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적인 삶
이서희 지음 / 그책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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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고백으로 멈추면 좋을...

현대사회를 특정 하는 말로 벽, 단절, 소외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는 널려 있는 것이 현대사회다. SNS의 대표적인 영역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것도 공감을 바탕으로 한 소통의 장이다. 나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몇몇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일천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 이러한 SNS의 소통은 특정한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일방적인 자기고백이나 소통이라는 이름하에 불편한 자기 속내를 내 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는 것처럼 비추지만 보면 누구나 욕이라고 생각되는 단어를 난발하면서도 자신의 전매특허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런 단어가 포함된 내용의 진실성을 보기에 공감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것이리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뿐 아니라 생면부지의 사람들 사이에도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현대의 이러한 소통은 일방적이다. 관계 맺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 차단이 가능하기에 단절을 전재로 한 소통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않는 경향성이 강하다. 하고 싶은 말은 참지않고 내 지르고 듣기 싫은 말은 언제든 차단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점이 있기에 소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 꼭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것에 서툰 사람들이 대리만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소통이라면 소통이다.

 

‘관능적인 삶’의 저자도 페이스북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호응했던 사람들의 인기를 바탕으로 그동안 페이스북에 올렸던 이야기들을 모아 책을 발간한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회자되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그녀의 이야기는 솔직하다. 이런 저런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한편 그녀는 당당하다. 다소 얼굴 붉힐 수 있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토해낸다.

 

“나의 글은 연애편지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쓰는 줄기찬 귓속말입니다. 대상을 밝히지 않아 은밀한 글, 하지만 읽는 자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자신을 향한 글임을 알 수 있는 글. 모두 개인적인 속삭임이고 두드림입니다.”라고 하지만 나에게 읽히는 속내는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자유롭고,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며,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여자. 섣불리 남들 눈치 보지 않고 그들 눈에도 괜찮은 여자일까 아닐까를 고민하지 않는, 나로서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 말입니다.”라고 읽힌다. 절정은 “만약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다면 당신도 나에게 반할 만큼.”에 있어 보인다.

 

이 얼마나 솔직하고 당당하며 거침이 없는 말인가. 그렇기에 자신이 만났던 연인과의 이야기도 숨김이 없다. 관능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삶에 만족하며 앞으로도 충분히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옳다 그르다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는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해온 현대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삶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능과 매혹이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하는 것에 사람들이 동의하든 안하든 어쩌면 저자는 페이스북이라는 열린 공간(?)에 고백하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속에만 묻어두고 있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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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前사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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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논쟁인가

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이다. 논쟁의 중심에 있던 교학사 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위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역사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모든 해석은 그 해석을 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목적에 의해 바라봐 지는 것이기에 해석의 결과는 천치차이가 날 수도 있음을 안다. 하여, 각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역사는 지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 미래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풀지 못하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 또한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놓기에 해석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세계화 시대라는 미명하에 자국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을 송두리째 내 던지고 나서 사계화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껍데기 뿐 알맹이는 사라진 무엇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힘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진행되는 자국의 역사에 대한 접근은 오히려 민족주의적 시각을 강화하는 경향성이 농후한데 우리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극단적인 예로 학교교육에서 자국의 역사교육을 선택과목으로 돌리는 예를 어느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역사를 소홀히 해서 이득을 얻는 집단이 존재한다면 그들 역시 후대 역사에서 고스란히 존재감을 잃게 될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나 누리고 있는 혜택의 근간이 혹 지난 역사를 왜곡해야만 지켜낼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국사교과서 논쟁의 핵심 분야는 단연코 근대사에 집중된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국권침탈과 그에 빌붙어 영화를 누렸던 세력들이 우리의 근대사를 자신의 손아귀에 올려놓고 요리할 수 있을 때 앞으로도 그 영화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출발점은 아닐까 싶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환영하는 한국교과서라면 분명하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여, 가깝고도 먼 역사가 된 근대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절실한 때가 현재인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우리의 근대사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폭넓은 근대사의 이해를 돕는 책이 발간되어 교과서 논쟁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는 이미 역사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저자 이덕일의 역사이야기다. 1918~1945년까지 일제하 식민지 시대를 다섯 가지 틀거리로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아니키즘 그리고 혼란을 틈타 부를 축적했던 사람들과 식민지전쟁을 일으킨 일본군국주의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분단이라는 현실은 근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여, 사회주의나 아니키즘과 같은 세력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저자는 일제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활동했던 그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식민지전쟁의 원흉이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속내를 들여다보지 않았던 일본의 상황도 직시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에서 인물과 사건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족적과 사건의 정후 맥락을 올바로 살펴 이를 해석하는 것이 역사라고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지 답은 이미 그 안에 있다. 역사를 보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토대 위에서 사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모색”에 있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한 역사해석은 결국 그 역사를 만들어 온 사람들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현재 우리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근대사에 대해 이제는 열린 마음으로 들여다봐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가 그 시발점의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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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청우탁 - 문식 인문학 수프 시리즈 4
양선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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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제대로 읽기 위한 안내서

한때, 문학은 나의 호기심의 범위에 있지 않았다. 역사나 철학 등 인문학 서적을 주로 읽으면서 어쩌다 읽게 되는 문학책은 어렵기만 해서 도저히 끝까지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유야 찾아보면 분명하게 있을 테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제법 된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늘 문학은 어렵게만 여겨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책 읽는 사람들 모임에서 접하기 시작한 문학은 나에게 실로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주었다. 문예출판사와 을유문화사에서 발행하는 고전문학을 섭렵하면서 문학이 가지는 속 깊은 매력이 역사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문학은 여전히 어렵다. 무엇이 문학과의 사이를 벌려놓은 것일까? 여전히 궁금하지만 딱 집어 그렇다할 이유를 말할 수 없다.

 

작가와비평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인문학 수프 시리즈를 접하며 어렵게만 느껴지던 문학에 대해 새로운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가이며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양선규라는 사람이 쓰고 있는 인문학 수프 시리즈의 네 번째 ‘우청우탁(寓淸于濁)’은 문학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 소설에 대한‘장졸우교’, 영화 이야기 ‘용회이명’, 고전에 관한 ‘이굴위신’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주목받고 있는 시리즈다. 독특한 시각으로 각각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저자의 글맛이 보통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치를 충분하게 발휘하고 있기에 저자의 개인적인 삶을 함께 볼 수 수 있다는 점도 관심거리 중 하나가 된다.

 

이번 주제인 ‘문학’에 관한 중심 키워드는 ‘우청우탁(寓淸于濁)’이다. 흐리고 맑음이 둘이 아니다는 말이다. 픽션으로써 문학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하는 말로 보인다. 문학이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을 토대로 하여 작가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것이기에 관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여, 저자가 펼치는 문학이야기는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으로써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문학을 ‘문식’이라는 의미 있는 인식의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 문학의 ‘읽고 쓰는 일’에 대해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체와 분리된 기존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로 문학이 작가들만의 활동이 아닌 실천적 글쓰기와 연결된 문학으로 이해하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다.

 

문학의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다양한 문학 속 장치들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것이 글로만 머무는 것이 아닌 실제 문학작품과 저자의 경험을 비교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여타의 문학에 관한 이론서들과는 다른 맛을 전해준다. 특히, 시와 장엄에 관한 이야기인 참 좋은 울음터에서 박지원과 김정희 그리고 이육사로 이어지는 정서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제 나는 문학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이유 하나를 찾아 고백한다. 저자의 밀대로 단순한 줄거리 쫓아가기 식으로 읽어왔던 문학에서 ‘제대로’ 읽을 것을 발견한 것이다. 꾸며낸 이야기로 문학을 대한다면 사람들 삶과 구체적인 결합을 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있듯 문학의 기본 바탕은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일 것이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상인 것처럼 문학 역시 그 범주 안에서 머물러 있기에 사람들의 삶과 문학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심심풀이나 시간 떼우기, 줄거리 쫓아가기 식이 아닌 제대로 읽은 문학작품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 영향력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책 ‘우청우탁’을 통해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는 독특한 문학 강의를 듣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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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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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또 볼일이다

역사에 관심을 갖다보니 그 지평이 넓어져 주목하는 분야가 생겼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옛그림이 그것이다. 그림하면 우선 사양그림이 전부인양 하는 세태에 우리 옛그림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묻고 찾아보고 서점에 진열된 책들을 살피며 하나 둘씩 만나게 되는 그림 읽어주는 책들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만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솔, 2003)의 저자가 오주석이라는 사람이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저자가 오주석이면 무조건 책을 구입하고 그가 알려주는 우리그림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런데 그렇게 제미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이미 운명을 달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또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그림을 비롯하여 서양화까지 그림 읽어주는 책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냥 그림만 읽어주는 것에서 벗어나 문학과 그림이나 화가들의 그림을 비교분석하여 보다 알기 쉽게 그림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저자들 중에 손철주, 고연희, 허균, 조정육, 강명관, 이주헌, 손태호 등을 주목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것은 같은 그림을 두고도 저자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읽기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 중 손철주는 이미 꽤 많은 독자층을 확보한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미 그의 전작 ‘속속들이 옛 그림 이야기’(자음과모음, 2012), ‘꽃 피는 삶에 홀리다’(오픈하우스, 2012), ‘다 그림이다’(이봄, 2011),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현암사, 2011),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생각의나무, 2010) 등으로 손철주의 그림 보는 눈과 해설하는 글맛에 빠져 있다.

 

이번 책 사람 보는 눈(현암사, 2013)은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사람이 등장하는 옛그림을 저자만의 특별한 시각과 달달한 글맛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모두 85편의 그림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등장한다. 일하는 사람, 노는 사람, 꽃을 보거나 글을 읽는 사람을 비롯하여 자연 속에 동화된 사람들의 모습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림을 만날 수 있다. ‘같아도 삶 달라도 삶’, ‘마음을 빼닮은 얼굴’, ‘든 자리와 난 자리’, ‘있거나 없거나 풍경’등 네 가지 주제로 분류된 그림이야기는 그림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적인 측면 뿐 아니라 그 그림과 연관되어 그림이 가지는 정취를 함께 나누고 있는 시와도 만나 그림읽기의 즐거움을 배가 시키고 있다.

 

특히 손철주의 그림 보는 눈은 독자로 하여금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한다. ‘송인명 초상’의 뻐드렁니에서 포용력을, ‘이하응 초상’의 칼집에서 뺀 칼에서 대원군의 서슬을, ‘심득경 초상’의 붉은 입술에서 그린 이의 애통함을, ‘임매 초상’에서 ‘캐캐묵은 사람’의 심지를‘황현 초상’의 사시를 여기저기 다 보는 겹눈으로 읽을 수 있을까? 보고 또 봐서 그림을 그린 사람과 뜻이 통하거나 세상과 사람들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발휘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손철주의 그림 보는 눈은 특별하다.

 

또한 손철주의 그림을 풀어가는 글맛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우리말을 살려 가슴 속에 숨겨진 감성을 건드려 주고 있어 그림이 새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아이기하고 있는 “그림 밖의 사람은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고, 그림 속의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다. 이럴진대 사람 그림을, 그려진 사람으로만 여기겠는가. 보고 또 볼 일이다.”의 그 마음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다. 부제에 붙은 그림 자랑이라는 말이 수긍이 간다. 또한 책 뒷부분에 본문에 등장하는 그림들의 화가의 약력을 담아 두어 보다 넓은 이해를 도와주고 있는 점도 좋다.

 

얼마 전에 읽었던 연암고전연구회라는 곳에서 펴낸 ‘나의 길을 가련다’(2013)라는 책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표지로 실렸다. 하지만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었다. 손철주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구석구석 찾아봐도 표지화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책을 참조하여도 도무지 알 수 없다. 아디선가 본 듯한 초상화여서 더 궁금하다. ‘사람 보는 눈’의 표지에 쓰일 만큼 중요도가 있는 그림으로 보이는데 왜 없을까? 표지에 쓰인 초상화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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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의 역사 - 역사 속 억압된 책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
베르너 풀트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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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생각이 역사를 진전시킨다

‘금지도서’라고하면 가정먼저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사회 각층에서 민주화 열기가 드높던 때고 사회가 어둠의 그림자로 휩싸여 있을 때여서 당시 화두는 당연이 사회의 민주화였다. 짜여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무엇이든 내 자유의지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대학생활은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곳이기도 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당시로써는 낯설기만 하던 단어 ‘사회’, ‘민주’, ‘정의’, ‘통일’등의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 역시 감당하기에는 벅찬 시기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시대를 떠올려 보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회였던가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자신보다는 이웃과 조금 더 범위를 넓혀 민족이니 사회니 하는 이념들을 공유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숨겨서 돌려본 그러한 책들 속에서 비로써 사회나 민족, 자유, 정의, 평화,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대의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른바 ‘금지도서’는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한두 권씩 읽게 되는 거의 모든 책들이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당연히 복사본으로 만나게 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금지도서는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전 역사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데 불과 수년전에도 ‘2008년 국방부불온서적목록’이라는 것이 버젓이 존재하는 사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금지도서’라는 것이 생긴 것일까? 무엇을 감추고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걸까? 무엇을 근지 시킨다는 것은 결국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와는 반대되는 사상이나 이론 등이 유포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금지도서는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중국 진나라 시황제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특히, 서양의 역사는 바로 금지도서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불태워진 책들이 많았다. 이러한 금서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 발간되어 금서에 아련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어 새삼스럽다는 생각이다.

 

역사 속 억압된 책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담은 ‘금서의 역사’는 2013년 10월 시공사 발행가 발행한 책이다. 이 책은 책에 대한 탄압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살피고 있다. 책의 저자는 금서의 이유를 구분하여 그와 관련된 사례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자기검열, 사회를 위한 금지, 불구덩이에서 살아남은 책, 악을 근절시키기 위한 분리, 정신의 지배를 위한 분서, 믿음과 권력을 지키기 위한 금지, 다양성, 그리고 호기심, 지식과 음란에 대한 금지, 부도덕과 독재가 부른 금지, 허위와 기만이 낳은 금지, 지극히 사적인 금지 등 이유와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이렇게 금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 권력은 정치, 종교를 포함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직접적인 외부압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알아서 기는 형태를 일컽는 말로 자기검열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금서의 목록에는 요즘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제롬 데이비드 샐린의 호밀밭의 파수꾼 등에서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금서는 현재 진행형이다.

 

금지시킨다고 해서 안하거나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론 금지하면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사람이기에 ‘2008년 국방부불온서적목록’은 국방부 추천도서 목록이라고하여 독자나 출판사에서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비밀이 거의 없는 현 인터넷 정보화 시대에는 어떨까? 최근 미국의 정보기관이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전화를 감청했다고 해서 미국의 대통령이 곤혹을 치룬 일이 있었다. 이것은 정보화 사회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열린사회라고 하는 말 속에는 보다 은밀하고 치밀하게 검열이 진행되고 있지만 오히려 소리 없어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로 보인다.

 

금지도서는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광범위한 분야에서 폭력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금지한 쪽에서 보면 ‘불온한 생각’이 어쩌면 역사를 진보시켜 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헬렌 켈러는 〈뉴욕 타임스〉지에 썼다는 “너희들이 사상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역사가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 것이다. 독재자들은 이미 분서를 자주 시도했지만 사상은 모든 세력을 다해 맞서 일어나 독재자들을 멸망시켰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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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서의 역사> 금지조치 당한 책들의 모든 것
    from 책으로 책하다 2013-11-24 16:21 
    [서평] ⓒ시공사 시간을 거슬러 중국 진나라 시황제 때로 가보자. 당시 진나라는 상앙과 한비자 등의 법가를 국가 통치 체제의 주된 전략으로 받아들여 우민 정책과 함께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중국 대륙에 뿌리내려져 온 유가 학문과 사상은 이 체제를 비판하였다.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진나라의 승상 이사는 정부가 시행하려는 정치를 비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