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Blu (리커버) 냉정과 열정 사이
츠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들 싸움에서도 그렇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서는 누구의 잘못이 큰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사람은 늘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유불리를 따져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숨기거나 축소하게 마련이니까. 그와 같은 방어기제는 누군가로부터 학습을 통해 습득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싸움의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사랑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사랑도 싸움도 집단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원초적인 생존 수단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일본의 남녀 소설가 2명이 같은 결말의 서사를 남자와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냉정과 열정 사이>는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에 이르는 과정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추억하며 각자가 지닌 사랑의 정도를 저울질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꽤나 기발한 발상이자 흥미로운 기획인 듯 보인다. 하기에 일본의 여성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와 일본의 남성 소설가 츠지 히토나리에 의해 쓰인 두 권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 Blu>는 두 사람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 소설이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하나의 단점이 있다면 ROSSO든 Blu든 하나를 먼저 읽고 나중에 읽는 소설은 어쩔 수 없이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의 소설가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는 점도 무시할 수가 없다.


"후회 없는 인생이 있을까. 후회만 계속해왔다. 평생, 후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진다. 느슨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올려다보았다. 굽어지는 길 중간쯤에 메미가 사는 아파트 불빛이 보였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어떡할까, 하고 망설였다."  (p.60)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를 먼저 읽었던 나는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Blu>를 읽는 데 꽤나 긴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츠지 히토나리의 문체나 서술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두 소설의 내용이 많은 부분 중첩되거나 예상 가능한 부분이 많아서 좀처럼 독서에 속도를 높일 수 없었던 때문도 아니다. 제목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달리 썼다면 완전히 새로운 소설이었을 테지만 단지 주인공의 이름이 같고, 결말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나의 독서 이력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날이 그리워,라는 애절한 멜로디의 일본 팝송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것이다."  (p.194~p.195)


교포 출신의 아오이와 쥰세이는 도쿄의 대학에서 만나 연인이 되고, 사랑하던  두 사람은 아오이의 임신을 계기로 심하게 다툰 후 헤어진다. 그 후 쥰세이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미술품 복원사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미술품 복원 일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쥰세이는 공방에서 함께 일을 배우는 다른 수련생의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게다가 조반나 선생님은 짬이 날 때마다 쥰세이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어린 시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쥰세이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뉴욕에 살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쥰세이는 조반나 선생님에 대한 특별한 감정으로 이어진다. 한편 그의 곁에는 일본인 유학생 메미가 있다.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메미는 두 사람의 이혼 후 줄곧 엄마와 함께 일본에서 생활한 터라 이탈리아어는 몹시 서툴렀다. 어학당에 다니며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메미의 유일한 조력자는 언어가 통하는 쥰세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헤어진 연인 아오이를 잊지 못하는 쥰세이는 연인인 메미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겉돌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쥰세이가 복원을 맡았던 명화가 심각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고, 그 일에 책임을 느낀 조반나 선생님은 공방을 폐쇄하기에 이르고,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수련생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책임을 느낀 쥰세이도 결국 일본에 사는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무기력한 생활로 일관한다. 어느 날 이탈리아에 있던 메미가 연락도 없이 쥰세이를 찾아오고...


"나의 광장. 예전에 그렇게 부르며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떠돌며 살아가던 내게 있어 그녀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도시의 광장처럼 시원스러운 존재였다. 별다른 용건도 없이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노인처럼 매일 그곳을 찾아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자신이 고독하지 않고, 행복한 존재라 생각할 수 있었다."  (p.168)


누구보다도 쥰세이를 아끼고 사랑했던 할아버지 곁에서 시간을 보내던 쥰세이는 조반나 선생님의 자살 소식을 듣고 다시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리고 헤어진 연인 아오이와 했던 오래전 약속을 떠올리는데...


남녀간의 사랑이나 결별은 한쪽편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결론짓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변수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많은 변수를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하여 최종적으로 누구의 잘못임을 객관적으로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사랑 앞에서 무모한 듯 보이고, 맹목적일 수 있다. 비록 그 결과가 참혹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랑에 대한 용기는 그 무모함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7. 한결 홀가분한 마음


봄날씨처럼 따사롭고 화창했던 어제는 아내 멧돼지와 함께 모처럼 진흙목욕을 했습니다. 발정기가 지난 수컷 멧돼지들에게 어쩌면 2월은 잔인한 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게 하루의 일과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선거도 멀지 않았는데 그렇게 멀뚱히 앉아서 매일 잠만 잘 거냐는 아내 멧돼지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결국 마음에도 없는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던 것입니다. '돈생 토론회'라는 거창한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 멧돼지의 명령이라면 해외 순방도 취소하는 나로서는 그깟 국내 순회공연쯤이야 하는 심정으로 호기롭게 나섰던 것입니다.


남쪽 부산에서는 새뜻이 핀 동백꽃이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부산에서 개최하려고 했던 국제 행사의 유치에 실패한 이후 나는 부산의 멧돼지들로부터 심한 야유와 비토 정서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나는 사실 국제 행사의 유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것을 핑계로 해외여행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과 재물이 많은 멧돼지들을 대동하고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행사 유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똘마니들의 조언과 이러다 다 죽게 생겼다는 아내 멧돼지의 비명 때문에 나서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가는 곳마다 공약(空約)을 쏟아냈습니다. 그 많은 공약을 지키려면 나라의 곳간이 거덜 나겠지만 그게 공변될 공(公)이 아니라 단순히 빌 공(空) 자 공약(空約)이라는 걸 나의 똘마니들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내가 어떤 말을 하건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시쳇말로 어차피 '뻥'이고 '쇼'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몇 번 뻥을 치면서 다니다 보니 대전의 한 행사장에서는 나의 연설 도중에 바른말을 하는 멧돼지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냥 둘 수가 없었지요. 마음 같아서는 날씬하게 두들겨 패서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똘마니 멧돼지들을 시켜 강제로 쫓아냈을 뿐입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이와 같은 쇼를 몇 번 더 진행할 요량입니다. 미련한 일반 멧돼지들은 이것이 쇼라는 사실도 모른 채 나의 공약(空約)에 열광할 것입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입니다. 화창하고 따사롭던 날씨는 하루 만에 급변하여 소란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운을 예견하는 듯 말입니다. 나는 어쩌면 리더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무능한 멧돼지일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게 하늘을 찌를 듯한 아내 멧돼지의 욕심 때문에 비롯된 일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나는 리더 멧돼지로서의 능력이 없으니 각자 알아서 생존을 도모하기를... 꽃이 피고 녹음 무성한 여름이 오면 나는 어쩌면 리더의 자리에서 쫓겨나 합당한 처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만 된다면 지금보다 한결 홀가분한 마음일 테지요.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결심하는 이는 원래부터 다정한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다. 우리가 지난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더 열심히 해야겠다 결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신년계획을 세우는 일도, 다이어트나 운동 등 새해 결심을 하는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지키지도 않을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만 낭비하고 의지박약의 나 자신만 탓하는 일도 유행 지난 신파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상냥한 사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시간마다 기도와 더불어 다짐하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다정한 품성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나는 제법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만회해 보자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런 거창한(?) 프로젝트를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로 나는 시를 외우거나 읽기, 시인의 산문집이나 대담집 읽기로 계획을 잡았다. 말하자면 나는 '시인처럼 생각하기'를 실천해 볼 요량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어서, 시시때때로 이해득실을 따져 좋고 나쁨을 가리는 까칠하고 몸에 밴 자본주의 성정이 수시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 자신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한평생 길들여진 자본주의 품성이 터줏대감처럼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까닭에 굴러온 돌인 시인의 품성은 매번 겉돌기만 할 뿐 진득하니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 그렇게 쌓아가야 한다는 것은 허수경 시인으로부터 배운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독일어를 배운 지 10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는 독일어로 쓰인 시들을 읽을 수 있었다. 시들을 읽을 수 있으면서부터 배낭에 시집을 넣고 수천 번도 더 걸었던 도시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를 읽으며 걸었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라는데 시 중독자이자 시인인 나는 시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의 속내나 거리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미디엄이었다. 내 영혼의 속살은 그 매개로만 표현되었다. 이방의 시인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도시를 드문드문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p.24)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하여 터를 잡고 살았던 도시 뮌스터.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 중 다섯 번째 이야기인 <너 없이 걸었다>는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뮌스터의 사람들과 풍경을 독일 시인들의 시와 엮어 그곳에 살고는 있지만 원주민의 시각이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이방인의 시각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경계인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독일 문화의 깊은 숨결을 호흡하고 있다.


"외국어를 쓰고 사는 동안 나는 우리말로 대화할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컷 우리말로 수다를 해보았으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에게 절실한 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눌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특정한 사람들이었다. 그 특정한 사람들이 들어 있는 기억의 서랍은 하도 자주 열어보아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다. 이 거리에서 내가 그렇게 자주 오라고 불러대던 사람들은 아마 다른 거리에서 나를 오라고, 그렇게 자주 불러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p.114)


허수경 시인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독일 시인은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등 어디선가 한두 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유명 시인들과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등 낯선 시인들의 이름이 섞여 있다. 진주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난 한 시인이 시가 아닌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뮌스터라는 독일의 소도시로 떠났을 때, 시인을 아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머잖아 돌아올 거라고 아주 쉽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을 깨고 시인은 독일에 눌러앉았고, 익숙했던 공간을 떠난 한 인간의 삶과 고독이 문틀에 새긴 아이의 키 눈금처럼 시와 글로 표출되고 있다. 독일이라는 먼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시인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유를 버무린 이 책은 한 권의 문화백과사전인 셈이다.


"나이가 든다고 유혹이라는 치명적인 달콤함을 버릴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뭔가, 혹은 누군가에게 끌렸던 그 설렘만큼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죽음의 기미를 알아채면서도 유혹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이들은 일종의 삶 중독자이다.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매일밤 도박장을 찾는 이 어쩔 수 없음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는 유혹이 인생을 동반한다."  (P.187)


터무니없는 겨울 햇살이 비듬처럼 쏟아지는 오후. 나는 베란다 유리문을 통해 산책을 나온 사람들의 느린 발걸음을 시선으로만 좇고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소리가 차단된 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은 평화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러나 선량한 그들도 살다 보면 때론 본의 아니게 악다구니를 쓰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때도 있을 터, 나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했던 오래전 약속을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조심조심 꺼내 본다. 끈적하게 눌어붙은 주머니 속 사탕껍질을 벗기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05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957년 세상을 떠난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뉴 룩으로서 전후 패션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디오르는 모드의 세계화, 기업화를 위한 발판을 구축하였으며 후진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그가 자신의 조국 프랑스도 아닌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이토록 유명세를 타는 까닭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일 것이다. 어느 욕심 많은 여인이 디올 백을 무척이나 사랑한 데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요즘 개인적인 용무나 공적인 업무로 외국의 지인과 통화를 할 때마다 디올 백과 김건희에 대한 사적인 농담, 사건이 터지게 된 저간의 사정과 나의 견해를 묻는 질문 등으로 인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디올 백과 더불어 김건희 씨의 명성이 세계적인 셀럽 수준으로 높아진 것에 대해 소식을 듣는 나조차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이다. 게다가 크리스챤 디올사는 자사의 상품을 어떤 보상도 없이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 김건희 씨에 대해 사례를 톡톡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제는 독일에 사는 지인 한 명과 길게 통화를 했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예정되었던 독일과 덴마크 순방을 취소한 것에 대해 그는 별다른 코멘트도 없이 대통령이 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물쭈물 궁색한 대답을 하려는데 그분이 느닷없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겠느냐고 따져 묻는 바람에 나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것과 같지는 않지만 디올 백과 김건희 씨에 대한 질문은 다른 나라의 지인에게서도 여러 번 받은 바 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작금의 경제 상황과 국격의 추락을 초래한 윤석열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은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국가의 존립과 미래를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을 잘못 판단해서, 욱하는 마음에, 단순히 진보 정권의 재집권이 싫어서 윤석열 대통령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참담한 결과를 보고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반성할 줄 모른다면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까운 친구나 일가친척들 중에도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도 이따금 말하곤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국민을 위해 잘한 게 한 가지라도 있으면 말해달라고, 그것으로 나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김건희 씨가 디올 백을 받았던 것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덮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청아 2024-02-1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탄희 의원이 정치권의 혐오정치로,반사이익으로 또 이런일이 있을 수 있다고해서 심란했습니다. 워낙 이슈가 많아 다 덮히는 느낌도 들고요.

꼼쥐 2024-02-17 16:22   좋아요 1 | URL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현 정권의 무능조차 덮어주는 언론과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편을 험담하는 정치인들의 비이성적 언어를 그대로 보도하는 언론 행태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건 사실이죠. 그놈이 그놈이라는 양비론도 비등하고 말이죠.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잉크냄새 2024-02-17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지자들은 인지부조화의 상태가 아닌가 싶어요. 자신의 실수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으니 오히려 그 실수를 정당화해버려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랄까요.

꼼쥐 2024-02-17 16:19   좋아요 1 | URL
실수가 실수였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몇몇의 사람들일 테고, 나머지는 알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일 테지요. 작금의 경제 상황과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외교 현실을 보면서도 혹은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들이 정말 악인이죠.
 
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직장인들의 고민 중 하나는 오늘 점심에는 뭘 먹을까? 하는 문제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 그게 뭔 고민이 될까? 생각하겠지만 그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얘기다. 사무실 근방의 음식점이야 손으로 꼽을 정도로 빤하고 각각의 음식점에 대한 맛의 평가도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여러 번 들어 달리 변할 것도 없지만 그 많지 않은 선택지 중에서 오늘의 메뉴를 고르는 일은 매번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이 되기 전부터 나 대신 그 어려운 문제를 떠안을 다른 누군가를 물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김 대리, 오늘 뭐 먹을까?"


오늘은 사무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고 나가 토종닭을 먹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오전과는 다르게 비는 이제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급변하는 날씨에 오싹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요 며칠 기형적으로 따뜻했던 날씨 탓에 옷을 얇게 입고 나왔던 게 화근이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주문 요청이 들어왔다.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공깃밥에 닭볶음탕을 볼따구니가 미어져라 욱여넣었다.


"내가 감자탕을 처음 먹은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자탕 맛에 제대로 꽂히게 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한다. 제법 추운 날이었다. 남자친구가 감자탕을 잘하는 집이 있는데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매우 설레던 때라 "난 감자탕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쩌고 해서 남자친구의 제안에 초를 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법 규모가 크지만 허름하기 짝이 없는 식당에 앉아 한참을 펄펄 끓인 감자탕의 첫 국물을 떠먹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감자탕 국물이 원래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었던가? 믿을 수 없었다."  (p.181)


권여선 작가의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를 다 읽고도 리뷰를 쓸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다. TV나 인터넷 방송의 먹방과 ‘쿡방’이 넘쳐나는 시대에 책이라는 낡은 매체가 이들과 경쟁하는 것도 우습고,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그리 크지 않은 나로서는 작가가 밝힌 음식과 그에 얽힌 여러 뒷얘기에 덧붙일 말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블로그 활동을 하는 여러 블로거 중 다수가 자신이 방문했던 여러 음식점의 사진과 메뉴 등을 경쟁하듯 올리고 있는 게 현실 아니던가. 현실이 그와 같은데 나 역시 남들이 읽지도 않을 글을 올리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는 게 그닥 내키지 않았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허름한 술집 문이나 벽에 붙어 있던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이 책 제목인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p.10 '들어가는 말' 중에서)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부 '봄.청춘의 맛', 2부 '여름.이열치열의 맛', 3부 '가을.다디단 맛', 4부 '겨울.처음의 맛'의 사계절과 5부 '환절기'가 더해지고 있다. 음식은 대개 추억과 함께 기억된다. 그러므로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 얽힌 말하는 이의 추억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쓰는 이의 성정과 글솜씨에 의해 독자의 감흥이 달라질 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이야기꾼인 권여선 작가의 음식 이야기는 책을 잡은 어떤 이에게도 매혹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고, 작가가 떠올린 어떤 추억은 마치 내 일인 양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십 대 후반 무렵 겨울에 비록 반지하방이긴 해도 처음 독립해 자취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내 부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의 첫 식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사를 마치고 피곤한 와중에도 나는 기운을 북돋워 시장에 나가 소고기와 콩나물, 꼬막과 양념거리를 사 왔다. 소고기에 콩나물과 대파를 넣어 고깃국을 끓이고 꼬막을 삶아 양념장을 듬뿍 넣어 조린다. 내 조그만 자취방은 금세 맛난 고기와 조개, 양념 냄새로 가득했다. 훌륭한 만찬에 소주까지 곁들이니 부러울 게 없었다."  (p.210)


낮에 먹었던 닭볶음탕이 생각난다. 창밖으론 진눈깨비가 내리고 식당의 좁은 문으로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 느긋하게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던 그 한 끼의 식사가 날씨처럼 스산했던 오늘 오후를 지탱하는 든든한 힘이 되었기를... 그리고 언젠가 오늘보다 느긋한 하루가 주어진다면 오늘의 식사를 함께 했던 식탁 위의 얼굴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기를... 그렇게 맛있게 늙어가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