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정가 5000원인 책 드물 텐데... [몽실 언니] 정가가 5000원인 걸 확인했다. 언니를 서가에 모셔만 둔지 십수 년 지났나 보다.


후회된다. [Pachinco]는 득달같이 원서로 도돌이표 감아가며 읽었으면서, 정작 권정생 선생님의 [몽실언니]를 소홀히 대접했다니. 게다가 난, 고작 1/5이나 읽었을까 한 지점에서 무례하게도 책 덮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이제 열 살도 안 된 몽실이가,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시련을 "제 팔자"라고 말하는 게 안타까워서 였긴 했지만...


https://blog.aladin.co.kr/757693118/14198722


[몽실언니]를 다 읽고 나니, 어머니 밀양댁도, 몽실이 새아버지도 친아버지도, 몽실이가 만났고 스쳤던 많은 사람들이 내렸던 선택과 행위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Presentism

나에게 "직관력 있다perceptive"고 칭찬(?) 해주셨던 선생님께서는, 과거를 해석할 때 "presentism"를 경계하라고 알려주셨다. '현재주의(?)로 옮겨야 하나?'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현재의 잣대로 과거가 남긴 편린들(물질이건 비물질적 관계이건)을 상상하려는 성향을 극복하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런데 내가 [몽실 언니]를 읽으며 반대로 했다. 아침이면 스벅에서 뜨거운 커피 마시며 자판 두드릴 생각하며 배곯아 본 적 없는 나는, 지극히 내 중심의 현재주의적 관점에서 [몽실 언니]를 해석했으니까.

* * 

"다리 다친 건 제 팔자"라는 몽실이의 말은,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예요."라는 현실 인식과 이어진다. 이제 채 열 살 정도 나이였지만, 몽실이는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름의 전략으로 생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했던 것이다.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그래서 "언니"같다.

몽실이는 전쟁통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난남"으로 불리는 동생을 갓난이 때부터 엄마 대신 먹여 키웠다. 젖도, 쌀도, 기차삯도 동냥해서 동생과 아버지를 부양했다. 깡통을 구해 '거지'를 자청하더라도, 동생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몽실이에게 "팔자"는 영어 단어의 "destiny" 뉘앙스가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 같다. 미안스럽다.

* * 

몽실이가 업어 키웠던 동생 난남은 학교에서 글을 익혔고, [안네의 일기]를 좋아했다.


자신도, 몽실이도, 죽은 금년이 아줌마도, 한국의 모든 여자들은 안네 같다고 생각했다.

...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었다.


[몽실 언니] 마지막 장.

"한국의 모든 여자들은 안네 같다"라고 적어준 권정생 소설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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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2-23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득 오래 전 드라마로도 나왔는데 그때 주인공을 맡은 그 소녀 탈랜트 지금은 뭐하며 사는지 궁금하네요. 똘똘하게 연기를 잘 해서 나름 인기있었는데. ㅎ

얄라알라 2022-12-23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 K님 말씀해주시니 갑자기 검색해보고 싶어졌어요^^ 전 드라마는 본적이 없는데 단발머리 그 소녀는 알 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2-12-23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권장도서여서 이 책 읽긴 했는데,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 읽으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잘읽었습니다. 알랴알라님, 이번 일요일이 크리스마스인데, 날씨가 계속 추울 것 같아요.
추운 날씨 조심하시고,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얄라알라 2022-12-27 09:5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서니데이님, 제가 핸드폰으로 북플 확인하다 보니 바로바로 댓글 인사를 못드렸네요.

저는 뒤늦게 읽고 보니,
다른 분들은 이미 다 읽으신 필독서였나봐요.

분량은 짧지만 저를 충격에 빠지게 한 책이었네요^^;;

서니데이님께서 해피 연말 보내시기를
 

“다리 다친 건 내 팔자예요”

"내 팔자八字"란 말을 권정생의 소설, [몽실언니]에서 만날 줄 몰랐다. 그것도 어린 소녀의 입을 통해서...

몽실이는 어이없는 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동네 아이들에게 "찜발이" 낙인이 찍힌다. 무릎이 굽은 채 뼈가 붙어서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한 뼘이나 짧아졌기 때문이다. 사고의 기승전결은 다음과 같다.


  • 몽실이의 새아버지가 몽실이 어머니에게 화를 내다가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옆에서 보고 있던 딸, 몽실이가 어머니께 친아버지에게 가자고 한다.

  • 그 말에 화가 더 커진 새아버지는 몽실이와 어머니를 완력으로 밀어낸다. 먼저 떨어진 딸 위로 어머니가 떨어졌는데, 그만 딸의 왼쪽 다리를 꺾어버렸다. 몽실이의 왼쪽 무릎이 반대로 젖혀저 부러졌다.

  • 몽실이는 기절했고, 깨어난 후에도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남편이 시끄럽다고 화를 낼까 두려워했던 어머니는 몽실에게 참으라고 했다. 몽실이는 비명과 울음을 삼키며 밤을 새웠다.

    다음 날, 몽실이의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던 듯 일상을 살았다. 어머니조차 남편 눈치 보느라 몽실이의 다리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다. 밀가루 반죽을 약이라며 무릎에 붙여 준게 전부였다. 이후 몽실이는 한 달 동안 누워서 지냈다.


    동네 아이들은 몽실이를 놀린다. 절뚝거리는 조카 몽실이가 가여운 고모는 몽실이 엄마를 비난한다. "왜 애를 병신 만들었수?"라며. 몽실이는 속으로 생각한다. 엄마 잘못이 아니라, 새아버지 잘못이라고.나중에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아버지가 오지 않았어도 김씨 아버지와 엄마는 자주 싸웠어요. 그러니까 언젠가는 내가 다리를 다치게 됐을 거예요....다리 다친 건 내 팔자예요.


아! 나는 어린 몽실이,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아야 할 아이의 입에서 "다리 다친 건 내 팔자"라는 말이 나오자, [몽실 언니]를 당장 덮어버리고 싶어졌다. 몽실이가 측은하고 몽실이 주변 어른들에게 화가 나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린 몽실이가 "희생자 비난" 논리를 그대로 삼켜 "팔자" 탓한다는 점에 화가 났다.

몽실이 다리 부러뜨려 놓고도 태연한 새아버지야말로 사람도 아닌지라 입에 올리지도 않게다. 몽실이 어머니. 그녀는 무릎뼈가 부러진 아이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당부한다. 당대 조혼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그녀는 2-30대 였겠고, 본 남편 버리고 온 가난한 여자라는 이유로 몸 사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떻게 자기 아이 무릎이 부러졌는데 고작 밀가루 반죽으로 응급처치 한단 말인가? 밤새 차가운 바닥에서 방치할 수 있을까?


가장 날 슬프게 하는 사람은 몽실이, 그 아이. 어떻게 몽실이는 다리 불구된게 제 팔자 탓이라 생각해버릴까?

몽실이처럼 희생자 비난의 논리를 그대로 내면화해 도리어 자기 탓하며 억압과 불합리를 견뎌온 사람들, 특히 약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많았을까?

[몽실 언니] 읽다가 두드러기가 난 이유이다.




몽실아, 다리 다친 게 네 팔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가여운 아가...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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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12-22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생 때 몽실언니 필독도서라서 읽었는데 몽실이가 다치는 부분 너무 끔찍했어요.... ㅜㅜ

얄라알라 2022-12-23 11:05   좋아요 0 | URL
파이버님, 중학생 때 읽으셨네요.

요샌 초등 중학년 필독도서로 많이 추천되더라고요

저는 이제 막, [몽실 언니]를 다 읽었는데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벅찬 소설이네요....

가슴이 저릿하게 차 오릅니다...슬픔이니, 경이로움인지.....
 
산전수전 다 겪고 알려주는 진저의 실전 미국 영어
조향진 지음 / 토마토출판사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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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가 찾던 바로 일상 영어 표현 책입니다. 진저쌤이 미국 이민 생활 하며 겪었던 에피소드를 통해 표현 소개해주시니 실전감각 짱입니다. 유용한 책이라 감사하지만 조금 더 욕심 부리자면, QR로 자연스러운 생활 대화 실제 들을 수 있는 보너스를 독자에게 주시면 좋겠어요! 감사해요. 진저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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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플래트닝 Unflattening]

온라인 친구분의 책 곳간에서 소개받은 후, 시간차를 두고 두 번 읽었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저자 닉 수재니스(Nick Sousanis)는 이 만화 형식의 논문으로 컬럼비아 대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생각하는 방식, 제도권에서 학문하고 학위로 인정하는 방식, 텍스트와 시각 우위로 위계 세우는 방식 등등에 도전하는 비주류의 시도가 'PhD dissertation'으로 인정받았다니, 솔직히 충격입니다. 그 과정에 관여하고 협업한 많은 이들의 유연성에도 감탄합니다. 




저자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수이자 인정받는 예술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https://spinweaveandcut.com/

닉 수제니스는, 이름뿐인 "융합"조차도 잘 팔리는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언플래트닝" 융합을 보여줍니다. 번역자 배충효는 "Unflattening"을 "입체화"로 옮겼는데, 저는  "Unflattening"은 예측 가능하고 단조로운 평면성과 이분적 사고를 극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2차원 평면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설 [플랫랜드 Flatland](1984)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습니다.



 











모든 작품이 그러하지만, [언플래트닝]은 특히나 더 직접 책장을 넘겨 보셔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본문 외, "작가노트"와 "참고문헌"을 샅샅이 훑으며 행복했습니다.

세상 해석하는 방식이 독창적이고 다름을 밀어내지 않고 부드럽게 포용하는 어른을 만나면 항상, '당신은 어떤 환경에서, 무엇(누구)의 영향받으며 자랐나요?' 이 질문이 떠오릅니다. 쉬운 말로, '엄마아빠가 어떤 분이세요?'


그 궁금증이 [언플래트닝] "작가노트"를 읽으며 상당히  해소되었거든요. 작가노트에는 저자의 형아, 엄마, 아빠가, 등장한답니다. 저자의 아버지 역시 제도권 교육현장에서 혁신적 방식으로 교육하려 고군분투하셨던 분이고, 어머니도 평범하신 분은 아닐 겁니다. 닉 수제니스가 그린 배는, 부모님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드신 카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하니까요. 형아 존 수재니스 역시 어린이 닉에게 '원더랜드'급 상상력을 키워준 짝꿍입니다. 


[언플래트닝]

마지막에는 3페이지에 걸쳐 스케치가 담겨 있습니다. 본격 집필 전, 전체적인 구상을 했던 흔적인가 봅니다. 텍스트와 길게 나열된 인용에서 권위를 얻는 기존 방식과 얼마나 구별되게 박사 논문을 구상하고, 실물로 완성해냈는지 추정하게 해줍니다. 

이 소중한 책을 알게 해준 온라인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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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2-15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읽고 싶네요!! 멋지다!! 마지막 올려주신 스케치는 우리 막내 생각이 나네요. 좀 과장해서.^^;;;

얄라알라 2022-12-15 23:24   좋아요 0 | URL
^^ 아! 라로님, 저는 라로님의 자제분께 ˝엄마아빠가 어떤 분이세요?˝ 묻지 않아도 되겠네요.
라로님께서 길러내신 어머니이시니까요.

전 그림을 안 그려봤고, 그래서 못 그리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질투나게 부럽습니다^^;

서니데이 2022-12-15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2-12-19 11:2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저는 북플마니아는 아니고, 서재의 달인에 뽑아주셨어요.
이렇게나 저렇게나 모두 감사드릴 일이지요. 덕분입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꾸준히 포스팅 쉼 없이 올리시는 와중에 이웃님들 살뜰하게 챙겨주셨으니 북플 마을을 따뜻하게 한 공로상도 받으셨음 좋겠네요^^

해피 월요일 보내세요

서곡 2022-12-15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이 책 읽었어요 전자책으로 봤습니다 꼼꼼하게 읽지는 못 했는데 쓰신 글 참고해야겠습니다!

얄라알라 2022-12-19 11:24   좋아요 1 | URL
네, 서곡님께서도 이미 접하셨군요. 전반부에 참신함에 ˝홀리듯˝ 읽다가, 후반부는 약간 김이 빠지는 느낌을 두 번 리딩할 때마다 느꼈지만, 그래도 놀랍고도 놀라운 시도라 평가하고 싶어요^^

다음에 또 읽으신다니 좋습니다요^^

겨울호랑이 2022-12-15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얄라님 2022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선정 축하드려요. 항상 좋은 글과 따뜻한 답글로 지난 한 해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연말연시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

얄라알라 2022-12-19 11:23   좋아요 1 | URL
^^ 겨울 호랑이님, 서재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운 겨울 실감하게 하는 날씨인데 건강 유의하시고
내년에도 자주 서재 들락날락 하겠습니다. ^^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transient-guest 2022-12-16 0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2년 선정을 축하드립니다. 논문을 만화형식으로 출간하고 학위를 받았다니 꿈처럼 들리네요. 세상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얄라알라 2022-12-19 11:2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ransient님,
저 책에 담긴 활자를 타이핑 하면 A4 몇 페이지나 나올까? 생각하며 읽었는데, 짧은 글에 이처럼 심오한 생각들을 녹여냈다는 게, 그 작업을 혼자 했다는게 참 놀라웠어요.

지도교수와 커미티의 개방성에도 놀랐고요^^

transient님도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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