 이미 끊어진 예전의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코알라였어요. 코알라 주창이가 나한테 붙인 별명은 '돌부처'였어요. 항상 말도 없고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빙그레 웃기만 한다고.

오호라, 역시 별명은 사람의 특징을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맛이 있어요.

그러나 특징 한두 개로 그 사람을 정의내릴 수는 없어요. 돌부처 같은 나도 가끔은 화를 참지 못해서 터뜨릴 때가 있거든요.

세상에나, 택배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몸이 힘든 건 참아도 진상 떠는 고객은...

사실 이 소설의 묘미는 주인공 '나', 바로 '행운동'의 말빨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말을 잘하는 차원이 아니라, 참으로 절묘한 비유와 살짝 비꼬는 말투가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어요. 

그 상대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의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티키타카에 빠져들어요.

너무 빠져서 깜박 잊고 말았어요. 뭐지, 이 상황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직업을 전전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여서......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남들보다는 아니었지만 남들처럼은 고단했던 것 같고.

견디게 해준 건 소설이었다. 위대한 작가들부터 무명작가들의 소설까지.

그 속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를 만났다. 

... 아무튼 이 소설은 그래서 오마주다. 챈들러와 켄 브루언, 그리고 내게 영향을 준 소설, 영화, 미드, 팝에 대한.

인용한 이유는 그래서다.

... 이 소설이, 당신이 삶을 견디는 데 먼지만 한 위로라도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 뿐이다."  (340-343p)


이 글은 정혁용 작가님이 읽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이 말은 꼭 남기고 싶네요.

"당신의 소설은 유쾌한 위로를 줬어요."

무엇보다도 '행운동' 씨의 말빨은 사막 같은 현실의 오아시스, 팍팍한 삶은 계란 다음에 마시는 사이다 같았어요.

만약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주저없이 <침입자들>을 뽑았을 거예요. 그야말로 먼지만 한 위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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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가게 1 - 시간의 마법, 이용하시겠습니까? 십 년 가게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사다케 미호 그림,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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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청소를 하면서 고민이 생겼어요.

오래된 물건들을 계속 간직할까, 아니면 버릴까.

이럴 땐, 어느 정리의 대가는 다음과 같이 조언하더군요.

그 물건을 만졌을 때 설레는가.

어떤 물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는 건 물건 자체의 가치뿐 아니라 마음이 담겨 있다는 의미일 거예요.

훌륭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물건 정리는 늘 어려운 숙제 같아요.


<십 년 가게>라는 책을 구입하게 된 건, 순전히 초대장 때문이에요.

거기에 적힌 글들이 마치 마법처럼 저를 끌어당긴 것 같아요.


버릴 수 없는 물건,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물건,

멀리 두고 싶은 물건이 있나요?


'십 년 가게'로 오세요!

당신의 마음과 함께

보관해 드립니다!


이 책은 '십 년 가게'에 관한 이야기예요.

어떤 물건이든지 나 대신 누군가 맡아줬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십 년 가게'의 초대장을 받게 되고, 초대장을 여는 순간 신기하게 뾰로롱~

눈 앞에 십년 가게가 나타나요. 하얀 문을 열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면서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나게 될 거예요.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고양이의 이름은 카라시.

주황색 털이 복슬복슬하고, 눈은 초록색이고, 까만 나비넥타이에 은색 자수를 놓은 새까만 벨벳 조끼를 입었어요.

십 년 가게의 고양이 집사 카라시는 두 발로 걸을 뿐 아니라 말도 할 수 있어요. 월급까지 받는 정식 직원이라네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는 마스터예요. 새하얀 셔츠 위에 딱 맞는 짙은 갈색 조끼와 바지를 입고 있어요.

긴 머리카락은 밤색이고, 눈은 호박색이고, 가는 은테 안경을 쓴 어딘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예요.

와우, 마법사!!!

먼저 초대장을 받은 여섯 명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요.

십 년 가게에 손님이 물건을 맡기면 십 년 동안 지금 상태 그대로 보존이 된대요.

손님은 그 대가로 자신의 수명 일 년을 줘야 해요.

그러니까 십 년 마법은 시간 마법인 거예요. 

계약 조건은 간단해요. 손님이 일 년이라는 수명을 지불하면 십 년 가게는 십 년간 물건을 보관해줘요.

기간 내라면 언제든 물건을 찾아갈 수 있어요. 단, 맡기는 기간이 십 년을 채우지 못해도 일단 지불한 수명을 되돌려받을 수 없어요.

십 년이 지나면 십 년 가게에서 기간이 끝났다고 알려주는데, 그때 찾을 건지 버릴 건지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어요.

솔직히 나라면 물건을 맡기지 못할 것 같아요. 이 나이에 수명이 일 년 줄어든다고 상상하니... 으윽, 뭔가 오싹해요.

책 속에 나오는 손님들의 공통점은 나이가 어리다는 거예요.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십 년 가게의 마법 덕분에 물건을 맡긴 손님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진심으로 소중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구나.

결국 모든 건 마음의 문제였어요. 시간의 마법은 그 물건을 통해서 맡긴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게 해주네요.

실제로 책과 함께 초대장을 받았어요. 초대장 카드를 펼쳐보면 자신이 맡기고 싶은 물건을 적거나 그릴 수 있는 빈 칸이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마법의 판타지뿐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멋진 시간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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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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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아시나요?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상관 없어요. 실제로 존재하는 고양이도 아니니까.

그야말로 생각하기 나름.

솔직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양자역학의 개념이 너무 어려워요.

설명된 내용을 읽고 그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모르는 거죠.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은 도쿄에 위치한 '마와타 장'이라는 하숙집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2층 목조 건물, 빙 두른 벽돌담에 '마와타 장'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고, 문에 손바닥만한 지붕이 달려 있고, 바닥에는 회색 돌이 박혀 있어요. 

마당에 세운 빨랫줄에는 시트와 목욕 수건 등의 큼지막한 빨래가 걸려 있어요. 

방의 창문들은 대부분 활짝 열려 있고, 2층 베란다에는 화분이 놓여 있어요.

책의 첫 페이지에 '마와타 장' 건물 평면도가 그려져 있어서, 잠시 '추리 소설인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가끔 추리 소설에서 살인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평면도가 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참,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 아니에요. 살인 사건은 물론이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진 않아요.

앗, 그럼 무슨 재미?

대신에 하숙집의 동거인들을 추리 대상으로 보면 색다른 재미가 있어요. 

우선 야마토 요스케부터 소개할게요. 훗카이도 출신인 야마토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면서 '마와타 장'에 하숙하게 된 남학생이에요.

새로운 하숙인의 등장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돼요.

총 6편의 단편이 연작으로 이어지는 소설이에요. 첫 타자가 야마토 요스케예요. 

야마토는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마음에 들려고 열심히 공부한 범생이였고, 도쿄에 있는 대학에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그 여학생에게 고백했다가 뻥 걷어차였어요.

모태솔로 야마토는 절친 미도리카와 슈이치가 우연히 들려준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 덕분에 대학에 합격했어요. 상자 속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상자 속 자신의 능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과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야마토는 여학생에겐 차였지만 행복한 기분으로 친구에게 합격소식을 알렸어요. 미도리카와는 속으로 저런 착각을 하면서 대학에 붙다니, 라고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말하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야마토에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설명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친구 사이뿐 아니라 인간 관계가 대부분 이런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서로 안다고 착각하면서 각자 제멋대로 생각하기.

하숙집에 도착한 야마토가 처음 만난 사람은 산뜻한 교복 차림의 어여쁜 여고생 야에코였어요. 야에코는 하숙인은 아니고, 2층에 사는 야마오카 쓰바키에게 놀러온 친구였어요. 야마토가 살게 될 2층 맞은편 방에는 야마오카 쓰바키와 여대생 구지라이 고하루가 있어요. 

하숙집 주인 와타누키 치즈루는 1층 방에 사는데, 자신의 옆방에 사는 마지마 세우를 '나의 내연의 남편'이라고 소개했어요. 내연의 남편?

미혼여성이 치즈루는 왜 세우 씨를 애인, 연인, 남자친구가 아니라 내연의 남편이라고 표현했을까요.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타인들의 이야기.

서로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는 알 수 없는 은밀한 사연들이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조금씩 드러나게 돼요. 그래서 식구라는 말이 생겼나봐요. 타인 간의 거리가 좁혀지는 공간, 그게 집이 주는 힘인 것 같아요. 물론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거리는 존재해요. 나와 너, 엄연히 다른 두 존재가 서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다만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상자 속 고양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지만,

고양이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219p)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깨달았죠.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우리는 각자의 상자 속에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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