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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평점 :
누구든 자신이 속한 국가나 민족에 대한 역사적 지식은 있게 마련이다. 많고 적음의 정도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특정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것은 어쩌면 다른 어떤 사람도 침해할 수 없는 사적 자유의 영역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평가를 밖으로 표출하는 문제는 또 다른 영역에 속한다. 나의 생각이 너와 다른 것처럼 나의 생각이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생각하는, 이른바 주류의 생각인지 일부 소수의 구성원인 비주류의 그것인지에 따라 비판과 지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방대하지만 작금의 시점에서 드러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그와 같은 일부분의 역사마저도 역사학자와 같은 전문가가 다수의 일반인에게 보여주고, 해석하고, 설명을 곁들이는 건 선별을 거친 것임을 감안할 때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던져진 뉴라이트 사관 역시 일제 식민지 치하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기인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제로 병합되고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통치 과정에서 자행된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인권 유린의 사료와 증거들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볼 것이며 이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어느 선까지 용인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방 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과학은 민족의 미래를 여는 열쇠이자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도구였지만, 이념은 우리를 분열시켰고,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며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대립의 역사가 우리 과학에 남긴 상처는 컸다. 무엇보다 거침없이 세계를 누비던 그 생생한 기록을 잊게 했다." (p.294 '에필로그' 중에서)
<조선인 만난 아인슈타인>은 제목만큼이나 생소한 내용의 책이다. 책의 저자인 민태기 박사 역시 공학도임을 감안할 때, 책은 단순히 과학 관련 사료와 증거의 나열이 아닐까 지레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발굴하여 정리하고 상황에 맞게 맥락을 설명하는 과정은 어느 역사가의 기술 못지않게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 전개된다. 가뜩이나 역사의 암흑기라고 불렸던 일제 식민지 시기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 전쟁 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추구했던 과학 발전의 원대한 꿈은 일반인들이 알지 못했던 생경한 분야이기도 했다. 1895년 서재필의 귀국에서부터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소개했던 황진남이 1970년 오키나와에서 사망했던 쓸쓸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암흑기에 있었던 우리 선조들의 과학 대국의 꿈을 사료와 함께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이념에 의해 도외시되고 찢겼던 우리의 과학사를 되살렸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처럼 당시 과학자들은 동시대의 최신 과학 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최규남은 1936년 5월, 4회에 걸쳐 아직 생소했던 '로켓' 과학과 달 탐사 전망을 소개하고, 6월에 일어난 개기일식을 6회에 걸쳐 설명하며 태양의 흑점과 코로나에 대한 연구를 알린다. 또한 1935년 처음 발견된 델린저현상에 대해 5회에 걸쳐 소개하며 전자기파와 태양 활동을 연결시켰다. 이 모두가 일간지에 실린 과학 칼럼이다." (p.170)
책은 단순히 사료나 당시의 잡지나 신문에 실린 기사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당시 세계의 과학 이슈와 새로운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이 우리 선조들이 민족의 역량과 과학 발전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애를 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함은 물론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당시의 우리 선조들이 세계 과학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게다가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과학계의 유명 인사들과 그들의 업적을 새로 알게 되는데 그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국제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리승기는 전쟁 중에 일본 군부에 불만을 표하다 투옥된 채로 1945년 해방을 맞게 된다. 교토 국제대학의 강사로 근무하던 박철재 역시 이 무렵 헌병에 잡혀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재일조선인 과학자들은 광복 후에 더욱 큰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p.187~p.188)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고, 인류가 화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케케묵은 역사를 알아서 도대체 뭐에 쓰겠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 선진국 대한민국을 이룬 기반도, 과학 발전을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기초 체력도 모두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우리 선조들의 땀과 눈물이 모여 현재에 이르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우리들의 조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는다는 건, 나아가 잘못된 역사를 가르친다는 건 어쩌면 세계사의 무대에서 우리 후손이 설 자리를 빼앗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세운 역사를 타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해석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