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평전 - 우리 시대에 던지는 오백년 선비의 역사
이성무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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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긍정적 가치를 어떻게 살려야 하나?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주목을 받고 있다. 주목받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요인은 ‘밀본’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정도전의 유지를 담고 있다는 밀본은 무엇일까? 그것의 실제 존재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조선을 개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정도전이 꿈 꾼 나라에 대해 주목하기 때문이다. 정조전은 신하의 나라를 꿈꿨다. 강력한 중앙집권에 의해 왕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은 상징적의미가 크며 실질적인 권력은 신하들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를 설계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을 개창한 태조와 이후 왕권에 도전하는 왕족들과 대결하는 과정에 그런 꿈은 무너졌다.

 

밀본이라는 것이 바로 정도전이 꿈꾼 나라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이는 조선시대 권력을 양분했던 신하들의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권력에 방점을 두고 왕권과 대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하들의 권력의 중심이 되는 의정부를 구성했던 세력들은 누구일까? 고려의 신하와 조선이 개국하며 공로를 세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고려 왕조에 끝가지 충성하며 조선의 신하로는 살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대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선은 기틀을 만들게 된다. 이 중심에 사대부들인 신하들이 있었고 이후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조선은 움직이게 된다.

 

조선을 대표하는 말로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고 한다. 바로 선비들에 사상과 정치적 이념에 의해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움직였다는 것이다. ‘선비’라고 하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조선의 당쟁사와 정치 제도사를 연구해온 저자 이성무의 ‘선비평전’은 바로 조선을 이끌어온 선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문 지면에 연재한 글을 모아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선비의 역사적 유래에서부터 행적, 인간관계, 그들이 지향한 학문, 정치지형도에서의 힘의 역학관계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선비평전’에서 저자는 선비의 개념에 대해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 밝히며 그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가치와 삶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 학문의 중심이 되는 유교문화에 대해서 살핀다. 고려 말 이후 조선조가 진행되는 동안 전쟁이나 당파, 사화 등 각각의 정치지형에서 무슨 역할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며 그들의 사상적 지향점, 정치적 실천 등을 밝히고 있다. 또한 부록 ‘선비와 선비사상’에서는 선비들의 삶의 가치를 지탱해 준 철학과 정신세계를 체계적으로 살핀다.

 

“민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선비들의 덕치를 표방한 것이요, 백성들은 덕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다. 선비들은 지주이자 관료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정치 주체였고, 그들이 내세우는 여론정치도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했다.”

 

조선의 정치이념은 민본정치라고 한다. 이 민본정치가 담고 있는 지향점은 무엇일까? 저자는 선비는 특정한 계급을 형성하며 사회를 지배했다고 이야기한다. 민본의 민은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민은 정치권력의 중심 역할은 한 것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써 백성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선비라고 하는 계급이 가지는 이중적인 모습이 아닐까도 싶다.

 

저자는 본문에서 당파를 이야기하며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당파를 붕당으로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잔재이니 이를 탈피하여 올바른 개념정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제에 의해 정리된 개념이 그것뿐 아니기에 이 모든 것을 고친다면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송시열과 윤휴의 이야기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둘의 입장을 교조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보면서 양비론의 입장을 위하고 있다. 저자 자신의 시각이 무엇인지 밝힐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이 점은 사회적 논의나 공감대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나 전공한 학자의 의견을 밝히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판단의 근거를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이라는 나라와 선비는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였다. 불의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고 저항하거나 때론 권력의 투쟁과정에서 목숨을 담보로 당파를 세우고 반대당파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목숨보다는 의리와 명분이라는 대의를 앞세웠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이념과 가치와는 구별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시각은 저자가 ‘선비정신’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신적 가치로 삼을 수 있을지 조심스런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인다. 선비정신이 담고 있는 긍정적 가치를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깊은 사고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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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치세어록 - 난세를 사는 이 땅의 리더들을 위한 정조의 통치의 수사학 푸르메 어록
안대회 지음 / 푸르메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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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정조의 진면목을 살피다

왕조의 나라에서 권력의 중심은 왕에게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왕조국가 조선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은 권문세도가들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권력과 왕권이 상시적으로 충돌하며 양자의 힘의 구도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었다고 보는 측면이 강하다. 왕권이 강했을 때는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왕을 중심으로 정책이 집행되었으나 그러한 시기에도 신하의 견제를 상시적으로 받았다. 이렇다 보니 왕은 때론 명목상 왕일뿐 일 때도 있었다. 당파에 의한 무수한 사화가 이를 증명해 준다.

 

500여 년 동안 27대 왕을 이어오는 동안 치세를 잘하여 기억되는 왕으로는 몇 명이 되지 않는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 초 세종이나 세조를 비롯하여 후반기에 와서 영조나 정조 등은 나라를 반석위에 올리며 민본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왕들이다. 그 중에서 할아버지 영조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라 재위기간 24년 동안 당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운과 관련되어 어려운 시대를 보냈다. 하지만 정조는 치세기간 중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 설치,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듦, 실학을 발전시킴, 문화적 황금시대 등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김 왕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재위기간동안 정조 왕이 이러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근원한다고 봐야 하는가? 안대회는 그의 저서 ‘정조 치세어록’을 통해 글쓰기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대 통치자들 중에서 정조만큼 글을 많이 쓰고 남긴 왕은 없었다고 하면서 학문하는 왕으로써의 정조를 살피고 있다. 이 책에 담긴 글은 정조의 글을 모아 엮은 ‘홍재전서’를 중심으로 ‘일성록’ 등의 자료에서 몇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선별하고 이 글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달았다.

 

저자 안대회는 정조의 어록에서 선별한 글을 나라의 근간이 되는 힘, 공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 임금의 길, 인재에 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법, 신하에게 이르는 말, 공정한 나라를 위함, 인간 정조를 엿보다 등 총 8가지 주제로 분류하고 묶었다. 왕으로써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권력의 중심에서 신하들에게 내린 교서, 인재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하여 인간 정조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글들이다. 특히, 난세로 표현되는 현대 정치를 돌아볼 때 지금도 정치가들이 머리에 세기고 살펴야 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정치의 근본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길은 백성에게 달려 있고, 백성을 배양하는 길은 먹을 것에 달려 있으며, 먹을 것이 풍족해야 교육이 가능하다. 교육하고 난 다음에도 반드시 조심스럽게 지켜주고 도와주어 이익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큰 근본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3년 뒤 첫 번째 조참에서 반포한 선언에 담긴 내용이다. 조참이란 문무백관이 한 달에 네 번 대궐의 인정전에 모여 국왕에게 문안드리는 의식을 말한다. 정조의 정치 틀을 확인할 수 있는 글로 경제, 인재, 국방, 재정 등에 관한 정조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오늘날 정치에서 무엇이 중심이어야 하는지 살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난히 학문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겼던 왕이 정조다. 또한 세손시절부터 써온 일기를 왕위에 오른 후에도 쓸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정조의 면모는 학문에 갇힌 고루함보다는 가을 산 단풍든 모습이나 국화가 피어있는 풍경을 보는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궁중 음악의 곡조가 빠른 것을 보고도 세상이 돌아가는 세태를 짐작하여 이를 바로 잡기를 지시했다. 감성이 메마르면 세상을 보는 눈도 메마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를 올바로 포용하려는 마음을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정조가 보여준 탁월함은 풍부한 감성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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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밑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라 - 성 초월로 가는 이야기
천명일 지음 / 지혜의나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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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본능에 대한 고찰

2011년 12월 12일, 고등학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화장실 청소를 하는 여학생을 성폭행 했다는 뉴스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하는 개탄의 소리가 많다. 이러한 뉴스를 접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도대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규범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 개인의 탈선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만연해 있는 성폭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기에 충분한 요소를 가진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인간의 기본 욕구 라고 하는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은 생존과 관련되어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가 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의해 변화를 거치면서 왜곡되어 왔다는 점 또한 누구나 알고 있다. 특히,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인간의 정신적 산물 보다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기본 욕구는 자본이라는 괴물과 결합되어 그 왜곡의 강도를 높여왔다.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앞으로도 이런 물질적인 풍요를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길은 요원한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일까?

 

‘배꼽밑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라’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되는 성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 해결을 찾아 나선다. 이 책의 저자는 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속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미워하고 사랑하는 상호작용을 일으킨다고 본다. 즉,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가 바로 성의 속성 때문이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이 성에서 자유로울 때 인간의 근본적 고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 근원적인 이해를 전재로 우주와 인간이 생성된 근원을 찾아간다. 초신성의 폭발과 같은 우주의 팽창이론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저자의 기본적 시각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우주론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어 보인다. 이로부터 인간이 태어나고 근본적으로 성에 대해 종속되어온 역사를 밝히며 인간과 성 본능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성의 속성에 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래 모습을 도출하여 이를 극복해 갈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명상법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명상은 관심법으로 모아진다. 성의 본능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고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동요를 잠재울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몸의 올바른 자세를 이야기한다. 흔히 불가에서 참선하는 자세와 동일한 자세를 취해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고 때론 호흡을 가다듬어 차츰 차츰 성 본능을 잊어가야 한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근본적인 고뇌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가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성폭력 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성에 대한 생각의 차이부터 성의 본능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깨달음의 길에 서서 수행해가는 수행자들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사항이 될 테지만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시각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배꼽밑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라'는 어쩌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일반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 책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성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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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의 향기
제운 지음 / 지혜의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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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는 수행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데 특정한 시기가 있는 것일까? 한창 앞만 보고 뛰어가던 시절은 뒤를 돌아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많고 또 내일에 대한 희망과 꿈이 앞서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생활이 안정되고 사회적 지위 또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될 시기쯤에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가 많아진다. 일상을 살아가는 여유가 생긴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는 것이 주는 또 다른 힘을 느끼며 지금 살아가는 현실에 더 굳건히 발 딛고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이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스님들의 경우는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매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깨달음의 걸음걸이가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하려는 수행자라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문의 향기’는 한 구도자가 걸어온 시간에 대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금 현재의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이라 의미가 있게 다가온다.

 

저자 제운 스님은 19살 나이에 출가하여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다. 스님의 고백처럼 특별하게 부처님 법을 알았거나 그 법 안에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유로 출가하고 사찰과 선방을 두루 거치는 동안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더해간 것으로 보인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세속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곤란이나 어려움은 없을지라도 수행자로 살아가는 동안 경험했던 또 다른 어려움이 담겼다. 아름다운 여인을 대하는 모습이나 해수욕장에서의 일화 몸이 아픈 가운데 치료도 적절하게 받지 못하며 느끼는 심정 등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구도자로써의 모습 뿐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삶 속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에 어쩜 수행자라는 신분에 대한 선입견을 배재하고 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은 기존 스님들이 발행한 책들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점이다.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인 의문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구도의 길을 걷는 수행자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전이나 수행자의 규범에 매이지 않지만 그 속에 나타나는 구도자의 모습은 그래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스님은 다양한 재주를 선보인다. 붓글씨, 집필, 선화를 그리는 등의 일상이 수행자의 삶과 그리 멀지 않은 일이며 그것 속에서 자신이 걸어가는 수행의 방편임을 알아 스스로를 성찰하고 있기에 산문을 들어서는 모습이나 산문을 나서 만행의 길에 선 스님의 모습이 한결같아 보이는 이유 또한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만행이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닦는 온갖 수행을 뜻하는 말이기에 스님의 글 속에 나타난 다양한 행적은 길고 긴 수행의 길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수행자의 모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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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한한 지음, 김미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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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상은 지나간 시간과 더불어 내 안에서 만난다

세상을 만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세상과 만나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일상은 그렇게 세상과 나를 관계 맺으면서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 이외에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든다. 내가 일상을 살아가며 만나는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쩜 잃어버렸거나 잊고 살아가는 내 꿈의 일부가 그 또 다른 세상에서는 현실이 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에 대한 환상은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며 확고한 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의 시간을 살아가며 마치 꿈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가슴속에는 언제부턴가 소망했던 것들이 하나씩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꿈이 어린 시절 하늘을 날고 싶었던 일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해쳐갈 낯선 세상을 향해 외치지 못했던 절망일 수도 있다. 꿈에서 멀어지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삶이라고도 하지만 꿈을 잃지 않았다면 새롭게 맞이하는 내일은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오늘을 내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가는 시간이리라.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1988’이라는 소설의 핵심이다.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 지금까지의 삶이 세상과 단절된 삶이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가지만 그 중심에서 벗어난 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며 곧 내일은 나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말이다.

 

‘1988’은 주인공이 타는 차의 이름이다. 1988년에 생산된 차라고 하니 주인공이 세상과 만나 자신을 가꿔온 시간과 엇비슷할지도 모른다. 차의 나이로 보면 이미 전성기를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면 주인공 역시 세상과 만남에서 이제는 중심부에서 벗어나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아니면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 삶에 대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소설 ‘1988’은 세상의 중심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 친구가 만들어 준 차를 타고 가는 주인공이 또 다른 주변부 인생을 살아가는 매춘부를 만나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지고 있다. 애기치 않게 여정에 들어온 낯선 사람과 다소 엉뚱한 일을 겪으며 살아가다 한번쯤 아주 가까운 곳을 시간차이를 두고 걸었던 일상과 마주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도 없이 지나간 일들이다.

 

‘1988’에서 만나는 길은 두 갈래다. 지금 1988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과 어린 시절 이지 지나간 추억의 길이 그것이다. 그 두 길이 서로 어긋나 결코 만나지 못할 길이 아님을 주인공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먼 길을 찾아와 만나려 했던 친구는 이미 유골이 되었고 낯선 길에서 동행했던 매춘부는 병원에서 사라졌다. 또한 추억의 길에서 들 동행했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 역시 이미 더 먼 길을 떠난 이후다.

 

이 모두는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 온 과거의 시간이지만 이미 멈춰있는 것만은 아니다. 살아갈 시간과 살아가며 만나게 될 낯선 세상 속에서 늘 함께 하는 것이다. 매춘부 나나가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세상에 맞서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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