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야 꽃이다 - 내일을 행복하게 해주는 이야기, 개정판
김병규 지음, 황중환 그림 / 예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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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행복해 지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간다. 그 희망이 있어 현실에서 느끼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현실을 저당 잡혀 오늘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내일이라는 불확실한 미래에는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까?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은 기약할 수 없다. 지금 행복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일이 행복할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자는 말은 아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놓치지 말고 행하면서 그 힘으로 내일은 준비한다면 보다 훨씬 나은 내일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내일을 행복하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부재를 단 예담출판사 발행 이 책 ‘떨어져야 꽃이다’는 그런 의미에서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처진 어께를 추스리기에도 버거운 어른들에게 지금 닥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의 두발로 걸어온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아닌가도 싶다. 그렇기에 이 책 ‘떨어져야 꽃이다’에 실린 이야기 대부분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거나 회상하는 줄거리들로 채워져 있다. ‘억이’, ‘밥맛’, ‘백만 원짜리 식사’, ‘복이 아재’, ‘반쪽짜리 편지’, ‘양말 다섯 켤레’, ‘붕어빵’, ‘넌 뭘 잘하니?’, ‘미안이’, ’떨어져야 꽃이다‘ 등 이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삶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이다. 이는 저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가슴 뭉쿨했던 기억을 더듬어 오늘을 살아가는 힘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야기들로 보인다. 여기에 그림을 담당한 황중환의 그림은 김병규 저자의 이야기를 더욱더 따스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하다. 가슴을 적시는 이야기에 그 내용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그림이 곁들여 있어 마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준다.

 

‘떨어져야 꽃이다’의 꽃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나서야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꽃이 꽃으로만 있을때는 꽃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꽃은 열매를 맺어 생명의 다음 세대를 이어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다. 그 꽃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 생명은 당대로 그치게 된다. 하여, 꽃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비로써 떨어지는 것이다. 작가는 떨어진 꽃이 장작보다 센 기운으로 마음을 데워 주기 때문에 떨어진 꽃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가의 떨어진 꽃은 무엇일까?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하는 깨우침을 주는 그 떨어진 꽃을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사람숫자만큼이나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각자 자신만의 떨어진 꽃을 찾아내 현실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내일을 행복하게 맞이할 힘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 없는 내일은 없다. 그렇듯이 내일에 거는 희망도 어제나 오늘 내가 걸었던 발걸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넌 뭘 잘하니?’의 그 아이처럼 어쩌면 현실에선 기준미달로 보일지라도 나름대로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기준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볼 일이다. 저자가 어른들을 위한 이 이야기를 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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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 - 곽세라 힐링노블
곽세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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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어디쯤에 있을까?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 고통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순간과 함께 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그 고통의 순간을 기억하며 삶의 고비를 맞이하는 순간마다 상처 입은 자신에 대한 감정에 사로잡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대개의 문학작품은 작가가 살아가는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 현실은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것이 문학작품이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문학작품 속에서 살려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 말이다.

 

그런 류의 문학작품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곽세라의 영혼을 팔기에 좋은날은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집에는 중편 영혼을 팔기에 좋은날천사의 가루가 실려 있다. 우선 각기 다른 줄거리를 가진 두 소설이 사람의 마음에 남겨진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을 팔기에 좋은날의 주인공 열일곱 소녀 류의 역할인 뮤토가 바로 그것이다. ‘뮤토는 라틴어로변화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열일곱 소녀 류가 뮤토로 성장하는 과정에을 따라가게 만드는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뮤토를 필요로 하는 의뢰인과 뮤토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교감 속에서 감정을 주고 받는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뮤토를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역으로 현실에서는뮤토가 필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기에 소녀 류가 만나는 의뢰인들 중 누군가는 나와 같거나 비슷한 이유로 뮤토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그 의뢰인들의 시각에서 다시 보면 이 소설 영혼을 팔기에 좋은날은 상처 받은 모든 이들이 주인공인 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기에 충분한 요소를 담고 있어 보인다. 혹 소설에 등장하는 의뢰인들의 경우와는 다른 이유로 뮤토가 필요한 사람일지라도 바로 이 소설이 가지는 장점이 바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 안에 담긴 상처의 근원에 대항 성찰에 이르는 길을 모색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인다.

 

천사의 가루영혼을 팔기에 좋은날에서 보여주었던 의뢰인들의 다양한 사건의 버주 중 하나를 선택하여 구체화된 고통의 원인을 특정화 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 특정화된 주제가 사랑이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화두가 사랑일 수 있기에 사랑에 대한 이 이야기는 역시 의뢰인들이 가지는 다양한 감정에 대한 일반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남녀의 사랑의 여정을 짧은 문장으로 이어진 단락의 구성으로 꾸며가고 있는 것이 독특하게 보인다.

 

한 포털사이트에 연재되어 화재를 불러왔다는 이 작품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감내하고 살아가야 하는 다양한 고통의 요소들의 나열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안고 있는 고통들의 원인과 진행과정 그리고 자신에게 영향 미치고 있는 특별한 현상까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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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바람이 꽃을 피운다 - 심형준 에세이
심형준 지음 / 새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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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답한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이나 당당함은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 힘은 자신 이외에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치 않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나이 들어 세상을 바라보며 삶에 지친 청춘이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굴복해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에는 따스함이 함께한다.

 

새미에서 발간한 잔바람이 꽃을 피운다의 저자 심형준도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평생을 교단에서 학생들은 가르치고 책과 더불어 생활하며 글을 써온 저자의 눈으로 바라본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저자의 시각에는 따스함이 묻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을 영위하며 느끼는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살아오며 겪었던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사회 구석구석의 다양한 관심거리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 책 잔바람이 꽃을 피운다의 저자 서문을 읽으며 다소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어 저자의 프로필을 다시보게 된다. “잔바람이 꽃을 피운다에 실린 저자의 글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는 표현들이 거침없이 수록되어 있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발표한 글에 대해 겸손함을 먼저 내세우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고 우선 당당하다.

 

저자의 그런 자심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책에 실린 몇 편의 글 들 만으로도 짐작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세상을 살만큼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얻은 교훈의 무게가 참으로 클 것으로 생각되는 글들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깊이 있게 생각해봐야 할 점들에 대해 저자의 확신에 찬 주장을 접하지만 선입감처럼 근거 없는 주장이나 강요가 아님을 알게 된다. 보편타당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어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좋은 글들이지만 선배세대들 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의 후배들에게서 보이는 모습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때론 괜한 소리가 아닌가 싶은 것들도 없지는 않다.

 

평소 일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성대방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나와 무슨 관련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에도 몇 편의 글들은 저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세대차이로 인한 오해나 기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글들도 있다. 저자의 주장하는 바와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졌더라도 상관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자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보인다. 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이 가지는 사고의 시각과 깊이가 같은 수 없고 삶을 살아온 시간이 다르기에 가치관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듯 말이다. 하여, 굳이 저자의 주장과 내 생각이 맞지 않더라도 인생의 선배의 말에 귀 기울이듯 볼 수 있는 책으로 여겨진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전직 대통령 애우에 대한 이야기처럼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나 정치적 지향점이 보이는 글들에서 더욱 그러한 점이 많아 보인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저자의 살아온 삶을 알게 하는 부분이도 하고 글에 실린 무게감을 더해줄 수 있기도 하기에 굳이 시비를 걸 필요는 없으리라.

 

산문은 사람들이 세상과 접하면서 가지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저자의 가치관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글은 산문으로 완성된다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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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 사회를 비추는 거울, 집의 역사를 말하다
서윤영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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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을 채워가는 집

어느 시대든 인간이 만들어 온 모든 것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전 시기든 자신이 살아가던 시기든 먼저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과 문화나 삶의 방식을 담고 있다. 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사회적 흐름의 경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중요요소로 의(衣)식(食)주(宙)를 꼽는다. 이 중에서 당대 문화적 요소를 가장 많이 반영하는 것이 주(宙)가 아닌가 싶다. 현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 집에 대한 생각은 주거의 목적으로써 집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으로 집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동산에 대한 투자만큼 확실한 재태크가 없다는 말처럼 투자 대상으로써의 집은 주객이 전도된 양상으로 발전하며 현대까지 여전히 지배적인 생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집은 언제부터 어떤 모양으로 인간과 함께한 것일까? 그런 의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 있다. 서해문집에서 발간한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이 그것이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로 집을 짓고 있다는 저자 서윤영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집에 대한 역사를 살핀다. 건축 형태의 변화뿐 아니라 형태를 만들어 온 내용까지 함께 살피고 있어 건축으로써 집에 대한 종합적인 사고를 살 수 있게 만든다. 특히, 인류문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4대 문명발생지를 고찰하면서 서로 닮아 있는 부분이나 상이한 부분을 밝히고 상호 영향성의 여부까지 살핀다.

 

저자가 집이라는 특수목적 건축물에 대해 살피면서 간과하지 않는 점이 있다. 바로 인문학적으로 집의 변화를 살핀다는 것이다. 고대 사람들이 자연에 순응하거나 자연을 극복하려는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주거형태를 살피면서 움집현태의 우주부터 현대 주거문화의 전형이 되고 있는 아파트까지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생활방식을 유추하며 시대마다 달리한 시대의 경향성이나 인간의 욕망까지를 이야기 한다.

 

또한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집이 가지는 다양한 성격을 살피면서 인간의 계층화에 따른 집의 변화까지 함께 살피고 있다. 그래서 어떤 집에 사느냐나 어디에 사느냐 하는 질문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핀다. 조선 후기 주거에 여성 전용 사랑채인 ‘안 사랑채’가 있었다는 점이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또 살고 싶어 하는 아파트에서 주방이 점유하는 공간적 확대, ‘타워팰리스 박씨-78평’ ‘래미안 김씨-33평’와 같은 실태를 통해 집이 가지는 사회적 가치의 반영이나 그 경향성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자는 새로운 사회문화적 시각으로 우리 사회의 집과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게 하며, 우리의 집이 품고 있는 욕망은 누구의 것인지 묻는다. 건축물인 집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며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지능이 높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한다고 알려진 영장류는 대부분 집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을 뜻할까? 어쩌면 유독 인간 만에 욕망의 대상으로 집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인간이 가지는 한계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복잡하고 삭막한 도시의 생활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1970년 대 후반에 지어진 조그마한 한옥에 마당이 제법 커 사람 마음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마당 한 쪽에 텃밭을 만들고 화단도 크고 작은 것을 두 곳에 마련하고 여러 가지 과일 나무를 심으면서 이 집을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다. 무엇이든 그 주인을 닮아간다고 하는데 걱정 반 기대 반이다. 그저 욕심 부리지 않고 마음 편안하게 머물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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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너머 그대에게 - 세상 속 당신을 위한 이주향의 마음 갤러리
이주향 지음 / 예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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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見)과 관(觀)의 차이로 내면을 향한 성찰

자신의 내면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성찰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흔히 철학이라는 범주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통례이나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자신울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대해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기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기에 내면과 접할 수 있는 훌륭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자신과 만나는 기회는 대부분 보는 것을 통하게 된다. 시각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보면서 대상을 인식하고 그 대상과 더불어 사유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경우가 만다. 시각적인 정보에 의한 것이 우선되는 본다는 것은 그래서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보다는 밖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것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한자에서는 그래서 본다는 것은 같으나 대상의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을 사용한다. 바로 관(觀)이다. 견(見)이 바깥에 중심을 둔다면 관은 내면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다. 숨겨져 있어 알 수가 어렵지만 알게 되면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까지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대상을 관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주향의 ‘그림 너머 그대에게’는 그림 읽어주는 책의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과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발간되는 것을 몹시 반기는 사람으로서 저자의 이 책 역시 반갑기만 하다. 저자는 클림트, 반 고흐, 샤갈, 루벤스, 렘브란트, 모네 등의 작품을 통해 화가가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림이 주는 시각적 정보 이외에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그림을 이해하고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림을 읽어주는 책은 대부분 그림과 얽힌 뒷이야기나 화가와 관련된 주제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주향의 ‘그림 너머 그대에게’는 다른 점이 있다. 분명 그림을 주제로 그와 관련된 그림이야기를 펼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림을 매개로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동안 신화와 종교, 철학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불편한 그래서 때론 부담스럽기까지 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것은 그림 속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를 내 자신의 내면의 숨어 있는 모습과 관련지으며 공감을 불러오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인들의 숙명과도 같은 외로움이나 고달픔과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아버지의 눈길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조금 힘들더라도, 사랑이 조금 벅차더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볼 수만 있다면.”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듯 이 책에서 그림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외부적이며 피상적인 것에 몰두한 나머지 세상을 힘들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매개로 자기 자신을 관(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저자가 자신의 내면과 만나 따사로운 햇살아래서 산책을 즐기듯 행복했기에 그 행복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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