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슐리외 호텔 살인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
아니타 블랙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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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리슐리외 호텔 살인-아니타 블랙몬

 

처음에는 화자인 나의 모습에 답답함이 치밀었습니다. 아니 똑똑한 것처럼 말하던 사람이 왜 온통 당하기만 하는거야. 범인을 모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 추리소설의 관행상 초반부, 중반부에는 화자인 나가 범인을 알 수야 없지. 그런데... 범인을 모르고 제대로된 추리를 못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구. 그렇다고 왜 바보 같은 행동을 계속하는 거야. 누군가의 협박을 당했으면 그 협박에 조금 더 괜찮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협박범을 잡겠다고 혼자서 난리치다 돈만 뺐기고 위험에 처하냐구. 혼자서 무언가 하는 거 보다 다른 이를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더 괜찮은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지속되는 추리의 헛발질은 알고는 있었지만 보다보니 너무 답답함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마지막에 진상이 드러나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소설에는 셜록 홈즈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는 셜록 홈즈가 없습니다. 홈즈 같은 명탐정이 없는 대신, 다수의 왓슨들과 레스트레이드 경감 같은 무능력한 경찰들이 있죠. 홈즈가 없고 왓슨과 레스트레이드들만 있기 때문에 이 작품에는 누군가 나서서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걸 기대하는 건 어렵습니다. 대신에 무수한 추리의 헛발질과 사람들의 오류,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의심과 모두를 의심하는 경찰의 눈초리만 있죠. 하지만 무수한 오류들이 더해지며, 사람들의 헛발질과 노력이 더해지고, 거기에 우연들이 합해지며 리슐리외 호텔에서 일어난 사건은 진실이라는 햇빛으로 다가갑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머리로서 해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들이 맺어나가는 관계의 힘과 그 관계의 힘에서 인간들 다수의 의견이 더해지며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 비범한 한 사림이 아니라 평범한 다수가 합쳐서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 아무래도 저는 변태인가 봅니다.^^;; 이런 클래식한 정통 추리 소설에서 평법한 이들의 연대, 함께 하면 더욱 더 강해지는 관계의 힘 같은 이상한 관념들을 보니까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저를 이런 관념쪽으로 몰아가나봐요, 어쨌든 클래식한 정통 추리 소설에서는 비범한 엘리트가 주도하는 엘리트주의가 정통이고, 이런 평범한 이들의 연대로서 해결되는 구조는 이단이니까, 이 소설은 이단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재미있는 추리로설 정도로만 결론 내리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왜 <손에 손잡고>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거죠.^^;;;


*진짜 <손에 손잡고> 노래 듣고 있습니다. 노래 참 좋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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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2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 그린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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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정치신학-칼 슈미트

 

칼 슈미트는 분노했다라는 글을 썼다 지웁니다. , 다시 써야지. 이번에는 솔직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야. 저는 <정치신학>을 세 번째로 읽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는 감정을 가진 채 다 읽었습니다. 이해 못했지만 일단 다 읽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두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읽으면 되잖아. 두 번째 독서를 시작하기 전, 저는 이미 칼 슈미트의 책들을 어느 정도 읽은 상태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저는 두 번째 독서 전에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정신현상학>,<존재와 시간>,<에티카>,<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같은 서양철학의 고전들을 읽어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쉽게 읽겠지. , 맞습니다. 두 번째 독서는 첫 번째 독서보다 쉬웠습니다. 뭐야,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었잖아. 이건 철학서라기 보다는 논적을 격파하기 위한 정치 팸플릿 같은데. 하지만 이건 오만이었습니다. 첫 번째 독서보다 이해를 더 하긴 했지만 제가 <정치신학>을 이해하는 건 아직 멀고 먼 길이었죠.

 

세 번째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앞의 두 번과는 달리,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고 몇 번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될 때까지 들여다보고, 앞으로 갔다가 다시 앞 부분을 확인하고 뒤로 돌아오는 걸 몇 번을 반복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잠시 덮고 여러번 생각을 하고, 그러고서 다시 책을 펼치고. 다시 앞부분을 읽고 또 읽고. 100페이지가 조금 넘은 얇은 책인데 책을 다 읽는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독서가 섣부른 도전이었고, 두 번째 독서가 자신감으로 읽은 독서였다면, 세 번째 독서는 꼭꼭 씹어 읽기였습니다. , 저는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꼭꼭 씹으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 읽고 이렇게 서평을 쓰려고 이렇게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칼 슈미트는 분노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와 정치가들의 행동에. 그들은 의회에서 투표하고, 토론하고, 논의하고, 이야기하면서 눈앞에 닥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것처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 앞에서 독일의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초인플레이션에, 실업률에, 적자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의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선거를 통해서 당선된 이들이 만든 정부가 위기를 넘기기는커녕 허둥지둥, 혼란스러워 하다 다시 선거를 해서 뽑히면 다시 허둥대고 혼란스러워 하고 이게 뭐란 말인가. 아니 이런 식이라면 굳이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건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무능한 정치가 이런 위기 상황 앞에서 왜 필요하단 말인가? 앞으로도 쭈욱 이런 식이라면 민주주의는 필요가 없지. 강력한 힘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아니 더 나아야만 해. 왜냐하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더 나쁠 이유가 없잖아. 그래, 맞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의 통치가 필요해. 강력한 힘을 가진 결단으로 이루어진 결단주의적 정치. 그게 독재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

 

칼 슈미트는 위기 앞에서 무능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정부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부를 원했다. 그가 보기엔 토론하고, 논의만 하며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지도 못하는 지금의 민주주의 정부보다는 강한 결단력을 가진 주권자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부가 더 좋은 정부였다. 지금의 정부보다 그 정부가 더 못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칼 슈미트는 저런 생각에서 자신의 논적들을 논파해나가는 책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법실증주의 같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념들을 논파해나가는 책을 쓰며 그의 정치 이념인 결단주의는 점점 공고해진다. <정치신학>은 그 책들 중 하나의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법을 실증을 통해 만들어진 법규범으로만 파악하는 법실증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 무정부주의를 논파해나간다. ...

 

책의 초반부는 법을 법규범으로 파악하며 과학적 객관성을 강조하는 법실증주의를 비판합니다. 칼 슈미트는 법실증주의가 형식만 강조하며 실제 현실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법이 현실을 반영하려면 주권자의 결단이 들어가는 법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3장에서는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라는 말로서 시작하며 현대 국가론의 개념들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말합니다. 중세 때 신 중심의 국가론에서 중세가 지나가며 왕 같은 지도자들이 신에게서 권력을 이어받았다는 왕권신수설 같은 이론이 이어졌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인민이 주권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론이 나온다는 식으로. 정확하게 도식화하면 신에서 왕으로, 왕에서 인민으로 주권자의 개념 변화를 이야기하며 그걸 정당화하는 신학적인 논의가 정치이론의 핵심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드 메스트르, 보날드, 도노소 코르테스 같은 반혁명주의자들을 언급하며 무정부주의자들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드러냅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고 말하면, 반혁명주의자들은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며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다고 말하는 식으로.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도 두 입장은 상이합니다. 무정부의자들에게 인간이란 선한 존재이며 모든 악은 신학적 사고와 그 파생물의 결과라도 말합니다. 그에 비해 반혁명주의자들은...

 

그의 인간 멸시는 끝 간 데를 모른다. 인간의 맹목적 오성, 연약한 의지, 육체적 욕구의 천박한 분출 등은 코르테스가 보기에 매우 처참한 것이었고, 이 창조물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철저히 그려내기 위해서는 인간 언어의 모든 어휘로도 모자랐다. 신이 인간이 되지 않았더라면-“내가 짓밟는 도마뱀도 인간만큼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었을 텐데.” 그에게는 대중의 어리석음도 지도자들의 무식한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놀랄 만한 것이다. 그의 전방위적 죄악시는 청교도들보다 더하다.

...

그의 역사철학에서 악의 승리는 명백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단지 신의 기적만이 그것을 막는다. 인류사에 대한 그의 인상이 표현된 비유는 공포와 전율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모두 입구나 출구나 구조를 모르는 미궁 속을 마구잡이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으며 이를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또한 인류는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배이며, 그 안에서는 뜻하지 않게 타게된 반항적이고 천박한 승무원들이 떠들고 춤춘다. 신의 분노가 이 반항적이고 난폭한 이들을 바닷속으로 처박아 침묵이 지배하는 날까지.(p.80~81)

 

국가를 사람들보다 우위에 두고, 인간의 선함 보다는 악함에 기대며, 통치자의 절대적 권위를 중요시하는 반혁명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항하며 독재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독재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는 이 책은 결국 칼 슈미트의 생각도 독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결단과 독재를 강조하는 칼 슈미트가 나치의 어용법학자가 되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나요? 학살과 독재와 폭력과 파괴로 점철된 2차대전과 폐허로 가득한 독일의 몰락이 결과죠. 그렇습니다. 독재로 끝나는 <정치신학>의 현실적 결말이 전쟁과 국가의 파괴라는 걸 생각해봤을 때, 저에게 <정치신학>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예고하는 예고편처럼 보입니다. 칼 슈미트의 논리가 가닿은 지점이 저기라면 저에게 칼 슈미트는 공포의 사상가이고 그의 책은 공포스러운 책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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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꾸러미 2023-02-12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어떻게
독자가 받아들이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고 백신으로 순기능할 수도 있는
책인거 같아요.

짜라투스트라 2023-02-12 22:14   좋아요 0 | URL
실제로 많은 후대의 사상가들이 칼 슈미트의 사상을 자기 식으로 변형시켜서 쓰기도 했죠.
 
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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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어슐러 K. 르 귄의 말-어슐러 K. 르 귄, 데이비드 네이먼

 

2018년에 어슐러 K. 르 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SF와 판타지 소설들을 쓴 작가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현실로서 와닿지 않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이 쓴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못한다는 사실도 체감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 때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저는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케스는 가상의 세계인 마꼰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속 도서관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어슐러 K. 르 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우주 속 어딘가 낯선 행성에서 살면서 앤서블로 헤인 문명과 통신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죠.

 

그러나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르 귄이 이 우주의 낯선 행성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지구에서는 가능하지 않죠. 2023년의 지구를 살아가는 제가 르 귄을 만날려면 르 귄이 썼거나 르 귄이 나오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글이긴 하지만 현실의 존재감을 가진 르 귄이 존재하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읽는 것도,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글에서는 살아 있는 르 귄을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르 귄이 나눈 인터뷰를 담은 책이라서 더욱 더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했거든요.

 

<어슐러 K. 르 귄의 말>에서 르 귄의 존재감이 강력한 이유는 르 귄이 평생동안 해온 글쓰기에 관해 인터뷰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평생동안 했던 글쓰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르 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삶에 녹아 있는 자신의 사상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살면서 익혀온 것들, 글쓰면서 경험한 것과 글로서 토해낸 자신의 생각들을. 그러면서 르 귄은 지금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인터뷰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글로서 자신의 인생의 생명력을 남긴 것처럼.

 

이제 조금 더 책에 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책은 르 귄이 써왔던 글 중에서 세 장르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과 시와 논픽션.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파트마다 나누었던 인터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설 파트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목소리에 관한 언급이었습니다. 르 귄은 소설을 쓰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소설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내면에 누군가가 있고 그 목소리에 따라서 글을 쓰는 것처럼. 목소리에 따라 쓰다보면 소설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그것이 소설을 만들어나간다고 합니다. 목소리와 리듬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문법 규칙의 시대성, 문학의 정전에서 지워지기 쉬운 여성 작가들, 소설에서 현재시제와 과거시제의 사용, 소설에서 사용되는 시점들의 차이, 소설에서 갈등에만 집착하는 것의 문제점, 장르소설이 문학으로 인정받게 된 것의 의의, 도가와 불교 사상의 영향, 새로운 변화를 맞은 출판 시장의 모습까지.

 

다음 인터뷰는 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았는데 르 귄은 꾸준히 시를 쓰고 발표해온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장르문학을 쓰면서 시를 계속해서 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장르 문학의 상상력이 시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르 귄은 시를 쓰는 건 소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시는 소설과 다른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건 확고한 무언가가 지시하는 느낌이 아니라 일종의 생명력이 있는 가능성 같은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르 귄이 시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건 리듬입니다.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그것이 시의 형식이 되고, 시의 형식 속에서 박자와 소리가 빚어지면서 음악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르 귄은 그게 신비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르 귄은 자신이 사랑한 시인들에 말합니다. 낯선 언어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만났고, 자신이 직접 번역하면서 그 시들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고 해요. 그리고 운율이라는 형식에 얽매여 쓰다보면 역설적으로 자유시보다 더 자유를 얻게 된다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재자들은 시인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며 시에 대한 인터뷰는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인 세 번째 인터뷰는 논픽션에 관한 것입니다. 르 귄은 긴 작가 생활에 비해 논픽션 책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르 귄 자신이 논픽션 쓰는 것을 힘들어하고 잘하지 못한다고 여겨서랍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서사에 익숙해졌고, 서사를 이용한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글쓰를 계속 해온 인물로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사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는 논픽션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그래도 많은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르 귄은 몇 권의 책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남겼습니다. 그 내용들은 다채롭고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는 문학 해석에 대한 비판, 상상력을 푸대접하는 미국 현실에 대한 고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이용하는 글쓰기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현실, 오직 인간에 대한 이야기만 함으로서 축소된 인간의 현실 반경에 대한 안타까움, 문학의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작가들에 대한 아쉬움, 주제 사라마구와 마거릿 애트우드와의 이야기까지. 마이클 셰이본이라는 작가의 행동에 대한 글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마감됩니다.

 

인터뷰를 다 보면서 든 생각인데, 르 귄의 상상력은 현실이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 전혀 다른 낯선 곳에서 상상력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현실에서 힘을 얻어 상상력을 꽃피우는 거죠. 리얼리즘 작가들이 현실에서 힘을 얻은 현실같은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 거라면, 르 귄 같은 이들은 현실에서 힘을 얻어 가상 세계의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장르문학을 만든 겁니다. 그녀가 써온 글들, 그녀가 행항 인터뷰가 그걸 증명하죠. 끝없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글을 개척해온 르 귄. 이제 그녀는 현실의 지구에 없습니다. 하지만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남아있죠. 어쩌면 르 귄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글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의 씨앗을, 자신의 글을 읽은 이들에게 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르 귄의 글을 읽은 이들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꽃피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르 귄이 했던 일들을 이어가는 상상력의 계승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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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장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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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녹색의 장원-윌리엄 허드슨

 

이 소설은 <정글 북>, <타잔> 등으로 대변되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소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백인 남성 주인공, 이상적이고 신비한 여인, 생명력 넘치는 야생의 자연, 어딘가 열등해보이는 원주민, 제국주의, 인종주의, 오리엔탈리즘, 백인 우월주의, 남성 우월주의, 식민주의, 문명과 대비되는 자연... 여기까지보면 <녹색의 장원>은 더 이상 읽을 필요도 없는 그 시대 소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자세히 살피보면 어딘가 다른 면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이 균열점이 소설에 존재한다고 해야할까.

 

이 소설이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은 백인 남성의 실패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타잔>, <솔로몬 왕의 금광>, <잃어버린 세계> 같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은 백인 남성의 성공 서사기 기본적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벨의 삶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아벨은 베네주엘라의 정치적 전복을 꿈꾸다 들켜서 도주합니다. 첫 번째 실패죠. 두 번째로 아벨은 야생으로 가서 황금을 찾는 엘도라도식의 꿈을 꿉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아벨은 황금을 찾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아벨은 야생의 숲에서 만난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을 꿈꾸지만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네 번째로, 아벨은 숲에서 만난 원주민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리마를 죽인 원주민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원주민들끼리 싸움으로 살육을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야생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일체감으로 육식을 금하던 리마 때문에 하지 못하던 육식을, 리마가 죽고 나서 숲에서 자기 파괴적으로 지내다 무기력한 동물들을 잡아먹으면서 행하게 됩니다. 아벨은 죽은 원주민의 눈을 보면서, 육식을 행하면서 생각하는 자조와 자괴의 생각하면서,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긴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자각합니다. 정확하게 보면, 아벨은 원주민들보다 더 악한 행동을 한 것이죠. 이건 아벨이 가지고 있는 백인우월주의 실패라고 할 수 있죠.

 

위에 적은 것만 보면, 이 소설은 백인 남성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백인 남성 성공 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의 공식과는 다른 면이 있는 것이죠. 그러면 왜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일까요? 추측이긴한데, 그건 작가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윌리엄 허드슨은 아르헨티나에서 미국 국적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그는 영국으로 가서 문인 생활을 하게 되죠. 문명에서 살며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그리워합니다. 그는 정체성만 보면 아르헨티나인이자 영국인이자 미국인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는 완전한 아르헨티나인도, 미국인도, 영국인도 아닙니다. 세 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 나라 사람이 아닌거죠.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어딘가에 있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백인 남성이지만 백인 남성 중에서도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그는 백인 남성 중심주의에 완벽하게 젖어 있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작가로서 그의 모호한 정체성이 이 소설에 반영된 탓인지, 백인 남성 중심주의와 동시에 그 이념의 실패와 균열이 소설을 맴돌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의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영국이라는 문명 속에 살며 남미의 자연을 그리워한 작가 윌리엄 허드슨은 남미에서 식민주의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영국에서 그는 가난한 삶도 경험했고, 기인으로서의 삶도 살았습니다. 문명과 자연을 모두 경험한 인물로서 그는, 백인 남성의 식민주의가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미의 자연에서 아벨의 지속적인 실패는 이런 그의 경험이 반영된,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살육으로 몰아가는 건, 남미 식민지 역사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의 실패 또한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와도 이어집니다. 이렇듯 가득한 실패는 작가의 삶을 반영한,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과 다른 소설의 등장으로 형상화됩니다.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하고 나니, 제가 무언가 이 소설의 포장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확실한 건 이 소설이 다른 빅토리아 대중 문학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백인 남성의 실패로 점철된 소설, 자조와 자학, 망상을 거쳐 자기 정당화로 이어지는 백인 남성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낸 소설은 백인의 승리, 백인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다른 빅토리아 대중문학과 다를 수밖에 없죠. 마지막의 아벨의 자기 정당화는 동시대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위선과 허구와도 이어지죠. 죽은 리마를 다시 만날거라는 환상을 품고 자기 삶을 정당화하는 아벨의 모습은, 폭력과 학살, 착취로 가득한 유럽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그 시대 백인 남성들의 모습과 겹치죠.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정당화 속에서도 윌리엄 허드슨은 백인 남성들의 현실을 맴도는 실패와 위선, 폭력과 착취,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의 허구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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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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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쇳밥일지-천현우

 

1.

<쇳밥일지>의 마지막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저자인 천현우 씨가 고향인 마산을 떠나는 걸로 끝납니다. 그래, 이제 과거 같은 번영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의 친구들, 고마운 어른들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이 있다. 지금은 비록 돈을 벌러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들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 오고야 말리라.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나 나름의 역할에 충실하리라. 비록 몸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오늘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쇳밥꾼들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주머니에 실패한 연인처럼 구겨져 있던 천원짜리 석장을 꺼냈다.

고향을 떠나기 전, 풀빵이 먹고 싶었다.(p.287)

 

2.

고향을 떠나는 천현우 씨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면서, 저는 책을 덮습니다. , 좋았다.. 이 말이 떠오르네요. 다시 생각해봅니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저는 좋았던 걸까요? 책이 좋은 이유는 책마다 다를 겁니다. 어떤 책은 서사의 힘으로, 어떤 책은 논리적 정합성으로, 어떤 책은 아름다운 문장의 힘으로, 어떤 책은 사유의 기발함으로, 또 어떤 책은 상황에 딱 들어맞는 비판의 유효성으로. 이렇듯 책이 좋은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 중에서 <쇳밥일지>가 좋았던 이유는 뭘까요? 제가 보기에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 책에 넘쳐 흐르는 삶의 힘 때문인 것 같습니다.

 

3.

<쇳밥일지>는 삶과 밀착한 책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공장에 다니며 쇳밥을 먹으면서 살아왔고, 그 과정을 가감없이 진솔하게 기록한 책답게, 이 책은 저자인 천현우 씨의 삶의 모습과 양상이 가득합니다. 공장 나가서 용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그 와중에 사랑도 하고, 산재사고도 겪고, 눈앞에서 다치는 사람들을 보고,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마주치고, 빚덩이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아픈 부모님을 돌보고, 사랑도 떠나보내고, 독서도 하고, 세상을 더 알아가고, 운동도 하고, 친구 만나고, 어떤 때는 눈앞의 일에 안주하고, 어떤 때는 우울해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깨달음도 얻고, 운좋게 자신이 쓴 글이 알려져 글쓰는 일도 하는 등의. 읽다보면 책 속에 가득한 삶의 힘이 독자에게 전해져옵니다. 삶의 힘을 건네받은 독자는 저자의 삶에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의 삶 그 자체가 독자에게 설득력으로 다가오니까요.

 

4.

때로는 삶이 더 영화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서평을 쓰니까 영화보다는 문학이라는 말이 맞겠네요.^^;; 때로는 삶이 더 문학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는 <쇳밥일지>의 천현우 씨의 삶이 그랬습니다. 바람기 가득한 아버지, 친모 같은 애정을 준 양어머니, 생모와 지내면서 받았던 가정폭력과 학대, 크게 다쳐서 찾아온 아버지 때문에 과거의 양어머니와 다시 살던 일, 가난했던 나날들, 서울 말씨 때문에 괴롭힘받다 게임 잘해서 괴롭힘을 극복한 일.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나가면서 공장 일을 하면서 겪은 일들, 사랑과 좋은 이들과의 만남, 부조리한 일들과 힘겨움과 고통, 글쓰기를 통한 새로운 삶의 기회까지의 과정도 마찬가지처럼 만만치 않습니다. 본인에게는 평범한 삶의 과정이었겠지만, 그 삶을 글로서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삶의 영역을 들여다보며 생생하게 체험해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이 글이 되는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문학적인 효과를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것에 독자가 참여해서 그 합일의 과정을 체험하는 것. 이 과정이 좋았기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걸 혼자 가슴 속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요.^^;; 아무튼 저자인 천현우 씨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하하면서 저 또한 천현우 씨 삶과의 만남을 끝내고 저의 삶이라는 세계로 다시 떠나가겠습니다.

 

청년공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는 힘들고 꾸역꾸역 생존은 가능한 나날이었다. 그때의 시간들. 고와 낙이 있었고, 땀과 눈물이 있었으며, 희망과 좌절이 공존했고, 꿈이 짓이겨졌다가 다시금 피어났던 과거를 문자로 남겨보고자 한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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