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애정], 원제 [ Mother Reader: Essential Writings on Motherhood]

한국어판 표지는 숙성된 와인의 여유로움을 환기시킨다면, 원서 표지는 수험용 참고서인양 딱딱해 보여서 의외였다. 대화 중 이 책, [분노와 애정]을 추천하던 지인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는데, 순간이었지만 눈빛에 복합적 감정이 스쳤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엄마됨의 기록이라는데 제목이 어쩌다가 [분노와 애정] 일까? "넘치는 애정"이 아니고 말야? 묻는 동시에 답이 뻔해 보였다. 분노의 대상이 무엇일지.......


표면적으로는,

밤 잠 설치게 하며 엄마 몸의 하얀 영양액을 요구하는 아가의 울음소리, 삶의 궤적을 기록할 15분을 오롯이 빼내기 어렵게 분절되는 엄마됨의 시간감각, 혹은 출산 후에도 바로 사라지지 않는 임신선이나 제왕절개수술의 꿰맨 흔적처럼 몸의 변화에 대한 분노이겠다. 엉뚱한 위장 표적이다. 분노의 표적을 정밀 분석할 여유가 없는 엄마들이 쉽게 떠올리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 사실 분노는 더 깊은 데, 잘 드러나지 않기에 흔들기 쉽지도 않은 저 깊은 데를 향한다. 게다가 화학성분 최소화한 비누로 씻은 아기의 피부는 얼마나 달콤한지, 분노는 순수한 애정 그리고 기쁨과 얽혀서 체로 걸러지지도, 쉽사리 분리되지도 않는다. "and 접속사"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니 [분노와 애정]이라는 제목은 합당하다



[분노와 애정]에 수록된 16편을 마음 가는(호기심 크게 느낀) 순서대로 읽었다.

  •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소설가

  • 마거릿 미드 Magaret Mead, 인류학자

  •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시인

  •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 시인.

4편까지 읽던 중 갑자기, 흉내 내고 싶어졌다.

*****************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다섯째 아이 The Fifth Child]의 작가 도리스 레싱의 자서전 <Under My Skin>(1994)에서 발췌한 글이다. 그녀는 모국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에서 자랐고, 마찬가지로 백인이자 파견공무원이었던 남편과 남로디지아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도리스 레싱은 피부색이 어두운 현지인들을 '하녀, 하인'으로 부려먹으며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 백인 부인이 되기엔 많이 깨어 있었으며, 당대(20세기 중반) 시대정신이었다는 "출산 넘어 또 출산, 즉 겹출산"을 운명으로 수용하기에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오만의 수준으로 자존감을 드높인인다.


나는 프랭크의 예쁘고 영리한 새 아내였고 프랭크는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 또한 사람들이 나와 활기 넘치는 내 아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 좋았다(21)

*

존이 태어난 지 9개월이 되어 곧 두 발로 서려고 했을 때, 우리는 둘째를 낳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내가 이러한 삶에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지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파리나 런던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꿈꿀 뿐이어싸. 난 이곳에 속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누가 봐도 모든 걸 잘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은 누구였는가? 티거는, 밝고, 저돌적이고, 재미있고, 유능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었다. (23)

*

나는 유모차에 존을 태우고 몇 시간이나, 몇 시간이나 걸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총명한 젊은 여성이 하루 종일 작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다. 나는 유모차를 밀면서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 (24)


[마가렛 미드 Margaret Mead]



미국 우표로 발행되었을 만큼 명사였던 마가렛 미드는 인류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력과 시적 감수성을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도 활용했다. 특히, 20세기 초 중반 당대 학계에서는 주변부의 소재였던 아동기 및 양육법의 비교문화적 연구를 선구적으로 수행했다. 그녀의 글 "할머니가 되어"에서도 인류학자로서 습관화된 거리두기 태도가 잘 드러난다.


직접 아기를 낳았을 때 나는 내가 편견을 갖고 어린 아이들을 관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대신,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내 아이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몸집이 더 큰지 작은지, 더 얌전한지, 똑똑한지, 능숙한지를 판단했다. 곤란했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엄마에 대해 상당히 많이 배웠다고 느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덜 객관적인 관찰자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70)

*

하지만 나 자신을 아동기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내 딸과 손녀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미친 영향을 상당히 달리 묘사되어야 한다. 나는 상쇄해야 할 편견이 아니라, 특별하고 아마도 언젠가는 사라질 민감함을 얻었다.(70)

[분노와 애정]_ 마가렛 미드 편


뼛 속까지 인류학자인 미드는 손녀 세반 마가릿이 태어나자, '할머니됨'의 경험과 감정을 역시나 인류학적으로 해석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생물학적 후손의 탄생에 관여하는 것이 낯설다(66)" 라는 문장에서 나는 이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존경심을 느낀다. 개인적 에피소드조차도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켜 해석하려는 체화된 직업 정신! 마가렛 미드는 자신의 행위가 아닌, 딸의 출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지위가 바뀜(즉 할머니가 됨)을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한다. 익숙함 공식을 뒤틀어 새롭게 보는 인류학자의 천진함을 미드에게서 엿본다.

나머지 14편의 에세이에 대해서는.....일기장 기록을 대신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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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2-25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특별하게 느껴지는 글이네요.
출산후 느낌이 분노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처음부터 확 애정을 느끼지는 못했던것 같아요.;; 그래서 죄의식을 느꼈던듯요.^^

얄라알라 2023-02-26 00:04   좋아요 1 | URL
역시나, 그레이스님 예리하심!!^^

저는 도리스레싱의 [다섯째 아이], 좀 더 이해되었어요.
실제 도리스 레싱이 두 아이들 놔두고 떠나잖아요..
저 에세이를 읽고 소설도 더 잘 이해되더라고요
 

2023년 2월 키워드로 [밝은 밤]을 남긴다. 사진의 배열 순서가, 이 소설과 나의 인연 변화를 보여준다. 처음엔 실수로 [긴긴밤]을 읽었다. 독서모임 책제목을 "베스트셀러 & 밤"이라는 조합으로 기억했다 벌인 실수였다. 다른 참여자가 테이블 위에 [밝은 밤]을 꺼내놓는 걸 보자, 나는 과장된 높은 음색으로 헤헤거렸다. 미안하다 못해 당혹스러웠기에...



.'덤벙덤벙' 실수 때문에 독서 모임이 한 주 미뤄진 미안함을 상쇄하고자, 아니 너무 재미있어서 차오르는 사심으로 [밝은 밤]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읽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가족 파노라마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민진의 [파친코]와 비교하는 리뷰도 보았다. 하지만, 메뉴판만 비슷할 뿐 속맛이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다. [파친코]에는 댕기 머리에 한복 자락 나부끼는 주인공이 등장하건만 [밝은 밤]에 비한다면 치킨 스튜를 더한 퓨전 육개장 맛을 낸다. 도리어 [밝은 밤]에서는 청국장 냄새를 맡았다. 역사적 서사는 생략된 채 주로 인물 간 관계 및 심리 묘사에 초점을 두는 데도 말이다. 오해는 피했으면 한다. 나는 [파친코]의 열혈 팬이며, 맛이란 본래 맛보는 사람마다의 미뢰 밀도에 따라 편차가 크니까. [밝은 밤]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속내, 고구마 3개는 꾸역꾸역 삼킨 듯 답답한 속내를 꾹꾹 눌러두거나 역으로 화산분출시키는 방식이 묘하게도 "한국적"이라고 느꼈다.



사람은 인생의 침잠기에 울림이 큰 작품을 쓰는 걸까? ***, ****, 장영희 선생님, 올리버 색스의 글을 읽으며 그런 궁금증을 품었더랬다. 최은영 작가 역시 [밝은 밤]을 쓰던 시기가 성인기의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_[밝은 밤] 작가의 말 中




그 힘들었다는 시기에, 심지어 마감기한이 세금 고지서처럼 따박따박 날아오는 연재소설을 써냈다니 최은영 작가의 필력도 필력이거니와 정신력에 놀라운 마음이 든다. 작가는 "삼천이(주인공 '지연'의 증조할머니)"라는 인물의 힘에 끌려 작품을 시작했다지만, 정작 주인공인 "지연"과 가까웠다고 했다. 또한 소설 속 인물, 지연이를 통해 힘을 얻어다고 고마워 한다. 지연은 천문학 분야 박사이자 연구원이다. 자녀 없이 이혼한 30대이며, 일부러 속초 어디매쯤 '희령'에 산다. 내가 행간을 통해 엿 본 지연은 잘 웃지 않고 생기 없고 과묵한 사람일 것 같지만, 예의가 참 바르다. 지연은 '희령'에 얻은 아파트에서 멋쟁이 이웃주민의 호의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친할머니셨다. 두 사람은 피를 나눈 혈연관계이지만, 처음엔 서로 존대하고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그러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지연의 엄마인 미선과 할머니는 오랜 기간 연락을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댁에 초대받은 지연은 자신이 증조할머니 '삼천이'와 무척 닮은 외모와 성정을 지녔다는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생긴다. 할머니를 통해, 고조할머니, 증조할머니, 그리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절친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위선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와 결혼하여 일생이 고단했다. 예를 들어, 양민 출신 증조할아버지는 '백정의 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증조할머니를 '구원'이라도 하듯 데려가 결혼을 했으나 정작 아내의 당당한 기백을 보고 '원래 양민이었던 것처럼 군다'라고 미워한다. 속이 참으로 좁다. 할머니의 남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6*25 전쟁 전 결혼했는데도에 피난 내려왔다가 한참 어린 어린 소녀를 아내 삼는다. 뻔뻔한 중혼의 피해자가 된 소녀가 바로 지연의 할머니이다.


나는 작가 최은영의 삶도, 인간관도 모른다. 다만 [밝은 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새비 아저씨'라는 이상화된 단독자를 빼놓고는 죄다 찌질하다는 점은 안다. 그들은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제 위엄으로 착각한다. 과연 [밝은밤]에 후한 독자평을 주었던 이들 중 남성은 어느 비율일까 궁금할 지경이다. 왜 작가는 '남성'에게 특화된 냉소적 시선을 갖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작가는 대 놓고 그 "F," "F(eminism)"를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밝은 밤]은 (콕 집어) 여성의 힘, 위선과 폭력에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여성 연대,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신화적 DNA, 말의 주술성을 보여준다. 많은 여성 분들이 서로서로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대여기한이 끝나가 [밝은 밤]을 다른 예비 독자분들께 돌려드려야 할 때가 오니, [밝은 밤]의 명문들을 남겨야겠다.




핏줄을 통해 흐른다. 세대에서 세대로 주술적이기까지 한 氣가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47


참을 수 없이 찌질한...작가는 왜 남성을 찌질하게 그렸을까?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삶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61)

*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늘 고개를 빳빳이 드는 모습에 그는 옅은 노여움을 느꼈다. 그런 일로 노여워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62)

**

지연의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어디 서방 앞에서!

- 내가 당신한테 도망가자 했기까, 내가 당신 부모 저버리라 했시까, 내가 당신보고 혼인하자 했시까. 기런데 왜 내를 일평생 입 닥치고 살게 했시까? 내 죄가 뭐인데, 백정네 딸로 태어난 게 죄라면 내 죄를 죄로 두지 기랬어요...

- 내레 너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널 단 한 번도 친 적 없다.

-기게 지금 자랑입니까?

이중결혼한 사위를 두둔하고 오히려, 남자 마음을 잡지 못했다며 딸을 비난하는 남편에게 증조할머니의 반격


밟으면 꿈틀. 당하지만 않는다.

서럽다. 문득 생각하다가 삼천이 너가 했던 말이 생각났댔어. 방앗간 사장이 내한테 뭐라 지랄한 적 있지 않간. 내가 빨리빨리 일을 못한다구 몰아붙였던 적이 있었더랬잖아. 내가 집에 가는 길에 서럽다, 서럽다 하니 삼천이 너가 그랬지. 서럽다는 기 무슨 말이간. 슬프믄 슬프고 화가 나믄 화가 나지, 서럽다는 기 뭐야. 나 기 말 싫구만. 너레 화가 나믄 화가 난다구 말을 하라요...섧다, 섧다, 하면서 화도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속병 드는 건 아니라고. (127)

증조할머니 삼천이에게, 삼천이의 친구 새비아줌마가 쓴 편지


여성끼리(만) 연대와 위로

'지도 학생 모임에서 지연씨가 왜 이 전공을 택했는지 이야기하면서 눈을 빛내던게 기억나요. 그 때 내가 많이 지쳐있었거든. 지금 지연씨 나이 정도였을 거예요. 만사가 지겹고 재미가 없었는데, 어린 친구가 왜 이 공부를 택했는지 밝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맘에 남았어요.'

...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바르고 말을 가려 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후, 의기소침과 우울을 겪던 지연이 상사에게 위로 받은 대목.

이십대 초반 지하철을 타고 왕복 세 시간 거리를 오가며 통학하던 때가 떠올랐다. 항상 피곤했고 지하철에서는 대개 잠들어 있었다..'학생, 그러지 말고 나한테 기대.' 그런 말을 하며 자기 어깨를 내어주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그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잇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이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딸아! 중력(ㄱㅂㅈㅈ 끄는 힘)을 피해 멀리 날아라!

'조국을 빛낸 해외 동포' 시리즈는 1988년 여름부터 1993년 여름까지 방영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다. '암호학자 김희자 박사' 편은 1992년 9월 28일에 방송됐다.

...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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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2-13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넘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밝은밤 계속 피해 다녔는데..
자꾸 올라오는 리뷰보고도 미루고 있었는데 정말 당장 읽고 싶게 만드셨어요~~^^
최고~~!!!

여기선 땡투를 못하네요 ㅠㅠ

얄라알라 2023-02-14 09:13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혹시 손에 잡으시면 그 자리에서 다 읽으시게 될지도 몰라요^^ 이름은 상대적으로 평이했는데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인지 알 것 같았어요^^즐거운 책읽기 하시기를.

페크pek0501 2023-02-13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과 인용을 곁들이며 풀어 쓰신 리뷰, 반찬 많은 밥상을 받은 듯 푸짐하게 느껴집니다.
두 번이나 읽으셨다니 저도 꼭 읽어야 할 책 같습니다. 검색해 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02-14 09:14   좋아요 0 | URL
발레로 다져진, 몸 가벼우신 페크님에게는 많은 반찬이 필요 없으시겠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새는 소설을 두 번씩 다시 읽는 ˝좋은˝ 습관이 생겼어요. 작가를 더 잘 알고 싶다보니 절로 그런 습관이 생기네요.(물론 별 5 소설만 ㅋ)

좋은 아침 시작하시어요. 페크님

반유행열반인 2023-02-13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어쩌다 실수로 두 권 읽게 되었으니 이득 아닙니까 ㅋㅋ두 권 다 읽은 (그러고 하나는 엄청 깐ㅋㅋㅋ)책이라 반갑네요.

얄라알라 2023-02-14 09:15   좋아요 1 | URL
ㅋㅋㅋ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열반인님 스톼~일의 농담 ㅋ 네네,
덤벙거리는 덕분에 따블로 읽었네요 ㅎㅎ
 
GEN Z (Z세대) -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로버타 카츠 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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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Z]?

사회과학서 제목이라기보다는, 백화점 입점 힙한 신생 브랜드 이름처럼 들립니다. 부제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The Art of Living in a Digital Age"를 확인하자마자, 궁금증과 당장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쳤어요. 사실, 도서관 300번대 서가 어슬렁거릴 때마다 "요즘 애들," "MZ," "(포스트) 밀레니얼," "청년" 을 제목에 담은 책들이 즐비하길래, 언젠가는 세대론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거든요. 게다가 평소 제가 관심을 두어 온 사회학, 언어학, 역사학, 인류학 전문가들이 협업한 결과물이라니 그 방법론과 분석 방향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Gen Z]는 미국 스탠퍼드대 캠퍼스에서 봄날 햇살을 즐기며 '요즘 애들'을 이야기하던 4명((언어학자 세라 오길비 Sarah Ogilvie, 인류학자 로버타 카츠 Roberta Katz, 역사학자 제인 쇼 Jane Shaw, 그리고 사회학자 린다 우드헤드 Linda Woodhead)의 오케이 부머(OK boomer)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각 전공 분야의 이론과 방법론을 활용해 "요즘 애들"을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해석하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합니다. 재정적 지원처를 확보한 후 이들 4인은, 대학교수로서 동원 가능한 연망과 지도학생들의 도움에 힘입어 3년간 차곡차곡 자료를 모았습니다. 일반인도 이해할 쉬운 언어로 그 연구 결과를 풀어낸 책이 바로 [Gen Z]이고요. 




[Gen Z]는 '세대론'이라는 주제와 방법론 면에서 태생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데, 공저자 4인은 영리하게도 도입부에서 그 약점을 공개하고 인정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먼저 표본의 한계로 인한 과대 일반화 가능성입니다. 이 연구는 2017년부터 3년간 120개 포커스 집단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자료, 무려 7000만 영어 어휘를 분석한 'I 세대 말뭉치' 그리고 문헌 자료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모두 미국의 두 대학(캘리포니아 소재의 칼리지와 스탠포드 대학)과 영국의 랭커스터 대학교 재학생인데, 저자들이 직접 인터뷰하지 않고 Z세대인 연구조교들에게 대리 수행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연구는 Z 세대 특유의 존재와 상호작용 방식, 정체성 지표, 지향과 세계관, 문제의식 등을 다룬다고는 하지만 표본의 한계로 인해서 특수한 소수 집단의 특성을 파악했다는 정도로 의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저자들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이 책은 표본의 한계로 인해 전 세계 포스트 밀레니얼에 관한 확정적 연구서는 되지 못한다. 그래도 미국과 영국의 Z세대를 포착하는 데는 유용한 책이기를 바란다. 다른 문화권과 사회에서 Z세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이 영감을 준다면 기쁠 것 같다.

[Gen Z] 들어가며: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中


_____

따라서, [Gen Z]를 생산적으로 읽으려면 자료의 대표성을 문제 삼거나 해석의 허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연구의 시사점을 현재 관심 두고 있는 집단 및 사회에 생전적으로 적용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 경우엔, 공저자 4인이 소위 포스트 밀레니얼이라 불리는 "Z세대"의 가치관(가족과 친족, 친밀관계, 상위 공동체, 정치의식 등), 관심 화두나 정신 건강상태 등 비물질적 변화를 '언어-I세대 말뭉치'를 통해 포착하려는 시도가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I 세대 말뭉치' Z세대의 교차적 정체성에서 '국가나 민족,' '종교,' '계층'등의 지표가 덜 중시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법적으로 구속되는 가족이나 친족 관계를 넘어, 온라인 오프라인 상 유사가족 관계를 구축하는 Z세대에게는 'fam' 'crew' 'tribe' 등의 어휘가 일상에서 많이 활용된다는 것도 확인해 줍니다. 또한 기성세대를 불신하고 경직된 위계질서를 환멸 하는 Z세대는 유독 "I"주어의 문구,  'I think,' 'I have,' 'I don't' 등을 유독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Z세대는,

  1. Born Digital: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산다. 그에 따라 소통방식, 상호작용 방식도 조율한다.
  2. 자기 중심성과는 변별되는 "자기 의존적 지향성"을 보이며 (의외로) 타인을 돌본다.
  3. 디지털 세대는 조립식 정체성을 통해 공동체에 소속되고자 한다.
  4. 공동체 밖 타인을 포용하고 다원주의를 추구한다.
  5.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 진정성을 중시하며, 이를 변별할 수 있다.
  6. 협력(콜라보)를 중시하며, 위계가 아닌 합의된 권위를 지향한다. 전문가 우대는 옛말이다.
  7. 암울한 현실에 환멸하고 현 세대의 과제가 버겁다고는 느끼며,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8. 그렇다고 안주나 포기가 아니라, 미래의 변화에 대비해 집합적으로 투쟁하고자 한다.

다소 이상화된 특성으로 보이지는 않나요? 아무래도 실제 Z세대의 일상에서 밀착 관찰한 연구가 아니라, 자기보고식 설문조사와 대면 인터뷰로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이상화된 답변들이 모이지 않았을까도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연구가 Z세대라는 추상의, 경계가 흐린 집합체를 'Z' 에 속하지 않는 세대와 변별하는 목적을 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보다는 인류가 처해 있는 큰 어려움과 변화에 협력하여 서로 배우고 같이 나아가자는 데 [Gen Z]의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기, 서문의 유효한 문장이 있어 옮겨보겠습니다.

우리 연구와 이 책의 목표는 Z세대를 병리학적으로 해부하거나 이상적으로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들의 방식대로 Z세대를 이해하고,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물려받은 세대를 파헤쳐 보고 싶었다... 우리는 한배를 탔다. 우리에게는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배울 귀중한 점들이 있다. [Gen Z] 13쪽



해당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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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1-31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Z세대ㅎ 유튜브에서 SNL MZ오피스 보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ㅎㅎ

Z세대의 특징을 보며 인간 혹은 젊은 세대의 보편적 특징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ㅎㅎ

얄라알라 2023-02-01 01:54   좋아요 1 | URL
그 연기 잘 하시는 주현영이 메인인 프로그램 말씀하시는 거죠?
ㅎㅎ저도 봤어요. 넘 재밌었어요^^ 다들 연기도 넘 잘하시고

오늘도 직거래장터에 가면 MZ세대 참 많이 볼 수 있다. 기성세대(?)와 다른 면이 있다...라고 얘기해주시는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 [GEN Z] 생각이 났어요

고양이라디오 2023-02-01 10:33   좋아요 0 | URL
다들 주현영씨가 연기 잘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넘 재밌어요ㅎ

요즘 MZ세대는 어떤가 궁금하네요ㅎ 뉴스로만 들은 거 같아요ㅎㅎ

2023-02-01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3-02-0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해 주신 대로 백화점에
이제 막 입점한 신생 브랜드
처럼 들리네요 ^^

본 디지털, 정말 공감하는
바입니다. 어릴 적부터 그렇
게 너튜브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디지털에 대한 거부
감이 기성세대와는 남다르
다고나 할까요.
 
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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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

완벽한 아이 (모드 쥘리앵)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재미있게 읽고 재확인한 지혜가 있습니다.

'책 덕후들의 리뷰가 뜨거울 땐 다 이유가 있다, 미루지 말고, 바로 읽어라.'

그래서 이번에는 [완벽한 아이]를 읽었습니다. '아이 child'만 일부러 찾아다닌 건 아니고요, 이 책 역시 최근 몇 년 이웃님들 서재에 자주 올라왔거든요. 역시나! 재미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잠들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아이 (The Only Girl in the World)]는 회고록입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1인칭 시점에서 회고하는 '모드 쥘리앵'이 가공의 인물이라고 착각이 들었고,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그 정도로, 그녀가 견뎌 낸 유년기는 가혹했습니다. 20세기 유럽, 그것도 프랑스라는 문명국가에서 한 아이가 18년이나 감금된 채 가스라이팅 당하고, 정서적이고 육체적 학대까지 감내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소설이라면 마음이 덜 불편할 텐데, '모드 쥘리앵'은 실존인물입니다. 책 표지에 빨간 두건을 쓴 아가가 바로 쥘리앙입니다. 암울해집니다. 그 가혹한 18년을 견뎌낸 아이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다행히 모드 쥘리앵은 정신의학을 공부한 후, 현재 심리치료사로 활동 중입니다. 자신처럼 학대 받고 가스라이팅 당해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했던)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18년 삶을 축약한 [완벽한 아이]를 빠르게 이해하는 데, 다음 두 단어가 유용합니다.

"식인귀" 그리고 "초인"

먼저, 식인귀. 저자 '모드 쥘리앵'은 이 책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그런데 수식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식인귀의 첫 희생자였던

나의 어머니에게


식인귀? 

네, 실은 모드 쥘리앵의 아버지를 칭하는 말입니다. 실존 인물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모드 디디에를 구글 검색하면 거구의 풍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딸과는 무려 56살이나 나이차가 나는 이 남자는, 완벽한 아이, 즉 초인의 길러내기 위해 위해 말 그대로 씨앗부터 사 왔습니다. 이 남자는 6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가난한 광부 아빠에게서 사 온 후(말이 좋아 잘 키워주고 교육도 시키겠다는 제안이지, 현대판 씨받이와 다를 바 없는 발상이기에 소름이 돋습니다), 6살 소녀를 22년간 착실히 기르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식을 생산하게 합니다. 계획된 것입니다. 어린 모드 쥘리앵조차도 가족관계의 기형성을 인식합니다.

***

아버지는 정말 내 아버지일까, 어쩌면 어머니의 아버지가 아닐까.

[완벽한 아이] 44쪽


모드 쥘리앵의 어머니 역시, 딸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입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어느 날 큰언니 앙리에트가 네 아버지를 데려왔어. 처음 본 내 눈에는 아주 크고 무서운 어른이었지...네 아버지가 처음 찾아왔을 때 난 여섯 살이었어. 지금 네 나이지. 네 아버지에게 나도 너 못지 않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아두렴. [완벽한 아이] 45쪽


****

같은 남성을 아버지로 둔 어머니로서 딸을 제대로 사랑하기 어려웠던 걸까요? 질투였을까요? 공포감 때문이었을까요? 어머니는 딸이 겪는 고행의 설계자는 아닐지언정, 집행자 역할에 무척 충실합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시켜 학교도 보내지 않고 엄격한 가정 교육을 시키는 아버지의 조력자가 됩니다. 쥘리앵의 아버지는 특전사 훈련인 양 신체적 극한 상황을 견뎌내고 욕구들조차(수면욕,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로 씻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욕망)도 억누릅니다. 피우던 담배를 쥘리앵의 허벅지에 대고 끄는 가학적인 음악 선생님을 아예 가정 교사로 들이지를 않나, 말 그대로 물에 집어 던져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수영을 스스로 깨치도록 유도합니다. 쥐떼가 찍찍 거리는 어두운 지하실에 가둬 놓거나, 전기 울타리를 손으로 쥔 채 포커 페이스로 고통을 참으며 공포를 극복하도록 훈련합니다. 최악은, 이 모든 부조리한 훈육과 학대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초인,' '멈추지 않고 땅을 파내려가는 나사송곳' 되는 과정이라고 어린 소녀를 가스라이팅한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아이]에는 "초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인내를 통해 승리하는 나사송곳이 되"(93) 는 것으로 세뇌 당했던 쥘리앵은 그렇게 초인으로 길러집니다. 가스라이팅 당한 나머지, 자신의 아버지가 환생을 거듭하며 피타고라스에게서 배웠고, 템플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십자군전쟁에도 참가하는 등 기적의 인물이라고 믿었죠. 그래서, '아버지 - 어머니 - 자신' 3인으로 구성된 기괴한 컬트 집단에서 별반 반항 하지 않고 컸던 것입니다. 과연 딸을 세상에 둘도 없는 초인으로 강화시키려는 아버지의 계획은 성공했을까요? 

****

모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이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여름이다. 우리는 베란다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래된 네델란드 치즈를 잘라야 하는데 굳어서 잘 안된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치즈와 칼을 빼앗아가다 손을 벤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다쳤다고 화를 낸다. 아버지는 "정신 버쩍 나게 혼내줘야겠다"라고 고함을 친다. 그 순간 나는 고함소리에 진저리가 난다. 칼을 집어 들어 치즈 도마 위에 놓인 다른 쪽 손에 힘껏 내리꽂는다... 내 손에는 여전히 칼이 박혀 있다. 아버지가 진다. 아버지가 졌다.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위스키 가져와. 그 손 상처에 반창고도 붙이고."

...

불편한 무언가가 마음을 들쑤신다. 조금 전 내가 위스키를 부을 때 아버지의 이글거리던 눈 속에서 보인 어던 것 때문이다. 그 희미한 그림자...그것은 자부심이었다...지금 나는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게 아닐까? 힘, 용기, 결단, 위력...아버지가 바라는 이런 것들을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스스로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아버지의 정신적 지령에 복종하는 불쌍한 꼭두각시일 뿐일까?


태산같이 꿈쩍도 안할 것 같던 아버지와의 기싸움에서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 딸은 자신의 이런 반항적 행동 역시 '아버지가 설계한 작품의 일부가 아닐까? 자신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까?' 회의합니다. 

실제, 18년 만에 모드 쥘리앵은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억눌렸던 고통들이 신체화되어 기절과 공황발작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쥘리앵을 잠식합니다. 



다행히 어린 시절, 동물과의 교감, 음악과 책이 소녀가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듯, 20대의 모드 쥘리앙은 '머리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는 유년기의 꿈을 안정제 삼아 공황발작과 공포를 다스리게 됩니다. 자신을 일으켜 도움으로서 남을 돕는 사람으로 우뚝 섰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모드 쥘리앵의 회고록, [완벽한 아이]를 읽을 수 있는 것이고요.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 모드 쥘리앵의 어깨에 따뜻한 손은 살포시 얹어주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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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1-29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엠마 도너휴 책이나 제이시 두가드 책이 생각이 나네요. ㅠㅠ 에고 읽기 힘드셨겠어요. 칼 이야기는 너무 끔찍해요. ㅠㅠ

얄라알라 2023-01-29 23:04   좋아요 2 | URL
엠마 도너휴 / 제이시 두가드....


바로 찾아볼게요. 감사드려요 Persona님,
네 읽기 힘들었어요. 동시에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정신과 몸을 억압해도 틈새를 비집고 밖으로 나오려하는 아이의 모습이 행간에 있어서...‘칼‘ 에피소드는 끔찍한 동시에, 벗어나고 뒤돌아 봤더니 자신이 여전히 그 미로 안에 갇혀 있는 겹겹의 가위처럼 느껴져서 무서웠어요

얄라알라 2023-01-29 23:07   좋아요 2 | URL
세상에나....제이시 두가드 역시 실존 인물이네요...힘들어서 <도둑맞은 인생>은 못 읽겠네요^^;;

persona 2023-01-29 23:20   좋아요 2 | URL
엠마 도너휴 책 <룸Room>도 프리츨 사건의 희생자에게 직접 인터뷰해서 쓴 소설이라 거의 실화예요. 둘다 읽다가 다 못 읽었답니다. ㅠㅠ 그런 실화라니 너무 끔찍하죠. ㅠㅠ

초란공 2023-01-29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실제 피해자가 쓴 글이라는 말씀이네요. 생각만 해도 소름돋습니다. 소설이나 영화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ㅜㅜ

얄라알라 2023-02-01 01:56   좋아요 0 | URL
[미녀와 야수]였던가요? 영화 보다, 주인공 엠마가 야수의 성에서 답답할 때, 도서관에서 미소를 찾는 장면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터졌었는데 [완벽한 아이]의 모드 쥘리앵 역시, 책과 음악, 동물친구들과의 교감이 정신의 줄을 잡게 해주었어요....

초란공님 말씀처럼 소름 돋는 이야기 속에서 희망이 보이는 부분이었네요...

오히려 실제 영화로, 영상으로는 이 이야기를 도저히 못 볼 것 같습니다 T T

호우 2023-01-30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많이 힘들 거 같아요. 그런데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룸>은 영화로 봤는데 소설은 더 심각하겠죠? 대개 영상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수위 조절을 하는지 글이 더 쎄더라고요.

얄라알라 2023-02-01 01:57   좋아요 1 | URL
저자 모드 쥘리앵이, 일기를 쓰지도 않았고, 아빠가 원하는대로 빡빡한 스케줄대로 살다보면 일기 쓸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어린시절을 저렇게 상세히 기억하고 묘사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더라고요...

호우님께서 말씀하셨듯, 힘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잔혹한 이야기에 찐한 호기심을 느낀다는 자체가 죄스럽기도 했어요. 동시에...

그레이스 2023-01-30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구요.

얄라알라 2023-02-01 01:58   좋아요 1 | URL
네, 그레이스님, 분명 논픽션인걸 알면서도
제가 읽으면서 자주 소설이라고 상상하고 있더라고요

고양이라디오 2023-01-31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화라니... 참 현실은 무섭고 대단합니다.

얄라알라 2023-02-01 02:00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 말씀을 들으니, 사실 멀리 196-70년대 프랑스의 예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에서도 많은 예가 있을텐데...

그 생각 하니, 씁쓸하고 맥이 빠지네요....^^;;;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김여환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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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_ 死 _ ◆(검은색) 


F층.

21세기. 2023년인데, 아직도 4층을 "F"로 표기한 엘리베이터 버튼을 종종 본다. 영화관에서건, 음악회 객석에서건 "4열" 좌석을 강박적으로 피했던 친구도 생각난다. 그 친구, 여전히 숫자 "4"에서 도망가며 살고 있을까? 포천시 모현 호스피스의 수녀님들은 하늘색 베일을 쓰신다. 검은색 베일은 상복 혹은 "死"를 연상시키니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죽음"과 "죽어감"은 금기의 화두인가?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는다면, 초대장 발권을 막을 수 있는 불청객인가? 아. 니. 그렇지 않다는걸, 우리는 안다.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서 전하는 핵심 메시지 역시 그것이다. 죽음은 피하거나 덮을 수 없으며, 독학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타자의 경험을 통해 죽음을 배운다. '너/그것/그들' 주어로 전개되는 죽음의 현재성은 내가 필연적으로 도달할 미래라는 것. 발화하지 않거나, 초대하지 않는다 해서 나를 피해가지 않을 죽음. 그러한 죽음관이 있기에,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은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에서 저자 김여환은 자신의 과거를 많이 드러내진 않는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정신분열증을 앓는 어머니 밑에서 컸고, '공부를 잘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 끝에 의대를 졸업했다는 정도? 저자는 그 귀한 졸업장을 묵혀둔 채 13년간 전업 주부로만 살다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했다.

저자가 소설가 박완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박완서 역시 40세로 늦게 등단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직업세계에 본격 입문했으나, 김여환은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센터장까지 역임했다(현재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의사로서 천 번도 넘게 임종을 선언했던 경험을 토대로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을 썼다. 환자, 환자의 가족,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읽으며, 유난히 와 닿았던 문장들을 옮겨 본다.



  • 우리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마지막과 접촉해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예인의 일상은 꿰고 있으면서,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미래에 반드시 닥칠 죽음의 길에.대해서는 아무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7

  • 죽음은 독학할 수 없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8

  • 의학적으로 말기 암이란, 죽기.직전의 상태가 아니라 더는 항암제가 암세포를 죽이지 못ㅎ는 시기를 뜻한다 66

  • 죽음은 숨기고 싶었던 삶의 비밀을 서슴없이 내보인다. 이 가족에게도 말 못할 갈등이 있는 게 분명했다.67

  •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는 현실에서 암 환자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79

  • 병마로 눈빛이 흐려지고 나무껍질처럼 피부가.거칠어져도 한국 사람들은 후회나 미련보다 전성기의 추억이남겨준 자신감을 간직하고 있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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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7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음은 독학이 불가하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말이지 싶습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3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레삭매냐님
저도 저자인 김여환 선생님이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지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경험하는 죽음이 곧 나의 것이라는 성찰 떄문이지 않은가 하며 이 책 읽었어요^^ 2023년 차차 죽음학에도 손을 대고 싶어집니다^^

혹시 생각나시는 소설이 있으실까요? 넓고 깊게 읽으시는 레삭매냐님께 제가 부담을 드려보아요 ㅎㅎ

바람돌이 2023-01-27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음은 타자로부터 배워야한다는 말이 들어오네요.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반드시 닥치고야 마는 것이 죽음인데, 죽음에 대한 터부를 깨는것부터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6   좋아요 0 | URL
당연한 말인데도, ˝죽음은 독학 불가˝ 이 표현 읽고 저 잠시 멍 때렸어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누가 입 밖으로 혹은 문장으로 확 고정 시켜 놓으면 현타 겪는 기분이랄까요.
1월도 이렇게 휘리릭 가버리네요...
죽어감의 순간에서는 이전 수십 년이 수초처럼 휘리릭 지나갈테지만요..


제가 좀....이상한 이야기를 했나봐요....자꾸시간이 가니 초조해서 하는 말이네요.

바람돌이님, 행복한 금욜 오후 보내시기를.....항상 제 서재 들려주셔 따뜻한 댓글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핵심 문장들을 보니 이 책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해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아주 좋을 거 같습니다!

2023-01-27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7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9 16:44   좋아요 1 | URL
벌써 읽으셨군요ㅎ 전 어제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겨울이라 확실히 추워서 처지네요ㅠㅋ

독서괭 2023-01-27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하셨다니 대단하네요!
사람의 죽음을 천번 선언한다는 게 참 어떤 경험일지 상상이 안 갑니다.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이 부분에 뜨끔합니다^^;

얄라알라 2023-01-27 23:49   좋아요 1 | URL
네, 독서괭님.

정말 대단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13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전문직에 도전한다는 게...

의학 지식적으로나 숙련도나 여러 면에서 수련의 과정에서 수모와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던 것 같아요.

다 이겨내고 우뚝 커리어를 세우니 멋진 분이신 듯..

저도 ˝영어 단어를....˝ 이 부분에 뜨끔해서 책 읽다가 적어둔 문장입니다요 ㅎㅎ

서니데이 2023-01-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대에 수련의 과정이면 이전에 배운 것들은 다시 배워야 할텐데, 시도하기 많이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매일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얄라알라님,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