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회화 초상화론에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말이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한민족대백과사전)”는 뜻이다. 동진(東晋)의 인물화가 고개지(顧愷之)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화가의 고민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서 단토는『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개념에 관하여 설명하며 1831년에 발표된 『미지의 걸작』을 예로 들고 있다. 대가 프렌호퍼가 화가 포르뷔스의 그림을 보며 평하는 장면이다.
“자네의 성녀를 보게, 포르뷔스. 처음 보면 성녀는 근사해 보이네. 하지만 두 번째 보면 그녀가 그림의 배경에 달라붙어 있어 그녀의 육체를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네. 이것은 단 하나의 면만을 가진 실루엣이고, 절단된 외양이며, 뒤돌려 볼 수도, 위치를 바꿀 수도 없는 이미지일 뿐이야. 이 팔과 그림의 바탕 사이에 공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없네. 공간과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물론, 투시법상으로 모든 게 좋아. 대기원근법도 정확히 지켜지고 있고. 하지만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름다운 육체가 따뜻한 생명의 숨결을 받아 생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미지의 걸작』 78p)”
대가 프렌호퍼는 포르뷔스의 ‘이집트의 마리아’가 생명이 없는 이유는 그가 데생과 색채 사이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푸생과 루벤스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엄밀한 냉정함과 눈부신 격정, 엄격함과 풍요로움 사이에서의 선택은 세잔 이후 화가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이다. 프렌호퍼의 모델이 누구일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추측을 하지만 한 예술가를 꼽기에는 복합적이다.
단토는 프렌호퍼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포르뷔스의 작품에 몇 번의 붓질을 하여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장면에서 이 생명은 정신의 개념을 의미한다고 한다. 세잔으로부터 입체주의와 현대의 호크니, 고흐로부터 표현주의, 마티스로부터 로스코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의 반복되는 작업과 실험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일 것이다. 노화가 프렌호퍼의 작업과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뒤에 올 화가들이 수없는 붓질을 통해 찾은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미지의 걸작』에는 이제 막 자신만의 화법을 찾아가고 있는 푸생과 오랜 기간 그림을 그려왔고 어느 정도 명성은 얻었지만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포르뷔스와 대가(大家) 프렌호퍼가 등장한다. 푸생에게 비친 프렌호퍼는 “예술가의 본성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였다. 그의 천재성과 광기는 악마적인 어떤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프렌호퍼의 작업실에 초대되고 그의 작업과 작품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프렌호퍼의 완성하지 못한 작품에 대해 알게 된다. 프렌호퍼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작품의 모델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연인 질레트에게 노화가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푸생과 자신의 화폭에 그려진 여인을 보여주는 것은 끔찍한 매춘이라고 하는 프렌호퍼의 생각은 대비(對比)를 이룬다. 프렌호퍼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피그말리온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야! 나와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여자이지. 자네는 내가 십 년 동안의 행복을 외투를 내던지듯 갑자기 버리길 바라나? 갑자기 내가 아버지이자, 연인이자, 신이 되는 것을 그만두기를 바라나? 이 여자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나의 창조물이야.(116p)”
질레트를 모델로 프렌호퍼는 작품을 완성하고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는 푸생과 포르뷔스는 처음에는 그 화면에서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만 보이고 여인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한 구석에서 벗은 발의 끝부분을 찾고, “그 발은 색깔과 색조, 불분명한 농담(濃淡)들의 카오스로부터, 즉 형태 없는 안개 같은 것으로부터 삐져나와(『미지의 걸작』 128p)” 있는 것을 본다. 두 화가는 프렌호퍼의 “도취 상태”를 모호하게나마 납득하기 시작한다.
“내 작업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모사와 윤곽선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자네에게 얘기했던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걸세. 가슴의 빛을 보게. 어떻게 내가 아주 두텁게 칠한 일련의 터치들과 ‘하이라이트’들로 진정한 빛을 획득하였는지, 또 어떻게 그 빛을 밝은 색조의 반짝이는 흰색과 결함시킬 수 있었는지 보게나. 그리고 어떻게 상반되는 작업을 통해 돌출 부분과 물감의 우둘투둘함을 지우면서 반-농담에 잠긴 내 인물의 윤곽을 공들여 다듬었는지, 그 결과 어떻게 데생의 인위적 수단의 개념까지 없애버리고 인물에게 실물 그 자체의 모습과 둥근 형태를 줄 수 있었는지 살펴보게.( 129p)”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포르뷔스에게 하는 프렌호퍼의 설명은 가까이는 인상파의 그림을, 더 나아가 세잔으로부터 시작된 야수파와 입체파, 현대미술의 도래를 예언하는 듯이 보여 놀랍다. 이 설명을 듣고 푸생이 그는 “화가라기 보다 시인”이라고 한 말과 “지상에서 우리 예술이 끝나는 군(『미지의 걸작』 129p)”이라고 한 포르뷔스의 말은 개념미술과 아서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을 떠올리게 한다.
발자크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작품에서 구현했느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그가 미술을 완전히 알고 전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 이전 푸생과 루벤스의 논쟁을 통해 예술가들의 고민과 그 갈등이 가리키는 예술의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푸생을 사랑하기에 프렌호퍼 앞에 선 질레트를 묘사하는 단어들이 독자인 나를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한다. “강도들에게 유괴당해 노예 상인 앞에 끌려온 순진하고 겁먹은 조지아 처녀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태도”, “수줍어하는 듯한 홍조” “눈을 내리깔았고.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두 손을 허리 곁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수치심에 가해진 폭력에 저항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미지의 걸작』 121p)” 그런 그녀를 보고 프렌호퍼는 놀라고, 푸생은 아름다운 보물을 그의 창고에서 꺼낸 것에 절망하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프렌호퍼의 작품 안에서 찾아낸 조형을 바라보고 감탄하던 푸생은 구석에서 잊고 있던 질레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질레트는 푸생을 경멸한고 증오하고 있다고 울부짖는다. 화폭을 바라보는 푸생을 보며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깨닫고 절망하는 질레트는 당시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여성들의 소외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누드모델』의 감독은 이 지점에서 사유를 확장시켰을 거라 생각된다. 원하는 포즈을 요구하는 노화가에게 “내가 찾겠어요”라고 하는 마리안의 대응은 발자크의 질레트로부터 더 나아간 것이다.
노화가가 요구한 포즈, 거기에 자신의 창조물인 여성의 이미지, 그 화가의 정신이 있다. 그 포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그리고 마네의 <올랭피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과 자세에 대한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비너스의 탄생>의 ‘베누스 푸디카’는 정숙한 여인의 자세로 여겨졌다. 그녀가 서있는 조가비가 사라지게 되면서 바닷가에 누워있는 비너스를 그리게 되고, 그것은 다시 <우르비노의 비너스>나 <올랭피아>와 같은 변화된 이미지들을 생산해냈다.
『시선의 불평등』에서 특별히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여성에게 강요된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들과 성적이 성숙에 대한 억압이 지속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 논리를 전개한다. 미술과 주류 이미지에서 비너스의 몸은 오랫동안 “인간의 성과 욕망을 탐구하는 합리적인 틀이고 보이지 않는 규범(『시선의 불평등』 59p)”이 되었다. 성적 욕망을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고, 남성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누드 작품에서의 여성의 포즈, 배경에 그려진 사물들이 지시하는 의미들은 오랫동안 여성에게 폭력적이었다.
발자크의 작품을 볼 때마다 에필로그가 달려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그가 인쇄소까지 쫓아가서 그 자리에서 고쳤다는 작품에 대한 조바심이 습관의 결과물이 아니가 생각한다. 아직 발자크에게는 자신이 낳은 작품을 독자에게 맡기는 자유로움과 성숙함이 없었을까?
『미지의 걸작』의 첫 번째 버전(『프렌호퍼 선생』)은 질레트의 울부짖음으로 끝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내용이 덧붙여졌다. 노화가와 작품의 마지막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까지 읽었던 발자크의 에필로그나 추가된 부분 중에 가장 맘에 들지 않는 내용이다. 처음의 엔딩은 질레트에게 초점이 모아진다. 발자크는 노(老)화가와 그의 걸작에 시선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듯하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1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