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2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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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6.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켄 리우

 

책을 읽으면 언어가 제 몸으로 들어옵니다. 제 몸에 들어온 언어는 나의 뇌리에 박혀서 정신을 형성하고 사고방식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제가 책을 읽으면 그 책들은 저의 정신을 형성합니다. 책들이 저 자신이 되는거죠. 책과 나의 합일.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를 읽기 전에 읽은 책들을 적어봅니다. 알랭 바디우의 <참된 삶>,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예찬>,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정보의 지배>, 포스트모던 사회를 예측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읽은 건 아닌데 읽다보니까 지속적으로 인문학 책만 읽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문학 책들을 계속해서 읽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저 책들의 언어가 제 몸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켄 리우의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를 읽었죠. 이제 <신들은 죽임 당하지 않을 것이다>은 제 머리 속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맥락화되고 구조화됩니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 저만의 맥락화나 구조화를 했는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이 책에는 싱귤래리티 3부작의 프리퀄격인 포스트휴먼 3부작이 있습니다. <신들은 목줄을 차지 않을 것이다>, <신들은 순순히 죽지 않을 것이다>, <신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들의 핵심에는 유물론이 있습니다. 서양 철학의 오래된 사고방식 중 하나인 유물론은 이 세상이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신 같은 비질적인 실체가 있다는 유심론과 오랫동안 대립해왔던 유물론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이 소설들은 인간의 정신활동이 뇌의 뇌파의 상태라는 입장에서 소설을 전개해나갑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인간의 정신은 대뇌스캔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 이후에도 데이터 속에도 살아남고, 데이터 속에 살아남은 포스트휴먼들은 자신들만의 숨가쁜 전쟁을 벌입니다. 그것이 현실에도 영향을 미치고요. 그리고 그들은 최종적으로 인간 이후의 삶을 데이터 속에 준비해두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들이 물질이자 데이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포스트휴먼이 인간 이후의 삶을 준비하며 데이터 속에 구현한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보면 현실의 무게감 없는 정신의 삶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여기서 유물론과 유심론이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유물론의 끝에서 데이터로 구현된 정신의 삶이 유물론과 유심론이 만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짐은 영원히 그대 어깨 위에>는 어떤가요? 저는 이 작품이 경이라는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인류가 우주로 나가서 외계행성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그 행성에는 외계 문명이 남긴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인류는 운 좋게 외계의 언어를 해독해냅니다. 거기에는 몇 십 만년 전에 사라진 자연재해로 사라진 외계문명의 서사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삶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몇 십 만년 이라는 시간의 흔적이 담긴 유적 앞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자연재해로 하루 아침에 사라진 문명의 흔적 앞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할까요? 백년도 안 되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몇 십 만이라는 시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유적 앞에서 저는 경이로움을 느낄 거 같습니다. 이건 칸트가 말하는 숭고와는 다른 감정입니다. 자연의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물 앞에서 느끼는 감정인 숭고에는 경이로움과 함께 공포도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소설에서 느낀 건 공포보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문명에 대한 슬픔. 그리고 그 문명의 이야기를 몇 십 만년 뒤에야 알게 되는 경이로움. 자연 앞에서, 거대한 시간의 힘 앞에서 우리 인간은 그렇게 약하고, 우리 인간이 만든 문명이라는 것도 얼마나 힘이 없는지 깨닫게 되는 감정으로서.

 

<북두>는 어떤가요? 한국의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명군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이 소설은 역사를 보는 다른 관점을 이야기해줍니다. 역사는 승자의 입장이라고 말하며 서양의 역사가들은 근대화과정에서 서양에 패배한 동양의 역사를 진보와 발전이 멈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다른 관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명은 발전을 멈추었는가? 정화의 해외원정 당시 명은 당시 서양문명이 이루지 못했던 발전을 이루었는데 왜 그들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는가? 이 작품에서는 명이 선택을 한 겁니다. 어떤 선택? 세상을 이기심과 자연파괴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며 인간을 더 많이 죽지 않게 만드는 방식의 삶으로. 실제로 이후에 그들의 문명이 실패할지라도 그들은 그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겁니다.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시간대마다 다 답이 다를 겁니다. 지금에서야 서양이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더 미래에는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 지금과는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 때의 선택이 서양에서 말하는 미개한 선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나름의 선택이었다는 거죠.

 

이 외에도 저는 소설들에서 저만의 맥락화를 이루어냈습니다. <루프 속에서>, <1비트짜리 오류>, <장거리 화물 비행선>, <카산드라>, <풀을 묶어서라도, 반지를 물어 와서라도>에서도 각각의 소설들에서 저만의 어떤 특정한 사유의 흐름을 읽어냈습니다. 이 글에서 다 말할 순 없지만 제가 그 생각들을 하게 됐다는 점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앞에 있는 책들의 영향으로 이 책을 읽게 됐다는 명확한 증거이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읽은 책들이 저를 만든다는 사실을, 제가 읽은 책이 저와 저의 삶을 만드는 만큼, 저는 앞으로도 책을 읽어나가며 책에 대해 무수히 바뀌는 많은 삶들을 살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책에 따라 무수히 바뀌는 저 자신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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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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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5.미래과거시제-배명훈

 

N에게 보내는 편지

 

N, 다시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해. 오늘 너에게 이야기할 책은 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 N,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했어. 한국 SF작가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읽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했어. 읽기 어렵다라는 말은 낯설다라는 말로 바꿔쓸 수 있어. 한국 SF작가의 소설에서 내용의 새로움이나 독특함, 설정의 신선함을 많이 만나기는 했어. 그런 것들이 읽기의 어려움을 초래한 적은 없어. 그런데 <미래과거시제>는 진짜 읽기 어려운 소설들이 있었어, 그건 형식의 새로움을 시도했기 때문일 거야. 형식의 새로움이 언어의 새로움으로 그것이 읽기 어려움이자 낯설음을 불러일으킨 거야.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라는 소설을 예로 들어볼게, 이 소설은 미래의 인물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소설이야. 문제는 이 화자가 미래의 언어를 쓴다는 거야. 지금까지 한국 SF에서 미래인들이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은 많았어. 하지만 언어는 현재에 쓰이는 한국어를 썼지.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는 진짜 미래에 쓰이는 한국어를 가상으로 만들어서 소설에서 써. 현재 한국어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은데, 읽는 게 힘들었어. 뭔가 비슷한데 부분부분 이해가 안 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니까 답답한 느낌이 들었어. 그때 깨달았어. 이 책에 낯선 느낌의 소설들이 많은 거라는.

 

<임시 조종사>는 충격적이었어. , SF 소설의 형식을 이렇게 실험적으로 할 수 있구나. SF의 스토리텔링을 판소리 형식으로 풀어내는 형식의 소설인데 개인적으로 읽기는 너무 힘들었어. 읽기는 읽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이 안 되어서. 한문도 많고, 언어도 일반적인 SF에 나오는 것들이 아니어서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미래과거시제>는 실험적인 소설만 있는 게 아니야. <, 어웨이> 같은 짧은 소품 느낌의 소설들도 있고. , <, 어웨이>는 소품 느낌이지만 짧은 농담 같은 느낌이기도 했어. 형식적인 실험은 아니지만 설정상의 새로움이 있는 소설들도 있어. 외계인과 종이접기를 합친 컨셉의 <집히는 신들>, 테드 창의 <우리 인생의 이야기>속 시간관을 로맨스물로 바꾼 듯한 <미래과거시제>, 경제학의 수요,공급 곡선을 SF로 바꾸서어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꾼 <수요곡선의 수호자> 같은 소설도 있어.

 

마지막 소설인 <알람이 울리면>은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소설이었어. 사실 나는 이 단편을 다른 앤솔로지 단편집에서 봤어. 그때도 참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 단편을 읽으면서 갑자기 읽었던 기억이 나는거야. 재밌는 건, 두 번째 읽었는데도 이 책에서 감동이 느껴졌어. 그건 아름다운 이별에 대한 판타지 때문이었어. 나는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힘들다고 생각하거든. 그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이별을 다룬 소설들을 보면 나는 끌리지 않을 수 없어. 이 책에서 말하는 이별, 사랑하는 이를 아름답게 떠나보내는 방식은 나의 마음을 울리고 짙은 여운을 남겨. 그래, 이 책의 내용처럼 나도 이제 너와 행복하게 이별할게. 다음에 또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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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로르의 노래 민음사 세계시인선 2
로트레아몽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197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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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4.말도로르의 노래-로트레아몽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금 누가 이런 책을 읽을까?’라는. 책 안 읽는 제 주변인들은 당연히 읽지 않겠죠. 그런데 제가 나가는 독서모임의 사람들도 이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언급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분들은 이 책의 존재 자체도 모를 겁니다. 그나마 온라인 공간 상에 존재하는 책 읽는 분들 중에는 간혹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수를 따져보면 많지는 않겠죠.^^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아주 소수의 행위가 됩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책을 꾸준히 읽는 분들도 다수라고 보기 힘든데, 그중에서도 소수파에 속하니까요. 소수 중에서도 소수가 읽는 책이니까요.

 

위의 생각은 또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쩌면 이게 특권이 아닐까. 사실 특권이라는 말을 여기에 붙이는 건 이상합니다. 보통 특권이라 하면 특권층이라고 불리는 어떤 상위 계층의 특수한 권리를 의미하죠.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하지만 이 행위를 특권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말이라는 건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권을 어떤 우월성의 표현으로 말하지 않고, 다수가 행하지 않는 소수의 행동 패턴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정의하면 제가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는 행위도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다수는 행하지 않는, 그 다수에 속하지 않는 독서층이라는 소수 중에서도 소수가 행하는, 그 소수마저도 의지를 가져야 할 수 있는 이상한 특권 행위.

 

특권이라는 말을 붙이고 나서 제 행동을 바라보니 이상한 건 맞습니다. 이 특권에는 이득이 없습니다.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는 게 저한테 무슨 물질적 이득이 될까요? 물질적 이득이라는 속물적인 생각을 제외하면 남는 건 정신적인 이득입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남는 건 정신적인 이득인데, 이 책은 그마저도 희박합니다. 어떻게? 이 책을 읽으며 저는 고통을 느꼈으니까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떤 고통을 느꼈을까요? 그건 악마적 낭만주의나 데카당스 문학을 읽으면 제가 종종 느끼는 감정에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감정이나 행위를 문학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는 악마적 낭만주의나 데카당스 문학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탐감이 주는 쾌감을 벗어나다 못해 더욱 더 어둠이나 수렁으로 파고듭니다. 어둠이나 수렁으로 떨어지는 이 행위들을 들여다보면 저는 고통을 느낍니다. 왜 저렇게 하는 거지? 왜 살인을 예술이라고 하는거지? 내가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거지? 이 생각들은 결국 이런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왜 이런 책을 읽는 것일까? 독서를 하다가 독서 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면 독서 행위 자체를 이어가는 게 너무 힘들어집니다. 여기서 저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말도로르의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말도로르라는 가상의 화자를 내세워 세상에 대한 화자의 저주와 혐오를 노래합니다. 저주와 혐오로 가득한 화자는 세상에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범죄라고 부르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부르주아 가정의 행복을 박살내고 싶어하고,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식의 정상적이고 안락학 삶을 부정하려 합니다. 이 노래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현실의 의지를 노래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내면 세계 속에 구축된 어떤 환상을 노래로 옮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겁니다. 왜 이런 책을 읽냐는. ...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주와 혐오를 노래하는 시이지만, 내용과 상관없이 시의 언어로만 놓고 본다면 분명 어떤 문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미의 역사>와 대비되는 <추의 역사>를 통해서 이 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제가 말한 추함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는 추함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가 담겨 있죠. 보들레르를 따라서 생겨난 문학 유파들은 추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들을 짓게 되고요.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이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내용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겁니다. 아름다움은 생득적인 게 아니고, 사회화 과정과 교육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겨난 겁니다. 미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사회와 국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추함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과정은 또다른 아름다움을 알아가면서, 내면에 또하나의 아름다움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 또한 책들을 읽으며 이 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로서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에게 <말도로르의 노래>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저 시의 언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진짜 아름답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거죠. 여전히 저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에 물들어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굳이 벗어날 필요를 못 느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상의 일반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벗어날 가능성도 포기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꾸준히 이런 책을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 책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라는. 이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 가능성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 아마도 이게 제가 생각하는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으면서 떠올린 저만의 특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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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07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추하고 역겨운 내용들이 가득해서 아무도 안 읽는 책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

짜라투스트라 2023-05-07 19: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진짜 딱 맞는 말인 듯 합니다.
 
서쪽 바람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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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서쪽 바람-메리 올리버

 

대체적으로 시는 서정의 장르이고, 소설은 서사의 장르라고 합니다. 물론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로 자처하는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이는 소설이 서사의 장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제 말은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서정의 장르이기에, 시인이 느낌 감정을 서술하게 됩니다. 소설은 서사의 장르답게 소설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서술합니다.

 

서정 장르라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시가 독자에게 시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시키는 건 아닙니다. 소위 모더니즘이라든가 포스트모더니즘, 실험적인 시들을 쓴다는 시인의 시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읽어본 경험으로는 이런 류의 시들에서 시인의 감정은 쉽게 파악이 안 됩니다. 실험적이고 난해하게 표현된 언어들 속에서 시인의 진의는 감추어진 채 독자는 언어의 미로를 헤매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운 시들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시를 더 좋아합니다.

 

메리 올리버의 시는 제가 좋아하는 서정 장르로서의 시에 해당합니다. 어려운 단어도 없고, 시인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거나 감정이입하기 쉽기에. 주로 자신이 자연을 거닐고 바라본, 자연에서 파악한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메리 올리버의 시들을 읽다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할께요. 시인이 마주친 자연의 아름다움은 모두 순간적입니다. 이 때의 순간이란 오직 현재뿐이라는 말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오직 현재뿐이란 의미에서의 현재. 하지만 이 현재의 아름다움은 시인에게 영원합니다. 모순적인 말이긴 한데(^^;;) 시인에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합니다. 한 순간의 아름다움이 시인에게 영원히 뇌리에 남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지나가면 사라지지만, 시인의 뇌리에 영원히 남아서 시로 구현됩니다. 순간적인 영원의 아름다움으로. 시인은 순간에서 영원을 보는 겁니다.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러나 이 영원의 아름다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해보죠.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봅니다. 현재로 존재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하지만 거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저는 <서쪽 바람>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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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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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젊은 남자-아니 에르노

 

<젊은 남자>에서 여전히 아니 에르노는 솔직합니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는 여전히 자신의 심리와 삶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봅니다. 과거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글로 써내는 아니 에르노의 스타일은 이 작품에서 여전합니다.

 

, <젊은 남자> 이야기도 안 하고 바로 아니 에르노 스타일을 말해버렸네요.^^;; 늦었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젊은 남자>50대의 여성인 20대 대학생인 젊은 남자의 연애 이야기를 50대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낸 소설입니다. 아니 에르노 특유의 오토픽션으로서, 저자가 과거에 실제로 겪었던 연애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50대 여성의 연애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 더 젊었던 시절의 연애 경험을 다룬 <단순한 열정>과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단순한 열정>에서 아니 에르노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열정을 보여주면서, 열정으로 가득한 연애의 현장을 독자에게 전합니다. 그에 비해 <젊은 남자><단순한 열정>보다는 차분하고 조금 더 정제된 느낌의 연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다가옵니다. ‘20대의 나와 함께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체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시 사는 기분으로서의 연애. 그에 비해 나는 젊은 남자에게 미래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젊은 남자는 나에게 과거의 삶을 나타내고, 젊은 남자에게 나는 미래를 표현하는 셈이죠.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 책을 쓰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던 는 자신의 임신중절수술의 경험을 다룬 <사건>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면서 젊은 남자와 헤어지게 됩니다. 자연럽게 이별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서른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연애의 생성소멸을 짧은 내용에 밀도감 있게 담아낸 <젊은 남자>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작가 경력을 이어가는 아니 에르노의 작가로서의 삶은 지속되기에 그녀의 글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로서의 저의 삶도 계속되고 있기에 아니 에르노와의 저와의 만남은 계속해서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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