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 다산과 추사가 사랑한 초의 선사의 우리茶 기행
박동춘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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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통한 사람 사이의 소통

지인의 따스한 마음이 담긴 차 한통을 선물 받고 아껴 마시는 기억이 있다. 차에 대한 특별한 취향이 있다거나 차도에 대한 나름대로의 격식을 갖추기도 전에 차 맛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을 가슴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던 차다. 하지만, 차를 즐겨 마시거나 찾아 마시는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기에 그저 가끔 손님에 올 때 접대하거나 어쩌다 마음이 동하여 혼자 마시곤 한다. 나의 이런 차에 대한 마음이 나름대로 국한된 경향을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연히 차를 좋아하고 좋은 차를 찾아다니며 차 모임을 하는 사람들 자리에 함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차에 대한 생각과 모습에서 차를 왜? 마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차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지나친 격식과 그 격식에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싫었다. 차를 마시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차 자체가 주인공이면서 사람은 그저 차를 따라가는 것 같은 모습에서 주객이 전된 듯한 어색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옹졸함이 그 출발이겠지만 그 후론 그저 내가 좋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것이 차를 대하는 태도로 올바르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처럼 잘 알지 못하면서도 편견에 사로잡히는 일은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부지기수로 만나게 된다. 이런 편견을 바로 잡는 기회도 때론 우연히 찾아오는 것 같다. 그것은 남도 출신이면서 서울에 살다가 다시 고향에 터를 잡고 문학에 전념하고 있는 작가 한승원의 작품을 통해서 이다. 초의, 다산, 추사로 이러지는 일련의 작품들 속에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처럼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확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잘 알지 못하는 초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며 이들 상호간이 관계를 이해할 때 개별적인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박동춘의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는 바로 차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차의 중심에 있었던 초의와 추사간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고려시대 활발했던 차 문화가 조선에 들어와서 명맥을 유지하지도 못할 만큼 사라진 상황에서 중국과는 다른 우리 차를 복원하고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 차 문화를 형성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초의가 차를 접하고 만들어 온 과정과 이를 추사를 비롯한 신위와 같은 사람들이 극찬하게 차가 가진 본래적인 기능의 찾아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들었던 과정에 대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풀어가고 있다.

 

초의차의 계보를 이어온 저자 박동춘은 30여년에 거쳐 차를 만들어 온 사람으로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온 과정에서 스스로 깨달은 바를 이 책에서 초의 선사의 행적을 찾아 가는 형식을 통해 밝혀놓고 있다. 이런 행적에 대한 추적은 관련 유적지에 대한 답사와 문헌자료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간찰을 통해 개인 간 교류와 사적인 감정을 비롯해 초의선사 그리고 초의차와 관련된 사람들의 관계를 조망하고 있다.

 

학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 개인이 차를 만들어 온 경험과 긴밀히 결합되어 차와 사람에게 한발 더 깊숙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제기하고 있다. 더불어 차와 관련된 간찰과 그림 등이 함께 실려 있어 주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한 부록처럼 붙어 있는 인물목록은 조선 후기 초의와 추사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고 빛나게 했던 사람들에 대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알 수 있게 하여 다양하게 관계를 통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세심함까지 보여준다.

 

차는 불가에서 참선을 하는 스님들에 의해 이어져 온 것이 사대부를 중심으로 넓혀지며 오늘날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다. 오늘날 차가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애용되어질 수 있는 기초에 초의 선사의 노력에 의해 복원된 초의차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런 일을 한 초의 선사를 사람들 사이에 새롭게 조망 받게 하고 있어 의미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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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 일본군 자살특공대원으로 희생된 식민지 조선인
길윤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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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에서 개인이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지는 것일까?

현재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이나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이들 대부분이 말하는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북 분단 상황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식민지잔재의 청산을 꼽는다. 이 두 가지가 오늘 한국이 안고 있는 딜레마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남북이 갈라진 상태로 그것도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협정 상황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민족의 통일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부분이다. 정치권력의 편의주의적 속성에 의해 민족적 과제가 오락가락하는 현재의 상황을 볼 때 어쩜 요원한 문제가 아닌가도 싶다. 그에 버금가는 문제가 일제식민지의 청산문제다.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이미 완결된 상태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여전히 위안부 할머니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일제식민지 청산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일제식민지의 잔재는 오랜 시간이 지낸 지금도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들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나는 조선인 카미카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새로운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보인다. 일제의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강제로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정신대도 그것이며 강제징용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주목하는 새로운 문제는 가미카제특공대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미카제특공대는 패색이 짙어가던 태평양정쟁에서 일본이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한 특공대를 말한다. 천황의 방패로 제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특공대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들이 특공대에 참여하게 된 동기에서부터 일본이 자살특공대를 창설하게 되는 배경과 진행과정 그리고 조선인의 활동상황에 대해 밝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왜 이런 자살특공대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 저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삶의 상당부분이 지배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진로가 불투명한 상태를 개선하려는 점 그리고 비행기에 대한 개인적 열망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강제적인 방법에 의해 동원된 경우가 주를 이루지만 자발적으로 입대한 경우도 있다. 이 모두는 출발점이 다르지만 결국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한 결과를 낳았다. 마지못해 선택했던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입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이해요구보다 민족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돌파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과는 달리 암울하기만 한 상황을 벗어날 기로 삼는 경우가 많아 이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보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거리가 많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제한된 상황에서 교육을 받고 일보 전투기를 몰아 연합군 배를 침몰시키기 위해 요격에 나섰다. 이 점에선 누가 뭐라고 해도 친일부역자나 친일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갈등하고 그 길에서 뛰쳐나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넘겨야 옳은 일일까? 이 점이 딜레마다. 이것은 가미카제 특공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인에게 피할 수없는 일로 다가왔을 것이며 그렇다고 모두가 같은 선책을 한 것이 아니기에 판단의 기준은 이미 마련되었다고도 보인다. 해방 후 한국의 사회 곳곳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한 것처럼 비행기술을 익힌 특공대원들에 의해 대한민국 공군과 민간항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의미 있는 것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친일의 최전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살특공대에 지원하고 죽음을 맞이했거나 살아남아 한국 사회에 일조한 사람 모두 선의의 피해자일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저자 역시 이점에서는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도 판단을 미뤄두고 있다. 이처럼 판단을 미뤄두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근본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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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우는 옛 그림 - 조선의 옛 그림에서 내 마음의 경영을 배우다
손태호 지음 / 아트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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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랑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무엇은 멈추질 못하는 속성을 가지게 된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것을 하는 동안엔 행복한 마음이다. 이런 일 중에는 취미로 시작한 일이 전문가를 넘어서는 경우도 생긴다. 모두 마음이 내켜 하는 동안 즐기게 되는 이것은 그래서 때론 막강한 힘을 가지게도 만들어 준다. 꽃과 나무가 좋아 무작정 따라나선 길이 시간과 노력을 더해 어느덧 식물학자 이상 가는 실력을 가지게 되는 경우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을 따라가다 미술평론가 이상의 그림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전문가도 찾아내지 못하는 특별함을 찾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제법 많다. 하여, 그들이 사는 생활방식이나 탐구한 결과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들며 또 다른 자신들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우리 옛 그림이나 나무와 숲에 관심이 많은 나로써 참으로 부러운 사람들이 그들이다. 오늘은 우리 옛 그림에 대한 사랑이 넘쳐 자신만의 그림을 보는 안목으로 옛 그림과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있는 사람의 책을 만난다. ‘나를 세우는 옛 그림의 저자 손태호다. 그는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 그림에서 얻은 마음의 힘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간 사람이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여행사를 운영하는 등 어떻게 보면 그림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 점에 주목하여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시사점을 주기에도 충분한 삶을 살아가는 한 예가 될 수 있어 비록 책을 통해서이지만 무척이나 반갑게 만난다. 이는 그림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전공자나 그림을 그리는 당사자들의 고유 영역이라는 생각에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그렇다고 꼭 그림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자처럼 책을 낼 정도의 실력을 갖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림이 주는 독특한 정서와 소통하면 그만인 것이기에 말이다.

 

저 솟은 봉우리와 흐르는 물 등은 다 나와 관계가 없는 것인데, 옛 성현이 오히려 이를 즐거워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저자가 책머리에 인용한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 중 송애기다. 저자는 바로 이처럼 어떻게 보면 나와는 상관없는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즐거워한 일과 또한 일반인들이 무엇이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에 관심을 기우리는 것과도 통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시각으로 저자는 우리 옛 그림에 대해 자신의 마음속에 공감한 느낌을 나누고자 한 것이리라. 3부로 구성된 이 책에 공통된 주제는 지금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에 긍정적인 힘을 주는 의미로써의 그림을 대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윤두서의 유하백마도, 김명국의 설경산수도,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김정희의 수식득격, 신윤복의 주사거배와 월하정인, 김홍도의 황묘농접도와 춘작보희, 채용신의 매천 황현 초상에 이르기까지 그림을 접하며 저자가 느낌 다양한 경험을 열아홉 가지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책에는 이미 우리들에게 익숙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그림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자신의 독특한 경험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 옛 그림에 대해 설명해 놓은 책들에서 자신의 견해와 비슷한 것을 소개하기도 하고 때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 보이기도 하지만 모두 우리 옛 그림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림은 어떻게든 화가와 화가가 살아가던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림 속에는 화가의 개인적인 관심사나 삶의 지향점을 비롯하여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과 생활풍습이 반영될 것이다. 이 속에 그림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며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자 하는 것 말이다. 저자나 사람들이 우리 옛 그림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된 그림읽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오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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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온 편지
김용규 지음 / 그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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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희망은 자연으로 돌아감 속에 있다

사람들은 왜 나무와 풀 등 자연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이 물음에 앞서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어 보인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근원과 관련된 잃어버린 기억과 결부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사람을 분리하고 사람이 자연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왔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분리해서 얻어진 것이 무엇일까? 어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이나 외로움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하여, 자연과 나무들에 대한 관심은 그 근원으로의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인들의 그 근원으로의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어떻게 표현되는 것일까? 가까운 숲을 찾아 거닐며 협소한 공간에서나마 자연을 체험한다거나 산이나 들로 다니며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 짧은 시간일지라도 노닐거나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시골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방법이야 어떻든 이 모든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 또한 여의치 않아 마음뿐인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과감하게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이 책 숲에서 온 편지의 저자 김용규이다. 그는 벤처회사의 CEO로 살면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있음을 느끼며 삶의 근거지를 옮겨 산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산 속에서 생활한지 어느덧 5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며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며 얻은 삶의 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담긴 책이다. 편지글 형식으로 된 이 이야기는 편지를 쓰는 사람의 일상이 중심이 되지만 내용의 핵심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바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음 한구석에 대한 담백하고 솔직한 저자의 애정 어린 마음이 그것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생명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 같기만 한 겨울부터 시작된 편지가 사계절을 지나는 동안 숲에서 살아가며 자신과 숲의 공감 속에서 이뤄진 소통의 정서를 친근한 벗에게 내 보이듯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가족과도 같은 개 두 마리와 자신을 받아준 숲의 주인 나무 그리고 농사를 준비하고 지어가면서 느끼는 삶의 본질을 이웃이며 친구인 사람에게 자신이 느끼는 그 충만한 감동을 나눠가지고 싶은 마음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간 보낸 편지글 속에는 사람을 향한 따스한 온기가 넘친다.

 

하지만, 편지글 속에는 마냔 좋은 것만이 담긴 것은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새로운 삼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마음의 무게가 있어 보인다. 현실적으로 부담해야할 경제적 빈곤과 같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도 산 속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도 오히려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만족감으로 상쇠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혼자만의 만족을 위해 산 속 상활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개척하고자 선택한 삶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5년에 걸쳐 그가 걸어온 숲 해설가로, 농부로, 숲학교 교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 행보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점은 편지글 속에서 나타난다. 매 편지글은 특정한 사건이나 일로 시작되지만 마무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겪을 만한 일들에 대한 저자가 자연과 함께 살며 배운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다. 그가 전하는 당부의 말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 그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우리의 사계절 중 주목받지 못하는 계절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봄만큼 좋은 시기가 있을까 싶다. 가을날의 하늘빛에 어울리는 단풍보다 더 신비로움으로 다가오는 계절이 봄이다. 결실의 계절을 지나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은 그런 봄을 준비하고 맞이하기 위해 자연에게 꼭 필요한 시기이기에 새로 맞이하는 봄이 찬란할 수 있음을 저자는 알고 있다. 그 봄을 맞아 사람을 향한 마음이 간절하게 녹아 있는 저자의 편지가 우리들의 생활 한구석에 전해져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에 봄향기가 전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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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formation 女
하라 켄야.무사시노 미술대학 히라 켄야 세미나 지음, 김장용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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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전환으로 새로운 모습의 여성을 보다

계절이 바뀌면서 분명하게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다. 물론 자연이 변화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화려한 변신만큼이나 놀라운 변화는 일시에 일어난다. 바로 여성의 옷차림이 그것이다. 어떻게 그리 일순간에 거의 모든 여성들이 한 결 같이 옷을 바꿔 입는 것일까? 여성들만의 유전자 속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성의 옷차림뿐 아니라 여성에게는 알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무엇이 이처럼 다른 차이를 보이게 만드는 것일까?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있다. 바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성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과 분명하게 달라지는 것이 있다. 이렇게 시각을 달리하는 것을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이러고 한다. 엑스포메이션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얼마나 모르는지에 대해서 알게 하는 것으로서의 소통의 방법이라고 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이렇게 알고 있는 것보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에 주목한다면 여성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 엑스포메이션 여(Ex-formation 女)는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기초디자인학과에서 매년 그해의 세미나생 전원이 주제를 정해 공동연구를 수행한다. 이렇게 진행된 그간의 결과들이 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2009년도에 ‘女(여)’를 공동연구 주제로 하여 하라 교수와 15명의 학생들의 공동연구의 성과로 발간된 책이다. 여(女)를 주제로 한 시각의 전화에서 오는 흥미로운 점이 책 속에 가득하다. 이 공동연구에서 여(女)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심은 여(女)에 대해 몰랐는가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고, 여(女)가 갖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 탐구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열다섯 사람의 다양한 시각으로 다시 표현된 여성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오카자키 유카(Yuka Okazaki)의 임산부와 야마다 안리(Anri Yamada)의 봉棒 인간(졸라맨) 그리고 고바야시 키요에(Kiyoe Kobayashi)의 여자의 무표정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임산부는 여성만이 갖는 특수한 장점이면서도 때론 피하고 싶은 여성의 조건이 되기도 하기에 모든 여성에게 임산부의 모습을 대입하여 이를 통해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시각이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과는 조금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봉 인간은 언제가 보았던 인간에 대한 단순한 그래픽의 시도한 것과 비슷하여 친근함마저 들게 한다. 여기에서 한발 나아가 (사사키 유코 Yuko Sasaki)의 소녀와 여성에서는 여성 속에 존재하는 여성성의 발현이 어떻게 달리 나타나는지에 대해 알게 한다.

 

여성은 어쩜 같은 인간이면서도 남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어 보인다. 여성을 규정하는 온갖 사회적 제도와 환경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지켜오는 것과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 본연의 특성에 주목한다면 여성이 여성으로써 가지는 훌륭한 내면의 모습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여성에 국한된 시각이 아닐 것이다. 여성이 남성을 바라본다거나 남성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가는 시각의 전환이 있다면 분명 동일한 결론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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