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가 남다른 과학고전
조숙경 지음 / 타임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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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 박사 조숙경의 ‘클래스가 남다른 과학 고전‘은 20세기 과학 고전 12권에 대한 설명을 씨줄로 삼고 저자가 해당 책 또는 저자들과 이룬 접점을 날줄로 삼아 써내려간 책이다. 저자는 개별 고전들에 각각 제목을 붙였다. 가령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 대해서는 과학자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란 제목을 붙였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대해서는 과학은 유토피아를 가져오는가?란 제목을 붙인 것이다. 각 고전에 얽힌 이야기를 쓰고 별도의 편성으로 짧게 원저를 소개했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책의 내용을 얼마나 그리고 어느 정도 깊이로 다루어야 하는지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말한다. 가령 저자는 자신이 읽은 방식으로만 기술하다 보면 신선하다는 평가는 있겠지만 일부 독자의 흥미를 잃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20세기 과학 고전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소 고색창연할 수 있지만 문제의식이 분명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책을 고른 것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만나지 못했다면 과학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란 궁금증을 표한 저자는 사람(과의 만남), 사건(과의 만남)을 주요 주제로 삼아 책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자신이 갖가지 난관을 헤치며 과학사 학도로 변신해 간 것은 파인만이 말한 것처럼 과학이 자신에게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게 가장 흥미 있는 책은 제이컵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다. 이 장의 제목은 누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가져왔는가?다. 저자는 앨런 차머스의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접하고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지 않아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지만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을 실천하기로 하고 다섯 번쯤 읽으니 내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다. 브로노프스키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요인에 대해 탐색했다. 그 중 하나로 브로노프스키는 인간은 어떻게 동물과 다른 여러 가지 손재주와 관찰력을 갖추었으며 깊은 사고를 하는 존재가 되었는가?를 들었다.


브로노프스키는 손은 정신의 칼날이라는 조각가 헨리 무어의 말을 인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브로노프스키는 특이한 존재인 인간을 동물과 달리 풍경 속의 한 형상이 아니라 풍경을 만들어가는 주체라고 설명하며 인간을 그런 주체가 되게 한 요인으로 상상력, 이성, 정서적 예민함, 강인함을 들었다. 브로노프스키는 이 네 요인을 키워드로 책을 서술했다. 브로노프스키는 원자폭탄이 가져온 엄청난 비극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난 참혹한 폐해는 과학적 연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지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으며 행동한 인간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를 보며 나는 조선이 망한 것은 성리학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교조적으로 수용한 조선 집권층의 경직성과 폐쇄성 때문이라는 생각을 반추해 보았다. 브로노프스키의 책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다윈이 규명한 시간적 순방향으로 흐르는 생물학적 진화와 대비되는 시간적 역방향으로 흐르는 문화적 진화다. 저자가 다룬 세 번째 책은 과학의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설명한 칼 포퍼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다. 포퍼는 과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끊임없이 발전한 것은 반증가능성 때문이라고 설명한 인물로 그에 의하면 어떤 과학 이론도 참임을 보장받을 수 없으며 반증될 수 있을뿐이다. 


사람과 사건을 논했거니와 저자는 우리나라에 과학사를 도입한 김영식 교수와의 만남을 인상적으로 풀어냈다. 즉 왜 공부를 계속하려고 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오라는 김영식 교수의 말에 저자는 학자란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제대로 된 글을 쓰려고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런 사연과 함께 소개된 책은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다. 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패러다임이다. 언어학에서 가져온 개념인 패러다임은 한 시대가 공유하는 과학적 사고와 이론, 법칙 등 연구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의 주요 특징은 과학 발전이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점이다. 


과학자들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옮겨가는 것은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실험 결과를 해석했다기보다 게슈탈트 전환과 같은 상당히 돌발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도 주목할 만하다. 쿤의 주장은 과학 지식이 관찰과 실험을 거쳐 누적적으로 축적될 뿐 아니라 진보한다는 귀납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과학관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패러다임의 근본적 창출을 이루어낸 사람들은 기존 패러다임에 익숙하지 않거나 그것에서 이익을 취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기존 패러다임에서 자유롭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안을 볼 수 있는 젊은 세대와 이방인들이라는 쿤의 말로부터 용기와 희망을 가졌다고 말했다. 


저자는 스스로를 삶의 대부분을 경계인으로 산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관찰은 객관적인가?란 제목으로 노우드 러셀 헨슨의 과학적 발견의 패턴을 설명한다. 저자는 남편과 함께 헨슨의 책을 1년 안에 번역 해내리라는 자신감을 가졌지만 5년이 걸렸다고 했다. 헨슨은 과학철학이 없는 과학사는 맹목적이고 과학사가 없는 과학철학은 공허하다는 말을 했다. 헨슨의 책은 꼭 읽을 필요가 있다. 저자에 의하면 헨슨은 현대물리학의 본질적 특성인 소립자 묘사 불가능성과 개별성, 파동 - 입자 이중성, 불확정성 원리, 상보성 원리 등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이들 개념을 얻는 과정은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단순한 귀납 과정이나 가설 연역 과정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며 심오한 지적 투쟁의 과정인 귀추라고 주장했다.


헨슨은 관찰에서 이론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 이론 의존적이라는 주장을 한다. 헨슨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실험으로 얻은 데이터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패턴에 짜맞출 수 있기를 열망하며 기존 지식 안에 유형화하거나 통합시키려 한다. 저자는 박사 논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독창성이라 말한다. 누구도 제시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론이나 설명 또는 해석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장에서 저자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다룬다. 제목은 과학자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다. 이 장은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만남을 다룬 장이다.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커다란 충격에 빠진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자의 발견이 대참사로 이어졌을 때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라고 물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과학 발전이 선한 방향으로 향하고 지식 확장이 인간의 복지를 위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지만 과학적 결과가 어떻게 사용될지 아직 모르는 과학자가 과학 연구물 사용 결과에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자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에게 진정한 전문가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분명한 답을 제시해주었다고 말한다. 전문가란 그가 관계하는 분야에서 매우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큼직한 오류도 알고 있어서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는 전문가란 좁은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보어의 말과 결이 다르다. 


DDT의 문제점을 널리 알린 레이첼 카슨이 공산주의자일 것이라는 추측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일곱 번째 장에서 그 유명한 침묵의 봄을 만난다. 제목 자체가 시적이거니와 카슨은 작가가 되려 한 인물답게 환경 고발서임에도 소설처럼 부드럽게 읽히는 책을 썼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나에게 카슨은 우리를 둘러싼 바다의 저자로 더 유명하다. 카슨은 침묵의 봄을 암 투병 중에 썼다. 


찰스 스노의 두 문화는 낮에는 과학자들과 실험실에서 지내고 밤에는 문학 동료들과 어울리던 저자의 이력이 낳은 문제작이다. 두 진영인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서로 몰이해한 결과다. 아홉 번째 책으로 왓슨의 이중나선을 다룬 저자는 최후 승리자로서 성공 스토리를 담고 있는 이중나선이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사라져 간 과학자의 존재를 다시 부각했고 프랭클린의 성과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고 썼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과학 고전에 든 것이 재미 있다. 저자는 왜 SF(사이언스 픽션)를 미래 사회학이라고 말하는지 십분 이해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brave는 ’멋진‘이라고 하기보다 용감한, 무모하면서 무지한 등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용어는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우)에서 따온 것으로 미래 과학 기술이 폭풍처럼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휩쓸 것이라는 무서운 메시지를 전하는 경고나 마찬가지다. 등장 인물 존이 이 문장을 사용한 것은 소마(정신안정제)를 배급받으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할 때다.


다소 생소한 책이 열한 번째 장에서 다룬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다. 인류는 계속 발전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설명한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리프킨이 스티븐 제이 굴드에게서 심각한 과학적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엔트로피는 물리적 현상에 방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리프킨은 과학과 기술이 더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고 기존의 에너지가 새로운 에너지로 대체되는 데 사용되는 기술은 사실 에너지 전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 열두 번째 책은 로이 포터의 2500년 과학사를 움직인 인물들이다. 제목은 과학에서도 만남은 중요한가?다. 포터는 과학자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 시대와 문화를 이해해야 할뿐 아니라 그들의 장점은 물론 한계까지도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포터는 역사를 위인론으로 쓰던 시대는 지났으며 과학의 진보를 영웅적 정신의 승리로 보는 것은 천박하다고 말했다. 


과학자의 개별 업적은 그가 살았던 시대정신의 총합이지 과학적 천재의 두뇌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이를 풀이하면 위대한 과학자가 위대한 성과를 낸 것은 시대와, 사람과 만났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궁금증이 생긴다. 저자에게 책 또는 저자와 연관된 바가 많지 않았다면 어떤 과학 책을 썼을까?란 궁금증이다. 책에 대해 비판할 부분이 아예 없었을까?란 궁금증에서 나오는 아쉬움도 든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알기 쉽게, 저자 자신의 경험과 관련지어 수준 높은 책들을 논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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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이어온 빛 - 광합성의 신비
라파엘 조빈 지음, 이현숙 옮김, 안태석 감수 / 북스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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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조빈의 ‘생명을 이어온 빛‘은 광합성의 신비를 밝힌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참고 문헌으로 쓰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아주 작게나마 자연의 신비를 발견할 때 과학자들이 느끼는 환희와 경이로움을 어느 정도 접할 수 있을 책이라 말한다. 광합성은 생물학에서 흔히 화학적, 지질학적, 우주적 압력을 견뎌내려 반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인간 종은 광합성의 직접적 산물이다. 광합성은 복잡한 세상에 다시 균형을 찾아줄 만큼 충분히 크고, 빠르고, 강력한 힘이자 더 늦기 전에 황폐해진 생태계를 바로잡을 가장 해볼 만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광합성이란 생명체가 빛 에너지를 포착해 물과 기체 같은 단순 자연 화합물을 결합해 더 복잡하고 더 유익한 화합물로 변환하여 성장과 번식, 발아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명에 활기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초록 잎을 가진 육상 식물만이 아니라 물 속에 사는 생명체도 광합성을 한다. 식물이 흙을 먹는다고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고 물을 먹는다고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다. 저자는 세 과학자를 언급한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부생고다. 오늘날 우리가 광합성을 하도록 처음 공부할 때 배우는 화학 반응식에서 균형이 맞도록 이산화탄소 소모와 산소 생성을 정량적으로 측정한 인물이다. 


이 식에 의하면 물과 이산화탄소가 햇빛과 결합해 식물의 녹색 엽록체 안에서 포도당과 산소로 바뀌는 과정이 해명된다. 광합성이란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미국의 식물학자 찰스 레이드 반스다. 19세기 말 이산화탄소와 수증기가 대기의 태양열을 가둔다는 의견이 처음 대두되었다. 스웨덴의 첫 노벨상 수상자인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광합성이 과도하게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지구를 식게 만들고 그 결과 빙하기가 시작되는 원리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과학자들은 포도당을 생성하지 않고도 광합성을 하는 기이한 미생물도 찾아냈다. 


육상 식물은 쉽게 접할 수 있고 이해하기도 쉬워서 가장 잘 아는 광합성 생물이지만 낯선 극한 환경에 살거나 뻔히 보이는 곳에 숨어서 광합성 하는 생명체들이 훨씬 더 많다. 지구는 약 45억 4,000만년전 우주에서 빙빙 돌고 있는 소용돌이(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 조각에서 탄생하였다. 녹은 불덩이 속에서 금속성 암석, 먼지, 물과 같은 물질 찌꺼기들이 엄청나게 커다란 힘으로 맞부딪히며 한꺼번에 녹아 지구를 만들어냈다. 맨 처음 대기는 증기가 과열된 상태로 암석에서 금속을 만들 정도로 뜨거웠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금속은 가라앉아 자성을 띤 지구의 핵을 이루었고 가벼운 무기질은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화학 물질로 구성된 이 마녀의 혼합물은 이후 식을 대로 식어 산성의 대기를 응결시키며 암석을 깎아낼 정도로 부식성이 강한 비를 내리게 하였고 이는 최초로 바다가 형성될 때까지 수억 년간 이어졌다. 냉각 현상이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초기 태양은 비교적 크기도 작고 빛을 많이 내뿜지도 않아서 우리가 오늘날 보는 빛의 70% 정도밖에 만들어내지 않았다. 


다행히 초기에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외에도 대기를 따뜻하게 하는 메탄이 100만개의 분자 중 100개 정도 있었다. 이는 현재 대기 중에 있는 메탄의 50배가 넘는 농도다. 대기 중 황과 탄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하며 카르보닐 황화물이라는 새 화합물을 만들었고 이 역시 얼마 안 되는 햇빛을 가두어 어린 지구를 온난하게 유지되게 했고 바다는 열을 흡수하는 기체인 이산화탄소, 메탄, 카르보닐 화합물의 장막에 덮여 액체 상태를 유지하였다. 유독한 가스에 싸여 산성의 습기를 머금은 그을린 세상은 황량할 뿐 아니라 오늘날 생명체라고 알려진 존재에게는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바다에는 물을 뿌연 갈색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철 화합물이 잔뜩 녹아 있었다. 이 철 화합물은 물을 투과하는 빛을 차단했다. 이렇게 숨 막히고 부식성이 강한 세상에 생명의 전제 조건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외계에서 아미노산과 탄소를 가지고 온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초기 바다의 화학적 수프를 휘저어 놓았다. 대기 중에 있던 따뜻한 카르보닐 황화물이 응결되며 펩티드와 아미노산을 형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혼돈 속에서도 지구에 최초의 생명이 융합할 수 있었던 필수 구성 요소이자 근본 양양분이었다. 


얕은 연안 지역이나 심해의 뜨거운 분출구, 아니면 눈의 결정이나 흙속 어딘가에 단순한 유기 분자들이 번식을 위해 모일 만한 조건을 갖춘 안정적인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유기 분자들은 스스로 조립하고 에너지를 흡수하는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내며 자신을 똑같이 복제하기 시작하였다. 대략 42억 8000만년전쯤 생명이 탄생하였다. 유전적 증거에 기반하면 오늘날까지 생명체와 인간에게 존재하는 유전자 355개를 가진 모든 생물의 마지막 공통 조상이 38억년 이전에 등장하였다. 


최초의 마법 같은 생명 생성 이벤트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합성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고세균류라고 부르는 미생물 속에서 발견한 광합성 절차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고세균류에게 메탄을 생성하는 능력이 생겼다. 이는 고세균류가 아미노산처럼 자연적으로 발생한 복잡한 유기물을 분해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광합성이 생명의 탄생 초기에 시작되었다 해도 말이 되는 이유는 세포를 결합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였고 당시에는 섭취할 먹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먹이사슬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초기 지구의 어두운 산성 구름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흐릿한 태양 에너지 즉 햇빛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린란드의 구조물에서 발견된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이 화석화된 퇴적구조다. 화석화된 미생물 매트가 겹겹이 층을 이룬 형태로 성장기인 여름에 한 겹이 만들어지면 겨울 동안 진흙으로 된 퇴적물 층이 그 위를 덮으며 번갈아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에너지원으로 햇빛과 유기 분자가 필요한 고세균류와 달리 남세균은 햇빛을 이용해 물을 분해하여 산소를 만드는 획기적 능력을 발달시켰다. 이 미생물의 수가 증가하며 세균성 광합성이 늘어났고 바닷물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 및 대기 중 이산화탄소까지 소비하여 지금의 알칼리성 푸른 바다를 만들며 세상을 서서히 바꾸어나갔다. 


이들이 만들어낸 노폐물이 산소다. 남세균이 점점 해안 지대를 점령해나가며 산소를 더 많이 방출하면서 바다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빛이 더 깊이 뚫고 들어가면서 더 많은 생명체가 깊은 곳에서도 자랄 수 있었다. 용존 철이 산소와 결합하면 용해되지 않는 침전 화합물을 형성한다. 지질학적 연구에서 남세균이 광합성을 하면서 방출하는 산소가 바다에 녹아 있는 철을 산화시켜 결정체로 만들었다. 약 28억년전쯤 매우 거대한 철 퇴적물의 띠(철광석)가 만들어졌다. 바다에서 용존 철이 침전하여 없어지자 산소 폐기물은 대기에 축적되기 시작하였고 당시의 생물체에게 독성물질로 작용해 지구상의 생명체를 거의 전멸시켰다. 24억년전 있었던 대기 중 산소 축적 즉 대산소 발생사건이다. 


광호흡이란 것이 있다. 광합성과 반대로 포도당을 이산화탄소, 물,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고세균은 산소가 없던 시기까지의 세상에 잘 적응하였다. 남세균류는 광합성을 하며 산소를 대기 중으로 방출하면서 점차 세상을 바꾸었다. 고세균류는 산소의 독성 때문에 메탄을 생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남세균류의 개체수가 증가하면서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소비하며 스트로마톨라이트 상태의 미생물 덩어리 형태로 엉겨 붙었다. 이에 더해 산소의 독성으로 인해 고세균이 사라진 결과 메탄이 감소하고, 대기 상층부에서 수증기와 결합한 산소가 메탄을 분해한 데 이어 화산활동마저 잠잠해 대기 중 메탄 양은 더 줄었다. 이것이 24억년전부터 21억년전 사이에 있었던 휴로니안 빙하기에 대한 설명이다. 


빛을 생명으로 바꾸는 과정인 광합성은 복잡한 생명체가 진화하기도 전에 지구에 사는 초기 생명체를 거의 전멸시킨 아이러니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세균은 눈 속에 사는 새로운 광합성 조류(藻類)로 세상에 적응하며 지구를 살렸다. 눈과 얼음 속에서 자라는 빙설 조류는 더 많은 햇빛을 흡수하여 눈과 얼음을 녹게 했다. 지구가 탄생하고 초기 40억년 동안 육지에는 생명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해로운 자외선 때문이었다. 산소가 만들어지면서 대기권에 오존층이 형성되어 결과적으로 자외선이 차단되었다.


조류는 균류와 공생하면서 육지에서 살 수 있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이끼나 지의류가 되었다. 단순한 이끼는 증식하면서 유기산을 배출하기 시작하며 암석의 풍화를 촉진했다. 이들은 육지에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암석들을 무기질과 영양분으로 분해하였다. 이 무기질은 바다로 씻겨 내려가 엄청난 규모의 조류 대증식을 초래하며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급격히 감소시켜 5억 4500만년전 역사상 세 번째 빙하기를 초래하였다. 광합성을 하는 남세균이 대기 중으로 산소를 방출한 결과 지구는 주기적으로 빙하기를 겪었다.


대기 중 산소가 주는 전반적 혜택이 산소를 해독하는 데 드는 에너지보다 크기 때문에 여러 생태계가 곳곳에서 생겨났다. 그 결과 더 많은 생명체가 더 많은 암석을 갈아 부수었고 더 많은 생명체가 이용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생물량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지구 전체의 생물들이 훨씬 더 다양해질 수 있었다. 식물은 흙을 먹지 않지만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 흙을 필요로 한다. 식물은 흙을 옮기기도 해야 한다. 그리 많이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10년마다 지표면의 약 2cm가 씻겨 나간다. 흙의 이동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생태계는 생존에 필요한 광물질을 얻는다. 


과도한 영양분이 강을 통해 바다로 씻겨 들어가면 생태계를 교란하는 조류의 대증식(부영양화)이 발생한다. 순환하는 영양분의 핵심은 질소다. 질소는 단백질을 비롯 여러 생물학적 분자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다. 또 다른 필수 영양분은 인(燐)이다. DNA 등 세포의 유전 정보를 담은 분자를 구성하는 물질이다. 세 번째 중대 영양분은 철이다. 철이 부족하면 광합성 활동이 대체로 줄어들고 특히 바다에서 더 심해진다. 전 세계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 폭풍은 해양 생태계 성장에 필수인 철을 공급한다.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에게 가장 필수적인 영양분은 탄소다. 탄소 저장에 바다가 주목받는 이유는 바닷물이 이산화탄소의 93%를 저장하기 때문이다. 빛을 생명으로 전환하는 마법 같은 과정은 가장 깊은 바다 밑바닥부터 가장 높은 산꼭대기까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광합성은 산소가 없이도 일어나고 이산화탄소가 아닌 다른 종류의 탄소원에서도 활발히 진행된다. 최근 몇 년간 과학자들은 공생이 생명 자체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다. 정통적 견해는 진화가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지구 역사 전반에 걸쳐 변화를 만든 가장 강력한 힘은 광합성이었다. 광합성은 대기와 바닷물의 탄소 농도 조절자이자 모든 생명체를 위한 식량 생산자다. 바다는 수생 광합성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비교적 탄소가 풍부한 환경이다. 생명체들은 꽤 멀거나 깊은 곳에 있는 영양분을 수송하는 해류에 직접 노출되기 때문에 뿌리, 줄기, 잎이 필요 없다. 물속에 있어서 자신의 몸체로 수분을 퍼 올릴 필요도 없다. 광합성이 너무 과하면 지구는 빙하기 상태가 되고 너무 적으면 더워졌다. 


과학자들은 광호흡이라는 문제와 씨름하느라 애썼다. 광호흡은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가 자신이 생산하는 산소를 다루는 데 애를 먹으며 오히려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으로 생명체의 탄소 고정 능력을 약 25% 감소시킨다. 광호흡이 진화적 낭비가 아니라는 말도 있다. 저자는 코로나 19 대유행도 삼림 파괴와 농업 개발에서 유래하였다는 게 거의 확실하다고 말한다. 책임이 한 나라, 대통령, 기업과 인종 집단에 있지 않은 것처럼 태양 표면의 폭발이나 거대한 화산 폭발 같은 외부 힘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역사를 통틀어 지구에 기근, 화재와 홍수를 비롯해 재난과 역병을 풀어놓은 우리 모두, 바로 인간에게 있다. 


우리는 식물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더 많이 알아내야 한다. 저자는 미래에는 세포들이 서로 협력하여 광합성을 하는 방법으로 진화한다면 햇빛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행동이 연결된 더 큰 계획에서 우리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몸은 우리가 함부로 버렸지만 다시 식탁 위로 돌아오는 플라스틱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생태계의 막대한 피해를 입힌 책임을 납세자들, 다른 나라들, 특히 다음 세대에게 떠넘김으로써 외부화(비용 전가)한다. 우리가 창출한 역사에 남을 만한 엄청난 부는 대부분 천연자원에서 직접 얻어낸 것이지만 뒷정리는 남에게 맡기고 있다. 나무만 길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생물량을 늘리는 방법은 다양하다. 인공 새집을 만들고 벌통을 짓고 공동 텃밭을 가꾸고 도시 공간에 알맞은 편리한 화분과 화단을 만들 수 있다. 퇴비를 주고 유기 폐기물로 비료를 만들자. 비료를 잘게 잘라 식묽과 나무 생물량에 골고루 섞어주면 몇 주 안에 신선하고 영양분이 풍부한 흙이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탄소를 가두어두고 지역 환경에서 살아가기 알맞은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광합성은 우리가 세계를 복원하는 동안 존재한 가장 강력한 힘이다. 저자는 햇빛을 수확하여 지구가 다시 자라게 하자고 말한다. 책을 다 읽으면 저자의 책이 아름답고 복잡한 시스템을 분석하지 않는 대신 사람과 지구에 어떤 가치와 영향력이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광합성의 신비라는 제목을 광합성, 그리고 광합성에 거는 모든 것이라고 바꾸면 어떨지? 저자의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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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 우리가 몰랐던 17세기의 또 다른 역사
김덕진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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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大饑饉), 조선을 뒤덮다‘는 소빙기, 현종(顯宗), 미수 허목 등에 대한 관심에 따라 고른 책이다. 책이 다룬 시기는 경신 대기근 시기로 경신년이란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의 머리 글자를 딴 이름이다. 소빙기란 16세기에서 17세기 또는 17세기에 해당하는, 빙하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추운 기온이 지속되었던 때를 말한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세계 인구의 10%가량인 6000만명에 이르던 아메리카 원주민 수는 유럽인들로 인해 큰 변화를 맞았다. 유럽인들의 학살이 의도적 결과였다면 그들이 신대륙으로 천연두와 홍역 등의 바이러스를 가져온 것은 비의도적 결과였다. 침략의 충격으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도 한 몫을 차지했다. 이런 여러 요인이 겹쳐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100년 만에 500만~600만명으로 줄었다. 


줄어든 인구가 부른 것은 경작의 감소였다. 이는 초목의 자연적 재생(재산림화)을 유발했다. 이에 따라 이산화탄소가 줄어들어 온실효과가 사라졌다. 이런 연쇄가 초래한 것이 소빙하기였다.(2019년 10월 19일 한겨레신문 기사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기후변화 초래' 참고) 컬럼버스가 신대륙에 진출한  1492년에서 1650년 사이 아메리카 인구가 5천 만에서 5백 만으로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다.(2019년 1월 3일 오마이뉴스 기사 ’8천만 명→1천만 명... 인류 최대 인종학살‘ 참고) 당시 이산화탄소가 줄어든 사실은 남극 얼음 속에 갇혀있는 당시 공기를 분석해 알아낸 바이다. 


나무 나이테로 몇 백년전, 몇 천 년전의 날씨를 알아볼 수 있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의 지구 온도는 얼음을 통해 알아낸다. 남극, 그린란드 등에는 몇 만년전부터 온 눈들이 얼음이 되어 쌓여 있다. 이 얼음을 분석하면 눈이 내린 당시의 연평균 온도, 계절별 온도까지 추정할 수 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7 페이지) 최성락은 조선 영정조,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프랑스 루이 14, 15세 등이 모두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칭송받지만 이는 왕이 잘해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났다기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난 때에 우연히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18세기 말은 지구 평균 온도가 하강했고 온도 하강 추세가 몇 백년 정도 지속되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9 페이지) 


17세기 조선에 연이은 대기근이 닥쳤다. 소빙기가 초래한 사건이다. 전술한 경술년, 신해년은 모두 현종 재위기였다. 1659년에 즉위해 1674년에 타계한 현종의 치세는 내내 참혹한 기근의 고난을 겪은 시기였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으니 현종 재위기는 기해예송(1659년)과 갑인예송(1674년)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몰아친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 김덕진이 기본으로 삼은 자료는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승정원일기 등이다. 덧붙여 이해 당사자들의 취사선택에 의해 작성된 실록 및 승정원일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집, 기타 고문서 들을 참고했다. 현종실록이 남인 집권기에 편찬된 책이라면 현종개수실록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을 추방하고 집권한 서인이 재편찬한 책이다. 현종개수실록에는 현종실록보다 재해 건수와 내용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한 남인 집권층의 실정을 부각하려는 의도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기후적 관점에서 소빙기란 약 100만년전에 시작해 10만년전에 끝났다는 빙하기에 비해 정도가 작다는 의미다.(22 페이지) 저자는 소빙기의 원인을 나열한다. 1) 태양 흑점 활동이 쇠퇴하거나 중지에 가까운 상태에 접어든 결과라는 설, 2) 거대 운석 등의 외계발(發) 충격으로 인해 대량의 먼지가 태양을 가려 급랭 현상이 일어난 결과라는 설, 3) 유별난 화산 활동의 결과라는 설 등... 17세기 위기론 또는 17세기 소빙기 설은 학계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 전 세계적 문제(글로벌 히스토리)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기근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겨우 숨을 돌릴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대기근이 전국을 휩쓸었다.(36 페이지) 


저자는 조선의 대기근 극복을 천혜의 자연조건, 상부상조 정신, 극복 시스템에서 찾는다.(39 페이지) 천혜의 자연 조건이란 말은 한 지역 안에 재해를 경미하게 입은 곳이 존재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순창의 재력가 양운거는 몇 백 석의 미곡을 관아에 납부한 데 이어 1661년(현종 2년) 흉년이 들자 기아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조선 영조 대의 무관(武官) 류이주가 세운 99칸 고택 운조루(雲鳥樓)의 일화도 예시할 만하다. 굴뚝을 낮게 만들어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지 않게 함으로써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뿐 아니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 누구나 먹을 만큼 곡식을 꺼내 가라는 뜻으로 뒤주를 놓아 두었는데 그곳은 가져가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주인과 쉽게 마주치지 않는 곳이다. 


조선은 지역 차원의 기근 구제 제도를 두었다.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가 된 효종의 아들로 병사한 아버지를 이어 임금이 된 현종은 재위 내내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볼 사람은 미수 허목이다. 미수 허목은 기해예송(1659년)이 서인의 1년상 채택으로 종결되자 삼척에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2년이 채 되지 않아 경기도 연천으로 낙향했다. 윤휴와 허목은 10년 이상 야인 생활을 하다가 현종 말년에 정계 복귀했지만 윤선도는 복귀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신권 강화 vs 왕권 강화의 구도이지만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종은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1666년 이후 부쩍 남인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현종은 즉위 2년만에 아들(숙종)을 낳았다. 이에 송시열은 상중에 해서는 안 되는 부부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왕을 비난했다. 


현종은 누이들의 집을 신축하는 일에 강경 입장을 보이다가 대신들의 말에 한 발짝 물러섰다. 대기근 때문이었다. 1670년의 자연재해는 냉해로 시작되었다.(106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7월에 우박, 서리 눈이 전국에 내렸다는 점이다. 찬바람이 불고 된서리와 찬비, 눈이 잇따라 내리는 겨울 추위가 1671년 봄까지 이어졌다. 가장 두려운 자연재해는 가뭄이다.(111 페이지) 전국 각도에서 기우제를 올렸으나 속수무책의 상황이 이어졌다. 봄 밭농사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모내기를 할 5월이 되어도 해갈 기미는 없었다. 오랜 가뭄 끝 비가 왔으나 폭우로 이어져 수해(水害)가 발생했다. 수해는 가뭄 못지않은 자연재해다. 


76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소문을 올려 기청제(祈晴祭)를 행할 것을 건의했다. 영제()란 말이 있다. 오래도록 장마가 이어질 때 서울 사대문 다락 위에서 비가 그치기를 비는 제사다. 폭우는 폭풍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다. 아사자가 속출했고 황충(蝗蟲) 피해가 잇따랐다. 황충이란 농작물을 갉아 먹는 해충을 말한다. 1670년 ~ 1671년 재해는 냉해, 가뭄, 수해, 풍해, 충해 등 5대 재해가 겹친 전례 없는 대재해였다. 백성들은 재해, 염병, 우역(牛疫) 등 3대 악재에 시달렸다. 1670~1671년 2년간 우역으로 죽은 소는 4만여 두에 이르렀다. 소의 대량 폐사는 엄청난 재산 손실이었다. 소가 없으면 농사와 교통 수단이 막힌다.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우금(牛禁)이라 한다. 우금은 소나무를 베지 몫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송금(松禁), 술을 담그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주금(酒禁)과 함께 조선의 3금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우역이 나날이 번지는 가운데 남아 있는 병들지 않은 소를 도살한 후 쇠고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자가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현종 즉위(1659년) 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의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1670년에는 유난히 갖가지 재해가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칠게 일어났다.(160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기근, 전염병, 가축병, 혹한이 삼중 사중으로 겹친 대재앙이었다.(161 페이지) 곡물가가 폭등했다. 사재기가 기승을 부렸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솔잎 먹기가 여의치 않았다. 정부의 송금령(松禁令)과 민간의 송계(松契)로 입산 및 채취가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채취 허가 명령이 내려졌다. 시늉만 내거나 전혀 시도하지 않은 수령도 있었으나 함경도 감사 부임 직전 청주 목사를 역임한 남구만은 관아 뜰에 절구를 놓고 솔잎 가루를 만들어 기아자에게 먹여 큰 효과를 보았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란 시조를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조는 전원의 소박한 삶을 그린 노래가 아니라 맹렬한 '권력비판'의 작품이라고 한다.(시인 이상국) 해가 뜨는 창인 동창이 밝았느냐는 의미는 임금의 안목과 총기가 밝아졌느냐는 의미고, 노고지리 우짖는다는 의미는 간신들이 왕에게 거짓을 고한다는 의미고, 소치는 아이가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의미는 충직한 목민관이 등장하지 않았느냐는 의미고,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는 벼슬아치들이  당파 싸움에 매몰되어 벌이는 말꼬리 싸움을 언제 그치고 산적한 현안 해결에 나설 것인가를 묻는 의미다. 남구만의 시조는 숙종이 장희빈을 책봉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강릉에 유배된 상황에서 나온 작품이다. 


굶주린 엄마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기아자와 걸인이 넘쳐났다. 아사자와 병사자의 동시 대량 발생이 현실이 되었다. 조선 천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신 처리가 큰 문제였다. 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인륜 도덕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떠돌며 도둑질을 하는 사태가 잇따랐다.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이 빈번했다. 진휼소가 설치되었다. 줄을 잘못 서거나 동작이 느리면 솥을 국자로 빡빡 긁어도 국물 한 방울 없는 '국물도 없는' 사태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억만(億萬)이 진창(賑倉)에 나왔으니 엉망진창이었다.(238 페이지) 진휼곡을 빼돌리거나 진휼에 소극적인 지방 관리들이 많았다. 


군포 면제, 토지세 감면, 부채 탕감 등이 건의되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휼에 쏟아붓고 세금을 탕감하느라 생긴 국고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를 감축했지만 만족할 만하지 않았다.(283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남인과 척신을 앞세워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려던 현종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302 페이지) 저자는 현종은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기근 극복 과정을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해왔다. 측근 신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과감하게 비축곡을 풀고 세금을 감면해 민심 수습에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서인들이 이상론으로 포장한 간섭을 물리쳤다. 대기근은 현종에게 돌파구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효종 비 인선 왕후 장씨가 죽자 예송이 다시 발생했다.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1674년의 일이다.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자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할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이다. 1차 예송에서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했고 2차 예송에서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했다. 1차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2차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1674년 재위 15년만인 서른 넷의 젊은 임금 현종이 죽었다. 저자에 의하면 현종은 신하들에게 끌려만 다니고 신하들의 눈치만 본 군주가 아니었다.(309 페이지) 여러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세우려 노력했다. 현실주의자로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도모했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끼친 영향 속에서 이상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천 사람인 나에게 대기근 중 미수 허목의 거취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미수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경신 대기근 시기는 미수가 연천으로 낙향해 세월을 보낸 시기와 겹친다. 대기근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사안은 예송논쟁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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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02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중에 부부관계를 했다고 나무라는 송시열 같은 신하에게 현종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지금 인기리에 방영중인 고려거란전쟁의 고려왕 또한 현종이어서 참으로 대비되네요.

벤투의스케치북 2024-03-03 06:4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꼼꼼하게 읽고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4-03-03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휴일되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24-03-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글 잘 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 백마디 말보다 강력한 문장의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현주 옮김 / 더모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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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사이토 다카시의 책이다.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란 책을 통해 처음 안 일본의 저술가이자 대학 교수다. 저자는 글쓰기의 제1 원칙은 제3자가 자신의 글을 읽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를 늘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전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읽기는 쓰기를 전제로 해야 하고, 쓰기는 누군가 내 글을 읽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해야 한다. 논술에서는 과제로 나온 문장의 중심 의미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시킨 글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글쓰기는 방대한 독서량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점은 글이 말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점이다. 생각이 정제되어 있고 논리정연하며 명료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지 못한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다. 독해력이 쓰는 힘으로 연결된다. 잘 쓰는 사람은 다독가이다. 쓰기의 시작은 소재 찾기부터다. 본문에는 (일본의 경우이지만) 영화의 문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영화가 드라마처럼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나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영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기에 인문, 사회, 자연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아니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도 인문, 사회 자연 등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영화에 관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싫다기보다 영화 문법을 이해하기 위해 배우거나 궁리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저자는 읽었다는 것의 기준을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했느냐에 둔다. 그렇다면 이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철학, 물리, 천문 등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물음에 답하는 것도 좋다. 즉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어디인가? 등에 답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locate란 단어가 있다. 어떤 것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다란 의미다. 인터넷 시대에 수준 높고 정확한 글을 찾는 능력 또는 노력이 필요하기에 하는 말이다. 저자는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독서 시간을 따로 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추천하는 것은 밥 먹으면서, 티브이 보면서 읽는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읽고 말하는 것을 연결하려면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수학 실력도 사실 언어 독해 능력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읽기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기는 거의 절대적이다. 저자는 넓게 읽는 것과 깊게 읽는 것을 연동하는 읽기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넓게 읽는 사람은 대부분 깊이 읽을 수 있다. 깊이 읽으려면 어느 정도 넓게 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깊이 파내려갈 수 있다. 넓게 읽는 사람은 깊이 읽는다가 아니라 깊이 읽을 수 있다란 사실에 주목하자. 다독가도 매양 깊이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깊이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매년 100권 읽기를 10년 할 것을 추천한다. 1000권을 읽으면 어떤 책이라도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주요 내용을 힘들이지 않고 파악할 수 있다. 속도도 빨라진다. ”넓게 많은 책을 훑어보고 특별히 마음에 드는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 된다.“(53 페이지)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한다면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 노력하기에 집중도도 높아진다. 읽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연습을 하면 흡수력이 높아진다. 


나에게는 읽은 내용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 이런 과정은 해설에도 유용하게 작용한다. 기억을 배가(倍加)하고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글이 책을 깨끗하게 읽으려고 하다 보면 책에 몰입할 수 없어 남는 게 별로 없다는 말이다. 빌려 읽거나 팔 생각으로 밑줄 긋기, 메모 부기(付記) 등을 하지 않는 경우다. 


여러 책을 낸 다독가이자 저술가인 저자도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원고지를 보면 늘 긴장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말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 픽션은 물론이고 논설문이든 에세이든 모든 글쓰기의 기본은 창작이다. 이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이 있다. 역사학자들의 글쓰기는 사료에 초집중해 사실성이 높은 반면 추론이나 서사가 부족해 서사가 떨어지고 한문학자들의 역사연구는 흥미진진하며 생동감이 있지만 사료를 근거로 함에도 지엽적인 것을 확대해석하거나 문학적 갈등 구조 등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벌어진 경우가 있다는 글이다. 


한 페이스북에서 읽은 글인데 이를 보며 사료에도 충실하고 상상력도 발휘하는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상상력이다. 앞에서 말한 원고지 10장이란 말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분량 채우기도 어렵고 그 분량 안에 하고자 하는 말을 딱 맞춰 넣기도 어렵고 그 안에 기승전결을 갖춰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문장은 정직한 것, 주술 관계가 명확한 것일수록 좋다. 한 문장 안에 하나의 정보를 담는 것이 좋다. 


저자는 발문과 단순 질문을 구분한다. 발문은 읽지 않으면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K가 자살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같은 물음이다. 단순 질문은 어떤 작품의 작가는 누구인가요? 같은 물음으로 답하면 대화가 끝나게 된다. 저자는 쓰기 전에 발문을 나열하여 목차를 만든다고 한다. 발문만으로도 훌륭한 목차가 된다. 쓸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키워드를 목록화하는 것도 좋다. 저자는 평론 독해의 팁도 제시한다. 대부분의 평론은 2항 대립 구조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A라는 생각이 있는데 B라는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한 역사 책에서 세종은 자신의 장인을 죽이라고 주장한 인물을 죽이지 않고 정승 자리에 두었기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나선 사람들을 죽인 정조보다 훌륭하다는 글을 읽었다. 상술할 수 없는데.. 나는 세종과 정조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글쓰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 본문에 평론의 대부분은 사실 저자의 좋고 싫음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글이 나온다.(105 페이지) 논리적인 평론도 마찬가지다. 


관건은 누구는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는 누구를 싫어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논리와 근거가 더 설득력 있는가이다. A 주장과 B 주장을 쓰고 여러 근거를 A 그룹과 B 그룹으로 나누어 쓰고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B 그룹에 넣어두고 특히 강조하고 싶은 핵심 부분을 표시해둔다. 이항대립 방식이나 변증법적 글쓰기 방식은 꽤 긴장감 있는 글쓰기 방식이기 때문에 마지막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읽는 이를 끌고 가는 장점이 있다. 꽤 논리정연하게 보이기 때문에 문장이 서툴러도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인다. 


결론은 먼저 쓰고 이유는 후에 쓰는 방식으로 글을 쓰면 누가 읽어도 논리를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다. 결론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려면 머릿속에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글의 구성이 모두 있어야 한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구성을 생각하고 그 안에 어떤 것을 담을지 결정하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가능한 한 논점을 메모해두면 좋다. 길고 복잡한 글일수록 도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식화한다고 해서 흑백논리를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먼저임을 강조한다. 내용이 알차면서 쉽게 읽히는 책이 ’글 잘 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다. 그런데 비법(秘法)이나 임팩트 있는 노하우가 제시되지 않아 아쉽다. 꾸준히 읽고, 명료하고 독창적으로 쓰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비법이기 때문일까? 관건은 직접 읽고 구상하고 쓰는 것이다. 그것도 잘 쓰는 것이다. 읽기의 최종 지점은 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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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개념 - 고대에서 현대까지
박준영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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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만나면서 우리는 사유의 수준이 어떤 다른 국면으로 넘어감을 감지하게 된다.“(이정우 지음 ‘세계 철학사 1 ’93 페이지) 박준영의 ‘철학. 개념’의 서주부(序奏部)에서 파르메니데스를 만난다. 그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을 했다. 존재만 가능하고 비존재 즉 무(無)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을 부정했다. 풀어 이야기하면 파르메니데스는 고정불변하는 있음만 인정하고 운동은 인정하지 않았다.(2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파르메니데스 방식의 사유로는 고양이가 거실에서 안방으로 움직인 것이 없어졌다가 있게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2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가 단 하나의 있음을 인정했다면 플라톤은 모든 개별자들 위에 존재하는 이데아를 주장했다. 플라톤은 감각보다 관념을 실재적이라 생각했다. 가령 커피의 실재성은 감각적 맛에 있지 않고 씀(bitterness)이라는 관념적 본질에 있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는 말을 했다. 그는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저자는 세상이 변하는 만큼 우리도 변하고 그 가운데 우리는 존재한다 또는 존재를 겪어간다는 말을 한다.(37 페이지) 우리는 유한성 한가운데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작은 성취감에 감사하고 또 다른 목적을 설정하고 거기에 몰두한다.(38 페이지) 헤라클레이토스는 변증법의 시조로 볼 만하다. 당시에는 변증법이란 용어보다 로고스(명사이기보다 셈하다, 말하다 등의 동사)란 용어가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생성의 대우주는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을 믿을 때 세계는 다자(多者)와 운동으로 다가온다. 무수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그 사물들은 늘 어떤 식으로든 운동한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 아닌가.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오로지 논변을 통해서만 사유할 때 다자와 운동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을 통한 그런 경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이정우 지음 ‘세계 철학사 1’126 페이지) 철학사의 적자는 파르메니데스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들을 스토아학파라 한다. 저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 모두 존재를 생성보다 우위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플라톤의 이데아에 해당하는 개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형상(에이도스)이다. 에이도스는 사물이나 사태의 내적 형식이며 전형이다. 모르페(morphe)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아이온은 변화무쌍하며 언제나 움직이는 생성의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변하지 않고 멈춘 존재의 시간이다.(49 페이지) 아이온은 차이 나는 것의 반복이고 크로노스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다. 이 두 시간은 대립적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조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두 시간 사이에 어떤 탁월한 인간의 의지를 새겨놓고자 했다. 바로 카이로스다. 크로노스의 규칙성과 아이온의 우발성을 연결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을 에우카이리아(적기; 適期)라 불렀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가 자칭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스스로에 대한 오인의 결과다. 그가 이성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존재론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인간 주체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으로 철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칸트 이후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회의적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불교의 윤회는 동일한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이고 영원회귀는 차이 나는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에는 법칙적 요소들이 없고 다만 힘의 증감, 그 과정의 반복만이 있다.(55 페이지) 니체의 생성은 차이 나는 생성이다. 원(原)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을 형상화한 글자다. 첫번 째 장소를 의미한다. 기슭 엄과 샘 천의 결합어다. 철학은 신화가 아닌 합리적 이론, 유용성이 아닌 탐구 자체의 가치에 초점을 두는 학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철학이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거칠게나마 종합되었다. 고대의 원리와 근대의 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의 원리는 질료적이고 물질적인 원소였고 근대인들에게 원리는 법칙 즉 로고스였다.(96 페이지) 


현대철학에서 원리와 원인은 더 이상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파악 작용도 감응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것이 어떤 원리나 원인에 의한 것인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감응이란 처음부터 파악 주체와 그 대상이 명확하게 구분되거나 정해져 있지 않는 상태의 과정이다.(99 페이지) 감응의 과정에서 유일한 것은 애매모호한 직관 같은 것이다. 카메라의 초점이 불분명한 채로 이 세계에 놓여 있다. 이때 어느 것이 원인이며 결과인지 정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명확해지고 경계가 설정되면 제한되는 때는 감응의 과정이 지각과 지성의 작용으로 이행할 때다. 지성은 비로소 주체가 되며 화병 안의 꽃은 대상이 되어 서로 인과관계를 형성하거나 주체의 원리나 대상의 원리로서 자리잡는다.(99 페이지)


이렇게 보면 원인이나 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생성된다. 즉 파생되는 질서다. 이 파생되는 인과적 질서의 한쪽 면에 주체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저쪽에 객체가 놓인다. 이렇게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주-객 이분법도 파생된 질서에 불과하다. 바슐라르적인 의미에서 과학자 또는 철학자는 모든 것을 애초에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주체가 아니라 실험과 조작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주체다. 이를 과정 속의 주체라 할 수 있다. 이 주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106 페이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능동적으로 지식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서 늘 불안정을 견딘다. 우리는 우리의 능동성 안에서 불안하다. 저자는 바야흐로 철학이 과학과 긴밀하게 갈마드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111 페이지) 


닐스 보어는 전자 자체에서는 빛을 방출하지 않고 제 궤도에서 이탈하여 다른 궤도로 진입할 때 빛을 방출한다는 대담한 가설을 세웠다. 궤도를 점프해서 들어가는 운동에너지가 빛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112 페이지)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도는가, 또 그것이 왜 점프하는가, 하는 문제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도는 것은 무시하고 왜 점프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드브로이는 빛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원성을 가진다면 전자도 그럴 것이라 가정했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전자가 일정한 정수값을 가지는 궤도를 도는 이유가 드러난다. 파동이란 늘 주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의는 파르메니데스로 거슬러 올라간다.(12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에게 하나란 생성 없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운동을 긍정하면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동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하나의 존재자가 A에서 B로 둘이 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파르메니데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으로서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세계관을 마련해놓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한다. 일자와의 합일이다. 감각적인 세계를 벗어나 초감각적이며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일자로 올라가는 상승의 이미지가 여기서 탄생한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플로티노스 사상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 지점도 바로 여기다. 기도와 선행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최종적인 지복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창조의 의지는 신의 존재에 속해 있는 선성(善性)이다. 존재의 상태가 무의 상태보다 선하다는 것은 서양 사상에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는 생각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분이 선하셔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하는 그 만큼 선하다고 말했다. 하나를 거부하고 여럿을 긍정한 고대 사상에서 스토아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스토아 철학 사상은 당시의 그리스 로마인들의 영혼과도 같았다. 기독교인들이 플라톤 사상에서 교리의 철학적 내용을 따왔다면 스토아 사상에서는 실천적 풍모를 카피했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세계는 로고스의 표현이다. 이 세계관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이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만물유전의 강에 운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세계의 법칙, 다수의 물체들이 운동하는 물리적인 경과를 의미한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보편자(본질)를 개별적인 것(개쳬)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놓았을뿐 부정하지는 않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인간에 상응하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대개의 철학자들은 철학의 근본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一)과 다(多) 즉 하나와 여럿의 문제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155 페이지) 데카르트는 감각적 다양성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하는 나(코기토)의 획실성만을 진리의 근거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원론자라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인간과 그 이성적 능력을 중시하긴 했지만 데카르트와 달리 그것을 모든 것의 토대로 특별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157 페이지) 그래서 이들에게는 인간보다 자연 또는 세계의 모습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유사하게 스피노자에게서도 하나는 곧 여렷이다. 신 즉 자연이 그 예이다. 신이라는 일자는 곧 자연이라는 다자와 같다는 의미다. 스피노자에게 세계는 실체, 속성, 양태라는 근본적인 세 개념으로 갈무리된다. 실체는 개별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하나의 존재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바 실체란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이 신조차 자연의 다양성 안에 놓이면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신적인 실체가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실체의 변용이다. 


물론 변용한다 해도 실체는 그대로 남는다. 실체는 양태로 변용된다. 양태는 사물들의 모양새 즉 갖추어진 꼴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지각에 해당하는 매개체가 속성이다. 지성이 대상을 지각할 때 대체로 우리는 그 대상의 공간적 속성 즉 연장(延長; extention)을 파악한다. 리쾨르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를 의심의 세 대가(大家)로 불렀다. 동일성이라는 큰 이념을 의심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동일성이란 하나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것이고 차이란 여러 모습으로 생성, 소멸하는 것이다.(169 페이지) 생성이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차이 나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하나의 동일성을 의미하고 차이 나는 것은 여럿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사유에서 어떤 것들이 대립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 거리가 멀다, 성기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대립을 사물의 본질로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된 것 즉 우리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뿐이다.(179 페이지) 실제 사물들의 세계는 그렇게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작은 차이들과 큰 차이들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들뢰즈는 모든 것을 차이로서 긍정하지만은 않았다. 들뢰즈에게 대립은 없지만 적대는 존재한다. 들뢰즈의 사유가 적대하는 것은 동일성의 사유, 노예적 사유, 재현적 사유다. 이 셋은 공히 어떤 큰 범주 또는 큰 대상에 의존하는 부자유한 사유의 이미지라고 들뢰즈는 부른다. 부정하기의 반대인 거리두기는 긍정의 역량으로서 우월한 힘이며 부정이 아니라 적대를 인정한다. 들뢰즈에게 하나와 여럿은 이분법적으로 대립한다기보다 여럿으로서 하나를 펼쳐내고 하나로서 여럿을 함축하는 긍정과 적대의 운동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어울려 펼쳐지고 함축하면서 긍정하고 적대하는 관계다. 변증법의 대립이라는 성긴 그물은 차이의 조밀한 그물보다 열등하다.(173 페이지) 신유물론은 의심의 대가들에 이어 차이의 대가들을 계승한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실재의 본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데 이분법을 극복하고 거기에 차이들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횡단성(transversality)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로 함축하고 함축되는 운동이 횡단성이다. 여기에는 어떤 위계도 없고 오로지 실재하는 것들의 아나키한 활동들이 있을뿐이다. 이 관계는 인간 ? 기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기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제한받는 수동적 존재다. 신유물론은 중심적인 하나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연결되지 않는 여럿도 인정하지 않는다. 연결 즉 관계 이전에 홀로 서 있는 어떤 주체나 객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고 했다면 실재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하나/ 여럿이 된다. 철학에서 무한은 infinitude보다 정해지지 않음이라는 의미의 indeterminate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아페이론은 무규정, 비결정이란 의미다. 무질서는 아페이론이고 질서는 페라스가 된다. 페라스는 한계라기보다 규정성을 의미한다. 고대철학자들의 무한은 외적으로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적으로 무한히 분할가능하다는 의미다.(202 페이지) 제논의 역설은 스승인 파르메니데스가 다(多)와 운동을 부정한 데 대해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개발한 논변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은 피타고라스에 반대한다. 피타고라스는 많음을 설정하는데 이 많음은 불연속적이다. 기하학적으로 수를 나타내는 점들 사이에 텅 빈 공허가 있듯 수의 계열에 있어서 하나의 단위에서 다른 또 하나의 단위로 가는 데는 갑작스러운 도약이 존재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기하학적 연속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꽉 차 있으며 어디서든 단속되지 않고 연속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신 = 실체 =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곳 안에 속속들이 펴져 있다. 양태들은 실체인 신의 표현이며 이 표현 안에서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과 화해한다. 이를 변용이라 한다. 무한자로서의 신은 연장(延長; 물질)과 사유(思惟; 지성)로 변용된다. 연장으로 변용된 것이 세상 만물이며 사유로 변용된 것이 지성이다. 실체 일원론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를 한갓 자연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자연은 유한한 양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무한하다. 무한한 신이 유한한 자연에 내재할 때 모든 것이 소진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적인 무한은 무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 극히 일부인 연장과 사유가 이 세계에서 표현될뿐이라고 말했다.(209 페이지) 저자는 비단 철학자나 수학자가 아니라도 일상인으로서의 우리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늘 깨달으면서도 어떤 무한한 존재, 무한한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근대를 지나 포스트 근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제 자연 자체의 무한이 아니라 문명 도는 기술의 무한성에 당혹감을 느낀다. 무한 즉 아페이론에는 법칙을 벗어나는 우발적 사태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유한 즉 페라스는 한도를 정하는 법칙적인 필연성을 요청한다.(219 페이지)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에세 그것은 로고스와 모이라로 대표되었다. 로고스는 자연의 질서 내지 운동을 가리켰다. 모이라는 불가피하고 불수의한 힘으로서의 운명이다. 스토아학파는 운명을 필연성으로 생각했던 철학 학파였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헬레니즘기라 부른다. 스토아 철학은 헬레니즘기뿐 아니라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시간 동안 이어졌다.(224, 225 페이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에서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 이르는 헬레니즘기의 주류 철학은 스토아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었다. 이 시기를 지나 두 학파는 기독교에 의해 오랜 시간 사장되었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인 존재론은 잊히고 앙상한 도덕철학만이 남았다. 초기 스토아철학의 대표인 제논(Zeno of Citium)과 크라시포스는 누구보다 장녀과 존재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것을 운명이라고 여긴 철학자들이다. 제논은 제논의 역설의 제논(Zeno of Elea)과 다른 사람이다. 스토아철학의 운명(fatum)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모이라와 상당히 다르다. 한탄의 대상이었던 모이라는 스토아철학에 와서 파툼이 된다. 파툼은 로고스 즉 세상의 이법(理法)이다. 이는 물질적인 법칙이다. 이를 프네우마라 한다. 숨, 숨결 정도의 의미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은 ‘운명 = 로고스 = 프네우마 = 불‘이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란 말에서 인간은 수동적이다. 척도로서의 진리가 인간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서 나의 주체는 현저하게 주도성을 띤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타자 또는 타인이었다. 그에게 타인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할 때 배경이 되는 존재의 의미를 가졌다. 타인의 첫 번째 효과는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대상과 생각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바탕을 조직한다는 점이다.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극히 일부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는 세상은 열에 아홉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다. 이 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나의 시선으로 구성한 세계상은 거의 대부분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고 이에 따라 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323 페이지) 


이는 데카르트적 자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근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불안하고 섬뜩한 결론이다. 여기서 나의 존재를 보증하는 코기토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들뢰즈의 생각은 나는 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나의 욕망이 나의 고유한 내면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욕망이 본래부터 내 것이었을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주로 자연철학 즉 존재론 위주의 사유를 전개했다. 소크라테스 이후에도 인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이 전경(前景)을 차지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 인식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340 페이지)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에 대응하면서 인간 의식의 심층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이려고 했고 플라톤주의는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에서 스피노자에 이르는 합리론으로 계승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플라톤식의 인식론은 비판받기 시작했다. 전면에 선 것이 경험론이다. 이 경험론의 핵심을 이어받으면서 칸트는 자신의 이성비판을 전개했고 20세기에 와서 다시 합리론적 경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바슐라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와중에 존재론은 베르그송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면서 인식론과 일정한 길항(拮抗)관계를 형성했다.(340 페이지)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논의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앎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궁극적인 앎이란 무엇인지 말해준다. 앎은 경이에서 시작되어 추론과 기억에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어떤 앎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언제나 무지의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무지를 다시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앎과 무지에 대한 고대 철학자들의 언어들을 넘어 나아가면 엄청나게 거대한 앎 ? 무지의 철학자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칸트다.(351 페이지) 존재론의 개념들은 범주라고 일컬어진다. 철학은 사실상 범주론을 통해 정점에 이른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을 밝혀 드러내는 분과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존재 또는 존재자이고 이를 근원적으로 분류, 탐구하는 것이 범주론이기 때문이다. 범주라는 말을 철학적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플라톤의 최상위 유는 다섯 가지다. 존재, 운동, 정지, 동일자, 타자가 그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범주론은 인식론적 전회를 거쳐 일신된다. 그 중심에 칸트가 있다. 전회라는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이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하는 방향에서 추구되었다면 칸트의 범주는 존재에서 인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359 페이지) 그래서 범주는 인간 주체의 인식 가능성과 관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식 능력이 존재자들과 상응한다는 전제하에 성립한다면 칸트에게서 그것이 역전되어 존재자들이 인식 능력에 상응한다는 전제가 나타난다. 칸트는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때 인식 능력(지성)은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다. 이 구성 작업이 인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보장한다. 감성을 통해 받아들여진 재료인 잡다(雜多)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범주다. 


칸트는 범주표를 도출하기 전에 그것이 우리 인식 능력인 판단력으로부터 나오는 종합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제시했다. 지식의 한계에 대해 더욱 철저하게 깨달은 철학자는 중세의 부정신학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다. 인간이 아무리 신에 대한 앎을 조장하고 거기에 접근하려 해도 궁극적으로 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 쿠사누스는 원 안의 다각형을 예로 들었다. 원 안에 다각형을 아무리 많이 그려넣어도 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도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기는 해도 그것에 적합한 진리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365 페이지) 인간의 이성은 동일률에 근거한다.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무한자를 파악하려 할 때 모순율은 무용지물이다. 


쿠사누스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진리에 만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화된 무지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무지의 긍정이 지적 허무주의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366 페이지) 쿠사누스의 교화된 무지는 과학과 수학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무지는 더 정교한 지성의 연마를 촉진하는 기반이 된다. 쿠사누스는 이성이 불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를 깨치고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비록 그것에 한계가 있을지라도 무한한 것에 접할 수 있다면 추진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무지에 대한 무지다.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의 최대치이고 무지에 대한 앎은 알의 최소치다. 여기에서 말하는 앎은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고 무지의 최대치와 앎의 최소치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만이 있다.(376 페이지) 칸트는 인식 주체의 시야를 벗어난 것을 물자체(物自體)라 이름했다.(378 페이지) 


현상은 우리 앎의 최대치이고 물자체는 무지의 최대치다. 최근 철학사상의 첨단은 신유물론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 카렌 바라드다. 바라드의 철학을 행위적 실재론이라 한다. 바라드는 이 사상을 존재-인식론이라 불렀다.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는 데카르트 이래 분화되어 칸트에 이르러 완전히 다른 영역이 되었다. 이 이후 사람들은 이 두 영역이 완결된 체계로서 때로 대립하고 때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라드는 이 두 영역이 이미/ 언제나 하나라고 선언한다. 바라드는 이론물리학자였다가 철학자가 된 사람으로 양자역학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바라드는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기반하여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더 신랄하게 말하면 그릇된 것이라고 본다.(389 페이지) 


대안은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인 보어에게서 나왔다. 보어의 이론은 하이젠베르크의 그것과 달리 미결정성 원리 또는 상보성 원리라고 불린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되자 다소 우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해석이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잘못된 것인데 대중적으로 너무 급격하게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그에 대한 논의가 붇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부차적으로 다루어졌다. 하이젠베르크의 핵심적인 주제는 실험 상황에서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하기 위해 무언가(예컨대 빛)을 쏘면 그것에 의해 측정이 방해받는다는 사실이다. 방해라는 생각에 기반한 이런 분석은 하이젠베르크를 불확정성 관계가 인식론적 원리라는 결론으로 이끌었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보어에게 중요했던 것은 방해가 아니라 입자의 속성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였다.(390 페이지) 


가령 그 입자가 방해를 받음으로써 빨강(입자의 경우에는 운동량과 위치)이 빨강으로 남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빨강이라는 특성 자체가 이미 미결정된 상태라는 것이다. 보어가 보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가 운동량과 위치라는 이미 정해진 결정값이 있고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없다고 보는 점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보어는 그런 이미 정해진 결정값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장치를 통해 측정하느냐에 따라(위치 측정을 위한 장치냐 운동량 측정을 위한 장치냐에 따라) 둘 중 하나의 측정값만이 불확실하게 결정되며 다른 하나는 미결정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이 동일한 의미에서 두 측정값의 존재는 서로 상보성 다른 말로 상호배제성을 띤다.(391 페이지)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확실한 앎이 있다고 전제하지만 사실상 그 대상은 직접 실험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앎도 존재하지 않고 안다고 해봐야 기껏 그 부분만을 알뿐이다. 


”보어에게 실재적인 주제는 미결정성이지 불확정성이 아니다. 그는 의미론적이고 존재적인 용어로, 그리고 추론적인 인식론적 용어로 위치와 운동량간의 상호관게를 이해한다. 보어의 미결정성 원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상보적 변수들의 값(위치와 운동량 같은)은 동시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주제는 인식불가능성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알려질 수 있는 것에 관한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의미론적인 것)과 모른다는 것(존재론적인 것)은 상보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상보적이란 말에는 상호배제적으로 보완한다는 의미가 있다. 상호배제적으로 관계 맺는 무지는 곧 미리 결정된 것은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한 앎은 동시에 다른 것에 대한 무지를 필연적으로 야기한다.(39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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