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치락뒤치락,

들뜬 왼발과

떠오르는 오른발,

판났다!”

 

단원 김홍도(金弘道), 씨름

조선 18세기 후반, 단원풍속화첩 중, 종이에 수묵담채, 보물 제527

 

절정의 순간이다. 모여든 사람들이 각가지 모양으로 이 순간을 주목하고 있다. 구경꾼들이 만든 경계는 자연스럽게 씨름판이 되었다. 갓을 벗고, 부채를 흔들고, 얼굴을 가리고, 신발을 벗어두고 순서를 기다리고, 짐짓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이 모여 씨름판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곧 판가름 날 것 같은 상황이다.

 

누가 이길까? 오른쪽 하단의 두 사람은 낌새를 알아채고 움츠린 모습니다. 오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오른 손과 왼 손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보았다.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이 장면을 두고 화가가 씨름판의 열기와 긴박감에 취해 실수했다고들 하는 이도 있으나 아마도 뒷모습을 얼굴이 반 넘어 보이게 그리다 보니 아차하는 순간에 앞모습으로 착각한 것일 게다.”

 

모두가 이목을 집중하는 판에 오직 한사람만이 딴전이다. 엿장수는 씨름의 승부에는 관심 없다는 듯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단오풍정의 한 단면을 묘사한 이 씨름판엔 무엇이 걸렸을까? 어린 시절 동네 씨름판엔 송아지도 걸려있고 쌀이나 솥단지와 같은 일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상품으로 걸었다.

 

이 한편의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씨름판이라는 것 이외에도 많다. 평민과 양반이 누구인지, 구경꾼들의 신분은 물론 다음 출전 선수가 누구인지, 부채를 통해 세시풍속에 구경꾼의 성격까지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두 남자들뿐이다. 여자들은 어디 갔을까? 단오 날이라 여인네들만의 놀이가 있었다. 이런 다양하고 세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풍속화가 가지는 긍정적 측면일 것이다.

 

이 그림이 씨름판 한 복판에 있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빙 둘러앉은 구경꾼으로 동그라미를 이루게 하고 그들의 구심적인 시선의 한복판에 씨름꾼을 놓아 그림에 강한 통일성을 주었다. 하지만 통일성만 강해도 그림이 답답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오른편 가를 일부러 텅 터놓았다. 또 시선이 모이기만 해도 단조로우니 엿장수는 짐짓 딴 데를 본다. 한편 갓과 벙거지를 적당히 흩어놓아 화면에 리듬감이 살아 있고 부채 또한 여기저기서 같은 역할을 한다.” 김홍도의 화격이리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편안하고 인간적인 풍속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조선시대 화가다. 씨름, 서당, 무동, 대장간, 빨래터 등의 풍속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풍속화 분위기에 어울리게 얼굴도 희고 잘생겼으며 성격도 좋았다고 전한다. 거문고 대금 등 악기 연주에도 능했고 시도 잘 지었다고 한다. 또한 김홍도는 술을 좋아해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림값 3000전을 받아 2000전은 매화를 사고 800전은 술을 마시고 겨우 남은 200전으로 쌀과 땔감을 샀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이처럼 풍류가 넘치는 감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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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쪽 어딘가

눈발 속

첫 매화 봉오리를

찾아서

 

 

김명국(金明國), 답설심매도(踏雪尋梅圖)

조선 17세기 중반, 모시에 수묵 담채

 

눈 속에 묻힌 풍경에 갇혔다. 산천초목 모든 것이 숨죽이고 봄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겨울은 그렇게 사람마저 움츠리게 한다. 눈 쌓인 풍경이 주는 멋을 충분히 누리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아직 다 녹지도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나서는 것, 바로 봄소식의 전령사 매화다.

 

'눈 밟고 매화 찾아가는 그림'은 조바심이다. 뭔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데 시간은 더디 가고 소식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니 길을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눈빛에 의지해서 단단하게 무장하고 길잡이 앞세우고 나귀등에 올랐다. “머지않아 가지 위에 따스한 볕이 쪼이면 매화 봉오리가 살포시 실눈을 뜰지 모른다.”어찌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있을까. “겨울 끝머리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퍼뜨리는 농주미인(弄珠美人) 매화. 간밤 꿈속에 선비는 '구슬을 희롱하는 미인'을 보았다.” 이미 나선길인데 왜 뒤를 돌아다보는 것일까?

 

집 앞 나무는 가지가 메말라서 뼈만 남았다. 단지 나무뿐 아니라 산도 물도 모두 얼어 자연의 뼈다귀를 드러내었다. 성기고 메말라 보인다. 겨울 풍경을 담았으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무엇인가 전해지는 것이 있다. 예각으로 틀어지면서 험상궂게 옹이를 드러낸 나무들. 잔가지 획을 게발처럼 뽑아 그렸기 때문에 해조묘(蟹爪描)라 부르는 이 필법은 혹심한 추위를 견디는 꼬장꼬장한 겨울나무의 혼이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1662년 이후)은 취옹(醉翁)이란 호도 사용했을 만큼 화원으로서 술을 매우 좋아했고 성격도 호방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작인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 외에도 산수화와 인물화 모두 잘 그렸다. 18세기의 화론가인 남태웅(1687~1740)청죽화사(聽竹畵史)란 저서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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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니,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라

 

 

작자 미상, 이재 초상(李縡 肖像)

조선 19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나이 들어 내 모습이 어떨까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초상화가 바로 이 초상화다.

 

誠於內 形於外 마음에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은 저절로 외모 밖으로 드러나지 마련이다.” 이런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합한 그림이다. 똑바로 앉아 두 손을 반듯하게 맞잡은 선비가 강렬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듦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 의지가 손상됨이 없다. 복건과 심의 차림의 모습이 단정하여 선비의 기상을 돋보이게 한다.

 

평생을 한결같이 학문과 수양으로 살아왔을 선비의 꼬장꼬장한 성품이 엿보일 듯하다.”

훌륭한 초상화란 외모 뿐 만이 아니라 그 인물이 가진 성격이나 인품이 그림 속에 묻어 나와야 한다. “一毫不似 便是他人 터럭 한 오라기가 달라도 남이다라고 불렀다. 이렇게 조선의 초상화는 예쁜 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모습 즉 참된 모습을 그리려 했기 때문에 외면보다는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 초상화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그런 초상화에 담긴 주인공의 삶을 닮아 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 초상화는 전() 이재 초상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오주석이 한국미 특강에서 날카로운 눈썰미에 의해 이채(李采) 초상임을 밝혔다. 이채(李采, 1745-1820)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재(李縡, 1680~1746)의 손자다. () 이재 초상은 이채 초상보다 십여 년 더 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주석에 의해 제 이름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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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롭고

살가운

어머니 사랑"

 

  

변상벽(卞相璧), 모계영자도(母鷄領子圖)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어릴 적 자주 보아서 눈에도 선한 모습이다. 아장거리며 걷는 병아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미닭의 모정을 느끼기에는 어린 나이였을까? 볏짚으로 바람을 의지한 곳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모습 그 자체로만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변상벽의 모계영자도에서 단연코 이목을 사로잡는 부분은 여섯 마리 병아리가 어미닭의 주둥이 주변에 모여 있는 장면이다. 누구에게 줄까? 오주석이 한국미 특강에서 이를 걱정했더니 양계장을 운영하셨던 분이 "암탉이라는 게 모정이 아주 살뜰힌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곡식 낟알을 하나 주워도 그냥 먹으라 휙 내던지는 게 아니라, 병아리 가는 목에 걸리지 않게끔 주둥이로 하나하나 잘게 부서 먹기 좋게 일일이 흩어 준답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병아리의 솜털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해서 놀랍고, 어미닭을 중심으로 병아리들의 움직임에서 놀라운 모정을 담고 있다. 닭 가족의 나들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그림에서 정작 아버지 닭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오주석은 꽁지깃이 길게 뻗쳐올라 기세가 장한 토종 수탉 꼬리를 함께 그렸다면 암탉과 병아리를 압도하여 다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그냥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보았다.

 

오주석은 이 그림의 주제를 '살뜰한 모정(母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도타운 모정이 살갑게 드러난 닭과 병아리 그림으로서 이렇듯 정다운 암탉 그림은 세상에 달리 없다고 단언하였다.

 

d; 그림을 그린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1775)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서 특히 닭과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계(卞鷄), 변고양, 변괴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그의 고양이와 닭 그림은 세밀하고 사실적이며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볼 때마다 동물화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이는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면밀한 관찰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곧 사람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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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한량없이

크나큰 물,

바다

그 위대한 세계"

 

 

정선(鄭敾), 통천문암도(川門岩圖)

조선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하늘과 바다가 하나다. 큰 물결이 밀려온다. 조급한 파도가 아니라 거대한 움직임으로 그 중압감이 압도하고 있다. 요동치는 바다가 보여주지 못한 장중함이 있다. 물의 힘이 저절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 파도는 위협적으로 사람을 덮치지는 않고 있다.

 

강원도 통천 해변가에 마주보고 솟구친 두 절벽으로 그 이름이 문암(門巖)이다. 두 절벽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문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그 사이를 걷거나 말을 타고 자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파도로 인한 위협이나 조급함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파도 앞에선 인간의 왜소함이 전해지지만 억지스럽지 않다.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바다를 본 사람은 물에 대하여 말하기를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던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반드시 물결부터 보는 것이다.”

 

오주석은 통천문암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중심은 단연 파도에 있다. “바다가 덮쳐 온다. 끝없이 넓고 깊은 동해 바다, 그 푸르고 차가운 물결이 천군만마(千軍萬馬)처럼 천둥소리를 앞세우며 밀려온다. 인간이 대체 무엇이랴? 세상에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장할 수 있으랴? 바다 앞에 서면 누구라도 왜소해진다.”하여, 바다의 위용에 주목한다.

 

해천일색(海天一色). 온 우주가 한 흐름이다.”라고 본 오주석의 혜안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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