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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알 ㅣ 환상하는 여자들 1
테스 건티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평점 :
《우주의 알》은 테스 건티의 장편소설이에요.
소설은 첫 장면부터 기묘해요. "무더운 밤, C4호에서 블랜딘 왓킨는 육체에서 빠져나온다.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지만 거의 평생 이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며 살았다." (11p)로 시작되는데, 어쩐지 독자들을 블랜딧 왓킨처럼 여기저기 부유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네요.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느낌으로 빠르게 C12호, C10호, C8호, C4호, C2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주인공답게 블랜딘은 우리에게 이곳이 어딘지를 알려주고 있어요. 쇠락해가는 미국의 가상 도시 바카베일, 블랜딘이 살고 있는 C4호는 '토끼장'이라고 불리는 낡은 아파트예요. 원래 소설 제목은 '토끼장 The Rabbit Hutch'이라는 걸, 읽다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됐지만 그대로 번역했다면 별로 끌리진 않았을 거예요. 숨막힐 것 같은 찜통 더위와 토끼장의 조합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블랜딘 왓킨이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첫 장면이 주는 강렬함이 모든 걸 압도하면서, 마치 홀린 듯이 다음 장면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육체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순간은 언제이고, 반대로 자신의 육체에 단단히 고정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C4호에 살고 있는 블랜딘을 중심으로 위, 아래, 옆집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상한 소름이 돋았어요. 다닥다닥 붙어있는 토끼장,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철저히 고립될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C8호에 젊은 엄마는 4주 된 갓난아기의 눈에 대한 공포증이 생겼는데 그 사실은 남편에게 말할 수 없어요. 엄마는 아기의 눈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누가 정상인이라고 여기겠어요. "아이 엄마에게 현대 삶을 요약해보라고 하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두가 하지도 않은 일로 서로에게 벌을 주는 시대." (15p) 라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가상 도시라지만 그들의 삶과 우리의 모습이 다르지 않아서 공감하면서도 씁쓸하네요. 바카베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어요. "집이 뭘까요? 집은 대도시 생활과 작은 마을의 편안함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는 곳이죠. 집은 벽난로의 장작이고, 문가의 레인 부츠고, 코코아 한 컵,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임의 밤입니다. 집은 첫 걸음마예요. 호탕한 웃음이고요. 당신이 무슨 커피를 마시는지 아는 바리스타죠. 집은 오븐 속의 파이, 도심의 색소폰 라이브 연주, 뒤뜰의 반딧불이에요. 강에서 낚시하는 삼대고요. 집은 단순히 장소가 아닙니다. 사고방식이죠. 바카베일 : 집에 온 걸 환영합니다." (335p) 현실과의 괴리감이 클수록 환상이 더욱 커지는 법이죠. 알듯 모를 듯, 블랜딘과 주변 인물들의 마음 속을 여행하는 오묘한 경험을 했네요. "블랜딘이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낀 순간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변수일 뿐이었다. 분노가 뭔가 태울 것을 찾아서 채굴하는 것처럼, 그녀를 자신에게서 퍼낸다." (180p) 자신의 느낌조차도 온전히 자신의 것인지를 의심해봐야 해요. 당신은, 진짜 당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