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다음, 작가의 발견 7인의 작가전
정명섭 지음 / 답(도서출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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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_무너져 내린 부활



오랜만에 서평단을 신청해서 읽은 책이다. 책 표지에 있는 '진실은 무너진 건물 안에 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세화병원이 무너지기 직전 등장 인물들에게 한 통의 메일이 온다. 오늘 세화병원이 오후 4시에 붕괴될 것이니 그 직후에 바로 모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일부러' 병원 건물을 무너뜨린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을 붕괴 시킨 것일까 궁금해졌다.


처음에 책에 대한 흥미를 갖고 페이지를 넘겼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표지도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몇 명의 등장 인물들이 자신의 상황에서 세화병원 병원장의 메일을 받거나 병원의 붕괴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붕괴 현장 앞에서 그 인물들은 다시 만난다. 구조대원으로 위장한 그들은 병원장의 안내로 병원에 들어간다. 병원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이 인물들이 병원의 비밀 공간이 지하로 들어가는 상황이 나오고 있다. 어둠 속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던 환자의 가족들은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해 한다. 병원장은 단지 가보면 알 수 있을 거라며, 지하에 있는 환자를 구하러 가자고 한다. 그러다 함께 들어간 환자의 가족들의 사연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병원의 무엇을 믿고 목숨이 위험한 가족을 맡길 수 있었을까? 누군가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거나, 혹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병원장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맡겼다. 그런데 병원장은 이해할 수 없는 실험을 실시했다고 한다. 죽음 직전에 놓인 환자들을 상대로 '엑토컬쳐' 실험이 시행되었다. 병원장 개인의 어떤 특정한 질환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엑토컬쳐 실험은 부작용이 심했다. 인간의 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많았다.


책에서는 엑토컬쳐 실험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지 않아서 아쉬웠다. 어떤 형광색 물질로 인해 인간이 좀비처럼 이성을 잃고 본능을 따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뒤에서는 그게 어떤 초인적인 능력의 발휘, 즉 초능력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험 내용이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글의 내용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부분이 아쉬웠다.


우리가 흔히 접한 좀비와는 비슷하지만 형광 피를 흘리는 괴물을 어떤 형태로 상상해야 할까? 그 괴물을 물리치는 과정은 잔인하지만 담담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병원장은 결국 자신의 질환을 위해 엑토컬쳐 실험을 실시 했지만 결국 자신도 희생자일 수밖에 없었다. 병원 붕괴에 대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람에 대한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인물들의 심리와 과거 보다는 병원 지하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상황이 많이 그려지고 있었다. 인물들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만 나와서 아쉽게 느껴졌다. 왜 인물들이 그래야 했는지 절실함이 미비했던 것이다.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엑토컬쳐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괴물을 겨우 물리치려고 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무엇일까?


연변이로 인해 초능력을 가진 무리들이 인간들의 세계를 차지하려고 하는 내용의 영화가 많이 생각났다. 엑토컬쳐 실험체들은 그 병원을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가둬진 자들의 고통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읽은 서평 책이었기 때문에 많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부터 재밌는 책을 더 많이 읽고 서평해 보고 싶다. 날씨가 추운만큼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지는 오후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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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해!


오랜만에 글을 올린다. 그 동안 무슨 일로 그리 정신없이 살아 왔을까?
돌아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난 여전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려고 애쓴다.
애쓰는 하루 속에서 작은 즐거움들을 다시 찾아 보려고 한다.
책을 읽으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그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쌓아 본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그저 그대로 흘러가며 미소 짓는다.
나는 아직도 안녕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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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의 발명 - '엄마'라는 딜레마와 모성애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 옮김 / 알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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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의 사회학적인 의미 해석

 

 

우리는 항상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아주 밀접한 관계로 생각한다. 그 관계는 너무나 확고해서 세계 어느 곳, 어떤 문화든지 적용되는 생각이다. 모성애를 가진 엄마라면 아이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성애'라는 사고 체계는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부분의 미디어에 의해 하나의 큰 주제가 된다. 그런데 그런 '모성애'가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발명된 것이라니? 이 책은 '모성애'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모성애'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집안일과 육아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나타난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집안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집안일도' 해야하는 슈퍼우먼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책은 독일에서 1975년에 출간되었는데, 특히 주부들에게 많이 읽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 출간되었는데, 한국의 여성 독자들도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부분이 많을 정도로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다. 낙태, 주부우울증, 순결강박증, 여자의 성적 주체성과 해방, 이혼 증가 등의 40년 전 독일의 여성들의 문제가 몇 년 전까지의 한국 여성들의 문제와 닮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문제들까지도 단숨에 뛰어넘어 버린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포세대나 사포세대라는 말이 떠도는 것처럼, 연애나 결혼, 출산을 포기해 버린 시점에서 아이를 키우는 상황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보다는 먼저 취업과 주거의 문제가 너무나 크다보니, 그저 현재의 삶을 즐기는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없이 말이다.

 

어쨌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직장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대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핵가족이 되었다. 대가족일 때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아이의 육아나 집안일 등을 서로서로 도우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핵가족이 되면서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해줄 사람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남자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안일과 육아 등을 온전히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슬로건은 '모성은 위대하다'는 관점이었다.

 

부모가, 특히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경우는 특수한 사정이 있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불편하고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가 발명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여자'라는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되었다. 나 또한 여자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데, 이 생각이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교육을 받아 온 결과라는 것이다.

 

색다른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아이를 내다 버리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육아는 여성에게만 주어진 의무 사항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수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동안 외벌이를 하면 집안일과 육아를 온전히 여자 혼자서 감당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맞벌이를 해도 대부분의 집안일과 육아는 여성의 몫일 경우가 많은 편이다. 직장 생활을 하며 집안일과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워킹맘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왜 외벌이든 맞벌이든 대부분의 집안일과 육아는 여성의 몫일까? 지금은 예전보다는 함께 집안을 하는 남성이 늘어서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집안일은 여성이 해야 하고, 남편은 그것을 '도와준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집안일 분배 문제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의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면서 직장 생활을 하며 사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다한다. 그러면서 남성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을 받는다며 경계심을 가진다. 이렇게 되면서 언제가부터 인터넷에서는 서로의 성을 혐오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혐과 남혐,,, 이러한 대립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생각이 아닐까 두려워 졌다.

 

너무나 살기 팍팍하고 힘든 세상 속에서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인 것 같다. 가슴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친다. 그 분노를 누군가든, 무엇이든,,, 표출하고 싶다.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아 헤맨다. 나보다 약한 무언가를. 절망과 슬픔, 분노로 인해 썩어 문드러진 가슴,,, 점차 손쓸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희생양을 짓밟는다. 그것이 언젠가 '나'이고,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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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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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다!

 

 

'무관심'이란 무엇일까? 한때는 사랑의 반댓말이라고 회자될 때가 있었다. 무관심 앞에 어떤 말이 오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 같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소중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람시는 '무관심'이 정치, 경제 등의 사회참여적인 의미에서의 '무관심'을 논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예로 들면 70~80년 대에는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이 꽃을 피웠을 때였다. 그 당시 문화 예술 방면에서도 순수예술이냐, 아니면 참여예술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그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아무 관심도 없이 먼 나라의 일로 여기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면 군부 독재 무리의 가해자였거나.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변혁'이 필요한데. 그 변혁의 힘은 일반 민중들의 '참여'에서 나오게 된다. 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고, 의식이 깨어 있기 위해서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전제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참여형 정치를 논했던 그람시로서는 '무관심을 증오'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람시의 사상이 담긴 에세이 같은 것이다.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한 자신의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쓴 시기가 유럽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시기에 그에 대한 저항의 방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 가치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를 옹호하던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1910년 대에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쓴 글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100년이 흐른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에 보내는 일침같은 느낌을 받았다. 미약한 군중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정치 방식, 그에 저항하는 깨어있는 자, 하지만 대부분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아니, 관심 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몇 명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봐도 그것은 더디고 한계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개개인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나 다급한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들을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까지도 포기할 지경에 이를 경우도 많아졌다.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감정을 자기 스스로 감당하지 못 할 수준에 이르르고 말았다. 그것이 그 현실은 본인의 잘못만 있는 게 아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현실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돈을 열심히 벌어도,,,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는 삶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삶일 것인가?

 

희망 없는 사회! 더 나빠질 가능성이 너무나 확실한 절망적인 현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다. 그람시는 말한다. "우리 스스로를 바꿀 필요가 있다."라고. 우리가 변해야 우리가 있는 사회가 변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몇 년 안 되어 전혀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표현, '외침'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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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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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길을 향해

 

 

며칠 전 미국 클럽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테러단체인 IS를 흠모하던 외로운 늑대형의 한 인간이 저지른 일이었다. 50명이 죽고 50명이 다쳤다. 이것은 개인의 복수극이 아닌다.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차별적인 테러 행위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곳곳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은 총기 사건이 자꾸 일어나고, 우리나라에서는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그 분노를 쏟아낸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생각 했을까?

 

세계 여행을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를 모를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테러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게 아니면 폭염이나 홍수, 화산폭발 등의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정말 집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한 일인지도 모른다.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요새는 산에 올라가는 일도 무섭게 되어 버렸다. 왜 우리의 세계는 테러 행위 등의 폭력적인 사태가 자꾸 일어나고 있는 걸까?

 

우리나라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럽과 같은 나라 저편에서는 수많은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새해에는 그런 난민들을 향한, 난민 중의 누군가가 성추행을 하는 범죄 행위가 무차별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더 이상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벌이는 범죄 행위나,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재정이 탄탄하지 않다. 그들을 정착시키는 문제는 자국의 국민들의 직업을 구하는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 각국의 나라는 난민들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난민들에 대한 대처 방안을 선택하고 있다.

 

나 또한 우리나라에 당장 난민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먼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난민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도 그저 흘러 넘길만한 사소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어쨌든 처음에는 난민들이 왜 생길까 궁금했다. 난민들이 생기는 이유는 아프리카의 내전 문제 때문이지만, 결국 그것도 알고보면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자기 마음대로 국경을 나누고 강대국들의 욕심으로 경제를 성장시킨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난민 발생에 대한 책임이 유럽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민 발생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등의 정책적인 대안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들이 얼마나 약소국들을 핍박했는가? 경제 성장은 더디고 정치사회적인 다양한 문제점을 가지게 된 것도 결국 첫단추를 잘못 끼우게 만든 강대국들이 아닐까?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난민들이 많이 발생할 것이고 여러 나라에서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라고 한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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