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노블 [샐리 존스의 전설]을 무척 좋아하고 여기저기 많이 추천해왔기에 덩달아 "산하" 출판사에 호감이 크다.



 "산하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서도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는 예전부터 읽고 싶었다. 어린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십여 권을 한 번에 주문하려다 구하기 어려워 포기했던 적도 있다.


12월 31일 연말 모임 장소로 이동하는 짬짬 비는 시간에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를 드디어 다 읽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여성은 자신의 삶보다 가족 구조나 타인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요구(강요) 받습니다.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답니다. 가난한 여성이나 대도시 밖에서 사는 여성은 더욱 그렇지요.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는 여성이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추구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이라며 추천한 그림책이다. 실존 인물을 모델 삼고 있다. 그리고 쓴 작가 사라 룬드베리는 "외롭고 힘든 길을 씩씩하게 걸어간 베타 한손을 생각하며"라며 첫문장을 시작했다.


Photograph of the Swedish artist Berta Hansson (1910-1994)


 

스웨덴 화가인 베타 한손은 어린이의 교육이 권리로 인식되기보다 어린이, 특히 가난한 농가의 소녀는 노동력으로 인식되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폐결핵을 앓는 어머니 외에는 베타 한손의 예술가적 재능과 관심, 영민함을 높이 사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미술 시간에 복사기로 찍어낸 모범적 당근 색칠하기를 거부하고 "우리 집 당근들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제가 심은 당근을 그려도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베타 한손에게 담임 선생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선을 벗어나지 않게 색칠해라)"라고 근엄하게 지시한다. 우유를 짜고 상을 차리고 동생을 먹이고 집안 청소를 하느라 바쁜 베타 한손의 마음 한편에는 늘 다른 세계가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해 답답한 베타 한손에게는 남들에게는 온통 아담과 하느님만 보이는 그림에서 하와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등 뒤에 하와가 있다.

자기가 만들어질 차례를,

자기도 눈에 보이기를,

생명을 얻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가끔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 본문




중앙에 서지 못한 배경이지만 중심으로 나갈 열망을 충분히 키웠고 준비까지 하는 하와처럼, 어린 소녀는 내면의 뜨거움을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매우 도발적이나 조용한 방식의 저항을 통해서. 아빠와 마을 아저씨들이 일을 마치고 와서 드실 점심 식사를 일부러 새카맣게 태우는 동안 꿈쩍 않고 책만 읽으면서 무언의 시위를 했다. 지금부터 100년 전, 가난하고 작은 여자아이의 꿈이나 재능, 열망 따위에는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을 시대에 그렇게 해서 알을 깨고 나온 베타 한손은 용감했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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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의 마지막 날 읽은 책.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이미 신간 베스트셀러라는 입소문을 들었고 "의사 엄마가 기록한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법"이라는 부제가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 엄마아빠를 둔 총명한 청소년(저자의 둘째 따님)이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고 응급실과 입원실을 들락이며 힘들게 병과 투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진행형의 7년 동안 아픈 당사자인 따님은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고, 자해로 인해 몸에 흉터를 남겼으며 심신이 지쳐갔다. 그 7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아픈 자식을 돌보는 부모 김현아 저자의 삶은 확 틀어졌다. 다행히 경제적 의료적 지원 면에서 풍족한 환경인지라 감내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은 포지션의 가정에서라면 16번의 입원과 치료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을 터이고 최선의 의료진과 의료정보를 바로 매칭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에세이 초반부 저자가 딸의 병세가 악화 혹은 완화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동시에 중간중간 관련 정신질환에 대한 의학 지식을 풀어내는 서사 방식을 오해할 뻔했다. '저자가 용기 내어 가족의 은밀한(?) 이야기를 열열긴 했지만 전문가다움을 드러내고 싶어하나? 그래서 의학 정보, 관련 예시(정신질환을 앓았던 천재와 유명인사들 예시)를 중간중간 곁들인 게 아닐까? 했다. 오해였다. 그것은 의사 엄마 김현아가 이 에세이를 통해 진정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한 밑밥이었다. 이 책 마지막 장 "우리는 모두 정신질환자이다"를 어느 한 문장도 놓치기 아깝게 특히 좋았다. 의사 엄마로서 아픈 사람과 그 가족의 삶, 한국의 의료현실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겪어가면서 느낀 점을 한국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며 전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 짧은 리뷰에서 "아프다," "정신질환" 등의 표현을 썼지만, 저자는 "신경 다양성"이라는 단어와 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 Roy Richard Grinker를 동원하여 '정상성'이라는 환상을 꼬집는다.

로이 리처드 그린커 Roy Richard Grinker는 [정상은 없다]에서 '정상'이란 오랫동안 사회가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거부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쓴 개념이며 유해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278쪽

김현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신랄하게 비판한 김규항의 글을 인용하며 젊은이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만드는 데 관심이 없는(덜한) 기성세대에게 일침도 놓는다.

한 사람이 아프면 개인적 문제이겠지만 여러 사람이 아프면 사회문제이다. 내 아이의 문제와 겹쳐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다시 성찰해야 했다...김규향 씨의 몇년 전 칼럼이 다시금 기억났다. "지난 몇해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가장 파렴치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아프니까 청춘이다]일 것이다. '청년의 지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 청년에게 할 첫번째 말은 '미안하다'여야 한다...그런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김현아는 '의사 엄마' 타이틀을 다른 각도에서 성찰한다. '아프니까 청춘'식 태도가 아니라 '당신의 아픔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의 태도로. 그 부분을 저자의 문장으로 옮겨본다.

6년간 아이와 함께 폭풍우치는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은 아이에게 나름대로는 최선의 치료 조건을 큰 어려움 없이 제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인적 자원 측면에서 부뫄 모두 의과대학 교수라는 점은 다른 이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여러 혜택을 가능케 했는데, 의료진과 선후배 사이인지라 내가 답답할 때에 이메일을 보내 상시로 소통할 수 있었떤 것은 특별히 운이 좋았던 예에 속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같이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며 책을 내게 된 계기도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하는 생각과 우리만큼 운이 좋지는 않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224쪽

정신건강의학 전문가가 본다면 한 없이 모자란 이야기를 용기내어 하게 된 이유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바꾸는 데 작은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작은 변화 중 하나가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질환 환자에게 하는 '미쳤다'는 말을 '아프다'로 바꿔보도록 노력한다면 환자에 대한 낙인이 어느 정도 옅어질 수 있다.

290

작은 변화를 꿈꾸며 어려운 이야기를 해준 김현아 저자에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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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31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거 진짜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죠..ㅎㅎ
이 책 좋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읽기 좀 괴로울 것 같아서 손이 안 갑니다 ㅜㅜ

얄라알라 2024-01-03 09:34   좋아요 1 | URL
네네 독서괭님,

그래서 김난도 교수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책 혹은 인터뷰에서 보았던 기억이 가물거려요.

김규항이라는 분이 비판하신 건데 급속도로 퍼졌나봐요^^

잉크냄새 2023-12-31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개그맨이 그러더군요. 아프니까 환자다.

얄라알라 2024-01-03 09:35   좋아요 0 | URL
^^ 그렇네요.

김난도 교수로서는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김규항님과 비슷한 톤의 비판하시는 분이 많않잖아요.
저도 일정 공감합니다^^

잉크냄새님 좋은 1월 3일 시작하시어요

페크pek0501 2023-12-31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건필하십시오.^^

얄라알라 2024-01-03 09:36   좋아요 0 | URL
우아 ˝건필˝...
전 이 단어를 써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더 멋지게 들려요

감사합니다 페크님! 새해에도 발레 열심히 하시고 건필, 건강하시어요
 

쉬거나 혼밥 하면서 영상 보는 분들이 많다. 나는 역으로 영상, 특히 사람 목소리로 "일방통행 설명" 하는 영상에서 피로감을 느낀다. 반면 책은 9~10시간을 잡고 있어도 피곤하지 않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다. 사람 음성의 설명은 발화자의 의지가 더 강하기에 청자자가 완급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잠시 영상 멈춤 하거나 1.25배로 재생속도 조율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화자의 전달의지가 청자의 이해 의지를 압도한다.

반면 책 읽기에서는 내가 지휘대를 잡는다. 활자의 오케스트라를 내 의지대로 끌고 갈 수 있다. 느리게 읽고 싶은 페이지에서는 오래 머물고 덜 필요한 부분은 빠르게 지나간다. 결론은 내게 책 읽는 시간만큼 평온한 휴식이 없다는!

12월에 읽은 책들을 떠올려봤다. 몇 권 누락이 있지만 아래와 같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과 [뼈의 증언]을 빼놓고는 모두 쉬지 않고 한 번에 다 읽은 책들! 특히 어린 시절 반쪽만 이해했던 고전을 다시 만나는 황홀함에 흠뻑 취했던 12월이었다. 이 재미를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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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31 0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영상 보는 게 피곤하더라고요. 아무리 콘텐츠가 좋아도… 역시 책이 최고입니다! 얄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얄라알라 2023-12-31 08:35   좋아요 2 | URL
오! 독서괭님, 23년의 마지막 일요일이자 Eve에 일찍부터 알라딘서재하시네요^^ 저도 제가 영상을 오래 보지 못하겠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봤는데 대화와 달리 영상은 일방통행으로 빠르게 화자가 자기 정보만 풀어놓으니까 그걸 소화하는게 힘든 거더라고요. 대화가 좋고 책이 좋아요

독서괭님, 새해에도 건강히 평온히 순간순간 즐거움을 자주 느끼시며 복 많이 받으시어요^^

새파랑 2023-12-31 1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 계신분들은 다 공감하실거 같아요. 저도 영상보다는 책~!! 영상은 생각할 틈이 없는데 책은 틈이 있어서 더 좋은거 같아요~!!
12월도 알차게 보내셨군요. 내년도 화이팅 입니다~!!

얄라알라 2024-01-01 21:08   좋아요 1 | URL
내년, 아니 2024년에도 새파랑님 일력의 정감 어린 필체로 문장들을 따라가보고 싶습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시어요. 새파랑님^^

반유행열반인 2023-12-31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하려는데 이미 많은 이웃 분들이 같은 목소리를 ㅎㅎㅎ 반대상황이었으면 여기 아니고 다들 유튜브에 댓들 달고 있었겠죠 ㅎㅎㅎ

얄라알라 2024-01-01 21:08   좋아요 1 | URL
ㅋㅋㅋ 맞아요. 그러네요. 댓글 다는 것도 그 연장인가봅니다. 저는 유튜브 댓글 달아본적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 것 같아요 반면....알라린 댓글은!!!

열반인님 말씀이 딱이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3-12-31 1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훌륭하십니다!!!

얄라알라 2024-01-01 21:07   좋아요 0 | URL
페크님 덕분에 또 ˝건필˝이라는 멋진 표현도 듣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페크님 새해 멋지게 시작하세요^^

은오 2024-01-01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달에도 알차게 읽으신 얄님...!! 😆
이미 공감의 댓글이 주루룩 달려있지만 저도 공감하고 갑니다. ㅋㅋㅋㅋㅋ 영상은 집중이 깨진 순간에도 혼자 계속 흘러가서 오히려 제대로 감상하려면 더 피곤하더라고요. ㅠㅠ

올해도 자주 뵙고 싶은 얄님!! 한해동안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얄라알라 2024-01-01 21:06   좋아요 1 | URL
은오님도 그러시군요! 열반인님 페크님 새파랑님 괭님, 다들 비슷하셔서 위안 얻습니다.
저는 영상(+사람 목소리 설명) 피로도가 높아서 종종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하거나 자리를 피하게 되는지라
제가 부적응자인가, 적응하도록 시대를 따라가야 하나 고민하거든요 ㅎㅎ

은오님, 자주 뵈어요. 빵바오건 은바오건 사랑스러운 은오님,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transient-guest 2024-01-03 0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보셨네요. 문학은 늘 꾸준히 읽어야 하는데 저는 요즘 복잡한 건 다 머리에 안 들어오고 집중력도 많이 떨어진 탓인지 책을 두서없이 뒤적거리고만 있네요.

얄라알라 2024-01-03 09:37   좋아요 1 | URL
와! 너무 재밌더라고요.
초중고대...학교 다닐 땐 거의 문학작품만 읽었는데 다시 그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였어요.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작가가 보이고 행간이 보이고
나이가 들어가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고전읽으며 다시 하게 된답니다.

transient님 머리 복잡하실 때는 누구라도 쉬엄쉬엄 가야죠^^ 일러스트레이션 많은 책도 보시고 쉬어도 가시고^^
 

연말 약속 때문에 옆 옆 동네를 방문했다. 저녁식사를 함께 나눴던 이들은 각자 스위트 홈으로 돌아갔고 나도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데,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자석에 끌리듯 들어간다. "신간도서" 서가에서 2~30분 머무른다.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데 어찌 신간도서 서가에서 쉬고 있지? 다들 앞다투어 대출해 가야 했지 않을까? 책을 향한 예의의 마음이 달아오른 애서가는 남의 동네에서 책 빌릴 수단을 고한다.




문상철의 [몰락의 시간]을 대출했다. 이 생소한 이름은 前충남도지사 안희정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의 재판에서 증언했던 "김상훈"의 실명이다. 최근 JTBC에서 문상철의 출간 인터뷰를 보았다.


화면으로 받은 그의 인상은,


1. 말을 참 잘 한다. 입술 밖으로 발음하는 말에 군더더기 하나 없어서 바로 기사로 옮겨도 교정 필요 없을 정도라는 김훈 작가님 떠올리게 할 만큼 언어 능력이 뛰어나다.

2.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음성과 화법을 지녔다. 정치인을 꿈꾸며 정치판에서 오래 수련하고 기다렸던 사람답게 나직한데 웅변력 있는 음성과 화법을 지녔다.


[몰락의 시간] 첫 장을 펴자마자 한 숨에 읽어버렸다. "정치계" 근처도 가본적 없는 "평민"에게 안희정 前도지사의 부침浮沈 및 권력형 불나비들의 생태계는 sci-fi 영화보다 흥미진진했다. 문상철은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글까지 잘 썼다. 안희정이 측근의 첫 요건으로 "페이퍼를 만들 수 있는" 언어능력을 중시했다던데 정치 "빽"이 일절 없던 문상철이 나중에 안희정의 이너서클에 들어간 이유를 알겠다.


문상철은 가까이서 수행했던 전前 상사의 치부를 까발리고자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그 어떤 정치인도 잠재적 '안희정'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려 글을 썼다고 밝힌다.


사람들의 기대와 욕망 앞에서 안희정은 스스로를 잃어갔다. 환호와 호응, 그리고 공격과 상처는 단어만 다를 뿐 결국은 한낱 인간인 정치인을 환각에 빠지게 했다...정치인 안희정과 그의 곁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지만 부디 그들만의 이야기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몰락의 시간] 15쪽



[김지은입니다]와 [몰락의 시간]을 읽은 독자로서 판결 난 사건에 사견을 더하고 싶지 않다. 내가 [몰락의 시간]을 흥미롭게 읽은 지점은 다른 궁금증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1. 한국형 그림자 정부?있어?

  • 일루미나이트 혹은 프리메이슨까지 들먹이기엔 너무 나아가는 상상이지만, [몰락의 시간]을 읽다 보면 장기말을 움직이는 세력에 대한 암시가 등장한다. 그 세력의 형성과정, 구성과 목적, 작동방식 등이 무척 궁금하다. 문상철의 눈에 그들은 "공부하는 모임이라고 했지만 이 모임의 구성원을 가지고 바로 정부를 운영해도 될 정도로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조직된 엘리트 모임.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만들어놓은 거대한 로비의 장."(105) 으로 그려진다.


2. 팬덤정치와 짝패인 정치인의 나르시시즘


  • "그중 안지사가 가장 선호하던 모임은 단연 여성 기자들과의 저녁 자리였다...스스로 '운동을 마치고 땀 냄새를 내며 들어가는 콘셉트'로 잡아 운동복 차림에 목에 수건을 건 채 (여성 기자들과의 모임 장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115)

  • "(안지사는) 재선 이후 스스로 다른 정치인들과 외모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외모 가꾸기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몸에 딱 붙는 슈트핏을 유지하기 위해 안경닦이조차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았고, 수시로 사용하는 담배와 라이터 등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물건은 자신의 옷이 아닌 수행비서의 주머니 속에 있어야 했기에 수행비서의 주머니는 항상 여러 잡동사니들로 넘쳐났다."(76)

  • "선거를 하다 보면 '뽕 맞았다'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현장에 지지자들만 잔뜩 진을 치고 와 있는 걸 알면서도 "와~~~"하는 현장의 함성 소리와 쏟아지는 기운은 강한 중독력이 있다. 환각력이 높은 이 팬덤의 기운을 안 지사는 힘들 때마다 찾았다." (88)


3. "정치 입문," "정치를 배우다" "정치 초보" "정치 구단"

평소 나는 "정치 초보" "노련한(?) 정치 구단"의 등급을 과연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 궁금했다. "정치를 (잘못) 배웠다"라는 문구가 기사에 등장할 때마다 더 궁금했다. 과연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무엇이고, 누구 혹은 무엇을 통해 정치를 배운다는 것인가? [몰락의 시간]을 읽으니 그 나름의 답을 알 것 같다.

자신 역시 정치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PD 및 연구원 일을 그만두고 도청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문상철이 관찰한 바, 대다수 젊은 정치지망생은 낡은 관계중심의 정치를 답습한다고 한다.

    • 청년팔이 정치_"캠프 내 청년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미지로 소진되었다...좋은 뜻으로 청년 정치를 시작했지만, 아무런 배움과 지도 없이 오로지 유세에 동원되어 율동만 하다 돌아가거나 젊은 배경이 필요한 일정에 소모되는 식으로 불려다녔다...이러한 현실에 부딪힌 정치 지망생들은 소모적인 일만 하다가 돌아갔다. 잔류한 지망생들은 모든 일을 관계로 풀어가는 얕은 정치만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정치권 선배들과 저녁 술자리를 하며 친밀도를 올리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의 기초의원 자리나 추후 청년 비례에 공천받기를 원하는 식이었다." (121)

    • "나이와 직급을 떠나 모두가 '안희정'이라는 아버지를 필두로 형, 동생으로 구성된 가족 공동체 같았다. 안지사는 평소에도 '가문'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안희정 집안을 일궈야 한다"는 표현을 빈번하게 썼다." (29)

    • "조직 외부에서는 안희정의 최측근, 안희정 키즈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붙이며 자신의 체급을 올리는 사례도 많았다...이름팔이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항상 후보의 눈에 띄기만 바랐다는 것이다." (126)

    • "대한민국에는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정말 많은 기관의 자리가 있음을 이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경력과는 무관하게 잠시 캠프를 거쳐갔던 사람들조차 다양한 자리에 임명되었다. 우리(안희정) 캠프를 통해 문재인 캠프로 우회 상장을 하려던 많은 사람이 전략적 성공을 거두며 사회 곳곳의 높은 자리에 앉았다." (145)

    • "피고인(안희정) 측 증인으로 공개 증언을 한 사람 중에는...안희정 사건 재판 기간 전후로 한 번에 다섯 단계를 뛰어넘어 5급 비서관으로 임용되었다....재판 과정을 거치며 다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191)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내부자로서, 이제는 기업체 직장인이자 외부자로서 정치권을 비판하는 문상철 전 수행비서 자신이야말로 안희정 前충남도지사가 선호하는 "티 안 나는" 의전을 매끄럽게 수행하도록 메뉴얼을 만든 사람이다. 이 메뉴얼은 후에 수행비서 김지은에게 인수인계되어 '안희정 특화 의전'의 토대가 된다.


 

" 나는 복잡한 의전은 싫어. 하지만 내가 싫다는 말은 티 나는 의전이 싫다는 거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의전을 해줘야 해...나는 충남을 대표하는 도지사이고, 국민에게 사랑받는 정치인이네...의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물 흐르는 의전이어야 해!"(65) 이런 까탈스러운 의전을 기대하는 상사를 만족시키기 위해 심지어 샤워할 때까지 방수팩에 핸드폰을 넣어 24시간 대기하며 자칭 도지사의 "외장하드"가 되어야만 정치실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건지...씁쓸했다.

정치인을 고발하고 권력의 부패가능성을 경고하는 에세이를 쓴 사람에게서 권력을 향한 욕구를 보았기 때문에 씁쓸하다. 어쩌면 문상철이 서문에서 썼듯, 어떤 정치인도 '안희정'이 될 수 있듯 나 역시 상황에 처하면 '의전 메뉴얼'을 자발적으로 작성했을지도 모르기에 이는 비판이 아니라 반성에 가깝다. [몰락의 시간]을 통해 '반성의 시간'을 유도해준 문상철 저자에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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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2-30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지사가 이렇게까지 수준높은(수행하는 사람들 피말렸을듯..) 의전을 요구한다는점이 권력의 신격화와 나르시시즘을 잘 보여주었죠. 그런 상황에서 문제가 안생기면 오히려 미스터리일지도..얄라님 잘 읽었습니다. ^^

얄라알라 2023-12-31 01:24   좋아요 1 | URL
미미님 서재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치인들의 선거유세 몸짓 언어가, (적어도 제게는) 맨정신으로 보기 힘들만큼 과장 흥분되어 보였던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문상철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좀 알 것 같았어요. ‘지지 받는자, 나의 지지자, 나의 찐팬‘이라는 환상에 중독되면 도취감에 그런 기괴한 몸짓이 나오나봐요....

이 책에 의전의 까탈스러움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벌거벗은 임금님은 혼자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
임금님 흉만 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동시에 제가 맨 마지막 문장에 썼듯 임금님을 떠받들지 않으면 잘려나갈테네, 어려운 문제이네요.
 



고정관념 혹은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돌아봅니다. 강원도 횡성에 이틀간 머무는 내내 "횡성 한우 맛집"을 검색했습니다. 저는 일부러는 육식할 일 없는 "채소 예찬자"입니다. 어차피 한우 음식점에 가더라도 버섯, 마늘, 쌈채에만 손을 댈 텐데도 계속 "횡성 한우"를 입에 올리고 검색하는 자신이 어느 순간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반복학습(횡성 하면 한우, 횡성 한우, 횡성=한우....) 세뇌의 자동누름버튼에 조종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 끼 음식을 두고 별생각 다하지요? ^^;; 아무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횡성여행에서 '한우'가 필요조건인양 생각하게 된 경로를 되짚어보다가, 에라! 감자를 찾아봅니다. 강원도하면 감자잖아요? 다행히 급 목표 수정해 찾은 로컬식당에는 감자와 메밀을 주재료 삼은 고마운 메뉴가 있었네요. 쫄깃하고 찰진 감자옹심이메밀칼국수! 


#횡성한우에 생각이 너무 많은 식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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