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과거를 넘어 미래로 가는 길목에 서서
한일 양국 간 해소되지 못하는 민족감정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화해할 수 없는 과거의 역사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역사를 보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대륙의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조선에 와서는 명나라나 청나라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이나 전쟁 또한 자주 일어났지만 유독 일본과의 마찰과 대립은 심한 생채기를 남기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기에 민족감정이 그대로 남아 유지되거나 확대 되는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사회는 국경 없는 사회라고도 할 만큼 세계는 서로는 각국의 이해를 기반으로 활짝 열린 자세로 다른 나라를 대하고 있다. 그것이 자국의 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에 문호를 열고 세계를 대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시대 국경을 맞대는 한일 양국은 묵은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깊어져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해결되지 않고 있는 양국의 문제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100여 년 전부터 일본이 한국에 행한 잊을 수 없는 악행이 바로 그 원인이 아닌가 싶다. 일제 강점기 국권을 빼앗고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벌인 다양한 정책의 기억이 남아 있고 해방이후 우리 스스로 일제 잔재를 올바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여기에 일본 정부가 그간 보여준 대한국 정책은 그러한 감정을 더 증폭시키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해결되지 못한 과거일로 인해 우리 스스로 발목을 밥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결되지 못한 것은 정당한 절차를 밟아 순차적으로 해결해 가면서 요구할 것은 분명하게 요구한다면 양국 모두에게 분명하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민족 간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간 보여준 양국 정부의 일련의 정책에 기인하고 있다.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양국 국민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화해 분위기를 정부의 정책은 역으로 돌려놓기에 일쑤다. 민간차원에서 오랜 시간 노력을 경주해 일궈온 국민들 사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등을 돌리는 결과를 정부들이 하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국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나 양국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대의에서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한 사진작가가 일본을 지속적으로 일본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옛 조선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노역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해 찾기도 어려운 흔적들이지만 남아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일본 내 조선인 강제징용과 그와 관련된 건축물에 대한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작가의 행보는 후쿠오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사카,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 곳곳을 다니며 군부대 진지, 탄광, 광업소, 댐, 해저탄광, 지하 터널, 비행장, 통신 시설 등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 지금 현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은 말이 없다. 하지만 사진만큼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진에 담긴 모습들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다. 말이 없지만 말 없음이 오히려 강한 울림으로 다가선다. 저자의 발길이 머뭇거리고 때론 멈춰선 곳이 어디쯤일지 사진을 짐작하게 만들고 있다. 순전히 사진에 담긴 모습만으로도 지난 시간 조선인들의 삶을 되살리는 것처럼 말이다. 

“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됩니다. 현재 일본 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철도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저자의 발길을 돕고 조선인 강제징용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친 재일 한국인 배동록 씨의 말이다. 애써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에서 울분을 토하지 않을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태도 또한 반드시 살피고 자나갈 일이다. 왜 당당하게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대변하지 못하는지를 말이다. 찾아간 곳 마다 조선인들의 피와 땀의 결실로 만들어 졌지만 유적을 보존하고 기념관이나 체험관을 운영하는 주체들은 어디에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일 양국의 공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 현 시대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현실은 양국의 화해와 공존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견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무엇을 선행되어야 양국의 공종은 가능해 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회빈 강씨 - 소현세자 부인
김용상 지음 / 멜론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조선의 세자빈이다
역사에서 치욕은 무엇일까? 외국의 침략을 받아 강압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일보다 더한 치욕이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이름붙인 사건은 몇 번 있었다. 현재와 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역사에서는 청나라의 침략에 변변한 저항한번 해 보지 못하고 당한 인조 왕 때의 병조호란과 황후의 목숨까지 빼앗아간 일본의 침략에 어쩌지 못한 을사늑약이 있다. 이러한 치욕적인 사건의 원인 무엇일까? 막연하게 침략의 주범이 되는 외국의 탓으로 만 돌릴 수 있을까? 물론 일차적인 원인이야 침략한 외국에 있겠지만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정치가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김용상의 작품 ‘민회빈 강씨’는 우리 민족이 겪었던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인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세자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정치상황은 혼란을 거듭하는 시기였다. 광해군을 모라내고 왕에 오른 인조반정 후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한 논란과 인조반정의 주역들 사이에서 벌어진 세력다툼 등 이미 백성의 안위나 국력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만큼 안정되지 못한 정치 상황이었다. 정적 간에 죽고 죽이는 피를 부르는 정국은 왕이 왕의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왕위 계승문제에도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7년이 넘는 세월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민회빈 강씨는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넘어선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다. 강한 조선을 꿈꾸며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며 훗날을 준비하는 것이다. 성리학이 주류를 이룬 조선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여인들의 삶은 대게 비슷했다. 그러한 여인들의 삶을 표현하는 바로 삼종지도가 그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세자빈 민회빈 강씨가 보여준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당당함을 보여준다.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조선 최초 여성 무역상, 노예로 끌려와 고통 받는 조선인을 속환하기 위해 힘쓴 일,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조선의 개혁과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여인하며 미래 조선을 준비하던 모습은 현대의 눈으로 봐도 당당함이 넘쳐난다. 

저자는 이러한 ‘민회빈 강씨’의 모습에서 "이 시대 여성의 표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소현세자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고자 했던 바는 남성 못지않은 뛰어난 기개와 총명한 재능을 지닌 실용적인 여성 경영자라는 점과 현실을 파악하는 시대적 감각이 탁월할 뿐 아니라 미래 지향적 사고력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상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서 저자의 시각으로 여성상을 찾는다면 바로 ‘주어진 현실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가는 정신’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비운의 삶을 살았고 시아버지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던 세자빈 민회빈 강씨는 끝까지 조선의 여인, 조선 사람으로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나는 조선의 세자빈이다'라는 외침은 허공을 돌아 지상에 강한 울림을 전해준다. 

꿈에도 그리던 조선에 귀국 후 아버지 인조 왕의 태도에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 압박이 얼마였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하여, 가정이 있을 수 없는 역사 앞에 가정을 해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가정을 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함일 것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려는 마음이 역사의 가정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개토태왕비 - 태왕의 연인 여화의 비밀문서
정현웅 지음 / 자음과모음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발걸음이 모여 만들어진다
지나간 역사는 기록물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기록물은 종이게 의존하기 때문에 세월의 무게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에 역사를 보는 것은 매장유물이나 남아 있는 건물, 탑이나 비 등을 발굴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세월의 무게 앞에 자유롭지 못하기에 훼손되기에 이 역시 완전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더라도 역사 기록물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기록에 의존하여 역사를 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기록물에 대한 이해나 해석의 차이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 대두되며 올바른 역사로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뒤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호태왕광개토태왕비’다. 이는 동북아시아 고대사의 판도를 뒤집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에 이해 당사자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유물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다분히 보는 사람에 의해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기에 ‘호태왕광개토태왕비’의 해석을 두고 일본이 주장하는 것이나 중국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처지도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밭침하는 여러 나라의 사료를 함께 검토하며 당시 시대상황을 종합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지난 시간의 기록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거는 현재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근거가 되기에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정현웅의 ‘광개토태왕비’는 바로 그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전면에 두고 있다. 이는 현재 벌어지는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저자의 집필의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태왕의 여인이라는 비중 있는 인물을 설정하여 그 여인이 남긴 개인기록물과 역사서에 담긴 고대 동북아 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고구려 19대 왕 담덕에겐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들 중 이미 두 번에 걸쳐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었던 ‘여화’는 미모뿐 아니라 지방에 근거를 둔 할아버지의 배경으로 지혜와 용기 그리고 무술까지 겸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황후로써 성에 머무는 것이 아닌 전장을 누비기도 하면서 태왕의 재사 역할까지 한다. 그녀가 고조선 이후 고구려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서 발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이를 비밀스런 곳에 남겼다는 것이다.  

시점을 달리하고 있는 작품의 이야기 구성은 처음 시작이 한 대학교수가 중국 흘승골성에서 추락사한다. 자신을 둘러싼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된 교수는 신문기자가 된 제자에게 문건을 남긴 비밀금고 열쇠를 주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을 세상에 발표하라는 말을 남긴 후 일이었다. 일본 학자와 정체가 불분명한 여인 그리고 신문기자가 중국 고구려 유적지를 함께 방문하고 교수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태왕의 황후가 남겼다는 역사서의 행방을 찾게 된다. 

두 시점이지만 주요한 흐름은 ‘여화’의 개인기록물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 기록물은 한 남자를 사랑한 여인이 남자에 마음을 기록하며 당시 국제 정세를 비롯하여 고구려 내부의 정치상황 그리고 업적이 주요하게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역사의 일면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는 작품의 제목 '광개토태왕'과 내용에서 표기된 '광개토대왕'의 차이가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매우 의문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나 전문가의 일만은 아니다. 한나라 국민 모두가 자신이 살아가는 나라의 역사를 올바로 알고 이를 후세에 전하려는 마음이 바탕이 되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리라. 물론 국가의 정책을 책임지는 정부의 의지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근거가 될 것이기에 지금 정부의 역사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에 대한 도발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대안은 그런 마음에 불안함을 전해주기에 심히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지금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우리 정부는 훗날 준엄한 역사의 평가를 어떻게 생가하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 무엇을 봐야 하는가?
그림이 지향하는 목표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것의 정체가 애매모호한 것이기에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다운 것도 다른 사람에겐 그저 그렇게 별 흥미를 끌지 못하기도 한다. 또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에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20세기 들어서며 보여주고 있는 미술의 세계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도 싶다. 무엇이 그림의 세계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이는 분명 사람들이 그림으로 다가서는데 벽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그 벽은 높기만 하다.  

나아가 화가와 그림 그리고 관객 사이를 이어주는 미술평론가들의 해설 또한 어렵기만하다. 갤러리나 전시회에는 마술관련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관객들을 생각하며 기획할 텐데 일반 관객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도 없다. 미술평론가들이 늘어놓는 해설은 단어부터 생소하기만 해서 그림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기일쑤다. 일반 관객으로 현대미술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한 고민으로 찾는 것이 미술관련 해설서들이 아닌가 싶다. 

미학자 진중권의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도 그렇게 찾아 본 미술관련 해설서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급변한 미술사조의 흐름과 더불어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중심에 서 있는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다양해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면서 앞에서 언급한 예술가들의 창작물과 관객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낮추는 방법이 아닌가도 싶다. 

‘야수주의, 입체주의, 순수추상, 절대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신즉물주의, 구축주의, 데스테일, 바우하우스’ 

20세기이후 현대미술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학교 정규교육과정에서 배우긴 했지만 긴가 민가하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이러한 미술 사조의 흐름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에 대한 미학적 관찰을 시도하고 있다. 원래부터 근원을 탐구하는 것은 단조로운 것이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글은 현대미술에 대한 학문적 접근으로는 돋보일지 모르지만 일반 대중의 보편적 시각으로 접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 것이 아닌가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으로 미학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은 것인데 낫선 현대미술의 사조를 이해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평소 그림에 관심이 많고 또한 직접 발품 팔아 다니며 그림을 보고 그림관련 서적을 찾아보는 사람인데도 한 페이지 넘어가기가 어렵다. 그렇더라도 각 미술사조의 대표적인 화가들의 표현물인 작품을 대하는 즐거움은 놓치고 싶지 않다. 그림을 통해 역으로 저자의 설명을 이해해보는 것도 제법 그럴듯한 재미를 준다. 

저자는 미학은 ‘어떤 사안이나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급변하고 있는 현대미술의 경향성을 저자의 이러한 미학적으로 살핀다는 점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일독한다면 높다란 벽을 낮추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생각나무 ART 7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그림을 그림으로 볼 수 있다면?
아름다움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사람들이 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한마디로 아름다움에 대해 정의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미술이다.  

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바로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리려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내 주변에는 늦은 나이에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림 공부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 바쁜 시간을 쪼개고 열정을 쏟아 부여 10여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들 역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몇 년 사이 그림과 관객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림 읽어주는 책’이나 미술관의 ‘기획전시’ 그리고 각종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그림수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사들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보이지 않은 벽에 막혀 멀게만 느껴지는 그림을 누구나 감상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서양화를 대상으로 하는 이주은, 이명옥, 그림과 문학의 함께 이야기하는 고연희, 우리그림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오주석,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손철주 등이 그들이다. 

이렇게 탁월한 혜안을 가진 그림 읽어주는 저자들의 애정 어린 노력으로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열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은 나와는 몇 발자국씩이나 떨어진 곳에 걸려있는 대상일 뿐이 경우가 많은 것 또한 현실이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이 거리는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림을 그림으로 보고 느끼며 즐길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이 이 책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출발점이 아닐까 한다. 

손철주의 책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는 1990년대 말에 출간되어 스테디셀러에 오를 만큼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은 미술교양서책라고 한다.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누리고 싶지만 어떤 방법이 있는지 고민하던 사람들의 가슴에 담긴 그림에 대한 열망을 위해 스스로 첫발을 내 딛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 책은 그만큼 편안하게 만만하게 그림과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리고 그림과 어우러지는 주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최북, 반 고흐, 브란쿠시, 쿠르베, 안견, 프리다 칼로, 마돈나, 피카소 등 이름만 들어도 알 것 같은 유명한 작가들과 이름도 생소한 작가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과 이들의 작품을 통해 작가와 작품이야기, 우리 것 그리고 미술동네, 감상이야기를 비롯하여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 등을 통해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그림을 한발 더 내게로 다가오게 만들어 주고 있다.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듯 사람들은 뒷 담화에 관심이 많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의 관심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격이 떨어지는 속된 이야기들은 아니다. 작가들의 덜 알려진 과거사, 작가들의 빗나간 욕망과 넘치는 열정, 미술시장 얽힌 이야기를 비롯하여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서양화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우리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조선시대 우리 그림의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림과 친해지기 위해선 우선 ‘그림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현대 미술의 난해한 표현들 앞에서면 늘 어색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림은 그냥 그림일 뿐이다’라며 현실에서 자신이 가진 이미지를 허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를 통해 그림에 대한 관심을 마음속에만 가두어 두지 말고 그림 읽어주는 책이든 미술관이든 그 무엇을 이용하더라도 직접 접해보는 기회를 늘려가라고 한다. 알고 본 그림과 그렇지 않고 본 그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기에 이런 느낌은 그림에 대해 더 가까이 다가서는 자신을 발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