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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4
모치즈키 료코 지음, 김우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모치즈키 료코와 처음으로 만난 ‘대회화전’이 지상 최대의 미술 사기극을 다뤘다면, ‘신의 손’은 엄청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세상과 사랑으로부터 고립된 채 살아가다가 자신이 탄생시킨 ‘괴물’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한 여성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대회화전’이 촘촘하고 사실적인 서사를 통해 진정한 사기극의 진면목을 보여줬다면, ‘신의 손’은 조금은 추상적인 테마들, 즉 열정, 원념, 사랑, 그리고 절망 등 복잡하기 그지없는 심리 묘사에 천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과 소설가로서의 열정으로 가득 찼지만 3년 전 실종된 기스기 교코, 그녀의 멘토이자 연인이었던 대형출판사 편집장 미무라, 어느 날 미무라 앞에 나타나 교코의 복제품처럼 행동하는 소설가 지망생 마키, 자신의 환자 마키를 통해 알게 된 교코에게 집착하는 의사 히로세, 순문학 최고의 영예인 신세기문학상을 받았지만 도작(盜作)의 혐의를 받게 된 혼고,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교코-미무라-히로세-혼고가 연루된 특이한 ‘도작 스캔들’을 접하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뛰어든 르포라이터 미치코 등 모든 인물들이 3년 전 실종된 교코를 중심으로 엮여있습니다. 중반 이후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진짜 관계’까지 소개할 순 없지만 대략의 내용만 정리하면...
의사 히로세를 통해 소설가 지망생 마키를 알게 된 편집장 미무라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녀는 3년 전 실종된 교코의 복제품 같았기 때문입니다. 버릇이나 말투까지 비슷한 것은 물론 자신만이 알고 있는 교코의 미발표 소설을 자신이 집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마키에게 놀란 미무라는 결국 교코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교코에게 집착하던 의사 히로세가 그 여정에 동참합니다. 미무라는 교코와 마키의 접점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작은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고, 심지어 마키의 방에서 교코의 마지막 원고까지 발견하자 “혹시 마키가 교코에게 빙의된 것이 아니냐?”는 히로세의 터무니없는 추정에 솔깃해지기도 합니다.
한편 연쇄 유아납치 사건을 취재하던 중 교코가 얽힌 도작 스캔들의 정보를 접한 르포라이터 미치코는 미무라, 히로세, 마키를 차례로 만나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그로 인해 교코와 관련된 모든 인물들의 ‘비밀과 거짓말’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교코의 실종에 얽힌 비극적인 사실들도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실종 진상 밝히기’보다는 교코의 글쓰기에 대한 엄청난 집념, 수많은 사랑의 실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갔던 그녀의 일상들, 그리고 천천히 내부에서부터 붕괴되다가 끝내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그녀의 삶에 주력합니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교코의 원고들은 그녀의 실종을 추적하는 단서들인 동시에 현실과는 절대 화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반영하는 극중극 형태를 띠고 있어서 긴장감과 호기심, 안타까움을 배가시킵니다.
교코의 삶은 글쓰기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글쓰기는 그녀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주범이기도 합니다. “소설가란 마음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고 있으며, 그 괴물을 키우면서 작가가 되고, 그 괴물에 잡아먹힐 때 자살한다.”라고 그녀 스스로 말한 적도 있고,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편집장 미무라 역시 교코의 작품이 갈수록 기괴해질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여러 사람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10년 전, 상식 이상의 엄청난 양의 원고를 들고 혈혈단신 도쿄를 찾았다가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부당한 후 미무라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던 시절부터 3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점까지 그녀의 삶은 열망, 원념, 사랑, 배신, 붕괴의 과정을 착실히 밟아왔고, 교코가 남긴 미스터리한 흔적들을 좇던 미무라와 히로세, 미치코 역시 열망에서 붕괴에 이르는 그녀의 민낯들을 하나씩 발견하면서 충격과 회한, 분노와 사죄 등 각자 복잡한 심경을 품게 됩니다. 앞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심리 묘사에 천착한 작품’이라 언급한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초반부터 쉽게 읽힐 작품이 아니란 건 눈치 챘지만, 다 읽은 뒤의 첫 느낌은 제 ‘이해력 부족’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난해해야만 했나?”라는 아쉬움이었습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아니면 실종인가 잠적인가? 실상이 무엇이든 간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교코는 사라졌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막판에 관련자들의 입을 통해 드러나면서 미스터리가 풀리긴 하지만, 평범한 독자 입장에선 여전히 교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녀의 삶도, 그녀의 글쓰기도, 그녀만의 사랑법도 너무나 기이하고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심리 묘사에 치중한 문장들 때문에 이 작품으로 모치즈키 료코를 처음 접한 독자는 물론 ‘대회화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가운데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교코의 삶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으려면 가능한 한 끊어 읽지 말고 한 번에 완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넉넉한 여유를 갖고 다시 한 번 재도전해볼 생각이고, 그렇게 읽다보면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또는 이해 못 했던 교코의 삶에 조금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