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의 남자 - 댄 브라운의 유일한 전기
리사 로각 지음, 권혜아 옮김 / 동네스케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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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역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작고한 사람이든 현재 활동하는 사람이든 그가 내놓거나 보여준 행동이나 말로부터 시작하여 보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과 연결된 부분과 관계 맺어 이미지화 된 것들이다. 그렇기에 온전하게 한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전기문학이 아닌가 싶다. 전기문학이 한 사람을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를 시도하고 그 결과물로 다른 사람에게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출간된 여러 사람들의 전기는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우뚝 선 작가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관심은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수많은 작가들로써는 부러운 일이 될 것이지만 현실은 삭막하지만 한 실정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본다는 것은 타산지석의 의미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독자들은 그 작가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거나 단순히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당대에 활동하는 작가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는 많다. 하지만, 한 작품으로 그러한 지위에 오른 작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헤리포터’의 작가 영국의 조앤 K.롤링이나 ‘다빈치코드’의 댄 브라운과 같은 작가들이 그들이다. 이 책 ‘다빈치 코드의 남자’는 자서전 작가 리사 로각이 쓴 댄 브라운의 전기문학이다. 아직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기에 작가의 삶에 대한 전반적 평가라기보다는 ‘다빈치 코드’라는 세기적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고 보여 진다.

 

‘다빈치코드’는 루브르미술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계기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 등에 숨겨진 암호를 풀면서 그리스도교를 둘러싼 비밀에 접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종교적 시각에서 보면 물의를 일으킨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던 이 작품은 댄 브라운을 일거에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다.

 

주목받거나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듯이 댄 브라운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그가 자란 가정환경과 지역사회의 특수성이라고 보여 진다. 사립 명문학교에 다니는 동안 평범한 생활 속에는 댄 브라운을 키워낸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 여기에는 부모의 영향도 커다란 역할을 한다. 모범적인 학교생활 이후 자신의 꿈인 음악가로 성공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분야가 아님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설가의 길을 선택한다. 이 과정에 늘 함께한 사람은 부인 블라이드였다. 댄 브라운에게 있어 블라이드는 삶의 동반자이자 격려자이면서 동료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댄 브라운을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린 ‘다빈키코드’는 우연히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다. 전작들의 실패를 딛고 소설가로써의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 계획과 준비에는 사회적으로 이슈화될만한 문제점을 작품 속에 배치하여 주목받고자 했다는 점도 들어 있다. 종교계의 반발을 충분히 인식하지만 이를 역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이 성공에 이르게 햇다고도 보여 질 만큼 적극적으로 활용한 측면이 강하다.

 

이 댄 브라운의 전기는 ‘다빈치코드’에 집중된다. 다빈치코드가 완성될 때까지의 인생 전반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다빈치코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댄 브라운의 노력이 무엇이고 어떤 결과로 모아졌는지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작들의 집필과 출판 그리고 홍보과정에서 얻은 경험이 다빈치코드의 집필과 이후 과정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것이라고 보인다.

 

댄 브라운의 전기인 ‘다빈치 코드의 남자’를 먼저 접하고 ‘다빈치코드’를 읽는다면 훨씬 더 풍부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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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테이너 - 시대와 소통하는 대중문화예술인 19명을 만나다
장윤선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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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생명력이 발휘 된다

얼마 전부터 ‘문화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는 말이 있다. 모 오디션 프로그램에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응모했다고 한다. 그곳에 응모한 사람이든 오디션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든 머릿속에는 ‘화려한 성공’이라는 말이 함께할 것이다. 불같은 마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이러한 현상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에 앞서 문화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 지닌 사유, 정보교환, 행동, 생활 등 그 집단에서 습득하여 계승해 온 양식’라는 사전적인 정의와는 별도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관가할 수는 없다. 곧 지금 우리들의 삶이 곧 문화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라고 하는 말이 주는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일상과는 구별되며 ‘특정한 매체나 장소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행사’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는 말이다. 이는 문화를 사람들의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문화 활동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일반인과 다른 사람으로 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스크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하는 영화배우나 가수 들을 사람들이 영위하는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고립시키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만들어 왔다.

 

소위 말하는 대중문화예술인인 배우나 가수들도 같은 땅에서 울고 웃으며 좌절하기도 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현실의 무게를 그대로 담아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여, 그들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사건이나 흐름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고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그러한 대중문화예술인들이 늘어나고 한편에선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소셜테이너(Socialtainer)는 ‘소셜(Social)’과 ‘엔터테이너(Entertainer)’를 합친 말로 대중문화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발언이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칭하는 말이다. 이미 정치활동에 들어선 문성근을 비롯해서 기부천사로 불리는 김장훈, 락 가수 윤도현, ‘날라리 외부세력’의 김여진, ‘레몬트리 공작단’의 박혜경 등이 그들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대중문화예술인들 열아홉 명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수록하였다. 이들 소셜테이너들의 활동은 다양한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글을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김미화, 공효진, 권해효, 김여진, 김남훈, 김장훈, 류승완, 맹봉학, 박진희, 박철민, 박혜경, 여균동, 윤도현, 이상은, 이광기, 이은미, 임순례, 홍석천, 탁현민

 

저자가 ‘소셜테이너’라는 이름으로 만난 열아홉 명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기부하는 것이나, 책을 펴내 대중적 계몽에 동참하거나, 사회적 이슈가 되는 현장에 동참하거나 SNS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들은 편향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왜곡된 시선을 받거나 출연하던 방송에서 도중하차하거나 섭외가 끊기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대중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한 몸짓으로 보며 자신이 할 수 있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부분에서 쉬지 않고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바로 문화가가 가지는 진정한 힘이 여기에서 확인된다고 본다. 각 분야에서 자신들이 하는 작은 실천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발걸음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그렇게 사람들의 실제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 숨 쉬는 생명력으로 대중들 속에 살아남기 때문이리라. 권력이나 제도권에서 다소 밀리는 경험을 할지라도 이들은 대중들의 사랑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더 매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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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나를 위로한다
김선희 지음 / 예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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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는 것은 나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살만큼 산 나이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세대들이 느끼는 세상살이에 대한 생각이다. 세상을 살아서 삶의 지혜를 얻었을만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고민에 쌓여 일상을 살아간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의 존재에 관한 말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는 말이 있다. 사회적 동물이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을 이르는 말이 된다. 나와 타자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적 속성은 바로 사람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의미가 된다.

 

사회적 관계를 떠나 개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먹고 사는 생존 이외의 문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존의 문제와 같은 무게로 때론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것이 이 관계로 부터 시작된다. ‘나’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의 문제는 나와 타자 그리고 이 양자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고 해결의 실마리 역시 그로부터 출발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여기에서 중심은 바로 ‘나’다. ‘나’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느냐가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모든 철학적 사유는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된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세상 속의 ‘나’는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규정한다. 이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로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과정 속에서 좌절하고 갈등하기 마련이다. 이 책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는 바로 세상살이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시각을 정립하자고 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세상살이에서 오는 문제는 사랑, 일, 가족, 나, 변화, 욕망, 자유, 시간, 타자, 행복 등 열 가지다. 이 열 가지의 문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서로 작용과 반작용으로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키워드로 저자는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이 모든 문제의 정답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전재하면서도 철학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 그 이유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는 못할지라도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에 철학은 사유의 틀로 작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는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힘의 원천이다. 사유하지 않으면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접근도 해결방안에 대한 모색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야기 방식은 구체적 현안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던 문제나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에서 때론 지금 당장 눈을 돌려 주변을 보면 만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이 대해 철학자들의 주장과 결합시킨다. 플라톤, 스피노자, 루소, 헤겔, 니체, 푸코,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공자, 주희 등 철학자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장했던 사유의 결과와 지금 겪고 있는 개인이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근본적 이유를 따져보는 것이다.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에서 보여주는 주목되는 시각은 과연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피는 부분이다.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나를 넘어서 주인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나’가 사라져 버렸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사회적 통념이나 규범, 관습 등에 의해 나는 사라지고 나라고 믿는 존재가 나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를 찾을 때 비로써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중심이 있는 ‘나’에 대한 깊은 성찰에 주목해야 한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자신을 우뚝 세우고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 ‘나’를 둘러싼 총체적 난국을 해결할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 수많은 자기개발서 들이 난무하는 속에서도 문제는 늘 나와 함께한다. 보통의 자기개발서 들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원인에 도달하지 못한 방법들은 쓸모없는 말잔치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철학의 중요성이 부각된다고 할 것이다. 삶을 해설하는 미사여구로써의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모습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 철학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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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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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딛고 일어선 예술가들

예술 한다는 사람을 만날 때 우선 생각되는 것은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이다. 빈 화폭을 대할 때 드는 절망감은 뒤로하더라도 만들어진 이미지에 갇혀 길고 긴 길을 가야한다는 점이 앞선다. 예술가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인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뭔가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예술가들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삶에서 그리고 이를 조장하거나 만들어 온 사회적 관습에 의거한 것이리라. 하지만, 예술 또는 예술가라는 이미지에 갇혀 어쩜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오직 작품 속에서만 이야기되어지는 예술가들의 삶에 중요한 무엇이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작품 속에 담고자 했던 예술가의 사사상이나 가치관을 비롯하여 그런 사상과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배재하기일쑤다. 작품의 성공여부에만 국한시켜 예술가를 평가하는 것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이 책 ‘예술, 상처를 말하다’는 바로 그런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미지화된 이름 속에 갇힌 예술가의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을 표현하는 이야기 중에서 창작에 대한 고통을 거론한다. 창작의 고통은 곧 예술가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다. 즉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섦을 대변하는 것이 작품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의 길은 대단히 험난하다. 생각하는 것을 화폭에 다 담을 수 있는 것도 힘들지만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깊이 관계된다.

 

저자가 주목하는 예술가 카미유 클로델, 빈센트 반 고흐, 케테 콜비츠, 프리다 칼로, 권진규, 백남준, 이성자,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장미셸 바스키아 이 열 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들에게서 남들이 주목하지 아픈 영혼, 상처라고 말하고 있다.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진 진실로 접근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상처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스승의 그늘에 가려진 아픔, 가족으로부터 쫓겨난 배신감, 사랑에서 버림 받았다는 상실감, 창조된 이미지에 스스로 숨어들었던 좌절 등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세상과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히 외로웠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예술의 본질에서 벗어난 시대적 산물인 상업성과도 관계가 있다. 모든 것을 물질화 시켜 값을 매기고 그것에 자신의 정신을 빼앗겨버린 현실이 그것이다. 정신적인 피폐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과정이다. 열 명 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예술가들이 제법 많다. 자살은 삶에서 벗어나는 극단적인 수단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면에는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간 사회구조적 모순도 한 몫 한다. 바로 이러한 상처들이 창작의 배경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는 점이다.

 

저자가 이들에게서 상처에 주목하는 점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바로 상처를 스스로 이겨내거나 그 상처 속에서 헤매는 과정이 창작활동과 떨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살아생전 빛을 발하지 못했던 예술가나 화려한 명성을 당대에 누리며 살았던 예술가나 스스로 상처에 갇혀 이 상처가 싸우는 결과가 작품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주류사회로의 진입이나 강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가치관이나 이상을 버리거나 강자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이며 소외된 사람들이다.

 

저자의 이야기는 강하다. 그리고 단정적이다. 예술의 본질로부터 벗어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강자나 상업성에 굴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자고 하는 주장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여, 저자는 오늘날 예술이 들려주는 것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 다름이 예술의 본질로 다가가는 지점으로 보인다.

 

강자와 타협하지 못하거나 상업성에 물들지 못하는 예술가들은 여전히 현실의 압박에 좌절한다. 예술은 역사와 시대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과 예술가들의 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은 언제나 고통과 상처, 소외와 고독, 억울함과 분노, 수치심 같은, 실패와 상실로 오해되는 것들의 옆에서 성취 된다.’고 말한다. 이런 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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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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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본질에 사람이 있다

‘그림 읽어 주는 책’을 가슴에 담았다. 그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 그림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마음과 만난 것은 삶의 보너스인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잠재해 있던 감성을 일깨워 주고 때론 나도 예술가들의 가슴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는 만족감을 준 이 만남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내가 그려갈 내 삶의 그림이 비록 유치한 수준에 멈출지라도 온전히 내가 그린 그림이기에 소중한 것처럼 이 만남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사람들 가슴 깊숙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나타낼지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이 바로 그림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 그 선두에 오주석이 있었고 손철주를 비롯한 이주은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각기 다른 향기를 발하는 그들의 마음과의 만남은 늘 설렘과 함께 한다.

 

맛과 향이 달리하며 독자들과 만났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손철주와 ‘당신도 그림처럼’의 이주은 두 사람이 각자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 우리그림을 비롯한 동양화에 주목했던 손철주와 서양미술사학을 전공한 이주은이 자신들이 선정한 그림에 비추어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 주거니 받거니 맛깔 나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그림은 어떤 방법으로 표현되었던 사람과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삶 속에서 추구했던 이상과 가치관,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다. 그렇기에 그림 이야기는 곧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림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현재의 우리들 삶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의 주제는 그리움, 유혹, 성공과 좌절, 내가 누구인가, 나이, 행복, 일탈, 취미와 취향, 노는 남자와 여자, 어머니 엄마 등 열 가지다. 주제 열 가지는 서로 주고받는 글이 열편이라는 점과 연결된다.

 

동양화와 서양화, 남자와 여자, 삶을 살았던 세월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 두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는 바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점이 아니라 이 두 분야의 공통점을 찾는다. 공통점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감성이자 구체적인 생활모습이다. 손철주가 ‘묘사하면 그림이 되고 갈망하면 그리움이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이주은은 그리움을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라는 답신을 보낸다. 또한 손철주가 ‘품에 안을 수 없는 미인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삶을 통찰한다면 이주은은 보통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담긴 감성을 부릴 수 있게 도와주는 ‘바쿠스의 포도주’를 들고 서로의 이야기에 화답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잘 보기 위해서 타인의 눈을 필요로 하고, 나 자신의 욕망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타인의 촉감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감정이란 막고 통제하려고 하면 굴레가 되지만, 느끼고 만끽하려고 하면 자신을 더 잘 알게 하는 마술의 틀이 되는 것이다.”

 

이주은 작가의 말이다. 그림은 예술가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낸 도구가 아닐까 싶다. 이 소통의 도구는 때론 예술가의 손을 떠나 관객들 사이의 소통을 매개한다. 이렇게 만나는 지점이 예술의 본질일 것이다. 삶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 또한 그 지점에서 만나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둘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핵심일 것이다. 열편의 편지로 끝나지만 이들은 독자들을 위해 열한 번째 편지를 남겼다. 손철주, 동양의 미술을 말하다와 이주은, 서양의 미술을 말하다가 그것이다. 이 두 글을 통해 두 사람의 그림에 대한 이해를 보텔 수 있어 좋다.

 

달을 보라고 가르치는데 손가락만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동, 서양의 그림을 보는 맛, 글을 따라가는 동안 떠나지 않은 미소로 참으로 따스한 만남이다. 다르면서도 같은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니다. 마치 연인들의 연애편지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아껴주고 격려하며 때론 농담도 서슴치 않지만 이를 보는 내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사귐이 이럴 수만 있다면 한 폭의 그림도 담아내지 못할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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