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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허를 찔린 기분이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침입자들>에게 침입을 당한 것 같아요.
도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요.
"누구나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지."
- 영화 《칼리토》중에서 (9p)
주인공 '나'는 마흔다섯 살의 3년차 택배기사예요.
우연히 구직사이트에서 '택배기사 구함'과 함께 숙소제공이란 문구를 보고 연락했던 거예요.
택배 소장은 50대 남자였고, 키 178 정도, 까맣고 거친 피부, 깡마른 몸 때문에 어쩐지 왜소해 보였고, 필리핀의 바나나 농장에서 20년쯤 어학연수라도 하고 온 것 같았어요.
그는 자신을 뭐라 부르든 상관 없다고 했고, 나는 '바나나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맡게 된 지역은 행운동. 그래서 나 역시 이름 대신 '행운동'으로 불리게 됐어요.
동료들 중 서른다섯 살의 말 많은 심주창의 별명은 '코알라'라고 지었어요. 코알라는 스물네 시간 중에 스물세 시간을 자는데, 그는 얘기하는 데 스물세 시간을 쓰는 것 같아서.
그밖에도 조 따꺼, 낙성대 아파트, 인헌동이 까데기 동료들이에요. 까데기란 터미널과 물류센터에서 구역별로 물건을 분류해서 간선차에 싣는 작업을 뜻해요.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내 숙소는 컨테이너.
한 달이 지나도록 동료들과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던 건 내 성격 탓이었어요. 인간관계라면 이미 끊어진 예전의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코알라였어요. 코알라 주창이가 나한테 붙인 별명은 '돌부처'였어요. 항상 말도 없고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빙그레 웃기만 한다고.
오호라, 역시 별명은 사람의 특징을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맛이 있어요.
그러나 특징 한두 개로 그 사람을 정의내릴 수는 없어요. 돌부처 같은 나도 가끔은 화를 참지 못해서 터뜨릴 때가 있거든요.
세상에나, 택배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몸이 힘든 건 참아도 진상 떠는 고객은...
사실 이 소설의 묘미는 주인공 '나', 바로 '행운동'의 말빨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말을 잘하는 차원이 아니라, 참으로 절묘한 비유와 살짝 비꼬는 말투가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어요.
그 상대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의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티키타카에 빠져들어요.
너무 빠져서 깜박 잊고 말았어요. 뭐지, 이 상황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직업을 전전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여서......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남들보다는 아니었지만 남들처럼은 고단했던 것 같고.
견디게 해준 건 소설이었다. 위대한 작가들부터 무명작가들의 소설까지.
그 속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를 만났다.
... 아무튼 이 소설은 그래서 오마주다. 챈들러와 켄 브루언, 그리고 내게 영향을 준 소설, 영화, 미드, 팝에 대한.
인용한 이유는 그래서다.
... 이 소설이, 당신이 삶을 견디는 데 먼지만 한 위로라도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 뿐이다." (340-343p)
이 글은 정혁용 작가님이 읽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이 말은 꼭 남기고 싶네요.
"당신의 소설은 유쾌한 위로를 줬어요."
무엇보다도 '행운동' 씨의 말빨은 사막 같은 현실의 오아시스, 팍팍한 삶은 계란 다음에 마시는 사이다 같았어요.
만약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주저없이 <침입자들>을 뽑았을 거예요. 그야말로 먼지만 한 위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