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현대’를 1차 세계 대전부터 보는지 1,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보는지 잘 모르겠지만, 전례 없던 양차 대전이 세계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은 것은 확실하다. 규모의 면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이 더 컸지만, 충격과 영향의 면에서 1차 세계 대전이야말로 ‘Great War'로 불리는 대 사건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불러온 필연적 파국이었다. 그 중심에는 신생 제국 독일이 있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펼쳤다.
“세력균형 정책을 펼친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과 이른바 삼제동맹을 맺어 독일 서쪽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했습니다. 독일은 유럽 한가운데에 있어서 전쟁이 나면 전선이 동부와 서부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부와 동부 어느 한 쪽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것입니다. 세력균형 정책 이전 시기를 포함하여 1815년에서 1870년까지는 전반적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느슨한 다극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90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독일은 러시아와 동맹을 갱신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재보장 조약을 맺지 않았고 이것은 독일이 러시아에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독일이 ‘엉뚱한 신호’를 보낸 결과,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연합했고(삼국협상),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삼국동맹) 느슨한 다극 체제가 1890~1914년 사이에 양극 체제로 바뀌면서 전쟁의 긴장이 높아지게 된 것입니다. p437 <역사 고전 강의>”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독일과 영국은 각각 3B정책과 3C정책으로 식민지 확장을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과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두 차례나 부딪히며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더 큰 문제는 발칸반도였다. 오스만제국이 쇠퇴하면서 발칸반도 곳곳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을 모아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세르비아를 지원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08년 오스만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를 합병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범게르만주의를 지향하는 오스트리아를 독일이 전적으로 지원하였다.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발칸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양한 민족들의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과 이를 둘러싼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대립 등 워낙 복잡한 양상이므로 자세히 알기는 어렵고, 이 전쟁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져 갔다는 것만 알아두자.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61>
세계 제1차 대전의 총성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렸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 청년이 쏘아 죽였다. 발칸의 화약고가 '콰쾅' 터졌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나섰다. 곧 동맹관계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유럽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헷갈리지 말 것은, 이탈리아가 줄을 바꿔 섰다는 점이다. 1882년 삼국동맹에 가입했던 이탈리아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삼국협상에 가담했다. 일본도 삼국협상 측에 붙어 승전국으로서 열매를 따냈다. 우리로서는 가슴 아프지만... 여하튼 이탈리아가 빠져나간 자리를 운 나쁘게도 오스만이 메웠다. 오스만은 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하여 영토 대부분을 잃고 가까스로 터키 공화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세계 대전은 인류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끔찍한 전쟁이었다. 기관총, 대포, 전차 같은 현대식 무기는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과시했다. 참호전이라는 무제한 버티기 작전은 전선을 고정시키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빠져들게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끔찍한 전쟁에서 먼저 빠져 나간 것은 러시아였다. 1917년 러시아는 ‘빵과 평화’를 외치는 혁명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신 전쟁에 참여한 것은 미국이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자국민을 잃은 미국이 1917년 전격적으로 참전을 선언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급격히 기울었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이 먼저 항복하였다. 독일도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1918년 킬 군항에서 독일 해군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민중들이 가세하여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망가고 독일은 새로이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독일 공화국은 1918년 11월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 이런 끔찍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1차 세계 대전 자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탐욕스러운 식민지 확장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선악의 구도로 발생한 전쟁이, 물론 그런 것이 있다면, 아니었다. 연합국의 승리가 사필귀정도 정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승전국들과 독일 사이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는 승전국들의 회담이었고, 승전국들은 패전한 각 국가들과 개별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일과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한마디로 보복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승전국은 식민지 문제를 외면하고 또다시 세계 분할에 열을 올렸다. 미국의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도 패전국 식민지를 처리하는 원칙으로나 이용되었다. 승전국의 식민지들은 한껏 고무되었던 독립에의 꿈을 잃고, 제국주의의 맨얼굴에 다시 한 번 이를 갈아야 했다. 여기 저기 남발한, 전쟁을 도우면 독립을 시켜주겠다던 영국의 약속도 거짓이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은 독일이 져야 했고, 막대한 배상금도 독일이 물어야 했다. 독일인의 불만이 커져가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더 참혹한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베르사유조약 후의 국제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싸우지 말고 착하게(?) 살자 라는 취지로 평화조약과 군비축소를 결의하기도 했다. 국제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국제연맹도 창설되었다. 그러나 실권이 없어 별 기능을 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72>
어쨌거나 전쟁이란 필연적으로 사회변혁을 가져온다. 1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의 민주주의도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독일과 오스만,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패전국인 오스만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들도 독립하여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제 공화정은 유럽에서 보편적인 정치 체제가 되었다.
여성의 참정권도 확대되었다. 총력전으로 전개된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시민혁명의 대명사 프랑스도 194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21세 이상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혁명은 참으로 끝나지 않는 길고도 긴 과정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전쟁이 끝나고도 독립되지 못한 나라들은 독립운동을 다시 이어나갔다. 인도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참전해서 열심히 싸웠으나 영국은 독립은커녕 탄압을 강화하였다. 인도국민회의를 이끌던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통해 자치를 획득하려 하였고, 간디의 뒤를 이은 네루는 자치가 아니라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베트남 역시 프랑스로부터부터 독립하기 위해 다시 싸워야 했다. 호치민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하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이슬람교가 우세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교 중심의 독립단체들이 네덜란드에 맞서 해방 투쟁을 벌여 나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국에서는 베이징 대학생을 중심으로 5.4 운동이 일어났다. 삼국협상 측에 줄을 서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독일이 중국에 가졌던 이권을 포함한 21개조 요구 항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으려고 하였다. 만주군벌이 일본과 야합하여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대대적인 반일-반군벌 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에 도시 노동자와 상인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참여하자 베이징의 군벌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77>
노혁명가 쑨원은 5.4운동에 고무되어 인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국민당을 조직했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에는 군벌들이, 난징 중심의 남쪽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군벌에 반대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을 하고 함께 군벌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북벌이 마무리될 즈음 국민당을 이끌고 있던 장제스는 공산당을 공격하였다. 국공 합작은 깨어지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고난의 대장정에 돌입하였다.
숙명의 라이벌, 국민당과 공산당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2차 국공합작을 하고 일본에 투쟁하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 즉시 국공내전에 돌입했지만.
러시아 혁명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식민지 확장을 위해 여기저기 끼어들었으나, 속은 곪아 들고 있었다. 시민혁명(혹은 시민) 없이 근대를 시작했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지식인 중심으로 전개된 자유주의 운동들은 실패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를 해방하였으나 나로드니키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후 차르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했다. 나로드니키의 브나로드 운동 또한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했다. 러시아는 위로부터의 개혁도, 아래로부터의 개혁도 이루지 못하고 20세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917년 11월, 레닌이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까지 러시아는 몇 단계의 혁명 과정을 거쳤다. 그 시작은 1905년 ‘피의 일요일’ 이었다.
1905년 러시아는 러•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은 패색이 짙고 경제는 어려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차르에게 심각한 경제상황을 호소하려고 겨울궁전을 향해 행진했으나 그들에게 날아든 것은 차르의 무자비한 총탄이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화로 1905년의 혁명이 일어났다. 뚜렷한 지도부도 일치된 목적도 없이 혁명은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일종의 의회) 등 개혁을 약속했지만 혁명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자 차르는 절대 권력을 내두르며 혁명을 탄압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혁명 열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고 판단한 니콜라이 2세는 서둘러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내의 문제를 외부와의 전쟁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패전이 거듭되자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들조차 전쟁에 반대하며 ‘빵과 평화, 토지와 자유’를 외치며 봉기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7년 3월(러시아 구력으로는 2월) 러시아 민중들이 왕궁으로 몰려들었고,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나며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자유주의 시민 즉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하는 (카렌스키)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3월 혁명의 기층 세력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을 대표하는 소비에트였다. 성격상 소비에트와 임시정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민중들의 염원과는 달리 토지 문제에 미온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임시정부의 부르주아들은 제국주의 전쟁인 1차 세계 대전에 승리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독일의 은밀한 지원 아래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은 임시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레닌은 권력은 소비에트가 가져야하며 전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지도 아래 1917년 11월(러시아 구력으로는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최초의 노동자•농민의 정부인 소비에트 정부,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즉각 전쟁 중단을 선언하고 독일 등 삼국동맹 측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의 많은 땅을 삼국동맹 측에 내어주었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 내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때 내준 지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대부분 다시 소련에 병합된다.
혁명의 불꽃은 한순간에 붙을 수 있지만 그 불길을 지켜 끝내 혁명을 완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반혁명 세력이 결집하여 혁명정부는 곧바로 내전에 돌입해야만 했다. 적군과 백군이 여기에서 나온 용어인데, 적군은 혁명군을, 백군은 혁명에 반대하는 귀족과 지주와 자본가들로 구성된 반혁명군을 말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의 열강들도 백군을 지원하였다. 러시아 내전 혹은 적백내전의 주요 전투는 11월 혁명직후인 1917년 11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완전히 끝난 1922년 마침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수립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예 등 3개국이 가입하여 연방을 이루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레닌은 1919년 각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을 연결하는 코민테른을 건설하여 혁명의 세계화에도 나섰다.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세계 각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5년 우리나라에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닌이 죽고 난 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중공업 중심의 강력한 계획 경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반대파를 숙청하여 독재 체제 강화에도 힘썼다.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에서 러시아혁명의 발발 배경에 관해 조금 알아보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마르크스의 이론과 정반대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인데, 여기에 레닌의 판단과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이 1917년 ‘4월 테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을 때, 당 동지들의 대부분은 귀 기울이지 않았거나 혹은 그를 경멸했다. 그의 4월 테제를 정신병자의 착란증이라 비난한 사람도 있었고, 그의 아내는 레닌이 미친 것 같아 걱정이라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레닌은 어떻게 볼셰비키 혁명을 이루었을까?
"1917년 2월 레닌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망명자로서 취리히에 처박혀 지냈다. 그는 러시아와 신뢰할 만한 접촉도 없이, 사건을 스위스 언론을 통해 주로 접할 뿐이었다. 그러나 10월에 그는 최초의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2월에 레닌은 유일무이하고도 우발적인 상황의 결과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즉각 인식했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혁명의 가능성은 아마도 수십 년 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즉 혁명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할 때 레닌은 외톨박이였고, 당의 대다수 중앙위원회 위원들에게 조롱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레닌이라는 개인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더라도, 10월 혁명 전체의 역사를 방향성 없는 대중과 대결하면서 점차 자신의 비전을 제시한 고독한 천재의 이야기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레닌의 주장이 당 관료들을 피해가는 대신 혁명적 미시정치학이라 불릴 만한 곳에서,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놀랄만한 확장과 러시아의 대도시마다 땅에서 솟아나듯 조직되어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면서 ‘합법’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지역위원회의 호응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10월 혁명의 숨겨진 역사이고, 소수 그룹의 냉혹한 혁명가들이 쿠데타를 이루어낸 신화의 이면이다. p28~9“
레닌의 주장들 받아들인 것은 당 중앙위원회 즉 당 관료들이 아니라 각 지역의 소비에트와 민중들이었다. 왜? 부르주아들이 주도권을 쥔 임시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관건은 언제나 “morning after", 즉 그 다음날 아침이다. 광란의 열정에 도취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면 부스스한 얼굴과 메스꺼운 속, 더럽고 어지러운 난장판이 초췌하게 드러난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던 ‘순간으로서의 혁명’은 오히려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파괴 위에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작업은 더디고 힘들고 반동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역사에서 봉기는 수없이 일어나도 혁명은 그처럼 드문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17년의 2월 혁명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혁명의 열정은 민중들의 것이었지만 그 다음 날 아침 권력을 손에 넣은 것은 부르주아 임시 정부였다. 여기서 레닌은 혁명이 한 번 더 반복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쟁 중단과 토지분배라는 요구를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는 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고, 마르크스도 러시아와 같은 봉건적 국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레닌은 마르크스를 배반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혁명은 반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상황의 패러독스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차르 정권을 전복시킨 2월 혁명이 끝난 1917년 봄, 러시아는 전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였고 예측할 수 없는 규모의 대중 동원, 조직의 자유, 그리고 출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유는 오히려 상황을 불투명하고 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어갔다. 만약 두 혁명 시기, 그리고 그 사이에 쓰인 레닌의 텍스트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실마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정당들과 정치적 주체들 사이의 정치적 투쟁에 의한 ‘명시된’ 공식적인 정세를 현실적인 사회적 이해관계(즉각적인 평화, 토지분배, 그리고 물론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 즉 기존의 국가기구들을 해체하고 이를 새로운 코뮌 같은 사회적 관리 형태로 대체하는 것)에서 떼어놓은 간극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간극은 열광 속에서의 자유의 상상적인 분출이자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때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연대의 마술과도 같은 ‘순간으로서의’ 혁명과, 이 열정적인 폭발이 사회 체계 내부에 흔적을 남길 경우에나 실행되는, 사회를 재구성하는 힘든 ‘작업으로서’의 혁명 사이에 존재한다.
이 간극이야말로 -1789년과 1793년 사이 프랑스 혁명에서 간극이 반복되듯- 레닌의 유일무이한 개입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지점이다. 혁명적 유물론의 근본적 교훈은, 혁명이 자체의 기본적 본성 때문에 두 번에 걸쳐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p2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