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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는 발음상으로도 재미있는 낱말이다. 국어문법 공부에 나름 열중인 상황에서 '읽다'가 활용될 때 나타나는 다양한 음운현상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다가도 한참씩 음운만 생각할 때도 있다.
1. 읽다 〔익따〕 : 자음군 단순화
쌍받침 'ㄺ'은 자음군 단순화에 의해 'ㄱ'이 음가를 가지고, 'ㄹ'은 탈락한다. '일따' 아니고, '익따'. 우리 발성기관으로는 받침의 자음 두 개를 모두 소리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 읽어 〔일거〕 : 연음
어간 '읽-'에 어미 'ㅓ'가 붙어 활용할 경우, 예를 들어 "책을 읽어 보아라' 에서 '읽어'는 자음군 단순화가 되지 않는다. 어미 '어'에 초성이 없기 때문에 받침 'ㄺ' 중 'ㄹ'은 받침으로 남고, 'ㄱ'은 연음되어 뒤 음절 초성으로 넘어간다. 'ㄱ+ㅓ →거' 로 되므로 읽어는 '일거'가 된다.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지기?
3. 읽는 〔잉는〕 : 자음군 단순화 → 비음화
일단 자음군 단순화가 일어나야 한다. 뒤 음절 초성에 'ㄴ'이 버티고 있으니까, 차지할 자리가 없다. ㄹ 이 탈락하여, '읽는 → 익는' .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를 막고 '익는'을 해보면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익는'은 대부분 코로 나오는 음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 나오는 소리를 비음이라고 하는데, 비음에는 'ㅁ,ㄴ,ㅇ'가 있다. 비음이 어찌나 영향력이 센지 바로 앞에 오는 자음도 비음으로 만드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익'의 받침 'ㄱ'은 뒤에 오는 '는'의 초성인 'ㄴ'에 의해 비음으로 변한다. 'ㄱ'의 비음은 'ㅇ'이다. 따라서 '읽는 →익는→잉는' 로 음운 변동이 일어난다.
4. 읽지 〔익찌〕 : 자음군 단순화 → 경음화
읽지는 먼저 '익지'로 'ㄹ'이 탈락한다. 자음군 단순화. 그런데 '책 좀 읽지!" 를 소리내 보면 '익찌'가 된다. 왜? 물론 '일찌' 하는 사람도 있는데, 교양있는 현대 서울인의 발음은 아니다. 이른바 표준 발음법인데, 일찌 X, 익찌O. 다시 돌아가서 '익지→ 익찌' 로 즉 'ㅈ→ㅉ'이 되는 현상을 된소리되기 (경음화)라고 한다. 쌍자음이 된소리다. 이유는 '익'의 받침 'ㄱ' 뒤에 예사소리(평음) 'ㅈ'이 연이어 오기 때문이다. 이때 뒤의 예사소리는 된소리가 된다.
5. 읽고 〔일꼬〕 : 자음군 단순화의 예외
표준 발음법의 예외에 해당한다. '읽다'는 표준 발음법에 의해 '읽다 → 익따'로 'ㄱ'이 남는데, 어간 말음 'ㄺ' 다음에 'ㄱ'이 오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ㄺ' 중에 ㄱ 이 탈락하고 ㄹ이 남는다. '읽고 → 일고 → 일꼬'. 경음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탈락하기 전의 'ㄱ'이 뒤 음절 '고'에 영향을 주어 경음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한다.
6. 읽기 〔일끼〕 : 5와 동일
어간 말음 ㄺ 다음에 ㄱ으로 시작하는 어미뿐 아니라 접미사가 와도 예외가 적용되어 읽기→ 일기 → 일끼 로 변한다. '일기' 가 무조건 '일끼' 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숙제로 매일 썼던 일기는 발음도 그대로 〔일기〕 이다.

'읽다'는 발음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다양함이다. 같은 책도 어릴 때 읽는 것과 중년이 되어 읽는 것이 다르고, 학생이 읽는 것과 선생이 읽는 것이 다르고, 철학자가 읽는 것과 문학가가 읽는 것이 다르다. 이런 다양한 다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책들에 관한 책을 읽을 때이다.
얼마 전에 강유원의 『책읽기의 끝과 시작』을 읽었다. 책 제목에 그의 야욕이 드러나 있는 것일까? '야욕'은 강유원 선생의 강의에 가끔 등장하는 낱말이다. 요즘도 예전에 다운 받아 놓은 강유원 선생의 서양 철학사 강의를 다시 듣곤 한다. 다섯 단락으로 글을 쓰지 않으니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의 강의처럼 여기 저기 샛길로 빠져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것도 세상사는 즐거움이니 나도 그 즐거움으로 산만한 생각을 그냥 따라간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곧 책읽기의 모든 것이란 뜻으로 전해진다.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마라는 야욕을 가감없이 드러낸 그 야욕이 강유원 선생이라 믿음직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서평을 쓰는 것으로 완결된다. 그냥 마구잡이로 책을 읽는 나같은 경우야 우연히 발견한 책을 중간에 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내는 것만으로 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고서는 책읽기를 완료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서평을 통해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추출해 내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덧함으로써 사고력을 발달시키고 사유를 확장할 수 있으니 지극히 올바른 가르침이다. 다만 서평은 언감생심 버겁고, 그저 독후감이라도 시작해 보아야지라고 생각을 해본다.
코로나 19로 집에 붙박이가 되면서 뒤늦게 알게 된 일들이 있다. 황현산 선생이 타계하신 것을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소한 부탁 』 하나를 세상에 남겨 두고 가셨다.
여러 종류의 글들을 모아 놓은 산문집이지만, 책들에 대한 글들도 꽤 많이 있다. 직접 번역한 「어린 왕자」를 비롯한 불문학뿐 아니라 우리나라 작품들에 대해서도 여러 글들을 남겼다. 나는 특히 시 「광야」에 대한 선생의 해석이 맘에 좋았다.
1942년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일본 경찰에 의해 압송되던 기차 안에서 이 시를 구상했다고 한다. "민족의 가장 처절한 고난이 자신의 한 몸을 꿰뚫었던 그 시간을 민족이 자랑해야 할 가장 거룩한 시간으로 바꾸었다" 고 평하며, 「광야」를 민족의 서정시라고 규정한다. 육사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는 이제 우리가 목놓아 불러야 할 민족의 서정시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의 해에 태어난 황현산 선생은 민족의 현대사와 더불어 사셨다. 그의 산문집에는 굴곡 많은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상일을 꼬집을 때도 ,번역에 대한 전문적 소견을 밝힐 때도, 서평을 할 때도 그의 글들은 민족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어 울림이 크고 생생하다. 고답적이지도 어렵지도 않다. '매화향기' 처럼 '홀로 아득' 한 글이지만, 그 깊고 높은 품격이 독자에게 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어제 다 읽은 책이다. 독어독문학 전공인데 제목은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읽기』 이다. 약력에는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철학 아카데미의 대표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책은 보르헤스의 『칠일 밤』이 연상되는 구성이다.
2010년에 진행된 〈전복적 소설 읽기 : 소설을 읽는 8개의 키워드〉라는 제목의 강의 녹취록을 정리한 책이다. '전복적' 이라는 수식에서 그의 철학적 관점이 얼핏 짐작된다.
8개의 작품 중 내가 읽은 것은 카프카의 『변신』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과 카뮈의 『이방인』 이다. 고전과는 악 소리나게 다른 현대 소설들이다. 읽기는 하는데 뭔지는 모르겠는, 뭔가 있긴 한데 콕집어서 말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이다.
현대 소설의 기점을 조이스, 울프, 카프카, 프루스트로 본다고 한다. 현대 소설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괴테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온 서사,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없으니 흔히 말하듯 '밑도 끝도 없다.'
없는 이야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복적 책읽기'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만든 시대를 읽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전통 사회에서 이야기란 겪음 혹은 고난을 통한 삶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삶의 완성이 불가능하다. 세상은 『이방인』의 뫼르소의 그것처럼 낯선 곳이고, 현대인은 그 속에 불쑥 던져진 존재다.
'완성' 이란 목적론적 의미를 갖고 있는 낱말이다. 삶의 완성이란 인간에게는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죽기 전에 그 목적을 완전히 다 이루었다면 그 삶은 완성된 삶이다. 이 목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무엇으로부터 부여된 것인가? 인간이 궁리하고 궁리하여도 '신' 이외에 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근대, 모던은 신과 결별하며 탄생한 시대다.
신 없이 홀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는 아마도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삶의 목적을 부여하거나, 목적없이 밑도 끝도 없이 살거나. 하나가 더 있긴 하다. 죽은 신을 살려 내거나.
처음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신났다.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신을 맞이한 셈이었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말이 있다. 이성이 신이었다. 이성은 인간에게 완전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얼마가지 않아 이성이 광기를 뿜으며 모던은 박살이 나고 포스트 모던이라 불리는 시대가 왔다. 진짜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세상이 왔다.
'전복적 소설 읽기'가 전복적인 소설을 읽는 것이든 소설을 전복적으로 읽는 것이든, 밑도 끝도 없는 세상을 이야기해야 하는 소설의 어려움, 그럼에도 밑이나 끝을 부단히 이야기하려는 소설의 열망, 밑이나 끝을 찾아 헤메는 인물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 방향없는 세상을 방향없이 이동(유목)하는 자유 같은 것들에 대한 독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막연히 한다. 그러고 보니 밑은 근원(존재의 참된 원인, 아이티아)이고 끝은 목적(telos)인가?
고전의 완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헤겔 전공자 강유원의 책읽기와 처음 읽는 분이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불가능한 현대 소설에서 삶을 찾으려는 김진영의 책 읽기는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황현산 선생의 책이 '세상 읽기'로는 편안하고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