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전인 1999년 철학자 이정우 교수의 ‘담론의 공간’에서 “아날 학파는 사건들로 시끄러운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평형들을 밝혀냈다.”는 글을 읽었다. 당시 내가 ‘담론의 공간’을 읽은 것은 동(同) 저자가 2년전에 낸 ‘가로지르기’를 읽으며 느낀 참신감(斬新感)을 지속적인 공부로 이어나가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이후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올해 6월 최호근 교수의 ‘역사 문해력 수업’을 읽었다. 이 책에서 ‘아날학파의 거두‘ 페르낭 브로델에 관한 글을 만났다. ’역사적 시간의 세 층위; 파도(波濤)의 시간, 해류(海流)의 시간, 해구(海溝)의 시간‘이란 글이다. ’역사 문해력 수업‘은 ’담론의 공간‘을 읽은 데다가 지질을 공부하는 내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파도의 시간은 변화무쌍한 것 같지만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파악하기 쉬운 사건의 시간이다. 해류의 시간은 흐름을 타고 전개되는 시간으로서 이를 포착하려면 세대와 세기의 단위가 필요하다. 해구의 시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구조적 단위의 시간이다. 이런 비유는 이야기의 끈’에서 철학자 김상환 교수가 선보인 비유를 연상하게 한다.

 

김상환 교수는 위대한 창조는 묵직한 습관의 지층에 습곡과 변동을 일으키는 용암의 분출과 같다는 말을 했다.(244 페이지) 해구가 지질 용어이듯 지층(地層), 습곡(褶曲), 용암(鎔巖) 분출(噴出)도 지질 용어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런 참신한 비유를 접하고 실재 성과를 내려면 공부하는 사람은 구체적 적용 예를 찾아야 한다.

 

우선 판구조론 및 해저확장설 등의 지구과학 내용을 숙지하고 레이첼 카슨의 ‘우리를 둘러싼 바다’ 처럼 해양 과학자가 쓴 문학적인 동시에 엄밀한 과학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훈련된 눈으로 현실을 분석하면 된다. 이런 작업은 글쓰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글쓰기는 특별히 현장에서 내용을 전하는 해설사에게는 더욱 필요한 일이다.

 

다시 김상환 교수의 글을 참고하자면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알맞은 표현을 찾으려 이미 쓴 글을 다시 고쳐 쓰는 것이다. ‘공공역사를 실천중입니다’에서 나는 해설사는 학문과 이야기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관계를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그리고 새로운 자료를 자신의 기존 이야기 풀pool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유연성을 갖추기 위해 건조한 글은 감성적인 글로, 감성적인 글은 엄격한 글로 만들어 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도 썼다.

 

지구과학 공부 - 인문 공부, 그리고 두 학문을 아우르는 일관된 시각을 갖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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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 창의적인 공공역사가가 되는 길'이란 글로 '공공역사를 실천중입니다'의 공저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 나는 문화해설사겸 한탄강(연천) 지질공원 해설사다. 이 이중의 정체성이 마음에 든다. 인문과 자연에 두루 정통하고자 하는 지향성이 반영된 프로필이기 때문이다. 어제 이**교수님께서 "여러 분야의 분들과 큰 활동을 하시는군요"란 말씀을 해주셨다. 이번 공저 참여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어서 더욱 기쁘고 감사하다. 지난 6월 공들인 프로젝트의 탈락으로 낙심하고 있던 차에 예상하지 못한 제의를 받고 기꺼이 참여했다. 훌륭한 분들과 함께 해서 기쁘다. 문화해설사이자 한탄강(연천) 지질공원 해설사는 현재까지 나 말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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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물학과 지질학을 가르치는 도널드 프로세로의 책에서 두 가지 예를 만난다. 하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직한 경우다. 전자의 예는 자기들의 삶을 더 낫게 해주는 바로 그 체계,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기꺼이 받아들이곤 하는 그 체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예다.('화석은 말한다' 39 페이지) 이와 관련해 프로세로는 "자연세계는 일괄 거래와 같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실과 싫어하는 사실을 골라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들려준다.

 

후자의 예는 위대한 발견은 꽤 우연히 이루어지지만 과학의 경우 세렌디피티(예기치 못한 발견)가 작동하려면 우연 속에 숨은 새롭고 예기치 못한 발견의 의미를 연구자가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지구 격동의 이력서 암석 25' 273 페이지)

 

'화석은 말한다'에서 저자는 과학과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는 강한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과학에 대해 두 길 보기를 하려는 이들이 많다는 말을 한다. 세계가 가진 대부분의 측면에 대해서는 자신의 믿음 체계가 설명한 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에게 필요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과학적인 설명과 발전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화석은 말한다' 39 페이지)는 뜻이다. 돈 때문이든 여가선용 때문이든 신앙과 배치되는 '지질'에 근거한 해설을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 있었다. 천문학의 이론들은 수용하면서 지질에 대해서는 복잡한 자세를 가진 독특한 경우였다.

 

책상 위에 철학 교수 제임스 스미스, 천문학자 제니퍼 와이즈먼 등 25인이 함께 쓴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란 책이 놓여 있다.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다. 과학책 두 권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정인경 선생의 '내 생의 중력에 맞서'와 함께 알려준 책이었다. 이에 친구는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를 두 권 주문해 내게 한 권을 주었고 정인경 선생의 책은 한 권을 주문해 자신이 가졌다. 따로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자는 말과 함께.

 

여담이지만 25인이 쓴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는가?'는 24인이 쓴 출간 예정의 책인 '공공역사를 실천중입니다'를 연상하게 한다. 이런 컨셉의 책이 가진 장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전기한 복잡한 인물이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는 확고한 믿음 때문에 그런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연구자는 우연 속에 숨은 새롭고 예기치 못한 발견의 의미를 알아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말을 공부하는 사람은 우연히 만난 책에서 새롭고 예기치 못한 단서를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로 활용하고 싶다. 이는 누구보다 나에게 먼저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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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단단하게 자라는 식물처럼 삽니다 - 식물의 속도에서 배운 16가지 삶의 철학
마커스 브릿지워터 지음, 선영화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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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밀어붙이기보다 북돋울 때 비로소 시작되며 그러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식물 애호가이자 교육자, 가든 마커스의 운영자인 마커스 브릿지워터가 '느리지만 단단하게 자라는 식물처럼 삽니다'에서 소개한 핵심 구절이다. 저자는 자신을 성장시켜줄 다섯 가지 도구를 언급한다. 씨앗; 선택과 경험, 토양; 공동체와 환경, 수분 측정기; 관점 대 인식, 삽; 유용한 도구 대 해로운 무기, 정원사; 생명과 세계 등이다.

 

식물에게 농약보다 더 해로운 것은 비료라고 한다. 비료는 식물을 빨리 자라게 한다. 그 결과 식물은 허약하게 자랄 수 밖에 없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자라는 식물처럼 삽니다'는 마음, 몸, 영혼의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책이다. 저자는 마약, 폭력, 범죄가 만연한 플로리다주 젤우드 지역의 입양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어린 시절 발음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머리털이 빠지는 지병이 있다는 이유로, 학급에서 피부색이 다른 유일한 학생이라는 이유로 학교폭력과 인종차별을 당했다.

 

하지만 양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식물 돌보는 법을 배우면서 꿋꿋하게 자라 식물의 지혜를 전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강연하며 살고 있다. 저자는 학교 폭력에 시달릴 때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공격자의 면전에 미소를 지은 것이다. 저자는 관찰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생각, 행동을 통제하는 능력을 함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능력은 성장에 필수적이다.

 

저자가 식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지혜를 얻었는지 보자. 저자는 라벤더와 장미를 예로 든다. 두 식물은 서로 도움을 주는 공영식물이다. 장미는 식물에 해를 끼치는 진딧물을 유인하고 라벤더는 진딧물을 잡아먹는 무당벌레를 끌어들인다. 이를 예로 들며 저자는 현재의 취미, 습관, 일과가 어울리지 못한 채로 삶의 질을 저해한다면 과감히 솎아버리라고 조언한다.

 

저자의 논지에 필수적인 항목은 인내다. 인내심은 무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집중하고 관찰하는 태도이며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적극적 실천 행위다. 영혼을 돌보는 일은 식물 한 포기를 키워내는 과정과 같다. 모두의 영혼에는 성장 잠재력이 숨어 있고 적절하게 관리하면 꽃을 피워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공동체를 에너지와 자원, 환경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공동체의 개념을 사람에 한정해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공동체는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고 말한다.

 

식물학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고 스스로 식물 전문가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성장을 일구는 일이 늘 즐거웠다고 덧붙인다. 저자가 밝히는 식물이 건강하게 자라는 이유는 1) 식물이 원하는 환경과 공동체를 조성하는 것, 2) 친절하고 끈기 있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식물을 돌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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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지질명소들을 해설해야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더욱이 지구환경과학과 학생들에게라면 더욱 의미 있는 도약이 가능하다. 단 이는 충실한 준비를 전제로 했을 때라야 유효한 이야기다. 오늘 해설한 곳은 재인폭포, 백의리층, 베개용암, 은대리 수평절리 & 습곡구조 등이다. 재인폭포 외의 모든 곳이 이야기거리가 많지 않은 곳이다, 어렵다기보다 소재가 풍부하지 못한 곳이라는 의미다.

 

지난 해 11월 공주대 지구과학교육과 학생들에게 한 해설은 선사박물관만 홀로 했을뿐 베개용암, 은대리 수평절리 & 습곡구조, 좌상바위 등에서는 관광과 소속의 지질 박사께서 주가 되었고 나는 보조적이었다. 오늘 해설은 나 혼자 맡아 무난히 진행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오늘은 재인폭포, 백의리층, 베개용암까지 하나의 주제로 엮었고 마지막 지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최덕근 교수의 ‘내가 사랑한 지구’, Thomson Turk의 ‘지구 시스템 과학 1’, 도널도 프로세로의 ‘지구 격동의 이력서, 암석 25’,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명 해류’, 권홍진, 이문원, 정병호, 안락규 등의 ‘한탄강 세계 지질공원으로 떠나는 여행’ 등으로부터 유용한 도움을 받았다. 물론 책들을 베이스로 해 내 식의 이야기를 엮었다. 고무적인 점은 생물학자의 책으로부터 지질 관련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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