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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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의 역사도 이제 제법 오래되었다. 

 초창기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서프러제트가 일어났던 건 19세기 초였으니까 말이다. 세월이 그만큼 흐르다 보면 이념 역시 그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상황은 늘 유동적이고 아무리 어제 새로운 것이라 하여도 내일이 되면 곧 낡은 것으로 바뀌어져 버리니까. 때로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늘 옛 것만 고집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황이 달라져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현실을 왜곡하며 옛 것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런 걸 사람들은 종종 독선이라 부른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듯, 그런 이념의 독선 또한 많은 폐해를 남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허다하게 그걸 보아왔다. 중세 시대의 마녀 사냥이 그러하고, 나치즘과 스탈린이 그러하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나 이슬람의 테러리스트들에게서도. 이념은 어디까지나 삶의 유용성을 증진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하지, 삶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남의 삶을 유린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이념 보다 삶이라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작품을 만났다. 바로 2019년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란 소설이다.





 5부에 13쳅터 그리고 에필로그 하나. 


이러한 형식을 가진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모두 12명의 인물이 저마다 화자가 되어 등장하며 그들의 위치는 대등하다. 중심과 주변의 나뉨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이념적으로, 인종적으로, 계층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에 위치한 사람들을 서두를 여는 인물인 엠마가 연출하는 연극,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를 기점으로 하여 한데 모아선 독자 앞에 펼쳐 보인다. 마치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나와 무대 중앙에서 일인극을 하듯이.


 그렇게 우리는 소설을 매개로 저마다 다른 행로로 뻗어나가는 12개의 선들을 보게 된다. 앞서 5부로 이뤄져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다만 군집의 의미만 띨 따름이다. 그러니까 관계가 깊은 인물끼리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단 뜻이다. 1부엔 아프리카계 흑인이자 레즈비언인 엠마와 그녀의 딸, 야즈 그리고 엠마의 레즈비언 친구 도미니크가 등장한다. 2부엔 오직 엠마가 가장 친한 친구들끼리 만든 '언퍽위더블'의 자매인 셜리와만 관계가 있을 뿐인 캐럴과 그녀의 엄마 버미, 친구 라티샤가 중심을 이룬다. 3부엔 엠마의 이성애자 친구이자 캐럴에게 큰 상처를 준 교사 셜리, 그녀의 엄마 윈섬 그리고 처음엔 싫어했으나 점점 많아지는 젊은 선생님들 때문에 저절로 동지가 되어버린 퍼넬러피가 전면에 나선다. 4부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메건/모건 그리고 그녀/그의 할머니 해티, 그 해티의 엄마 그레이스가 무대 중앙으로 나와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렇듯 이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흑인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저마다 다른 계층과 생각 그리고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고발하는 게 중심이 아니며 그처럼 부조리한 사회에 내던져진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개인으로 내던져졌을 때 이들은 내면의 강한 신념엔 너무나 안 어울리게 불안하게 흔들리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나 도미니크가 그렇다. 그녀는 엠마조차 반할 정도로 독립적이며 강인한 신념의 소유자였지만 우연히 한 눈에 반한 은징가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의존적이 되며 급기야 구타마저 당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2부의 캐럴 역시 친구 라티샤가 초대한 파티에 갔다가 성폭행을 당한 뒤론 속세의 성공만이 자기 존재를 보장해주리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녀의 엄마 버미는 셜리가 나이지리아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 불만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나이지리아 문화 때문에 심한 핍박을 겪었고 오직 혼자 힘으로 성공을 일궈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홀로일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지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쩌면 그래서 두드러지게 가족이 묘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부 모두 가족이 등장한다. 주로 모녀 관계로 나타난다. 서양 속담에는 조물주가 전생의 원수들을 모녀 관계로 태어나게 한다는 게 있는데 마치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에 나오는 모녀 관계는 상충한다. 큰 틀에서 모두 페미니스트인 엠마와 야즈조차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실천하는 방식도 다르다. 캐럴과 버미도 그렇고 셜리가 레즈비언인 엠마와 가까워지는 게 영 못다한 윈섬의 관계도 그렇다. 소설 전면에 등장하진 않으나 성전환한 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메건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가족이란 종종 서로 다른 이들을 그저 하나의 묶음으로 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선명하게 타고난 정체성이 있고 어떤 대상을 봤을 때 그것을 규정한 오래도록 전통으로 자리잡은 가치관이 있지만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에겐, 특히 후발 세대의 경우, 타고난 것보다는 자라면서 경험한 것들이 시야와 신념의 형성에 더 커다란 영향을 준다. 만일 내가 생각한 대로 이 소설에서 가족이란 게 페미니즘이라는 이념 범주를 비유한 것이라면 후발 세대의 이러한 행태들은 페미니즘 또한 오래된 옛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만큼 달라진 세월과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것일수도 있다. 더구나 소설 속 12명이 가진 생각, 처한 위치가 다양한 것처럼 페미니즘 또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서 확장되지 않으면 이 모두를 포용할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 작가가 1부의 완전히 페미니즘적 지형(엠마와 도미니크는 자신을 따돌리는 백인과 남성 중심 주류 사회에 수류탄을 던지는 사람들이다.)에서 2부, 3부가 거듭될 수록 점점 더 비 페미니즘적 지형(투사에서 그냥 보통 여성으로)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원래 페미니즘 역사에서 엠마가 위치한 흑인과 레즈비언은 버려졌었다. 마찬가지로 성전환자 역시 오래도록 운동의 바깥에 있었다.(최근 우리나라에도 성전환자가 그 이유로 입학한 여대에 가지 못하거나 그걸 이유로 강제 전역 당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더 나서서 입학을 불허해야 한다고 외치거나 불합리한 처사에 침묵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페미니즘의 지형 안으로 편입되어 갔다. 이와 똑같이 셜리와 버미, 퍼넬러피 또한 포용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이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 중심주의에 쩔어있다고 해서, 설령 적대적이라 하더라도 내쳐선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 여성 코트니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인용하여 야즈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중요해진다.


 코트니는 록산 게이가 '특권 올림픽'을 하지말라고 경고했으며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특권은 상대적이며 전후 사정을 따져 살펴야 한다고 썼다고 대답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야즈. 그러니까 내 말은 이 모든 게 어떻게 귀결되느냐는 거지, 마약쟁이 싱글맘과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이동주택 주차장에서 자란 백인 힐빌리가 오바마보다 더 특권을 누리나? 고통에 시달린 시리아 난민 보다 중증 장애인이 더 특권을 누리나? 록산은 불평등을 논하기 위한 새 담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p. 98)


 나 또한 여기에 동의하며 이런 취지로 작가가 가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그러하듯이 아무리 나와 다른 이라 하여도 껴안아야 한다는 뜻으로. 또한 가족이라면 내 마음에 아무리 안 들어도 싫다고 내치기 전에 허심탄회한 대화부터 시작하지 않겠는가? 록산이 담론을 더 강조했듯이! 가족이란 유대의 설정은 그 둘을 다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소설은 단독자가 아닌 연대를 강조한다. 4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여전히 세상엔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차별을 지양하는 페미니즘적 신념이 필요한 곳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메건/모건처럼 다른 성정체성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는 이들, 오직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이란 이유로 하녀밖에 될 수 없었고 딸을 낳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그렇게 온갖 차별의 집중 포화를 당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같은 여성들조차 그런 이들을 쉽사리 보지 못한다. 셜리는 캐럴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오직 흑인 아이들을 백인처럼 성공시키겠다는 교사의 신념에 빠져 그걸 보지 못했다. 셜리의 엄마 윈섬은 흑인 하녀에게 봉사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처럼 우리에겐 타고난 환경, 자라면서 주입 받은 가치관 때문에 그 너머나 상대 삶의 깊은 속살을 보지 못하는 판막이가 존재한다.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아직도 제 목소리를 찾지 못하고 무관심의 그늘에 있는 그들에게 관심의 빛이 도달하여 대화의 참여자로 만드는, 그렇게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인식 지평의 확장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전투 중심의 페미니즘 보다 더 강조하기 위해 연극이란 무대를 등장 인물들을 한데 모으는 중심점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연극은 바라봄, 즉 주시의 대상이니까. 


 어쨌든 내가 소설을 통해 느낀 것들을 이리저리 두서 없이 써보았는데그래도 소설이 뭘 말하려 하는가에 대해선 부족하나마 전해졌으리라 믿는다.(마구 쓰다가 문득 올려다 보니 글이 꽤 길어졌기에 뜬금없는 전개이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것을 감안하고 말하건대, 나는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작가가 원했던 대로(비록 내 식으로 이해한 것이긴 하지만) 인식의 지평이 훨씬 넓어진 느낌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단지 몇 자의 단어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것과 설령 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먼저 내세우기 전에 바로 눈 앞에 선 이의 삶부터 깊이 헤아려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기 전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혐오와 배척의 주먹을 들 게 아니라 존중 속에서 공존을 위한 담론 창조에 더 많이 애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념을 위한 신념은 그것이 아무리 헌신적인 것이라 하여도 결코 그걸 지닌 사람의 인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은징가처럼 자신이 당한 비극만 생각하고 피해자라 여겨 아무에게나 막대해도 좋다고 여긴다면 그건 지닌 신념이 아무리 아름답다한들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말로 내세우는 진보보다 살아가는 태도 전체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진보가 진정한 진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념이 아닌 삶의 중시, 주장이나 구호가 아닌 실천의 중시.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새겨들어야 할 귀중한 조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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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6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들어본 적 있는데 페미니즘 소설이었군요 꼭 그런 것만 나타내지 않겠지요 여자 남자 성으로 나누기보다 저는 모두 같은 사람으로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생긴 게 페미니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니...


희선

ICE-9 2021-03-14 03:45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소설이긴 한데 저는 페미니즘 보다 삶적인 차원의 중시라는 게 더 와 닿더군요. 희선님 말씀대로 자신과 다르다 하더라도 먼저 존중과 대화의 대상으로 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는 페미니즘도 그런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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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를 여행할 때 한 번은 찾아가게 되는 성 비투스 성당. 거기엔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아 절로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하나 있다. 슬라브 민족에게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했다고 여겨지는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우스의 형제의 일대기를 재현한 것인데 무엇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보이는 화려한 색채 때문에 작가의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두게 된다. 그 작가의 이름은 알폰소 무하. 오랫동안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 있어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현대 감각에 걸맞게 새로운 시야로 미술을 해석하고 표현했다고 하여 '아르누보'란 이름으로 알려진 사조의 대표 화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뭐, 단순히 말하자면 아르누보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화가인 셈인데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그만한 위치에 서 있는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 대해 한 권의 분량을 전적으로 할애하는 책은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알폰스 무하의 매력에 빠진 사람으로썬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알폰스 무하에 대해서만 얘기해주는 책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술이론가 강우진이 쓴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이란 책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단편적인 지식으론 잘 알 수 없었던 알폰스 무하의 생애과 그 예술 여정을 체계적이면서 쉽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가 어떤 인생 역정을 거쳐서 일러스트로 대변되는 그의 독특한 미술 세계를 정립했으며 또 말년엔 슬라브 민족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그걸 명확하게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인생 항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1860년 7월 24일, 체코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이반지체에서 태어난 무하는 처음엔 성직자로 키우고 싶은 부모님의 뜻을 따라 어릴 때 성가대로 일하기도 했으나 곧 변성기가 찾아오고 더이상 음악으로 신에게 봉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그는 우연히 보게 된 지방 화가 음라우프의 '예수의 탄생'이란 그림 때문에 미술에 헌신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빈에서 무대 미술을 전담할 화가를 구한다는 소식에 그것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난다. 떠날 때만 해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건 알지 못했다. 무하는 빈에서 미술에 있어서 한창 불고 있던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만끽했으며 빈에서 뮌헨으로 그리고 파리로 옮겨가면서 그것을 주로 밑바닥 민중의 생생한 생활상들을 스케치 하는 것을 통해 점점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하하면 얼른 떠오르는 '일러스트'는 예술적 소신이 낳은 선택은 아니었다. 원초적인 이유는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었다. 자신을 후원한 백작의 지원도 끊기고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도 어디서든 마련할 수 없어 생존이 정말 절박해졌을 때 겨우 들어온 일거리가 아이들을 위한 신문이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작업실을 찾은 많은 파리의 아티스트들과 교류(여기엔 고갱도 있었다.)하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파리의 가장 유명한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하는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맡게 됨으로써 그의 예술적 세계가 만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아는 무하의 예술들은 이러한 여정들을 거쳐 태어났던 것이다.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고전주의적 시각에선 무하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러스트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과 결별은 선언하는 아르누보의 입장에서 무하의 작품들은 고인 물과도 같은 예술에 신선한 물을 공급하는 마중물과도 같았다. 그렇게 그는 아르누보의 대표 화가가 되어갔지만 그러면서도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던 종교적 신념은 퇴색되지 않았다. 그는 1차 대전으로 향해가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점점 불안해지는 체코의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체코 민중들에게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성좌를 그려주려 한다. 종교적 신념과 체코의 민족주의를 화합하는 것을 통해. 그것이 바로 무하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슬라브 서사시'이다. 성 비투스 성당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도 바로 그 '슬라브 서사시'의 일환이다.


 [책에 나오는 무하가 만든 성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냥 그림으로 봤을 땐 무하가 왜 저 때 하필이면 저런 그림을 그렸으며 과연 어떤 마음이 변화의 거센 노도 속에서 그 스타일을 통해 관통하도록 만들었을까 알지 못했다. 그냥 참 예쁜 그림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이제 이 책을 통해 무하의 생애와 예술에 투영된 신념들을 헤아리고 나니 가벼워 보이는 그림 속에도 실은 아주 진중한 터치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흔히들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알폰스 무하의 그림만큼 그 말이 잘 들어맞는 것도 없을 듯하다. 분명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무하 그림은 전혀 다르게 다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나처럼 알폰스 무하에 대해 잘 알고 싶었다면 어쩌면 유일한 선택일 이 책을 추천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하여 무하의 그림들이 컬러로 많이 삽입되어 있어 눈까지 즐겁게 함으로 더욱 그렇다.


[이런 무하의 그림 도판이 책엔 많이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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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3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폰스 무하 그림이 그때는 아주 새로운 거였군요 지금이라면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도 좋아하는 사람 많았겠지요 아르누보 대표 작가니... 화가라고 해서 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린 건 아니군요 그런 사람이 알폰스 무하만은 아니겠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고 재능도 있었네요 그림을 그린 사람 마음이 어땠는지 알고 그림을 보면 다르게 보이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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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작가의 이름이 하세 세이슈였다. 놀랐다.

 '하세 세이슈하면 비정하기가 이를 데 없는 하드보일드 소설인 '불야성' 시리즈를 쓴 사람이 아니던가? 그가 이런 달달한 소설을 썼다고?' 처음 '소년과 개'라는 소설의 표지를 보았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 때는 그래보였다. 아무튼 개가 주연이고 그 개와의 관계를 통해 따스한 위로를 전하는 이야기라고 들었으니까. 하긴 개를 가지고 '불야성'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작품을 썼다간 애견인들에게 무슨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법, 불야성 시리즈를 완결한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달라졌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래, 그렇다면 듬뿍 맛 봐주지! 하세 세이슈가 쓴 달달한 소설의 맛을!'하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놀랍게도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대변되는 후쿠시마 사태를 작품의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주연이 되는 개, 다몬은 그 사태 때 주인을 잃은 개였다(이 사실은 소설 후반에 가서야 밝혀지기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작품에서 그리 중요한 미스터리가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여기서 밝혀두도록 한다.) 그 개가 일본을 이리저리 떠몰면서 이런저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소설은 그걸 인물 하나 당 각 장 하나를 할애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의 개'를 시작으로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는 자주 잊지만 개의 조상은 원래 늑대로 그 늑대가 그러하듯이 원래는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다. 소설은 바로 그런 개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야기 곳곳에서 개 다몬이 옛 주인을 떠나는 이유가 어떤 일로 인해 더이상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어서라는 게 자주 나오는 것이다. 작가가 하필이면 이런 '무리를 이루는 것'을 반복해서 내세우는 것에도 물론 이유가 존재한다. 소설이 계속해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가족'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우연히 다몬과 만나 그를 거둬들이게 되는 남자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를 홀로 돌보는 누나라는 가족이 등장한다. 남자는 장남이라 거기에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 상 그걸 짊어지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할 수 없이 절도단의 도피를 위해 자신의 특기이기도 한 차량의 운전을 해 주기로 한다. 그 다음, '도둑과 개'에선 '남자와 개'에서 절도단의 리더로 나온 미겔이 주인공이다. 그는 외국인인데, 소설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으나 아무래도 남미에서 온 것 같다. 그 역시 누나가 있다. 어릴 때 모종의 사건으로 부모를 잃었고 누나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미겔은 그런 누나를 위해 절도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려주려 하고 있다. 그는 다몬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데 그건 어릴 때 자신을 도와주고 병으로 죽어버린 개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 다몬과 함께 하면서 미겔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무리, 즉 가족을 다시 찾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다음 편도 그러하다. 모두 가족이 나오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무너져 있거나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밝혀진다. 다몬을 그런 가족 안으로 들어가 그 일원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역시 달달한 이야기 같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세 세이슈가 달달한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커다란 착각으로 밝혀졌다. 역시 '불야성'의 작가답게 이야기 도처에 범죄와 죽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편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미겔은 자신과 함께 한 이는 모두 죽었다면서 자신이 마치 사신과 같다는 얘기를 한다. 알고보면 다몬이 그런 존재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달달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일단 건조한 듯 보이지만 가급적 차가운 느낌을 배제한 문장이 그렇고 개와 가족을 향한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그렇다. 하드보일드에 자주 등장하는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자신만의 비극적인 사연과 현재의 고통 때문에 그저 누군가를 포용하거나 자신의 따스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외롭고 피로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범죄가 일어나고 죽음이 발생해도 마냥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들이 채 꽃 피우지 못하고 져서 애틋하고 그들이 남겨놓은 잔향들이 아련할 뿐이다. 어쨌든 '화차'로 유명한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나오키 상 수상작으로 정하면서 감동적인 수작이라고 했는데, 감동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족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좋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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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2-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가 먼 길을 가는 듯하네요 자신이 갈 곳으로 잘 갔을지... 개를 만난 사람은 자기 식구를 생각하고, 개를 만나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네요 어딘가에 머물러 살아도 괜찮을 텐데 개는 그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다니... 개도 자기 마음이 있겠지요 개와 만나는 사람 끝이 안 좋다니, 그건 아쉽기도 하네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희선
 

 기억에 처음으로 한나 아렌트란 이름을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작은 아버지 집에 갔다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예전에 신동아란 잡지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제목이 '현대 지성이 꼭 읽어야 할 명저 70 선', 뭐 이런 비슷한 제목의 것이어서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그러다 철학 쪽 명저를 소개하는 장에서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 소개 된 책은 '전체주의의 기원' 명저 선정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한 것이었는데 그 책을 누가 추천했는지에 대해선 당연하게도 잊어버렸다. 소개글을 책 내용도 간략하게 잘 정리하고 흥미롭게 써 놓아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언젠가 읽어보리라 작정하게 되었다.




 새삼 이런 기억을 건져 올리게 된 건 한나 아렌트의 주저 세 권이 리커버로 이렇게 묶여 다시 발간된 걸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리커버가 꽤나 유행이던데, 한나 아렌트의 책도 거기에 편승했나 보다. 어쨌든 한길그레이트북스의 시리즈 중 하나로 양장본이었던 것이 반양장본이 되었고 가격도 대폭 낮아졌다.

 전체주의의 기원만 헤도 리커버는 한 권이지만 원래는 두 권이었고 가격도 각각 28,000원과 22,000원으로 도합 5만원이었는데 세트 전체가 59,400원 밖에 안 하니까 말이다.

 예전으로 치면 원래 27,000원인 '인간의 조건'과 22,000원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거의 부록인 셈이다.

 문자 그대로 한나 아렌트의 주저들을 만나볼 기회를 호시탐탐 기다렸던 이에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미리 산 이들은 배가 좀 아프겠지만....




























세 권 중 한나 아렌트가 가장 먼저 집필한 것은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그 다음이 '인간의 조건'이고 마지막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몰랐는데 마지막 권은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된 모양이다. 데뷔작이 대표작이라니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한나 아렌트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열네 살 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통독할 정도로 순수 철학에 흠뻑 젖어있던 그녀를 정치라는 현실 철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한 건 역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대로 독일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 나치가 그러한 천인공노한 만행을 체제적으로 자행할 수 있었는지 알기 위해 연구를 했고 그 대답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전체주의(TOTALISM)이었다. 원래 전체주의란 말은 히틀러와 함께 이탈리아를 파시즘 국가로 만들었던 무솔리니가 자기 나라를 두고 처음 명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의 전체주의를 떠받치고 있던 두 개의 기둥은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였다. 

 나치는 반유대주의를 통해 독일 내부의 갈등을 타자인 유대인에게 모조리 떠넘겨버리는 것으로 봉합시켰고 그것을 바깥 영토의 정복과 지배를 통해 독일 대중의 지지를 공고화했다.

 이런 과정 가운데 독일 대중은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유대인 탓이라 여겼고 또한 여기저기서 선전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승전 소식 속에서 장차 위대한 독일의 일원으로 세계 열방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는 자신을 꿈꾸며 나치의 정책에 협력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핵심을 파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녀의 말년 연구까지 관통하는 핵심이 된다. 바로 사유다.

 전체주의는 한 마디로 절대적 복종 체제로,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 체제였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유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승리는 곧 인간성의 파괴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무엇보다 정치 역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일 수 있음을 밝힌 그녀는 '인간의 조건'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의 실천 행위로서의 정치를 철학적으로 탐색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을 이루는 조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그걸 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지막 행위가 좀 의아할 수 있을 것인데, 노동과 작업 모두 행위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행위란 좀 다른 개념으로 여기서 행위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노동과 작업은 홀로 된 개인의 행위이며 세 번째의 행위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의사 소통할 때 하게 되는 그런 행위를 뜻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사회적, 정치적 행위가 들어가게 된다. 왜 '인간의 조건'을 두고 정치 행위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책이라고 했는지 이제 아시게 될 듯하다. 결국 참된 인간을 형성하는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이 정치적 실천 행위를 내세운다. 그것이 한 사람을 인간이라는 주체로 만드는 조건이며 이러한 정치적 실천 혹은 참여가 지향해야 하는 바는 바로 아모르 문디, 즉 세계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이득, 사회적 조건, 계층, 인종, 국적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된 관습적이고 편협한 가치가 아니라 범 타자적 지향으로 모든 이들의 존중과 공존을 위한 참여말이다.


 그러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도주 중이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체포된다.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에 한나 아렌트는 하던 강의도 내팽개치고 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기자 자격으로 그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간다. 유태인을 어떤 수용소로 보낼 것인가 분류했던 아이히만은 중령으로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니어서 히틀러를 생전에 볼 수도 없었던 자였고 그랬기에 홀로코스트 계획을 세우기는 커녕 단순히 하달한 명령을 집행하는 자에 불과했다. 그는 그저 당시에는 법과 같았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 자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히만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의 위험성을 알게 된다. 아이히만은 그런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느냐는 재판정의 질문에 오히려 명령을 어겼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찾아낸 정말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좋은 실제 사례의 대답이 되는 셈이다.


 나 원,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책으로 인해 잠시 추억의 책장을 펼쳐볼 요량이었는데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다. 내 생각에 한나 아렌트의 작업의 가치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아니 지금은 그녀의 말에 더 귀를 기울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이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으니.

 최근 파장을 일으킨 배구계 학폭 사건 때문에 더욱 한나 아렌트의 책들을 다시 묵독하고픈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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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역사 관련하여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하나인 배리 스트라우스.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알린 <살라미스 해전>과 <트로이 전쟁>

 그리고 더불어 미드 <스파르라쿠스>가 한창 인기를 얻을 때 출간되어 그 드라마와 관련된 역사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던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뒤이어 그가 쓴 또 한 권의 역사책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로마 황제 열전>이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전제정으로 넘어간 후, 로마는 내내 황제의 시대였다.

 배리 스트라우스는 그 중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10명의 황제를 특별히 선정하여 그의 전기를 이 책에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황제의 삶만을 기술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 황제를 중심으로 삼아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당대의 로마까지 두루 포괄하여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로마 황제를 대상으로 한 책은 지금껏 많이 나왔다. 그러나 배리 스트라우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살라미스 해전', '트로이 전쟁'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전쟁'까지 막연하게만 알았고 잘 정리가 되지 않았던

 고대 역사적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또 선명하게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그이기에 

이번 로마 황제 열전 역시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껏 로마에 관련된 많은 책을 읽어왔는데 이 '로마 황제 열전'으로 지금껏 쌓아 온 로마 쪽 독서 경험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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