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棺), 마차(馬車), 청춘의 마지막 눈물에 관하여.
부성애의 화신(化身)을 담은 허름한 관(棺), 귀족 문장(紋章)으로 장식한 텅빈 마차 두 대의 행렬, 라스티냐크의 오열. 내게 새겨진 이 소설의 이미지다.
고리오 영감은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시대에도 사업에 성공한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 귀족들과 결혼한 두 딸들에게 재산을 다 쏟아주고, 가난하고 병들어 하숙집의 허름한 방에서 죽는다. 딸들은 자신의 욕망에만 몰두해 있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마지막까지 다 털어가고, 장례식에 빈마차를 보낸다. 아버지의 관을 딸들이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들의 배은망덕은 “레몬을 꽉 짠 다음에 레몬 껍질을 길 모퉁이에 던져 버린 것(민음사 p.108)”과 같다. 이 소설에서 고리오 영감은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부성애(父性愛)의 화신이다. 그가 주인공일까?
라스티냐크는 시골에서 올라와 공부하는 법학생이다. 그는 파리의 삶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가난에 대해 깨닫는다. 성공한 삶을 위해서는 공부해서 법관이 되는 것보다 더 빠른 길이 있음을 보고 알게 된다. 다른 남성들이 하듯, 여성 후견인을 통한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는 보케르 부인의 하숙에 살고 있다. 이 하숙이 위치한 뇌브생트주느비에브가의 모습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한다. 가난이 배어있는 곳이다. 그들이 사는 방에서는 “언어 속에는 명칭이 없는 냄새”가 난다. 그것은 “고리타분한 냄새, 곰팡이 냄새, 기름 썩는 냄새(을유출판사 p.7~8)”이다. 작가는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을 사용하여 이 거리의 가난을 표현하고 있다.
이 하숙은 자본주의의 계급구조를 그리고 있다. 2층이 하숙비가 가장 비싸고 위로 올라가면서 허름해지고 하숙비도 싸진다. 2층에는 쿠튀르 부인 빅토린 타유페르, 3층에는 푸아레 노인과 보트랭, 4층에는 미쇼노, 고리오 영감, 으젠 드 라스티냐크, 그리고 다락방에는 이 하숙집에서 일하고 있는 크리스토프와 실비의 방이다. 그들이 이 하숙집에 들어오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2층에서 3층으로 계급이 하락하고 누추해지는 고리오 영감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은 곱지 않다.
고리오 영감의 사랑은 읽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딸들에게 맹목적이다. 보트랭은 라스티냐크에게 살인방조를 해서라도 출세하도록 해주겠다고 하며 접근한다. 사회의 부패를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데 능란한 사람이다. 그의 정체가 탈옥수임이 밝혀진 후, 그의 유혹에 흔들렸던 라스티냐크는 자신이 굴러 떨어질 뻔한 “심연”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라스티냐크를 중심으로 고리오 영감과 보트랭이라는 인물을 배치한 것은 라스티냐크의 욕망과 그가 욕망하는 파리 사교계 사람들의 삶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라스티냐크가 주인공이다.
라스티냐크는 죽어가는 고리오 영감을 곁에서 돌보고, 장례를 치러준다. 허름한 관에 싣고, 초라한 장례미사를 드리고, 묘지로 향하는 길, 그의 슬픔이 서서히 빌드업 되어 간다. 그 슬픔은 묘지 일꾼들이 요구한 20수를, 그 적은 돈조차 없어서, 하숙에서 일하는 크리스토프에게 빌려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러 폭발한다.
“두 명의 무덤 파는 인부가 관을 덮으려고 몇 삽의 흙을 퍼서 관 위에 던진 다음에, 그들은 다시 몸을 일으켰고, 그들 중 하나가 라스티냐크에게 말을 걸면서 팁을 요구했다. 외젠은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한 푼도 없어서, 크리스토프에게 20수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이 일이 라스티냐크에게 끔찍스러운 슬픔의 발작을 일으켰다. (을유출판사 p.242)”
그 슬픔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라스티냐크가 무덤에서 언덕으로 올라가 파리 시내를 바라보며 “이젠 우리 둘의 대결이다”라고 한 말은 “청춘의 마지막 눈물을 묻고”, 성공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그가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뒤싱겐 부인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추측을 하게 한다.
사교계에 목을 매고, 신분 상승을 위해 부유하고 나이 많은 기혼 여성이나 남성을 후원자로 삼는 것이 공공연했던 시대였다. 고리오 영감의 딸들의 부덕(不德)은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미덕은 변한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존재 윤리는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나는 우리 사회에 로쟈나 외젠과 같은 청년들이 많아질까? 하고 걱정한다. 왜 항상 생각의 끄트머리는 같은 지점을 맴도는지….
- <인간 희극>에 관하여.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은 자신이 쓴 작품 전체에 <인간희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전집’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희극 La comédie Humaine》이라는 제목은 단테의 『신곡La Divine Comedie』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고리오 영감』에서도 하숙집이 있는 거리 묘사 중,
“마치 여행자가 지하 묘지를 구경하러 내려갈 때,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감에 따라, 햇빛은 점차로 줄어들고 안내자의 노래 소리는 굴속 밑으로 빨려 드는 것과도 같다. (『고리오 영감』 을유출판사p.5)”
라고 한 글은 그 자체로 『신곡』이다.
발자크는 이 <인간희극>을 통해 인간유형을 연구하고 그들 또는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여러 작품에 ‘재등장하는 인물들’이 많다. 발자크가 인물들의 반복 등장이라는 방법을 처음 조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리오 영감』부터다.그 책의 초판에서는 23명에 불과했던 ‘재등장하는 인물들’의 수가 그 후에 고쳐 쓴 판들에 오면 50명으로 불어난다.
“방대한 구성, 소개된 환경과 계층의 다양성, 재등장하는 인물들의 수(數) 등으로 볼 때 『고리오 영감』은 발자크의 작가적 생애에 있어서 결정적인 한 단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작품은 상호간의 대립, 구별, 닮은 등의 관계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자연발생적인 변신작용에서 생겨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프랑스 현대 소설사』 김화영 p.100)”
그는 《인간 희극》을 [풍속연구 Etude de moeurs], [철학적 연구 Etudes philosophiques], [분석적 연구 Etudes analytiques]로 나누고, [풍속 연구]에 <사생활의 장면><파리 생활의 장면><정치 생활의 장면><전원 생활의 장면><군대 생활의 장면>이 있다. 『고리오 영감』 은 처음에 <파리 생활의 장면>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는 후에 <사생활의 장면>에 포함시켰다.
이런 방대한 건축물은 미완상태로 남고 말았다.
- 번역에 관하여.
민음사 『고리오 영감』을 읽으면서 흐름이 자꾸 끊어지는 내용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급기야 발자크의 필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발자크 평전에서 읽은 그의 초기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터여서 더 그랬다. 가난한 그는 한동안 돈을 벌기 위해 하룻밤에도 완성할 수 있는, 통속적인 내용의 짜깁기 글을 썼다고 한다. 나중에 작품 활동을 할 때 이것은 그의 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고, 상당부분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혹시나 그래서 내가 고리오 영감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민음사 책을 다 읽고 을유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으면서 내 의심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술술 읽히는 통에, 시간이 없는데도, 민음사의 같은 부분을 비교 해가며 읽었다. 예를 들자면 마지막 부분의 경우를 비교하고 싶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 꼭대기를 향해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그는 센 강의 두 기슭을 따라서 꾸불꾸불 누워 있는, 등불들이 빛나기 시작하는 파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불치병자 병원의 둥근 지붕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들어가고 싶었던 아름다운 사교계가 있었다. (민음사 p.396)”
“홀로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의 꼭대기 쪽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 센 강 양안을 따라 구불구불 뻗어 있는,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앵발리드의 둥근 지붕 사이, 그가 뚫고 들어가기를 원했던 아름다운 사교계가 거주하는 그곳에 거의 탐욕스럽게 고정되었다. (을유출판사 p.242)“
민음사 번역은 어색하게 읽혀지기도 하고, 특별히 앵발리드를 불치병자 병원이라고 번역함으로 번역자가 생각하는 상징적 의미를 독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앵발리드는 군인들을 위한 병원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혁명 때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공격하기 위해 무기를 탈취한 곳이기도 하다. “앵발리드”의 의미 해석은 독자에게 맡겨야 하지 않았을까?
을유출판사의 판본에 관한 붙임을 보면 『고리오 영감』은 단행본으로 출판되기 네 차례에 걸쳐 연재 되었었고, 발자크는 단행본 초판본에 여러 번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교열과 수정을 거치고 또한 여러 출판사를 거치면서 여러 개의 판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 번으로 연재되었을 때 붙여졌던 제목들도 나중에 가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민음사 『고리오 영감』은 여전히 4부분으로 나뉘어져 소제목들이 붙여져 있다. 판본을 비교하면, 민음사는 La Comédie Humaine(Ed. du seuil, 1965), 을유 출판사는서지 정리 방식으로 상세하게 Honere de Balzac: Le Pere Goriot, in La Comédie Humaine, tome Ⅲ, Bibliotheque de la Pleiade, Gallimard, Paris, 1979.로 적고 있다.
‘이런 거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내가 뭐라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의 차이를 알고 나서, 먼저 읽은 책의 답답함을 경험했던 터라, 『고리오 영감』을 읽을 서재 분들이 발자크에 실망하지 않길 바라며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