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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평점 :
저자 비토리오 회슬레는 처음 들어봤지만, 번역자 이신철은 알고 있었다. 이신철은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을 번역했다. 바이저의 『헤겔』이 워낙 좋아서, 덩달아 번역자에게도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실제로 번역도 매끄러웠다.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앞뒤 문장이 모순되는 것도 없었고, 비문도 없었던 것 같고, 억지스러운 번역 말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도 않았다. 버거운 철학책에 취미를 붙이면서 번역자에게도 자연스레 신경이 가게 되었다. 책 자체의 어려움에 오역과 악역(?)이 가세하면 그야말로 난제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선뜻 『독일 철학사』를 주문한 것은 입맛을 당기는 목차 덕분이지만 번역에 대한 불안이 없어서기도 하다.
『독일 철학사』는 2013년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회슬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미국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현재 아내는 한국인이다. 그는 <대장금>과 <동이>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 책은 총 15장으로 되어있는데, 4장까지 읽었다. 지금까지는 기대보다 좋다. 번역은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 긴 호흡의 문장이 많아, 끊어 읽어야 할 부분을 잘 찾지 못하면 내용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보통 번역자는 문장을 임으로 나누지 않는 것 같은데,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이해하지만,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긴 문장은 독자에게 커다란 부담이다.
이 책의 부제는 “독일정신은 존재하는가.” 이다. 한 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는 질문이다. 철학이라고 하면 밑천이 짧은 나는 칸트와 헤겔을 맨 먼저 떠올린다. 독일 관념론 철학을 대표하는 이 두개의 거대한 이름은 그 자체로 독일정신의 상징이다. 저기 독일정신이 있는데, 도대체 난데없는 이 질문은 무엇일까? 회슬레는 독일정신을 부정하는가? 강조하는가?
01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독일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목표는 독일철학에 대한 간결한 개관, 이를테면 항공사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면서 이 철학을 다른 유럽 국민의 철학과 구별 짓는 특유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 정신에는 결정적으로 정신개념(Geistbegriff)에 대한 추사유(nachdenken)가 속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일 철학의 모든 전환에서는 그것 없이는 역사를 현실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럼직한 발전 노선이 명백해야 한다. p19
추사유? 검색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몇몇 간단한 언급이 있지만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1937년 11월 19일’ 동아일보에 <哲學的 思惟의 理解>라는 칼럼이 있고, 여기에 헤겔의 nachdenken이 나온다.
「헤겔은 일즉이 "哲學(철학)"을 存在(존재)의 世界(세계)에 대한 "나흐·뎅켄"(追思惟(추사유))으로 보앗읍니다. 이"나흐·뎅켄"이란 實在(실재)나 現實(현실)을 떠난 헛된 觀想(관상)이 아니라 도로혀 어디까지던지 客觀的(객관적)인 實在(실재) 및 그 世界(세계)에 대한 理解(이해)이요 省察(성찰)이겟습니다.」
기록보관의 힘이다. 독일어 검색을 하면 좋겠지만, 독일어 문맹이라 아쉽다. 여하튼 어떤 글에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하던데, 이 부엉이가 황혼에 난다는 점과 한자 追思惟의 追가 ‘쫓을 추’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nachdenken이 실재나 현실 혹은 행위를 뒤따르는 사유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독일정신이란 정신개념을 곰곰이 따지는 사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정신에 대한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왜 그렇게 (읽는 사람) 미치도록 ‘정신’이란 것을 물고 늘어지는지 알만하다.
독일정신 혹은 독일철학의 존재 유무를 따지려면 먼저 독일이란 개념이 존재해야 한다. 독일은 1871년에야 뒤늦게 통일국가를 이룬다. 독일이 근대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든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담지자라는 영예로운 특수역할이었다. 여하튼 1800년 전후로 강력한 독일 국민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회슬레는 이 책이 주로 1720년부터 2000년까지의 약 300년을 다루고 있다면서, “독일 정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도발적으로 그것이 1750년 이후에야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으로서 독일’ 이라는 말은 19세기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 책의 일차적 독자는, 내게 무척 다행히도, 일반적 교양 시민이다. 이를 위해 회슬레는 정확한 지식이나 복잡한 논증을 의식적으로 포기한다. 중요한 것은 박식한 세부사항이 아니라 커다란 노선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철학이 불러일으키거나 개념화한 의식사적 변화이다. 이 책은 철학사학적이라기보다는 이념사학적이다. 반은 에세이고 반은 역사학인 이 책은 독일철학을 의식적으로 독일 관념론에 비추어 해석한다. 또한 독일철학을 외부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회슬레는 분명 독일인은 아니다.
독일에 대한 나의 눈길은 더 이상 내부적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 즉 어떤 요인이 독일철학을 인류사에서 두 개의 가장 매혹적인 철학 중 하나로 떠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33~1945년의 도덕적-정치적 대재앙이 생겨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외국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p28
02 영혼에서 신의 탄생 : 중세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서 독일어로 철학함의 시작.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중세 사유의 완성과 돌파
라틴어는 전 유럽에 공통된 학문언어였다. 회슬레는 이 책에서 독일철학의 기준을 독일영토가 아니라 독일어를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지금의 독일 땅에서 살았더라도 라틴어로 학문을 했다면 그는 독일철학자가 아니다. 거꾸로 독일어를 사용했다면 활동지역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추정) 는 고유의 철학사상을 독일 민중어로 표현한 최초의 독일철학자이다. 그는 단테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에는 보통 신비주의 사상가란 말이 따라오는데, 회슬레는 에크하르트의 철학을 “이성주의적 근본 기획을 직접적인 신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결합한 것” 이라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이성주의적 입장은 교부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에 작별을 고하고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촉진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서의 말씀을 자연적인 이성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성서는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아니라 척도다.
에크하르트는 “신에게 있어 존재와 인식은 동일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신에게 있어서는 인식이 존재를 근거 짓는다는 테제를 옹호한다. 인식을 존재보다 위에 놓는 것은 비록 인간이 아니라 신을 염두에 둔 것일지라도 관념론의 근본 작업 과정을 미리 보여준다.
에크하르트는 신에 대한 근본적 사랑을 주장한다. 죄와 고통마저도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신이 일정한 방식으로 나의 죄를 원하는 까닭에 내가 범죄를 범하지 않았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더구나 어떠한 보상도 바라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라도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에 대한 근본적 사랑의 이념은 칸트에게 있어 마침내 수천 년에 걸친 행복주의 전통의 붕괴로 이어지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또한 에크하르트의 다른 윤리적 이념도 칸트를 예고하는데, 가령 헤아리는 것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의욕이라는 그의 견해가 그러하다. p44
루터로부터 독일 관념론으로 나아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에크하르트에게로 되돌아서 가야한다.
03 종교개혁에 의한 철학적 상황의 변화 : 파라켈수스의 새로운 자연철학과 야코프 뵈메의 신에게서의 아님
철학적으로 본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은 진보일 뿐 아니라 퇴보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주교들의 도덕적 신뢰 상실과 독일 군주들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루터는 자신의 군주의 호의 없이는 승리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루터는 군주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 (가톨릭과 칼뱅주의에 반하여) 군주에 대한 저항권을 포기해야 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파토스와 부당한 정부에 대해서마저도 굴종하는 것을 제멋대로 결합하는 것은 오랫동안 독일에서 루터교의 징표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루터는 우리가 성격(Charakter)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녔고, 선을 위해서든 악을 위해서든 자신의 종교적 및 언어 창조적 성취를 통해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르게 유럽 공동의 가족으로부터 독일 민족을 분리해내는 데 기여했다. 루터가 츠빙글리와 칼뱅의 또 다른 개혁에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은 라틴계와 앵글로색슨계 나라들이 그에 대한 본보기를 이루는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의 중간 상태에 머물렀다.
구두장이였던 야코프 뵈메(1575-1624)는 근세 최초의 독일 철학자다. 그는 결코 공부를 한 적이 없고 라틴어를 쓸 수 없었지만, 신비적 체험 이후 루터교적 성서 신앙을 신과 자연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전개에 관한 철학적 설명을 통해 근거 짓고자 했다. 그는 확실히 이성적 신학자는 아니었다. 엄밀하게 논증하는 대신 정신의 이름으로 종종 이성에 반대했다.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단한 용기를 지니고 전통적 신학이 흔히 비껴가는 물음을 제기했다는 점은 논박할 수 없다. 고통과 악은 어디로부터 세계로 오는가? 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고전적 대답은 결여론 이다. 즉 나쁜 것 또는 악은 존재에서의 결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악의는 단연코 단순한 결여 이상인 것으로 보이며, 만약 신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그것들도 신 안에서 그 근거를 지녀야만 한다. 뵈메는 신 자신 안에 부정적 원리를 갖다 대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며, 긍정적 원리와 부정적 원리의 공동작용으로부터 외적 세계에서의 신의 현현, 즉 오로지 신적 본질의 전개일 뿐이고 다른 두 원리를 결합하는 자신의 세 번째 원리를 이루는 신의 현현을 파악하고자 한다. 결정적인 것은 대립이 없으면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이다. p71~2
악마의 분노는 부정적인 신적 원리의 표현으로, 악마는 신의 내적 본질이다.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이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대립 없이는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것을 우리는 보통 헤겔적이라고 하지 않나?
04 신에게는 오로지 최선의 것만이 충분히 좋다 : 라이프니츠의 스콜라 철학과 새로운 과학의 종합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는 한마디로 천재다. 그는 인류 최후의 보편적 학자로, 철학 뿐 아니라 수학, 자연과학과 공학, 법학과 역사에 창조력을 발휘하였다. 미적분학 창시자의 자리를 놓고 뉴턴(1642~1727)과 싸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17세기에 철학이 이성주의적으로 전환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단순히 권위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들과 다르게, 권위에 기초하지 않는 어떤 심급의 필요성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시민전쟁이 불러일으킨 물리적·도덕적 악의 존재이다.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모든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종파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제국의 차이는 분명해 졌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왜 바로 독일에서 종교의 이성적 근거 짓기를 향한 노력이 특히 중요했는지,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종교적 활기를 지니고 추구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단순히 말해 30년 전쟁은 종교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진리 기준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이성주의이다. 17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불리는데, 바이저의 『헤겔』에는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이란 표현이 나온다.
과학과 신학의 결합은 근세 자연과학의 일반적 특징이다. 그런데 의지주의자인 데카르트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이성주의자였다. 데카르트는 수학의 공리를 신적 의지의 자의적 정립으로 간주했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본질과 그의 창조를 이성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선험적 반성에 의해 현실의 근본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과학적인 종교적 신앙의 억제는 독일 정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기여였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신은 과학의 각각의 모든 새로운 승리가 위태롭게 하는 미봉책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과학의 기초이며, 과학을 촉진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다. 그와 유사하게 초기 계몽주의적 세계 개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표현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서 신의 창조력을 모방한다. 종교를 가톨릭교회와 동일시한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관통하는 이성과 종교의 대립을 라이프니츠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라이프니츠 이후에도 독일 문화에서는 결코 현실적으로 기반을 얻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한 니체는 자신의 독일적 뿌리를 오히려 자신이 동시에 이성에 대해서도 투쟁하는 것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도 역시 볼테르에게는 이해 불가해했을 것이다. p85
독일철학은 종교와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과 종교는 한편이다. 볼테르(1694~1778)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는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를 대놓고 비웃는다. 캉디드가 만나는 이 비합리적인 세계가 라이프니츠의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의 진정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독일철학의 특수성은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곧 이성에 대한 투쟁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근세 철학은 아주 단순화하자면, 고대 양식을 모방하는 저자들과 근대화하는 저자들 사이의 경쟁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를 우두머리로 하는 근대화 파는 일차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사유하며, 스피노자를 필두로 하는 고대 모방파는 주로 존재론적으로 사유한다. 데카르트는 res extensa와 res cogitans를 이분하여, 고대철학에는 낯선 근세적 발전의 추동력을 일으켰다. 고대양식을 모방한 스피노자는 존재론적 증명을 철학의 출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 신 즉 자연, 의 실존을 증명하는데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지니지만 그 중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단지 연장과 사유다. 정신적 사건과 육체적 사건은 평행적으로 진행되며, 현실의 두 측면이지 서로 인과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혼을 부여받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중심 철학은 무엇인가?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인다. 라이프니츠에게도 신은 항상 이차적 원인을 거쳐 작용하며, 그 역시 결정론자이며, 오로지 자유가 철저한 결정화와 양립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유를 옹호한다. 동시에 스피노자와의 차이도 중요하다. 스피노자는 논리적 필연성과 법칙론적 필연성을 구별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가능한 모든 세계에 타당하며, 법칙론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해당 자연법칙을 지닌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라이프니츠는 우선적으로 이성 진리와 사실 진리를 구별한다. 이성 진리는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타당하므로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사실 진리는 오로지 현실 세계에만 타당하다.
그러나 왜 신은 다른 세계가 아닌 바로 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다른 세계들이 논리적으로 가능했을지라도, 신의 선택을 위한 근거가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충족이유율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형이상학에 대해 모순율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행위도 역시 바로 자유로운 행위가 근거를 지니는 것이다. 전능하고 전지하며 전선한 존재로서 신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실 진리는 -비록 우연적이라 할지라도- 무한한 정신에게는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p88~9
라이프니츠는 현실 세계의 특수한 지위를 가치론적으로 정당화한다. 가치 기준은 신 앞에 주어져 있으며 결코 신의 자의에 따르지 않는다. 그는 최대 가치를 지니는 유일한 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또 다른 차이점은 실체 개념과 관련이 있다. 스피노자는 일원론자인데 반해,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다수성을 가정한다. 라이프니츠는 이 다수성의 실체를 모나드라고 부른다. 모나드의 활동성은 오로지 이 모나드와 신 자신에 의해서만 규정되기 때문에 모나드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없다. 그 대신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를 주장한다.
비록 창 없는 모나드들이 오로지 자기의 내적 프로그램만을 연주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정확히 일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함에 있어 각각의 모든 모나드는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관점을 표현하거니와 각각의 모든 모나드는 모든 순간에 그 자신의 이전과 이후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우주 전체를 표현한다. p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