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다시 아이들이 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하는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이탤리언델리에 가서 갓 구운 롤빵과 커피를 사 마셨다. 집안일에서 이렇게 멀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창가의 의자나 보도의 옥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와 기쁨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외로운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쐐기풀' 중에서, p.260

 

앨리스 먼로 문학 세계의 정수를 담은 세 작품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녀의 열 번째 소설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필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 <런어웨이>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이지만,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먼저 읽게 된 것은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소재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인간사와 관계를 그려내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것이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상처, 관계와 회한에 대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었을 정도로 공감이 되곤 했었다. 특히나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꾸는 걸로 그려져서 여성 독자로서 더 인물에 동화되고, 그들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법한 여자들을 화자로 삼는다. 그녀들의 서사는 흔하디 흔한 일상에 대한 것이지만, 삶 전체를 껴안듯 복잡한 무늬들이 탁월한 구성으로 아름답게 담겨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결혼이 큰 변화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마지막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포스트앤드빔' 중에서, p.330

 

대부분이 작품이 여성 캐릭터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남편의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피오나와 그랜트는 오십 년간이나 함께한 부부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랜트는 아내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피오나는 남편에게 자신을 요양원에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그랜트는 결코 장기 입원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냥 한번 시험 삼아 쉬면서 치료할 겸 가보자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새로운 입소자가 처음 삼십 일 동안 어떤 방문도 받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고, 그랜트는 아내를 만날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긴 한 달을 홀로 보내고, 마침내 아내를 만나러 갔지만 피오나는 그랜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요양원에 잠깐 머물렀던 거라 곧 떠나버리고, 피오나는 상실감으로 심하게 앓기 시작한다. 그랜트는 그녀를 위해 그 남자의 아내를 찾아가 그를 다시 요양원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집에 가서 그의 아내에게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고는 그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아이러니, 갈등과 상처, 그리고 관계와 회한 등이 섬세하지만 담담한 문장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내일 당장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앨리스 먼로의 글들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감동을 주고, 위안을 안겨준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릿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을 통해 먼로의 작품이 가진 힘을 만나 보길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