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상대를 전혀 모른다는 것에서 온다. 가령 세계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도전자는 공포가 덜하다. 그건 챔피언의 스타일을 연구하고 그간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이름도 모르는 신인이 링에 올라서면 그 공포가 더 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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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인간의 초석을 이루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뿐 아니라 생명을 지니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느끼고 있다. 공포는 우리가 느끼는 그 외의 감정, 기쁘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보다 더 위에 있는 감정이다. 공포에 비한다면 다른 감정은 감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장 큰 감정이다. 공포에 빠져 코마 상태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두려워하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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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공포는 인간이 지구에 나타난 그 순간 공포를 죽 느꼈다고 한다. 길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프로이트의 글을 봐도 최초 인간이 군락을 만들고 거기서 우두머리를 만든 이유도 우리 인간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공포의 근원은 생존에 있다. 영화 포스 마쥬어를 보더라도 인간이 생존에 위협을 급박하게 당하게 되면 공포에 뇌가 공격을 당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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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 인간, 사람을 포함한 생명체의 기저에 깔린 본능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죽음을 최대한 배제하게끔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다. 이 근본적인 공포를 멀리하고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공포를 잊기 위해 뇌를 속이는 것 역시 어렵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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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떨 때 공포를 느낄까.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에도 그렇지만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직접적으로 신변에 위협을 받았을 때이다. 누군가 칼을 들고 위협을 한다거나, 정신질환자가 삶을 포기해 무차별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가한다거나 또 물에 빠져 죽기 직전에 인간은 극한의 공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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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위협이 있다고 착각할 때에도 공포를 느낀다. 간접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에도 공포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뇌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 속기 쉽게 만들어졌고 학습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포는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방어를 하게끔 한다.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는 하찮은 존재 인간이 공포가 있기에 조심하게 되고 한 번 더 사고하게 된다. 공포는 인간의 방어 기저와도 밀접한 관계를 두고 있다
.

그리고 미지의 세계관에서 공포를 느낀다. 미지의 존재. 최초에 말했듯 아무것도 모르기에 미지에의, 이종의 공포는 클 수밖에 없다. 공포는 찬동하게 되고 동조한다. 친구가 무서워하면 같이 무서워한다. 으슥한 밤에 이야기 잘 하는 사람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찬동하게 된다. 공포는 뇌를 속이고 동조를 이끌어 내기에 영화에서의 공포는 모두가 하나로 모으는 찬동이 가능하다
.

하지만 미지의 존재, 이종계로 인간을 끌고 가는 이야기는 너무 뻔한 이야기다. 이 뻔한 이야기가 엑스파일을 넘어설 수 없다. 두 시간 안에 엑스파일에서 보여줬던 숨 막힐 듯 조여오는 구성과 인간과 이종 사이의 대립과 간극에서 감탄을 불러들일 만큼의 사건을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 뻔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은 적을 수 있다. 어딘가 놀러 가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맛이 더 좋을 수 있다. 라면의 맛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는다. 너무 뻔하고 또 뻔하기에 맛있을 수 있다. 아니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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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공포영화 같은 경우, 한국으로 넘어왔을 때 정서가 다르다는 점은 공포영화에 빠져들어가는데 부딪히게 된다. 외국의 집은 집 안에 계단도 있고 2층에 복도도 있고 주방도 크다. 그 속에서 구성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만 한국인들이 외국의 정서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경험이 아닌 오직 상상만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공포가 반감이 된다. 그리하여 외국의 공포영화는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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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개연성, 설득력, 구조, 플롯을 따지지 말고 상업 영화로만 봐라,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앞의 것들을 제대로 배치해서 잘 만들어진 영화가 이미 여럿 있기 때문이다. 샤말란의 싸인처럼 작품성이 우수한 영화가 있고, 엑소시스트처럼 관객이 기절을 하고 토하고 걷지 못하는 공포영화가 있었기에 이후 나오는 공포영화는 더 잘 만들어야 한다. 무섭고 공포스럽고 빠져들어갈 긴 영화가 우리는 필요하지, 장황하게 설명이 긴 공포영화를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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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무비가 아닌 이상 감독의 세계관이 클리셰적인 세계관이 아니어야 한다. 그럼에도 다크 스카이는 각본의 힘인지 보는 동안에는, 뻔한 구조와 뻔한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으로 빨려간다. 역시 라면이 맛있다.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에게 동조된다. 빨아들이는 흡입력과 몰입에는 다크 스카이는 꽤 만들어진 영화였다. 허구인 영화는 실제인 인생을 반영하고 공포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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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까는 리뷰이기에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흡족하게 봤다거나 영화를 보고 힐링을 얻었다거나 마음의 치유가 됐다거나 하는 사람은 읽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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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재미있게 봤다는 김태리의 리틀 포레스트. 하지만 나는 그렇게만 볼 수 없었다. 이 영화는 현실성에서 너무 동떨어져 버렸고 힐링과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는 영화였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이 있고 하시모토 아이 주연의 일본의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느리고 과하지 않고 농촌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거기서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말에 걸맞게 치유의 맹점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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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생활. 김태리표 영화 속, 이 농촌의 생활이라는 것이 원작과 그리고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영화 내용은 간단하다. 도시의 복잡함과 임용고시의 탈락을 맛본 혜원은 지치고 힐링을 얻고자 시골로 내려가서 편의점 도시락이 아닌 느리고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신선한 채소를 가꾸며 일탈적인 일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치유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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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초반 편의점 알바를 하며 편의점 도시락을 먹다 밥을 뱉어내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도시생활의 은유적 작법이다. 편의점 도시락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본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편의점 도시락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포르노를 좋아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청춘들에게는 애증의 기호, 싫어하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청춘들에게 또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싸고 맛있고 알찬 편의점 도시락을 쟁탈하기 위한 경쟁이 있는지 기성사회, 기득권들은 절대 알지 못한다. 아마 청춘들 중에, 편의점 도시락을 싫든 좋든 먹는 사람들 중에 밥을 그대로 뱉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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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낙지볶음을 먹다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어떤 누군가에겐 편의점 도시락이 식당에서 먹는 낙지볶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것 같은 편의점 도시락이지만 누군가에게 편의점 도시락은 삶을 지탱하고 유지시키는 생존에 흡착된 음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감독의 청춘에 대한 이해도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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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삶, 그 속의 빠듯한 인간관계에서 현대인은 힐링을 무엇보다 강하게 원한다. 현대인인 혜원은 시골로 가서 요리에 최선을 다하며 영화는 혜원의 치유를 보여준다. 친구들과의 충만함과 술자리, 땀을 흘리며 직접 재배한 채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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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는 실제 농촌의 생활을 농촌의 아름다움으로만 덮어 버렸다. 방향이나 생활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하루를 버티고 살아낸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도시나 농촌이나 다를 바 없이 어렵고 힘들다. 여기에서 영화가 혜원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혜원이 농촌 생활에 적응을 하며 상처를 입체적으로 이겨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는 혜원보다 김태리의 예쁜 얼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나오면서 부터 어? 어? 하게 되는데 혜원은 농촌에서 하는 노동을 무시하게끔 하는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농촌에서의 노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허리가 아픈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에서의 힘듦의 몇 배, 아니 몇 십 배 더하다. 특히 농번기의 농사라면 말이다. 농사짓는 부모들이 얼마나 이를 악물고 농촌 생활에 적응을 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지 혜원은 알지 못하게끔 영화는 그런 태도를 보인다. 입체적인 혜원보다 평면적인 김태리에 조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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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리틀 포레스트가 탄생된 배경에는 이런 면이 작용을 했을 수 있다. 일본에도 농촌을 빠져나가는 젊은 층이 심해지면서 농사 인구가 극심하게 가물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젊은 층에게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면 집과 농업방식과 터전을 지원해주었다. 무엇보다 그 결과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농사를 망해도 정부가 지원해주는데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 것이다. 귀농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정부는 귀농한 젊은 층에게 감사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이 벌써 15년 전이었다. 그렇기에 이치코가 농촌의 생활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리틀 포레스트는 개연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임순례표 리틀 포레스트는 그렇지 않다. 과연 청춘과 마주한 적이 있나 할 정도로 청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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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음식, 농촌으로 가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 마음에 안 든다. 혜원은 오코노미야키를 만들어 먹는 것부터 별로다. 꼭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필요는 없지만, 일본에서의 오코노미야키야 서로를 이어주고 힐링푸드일지 모르나 한국의 청춘들에게 오코노미야키나 타코야키는 패스트푸드, 로드푸드의 개념이 강하다. 편의점 도시락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농촌으로 갔으면 솥뚜껑을 뒤집어서 들기름을 부어 부추 전이라도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의심스러운 부분, 감독은 정말 청춘을 이해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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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춘을 다룬 이창동의 버닝을 보면, 이창동이 감독 이전에 소설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화 속 주인공도 소설을 쓰려고 하고, 종수와 해미가 술집에서 리틀 헝거의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 주위를 비춰준다. 화면에 보이는 청춘들의 모습이 현실의 청춘들이라 할 수 있다. 이창동은 소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끌어와서 종수의 이미지는 자연광으로만 촬영을 하여 늘 어둡고, 소설적인 인물 밴은 인공조명으로 종수와 그 반대의 개념적 인물로 묘사를 한다. 이창동의 영화는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것처럼, 공백과 여백이 가득하고 공백과 여백 사이에 메타포를 한없이 심어놔서 보는 이들이 그 메타포를 느끼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그에 반해 리틀 포레스트는 머리로 계속 계산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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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은 청춘에게 애잔한 치유를 보내고 싶었다 하는데, 이 영화는 일정 청춘보다는 포괄적으로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골판타지 래플리카 영화였다고 본다. 그럼에도 영화의 괜찮은 점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의 사계절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다큐가 아닌 상업영화에서 이렇게 한국의 사계절을 환하게 담아낸 것은 참 괜찮은 점이었다. 그리고 류준열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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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수면 위의 일본 영화는 과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
예전에 ‘지금 만나러 갑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조제, 호랑이,,,,’ ‘철도원’ 같이 손을 뻗어 아무거나 휙 건져도 영화의 세계에 압도당하고 이야기에 몰입하곤 했던 적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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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스완은 원작 만화를 재미있게 봤기에 영화가 나왔을 때 팬들은 당연하게도 우려반 기대반으로 보게 된다. 원작 만화가 있는 영화가 성공할 확률은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하는 것에 비해 확연하게 떨어진다. 그건 프래쉬함이 낮기 때문이다. 프래쉬함이란 오직 한 번이기에. 원작 만화의 신선함을 영화가 넘어서기란 기적에 가깝다. 그러니 성공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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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일본의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나온다. 주인공인 아야노 고, 야마다 타카유키, 이세야 유스케, 키네코 노부야시, 사와지리 에리카, 그 외 선이 굵은 중견배우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그렇지만 만화를 영화로 옮겨놓다 보니 과하다. 입을 다물지 않고 우루사이!를 소리치는 것과 같은 발성이 과하게 영화를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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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도 과하고 미장센은 좋으나 역시 과하다. 과함에 과함으로 덮고 과함을 튀겨낸 영화가 신주쿠 스완이다. 거기에 소설적 대사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젤리처럼 만든다. 일본의 신주쿠 가부키쵸는, 캡처한 화면에서처럼 향락의 도시다. 소비가 매일 이루어지는 도시. 생산은 요만큼인데 소비는 이만큼인 도시. 바로 꿈의 도시다. 이는 곧 욕망을 드러내는 도시이며 현실 속 꿈같은 세계이다. 전체는 있지만 일부가 없는, 모호하고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도시이다. 누구 하나 말없이 사라져도 그 자리는 또 다른 인형이 들어서는 세계이다. 젊은 사람들은 욕망이 강하다. 좋은 가방, 좋은 차, 좋은 옷, 맛있는 음식,으로 향한 욕망은 인간의 밑바닥 본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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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향락과 물욕,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시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내가 있는 바닷가의 여기 도시에도 자정을 기점으로 향락으로 변모하는 도시가 있다. 지나가면 삐끼들이 따라다니며 말을 걸며 그들의 세계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겉이 화려할수록 속은 미궁 같은 곳은 대도시일수록 한없이 추악하고 가학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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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안타깝게 죽어버린 엔서니 보뎅(안소니 부르뎅)도 미국을 움직이는 화려한 뉴욕 사람들의 더러운 뒷이야기 ‘키친 컨피덴셜’을 적었다. 그 속에는 뉴욕을 움직이는 거대한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 마약, 음식 저장고 속에서의 섹스, 과음, 있을 수 없는 식재료, 그리고 업계의 폭로 등을 그대로 써냈고 그 이야기는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폭스 티브이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는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화려함, 커튼 뒤의 모습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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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풍속점, 패션헬스, 카바죠나 호스트가 산업이다. 섹스를 산업으로 두고 있고 길거리 스카웃은 합법적이다. 그러다 보니 야쿠자와는 다른 이쪽 업계의 종사자들은 경찰들과도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일본과 한국의 다른 점은 한국은 잡아끄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은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바로 경범죄에 속하기 때문에 그저 말로만 가와이, 우와 초 가와이! 같은 말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 일본의 걸그룹은 섹시한 콘셉트가 거의 없다. 대체로 귀여움으로 무장을 하고 자주 바뀌게 되는 반면 한국은 걸그룹이 섹시한 콘셉트가 많다. 일본에서는 풍속점을 비롯해서 AV 업계가 온통 섹시함으로 줄줄 흐르고 있기에 걸그룹은 그 사이를 뚫을 수 없는 구조다. 성인여배우, 이들은 회사를 통해 팬들을 만나는 것도 꺼려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들과도 거침없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에 거액의 돈을 거머쥘 수있다. 명과 암이 도사리고 있고 선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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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의 립반윙클의 신부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는 키자키 제시카를 비롯해 현역 AV 배우들이 실제로 영화에 출연을 했다. 좀 웃긴 이야기지만 일본의 섹스산업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오프라인의 대형 섹스샵에 가면 70퍼센트가 한국인, 25퍼센트가 외국인 나머지가 그 외에 사람들이 그 곳에서 입을 벌리고 구경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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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스완은 그런 향락의 도시의 뒷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만화 속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던 에피소드를 꺼내 영화로 만들었고 2년 뒤에 또 다른 에피소드로 2편을 만들었다. 두 편다 과함의 연속이고 감독의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만화와 비슷한 것은 역시 타츠히코의 머리 스타일이려나. 오히려 원작의 타츠히코의 얼굴은 분명 이세야 유스케가 하면 싱크로가 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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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적인 장면, 과한 피 터짐, 향락 뒤 지저분한 뒷모습의 대도시 신주쿠를 보고 싶다면 봐도 좋을 듯하다. 영화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대도시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것을 평범하지 않은 향락의 세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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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조이에서 이 장면을 보는 순간은 정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다. 나병 임산부의 손을 잡아 줄 때, 모두가 붙어서 아기가 무사히 나올 수 있게 땀을 뻘뻘 흘릴 때, 꺼져가는 생명에게 생명을 불어주는 주문을 외울 때, 그리고 아기가 나와 모두가 기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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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장면이었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무엇보다 시티 오브 조이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살아있었다. 팔딱팔딱 뛰고 있었고 소리를 지르고 생명을 존중할 줄 알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아있었다.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본 시티 오브 조이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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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고 고난을 겪고 그 후에 기쁨을 느끼는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는 것이 패트릭 스웨이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이다. 영화 속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부서지고 또 파괴되고 망가지면서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비록 인간으로서 신에게 파괴가 될지언정 인간 자신에게 패배 당하지 않음으로 어떤 필연성을 가진다. 그건 우리 인간이 비록 죽어 한 줌의 재가 될지라도 삶에서 부서지더라도 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사랑이 곁에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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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스웨이지는 죽었다. 그가 부른 노래 쉬 라잇 더 윈드처럼 바람이 되었다. 키아누 리브스와 미친 듯이 달릴 때도, 몰리의 사랑을 찾기 위해 동전을 끌어올릴 때에도, 자니가 되어 무대에서 새처럼 춤을 출 때에도 패트릭 스웨이지의 는개비 같은 눈빛을 잊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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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서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새로운 영화가 아닌 지나간, 몇 번이나 봤던, 예전의 오래된 영화들이다. 아마도 내가 낡은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낡아버렸으니 낡아버린 영화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래전에 느꼈던 감정 같은 것을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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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민을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검은 커튼을 두고 맞은편의 모르는 이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나의 불안과 나의 감정이나 내가 느끼는 일반적이지 않는 고민들을 이야기한다. 그건 뭐랄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기분이다. 그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어떤 기준 이하의 자격으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발을 밀어 넣고 난 후 어쩌지 못하는 비겁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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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조이에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그렇기에 기쁨이 더 큰 것 아니겠어요.를 알게 되는 것 같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환하게 웃을 때 영화는 그동안 더욱 밝았으니까. 우리는 패트릭 스웨이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이야기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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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벗어난 SF 영화는 재미있다. SF 영화는 우주의 고독이 있다.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의 공백을 표류하는 주인공들의 외로움이 가득하다. 깊은 고독을 오고 가는 메타포 역시 아름다운 지구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표류보다 심층적일 수밖에 없다. 끝도 보이지 않는 우주를 바라보는 시적인 감수성과 표층적이지 않는 언어가 있기 때문에 판타지와는 다른 SF영화의 감성 때문에 사람들이, 어른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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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타워즈, 에일리언 그리고 천 개의 행성 등 원작 소설을 봐도 주인공들은 더없는 외로운 우주 속을 고독하게 누비며 근원적인 인간문제에 대해서 다가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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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가 재미있으려면, 도시가 나오고 도시 속 사람들이 가득 나오고 그 속에서 비주얼 쇼크가 이루어지며 클리셰를 비틀어 버리면 보는 이들의 재미를 끌어낼 수 있다. 즉 지구를 벗어나 사람들이 도심 속에 있는 것만큼 나오지 않으면서 비주얼 쇼크를 일으키고 영화적 상상력이 결합된 영화가 주는 재미로 치자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영화적으로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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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DC코믹스의 시리즈는 망작에 가까울 정도로 위의 요소들을 전부 결합하고서도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맨 오브 스틸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조드 장군은 정말 지구의 인간들을 씹어 먹을 듯했다. 입체적이었다. 조드 장군과 카엘의 전투를 통해 미국의 왓슨 테크니컬 컨설팅 회사에서는 피해액을 추산하기도 했다. 인명피해로 12만 명의 사망자와 25만 명의 실종자와 돈으로는 7천억 달러라는 피해액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영화는 회자되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저스티스 리그에서는 초강력 빌런이라는 게 조드 장군의 다리 하나를 따라오지도 못했다
.

DC코믹스의 영화가 마블의 영화보다 재미가 떨어지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를 들자면 마블의 시리즈가 벌써 20편이나 나왔는데 마블 각각의 영화가 나오기 전에 도시가 먼저 화면에 나온다. 그리고 그 도시가 가지는 특징을 영화를 보면서 알 수 있고 그 도시 속 맥도날드나 실제 건물을 배치시킴으로 허구 속 현실을 보여주는데 반해 DC코믹스의 영화는 도시도 허구에 현실의 접점을 찾아볼 수 있는 요소가 전무 후무하다. 설이 길었다
.

인피니티 워는 마블의 19번 째 영화다. 그것도 아주 긴 영화다. 인피니티 워에는 그간의 어벤져스 시리즈의 영화에서보다 아주 많은 히어로가 등장을 하고 비주얼 쇼크가 강하게 이루어지고 흔한 클리셰를 파괴해 버린다.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줌으로 각각의 캐릭터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도 했다. 이로써 이제 어벤져스의 끝이 보이게 되었다. 십 년 넘게 전 세계 사람들의 아드레날린을 충족하게 분출시킨 시리즈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

인피니티 워에서도 우주적 고독과 철학적 물음 그리고 요소마다 나타나는 미국식 유머와 함께 조드 장군보다 강력한 타노스가 등장한다. 타노스는 우주적 재앙이며 흔한 클리셰를 파괴하는 굉장한 타격감의 빌런이기도 하다. 스톤을 모아서 아이언맨을 타격할 때에는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초합금으로 이루어진 아이언맨이 부서질까 조마조마했다. 타노스는 입체적이다. 어벤져스를 그야말로 때려 부술 것 같다
.

인피니티 워는 기존 히어로물의 작법과는 이별을 했다. 헐크가 패배를 한다. 이것은 충격적이다. 그 후 영화 내내 헐크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절대적일 것 같았던 아스가르드의 파멸, 록키의 죽음과 해임달의 죽음은 영화의 결말을 말하기도 한다. 마치 영화 우주전쟁 초반의 장면에서 레이첼(타코다 패닝)이 손가락이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아빠인 레이(톰 크루즈)가 빼내주려고 하자, 가시는 가만두면 저절로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 첫 장면이 우주전쟁의 결말을 말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

인피니티 워는 긴 시간을 할애함에도 조금 안타까운 건 타노스의 퀘스트를 한 영화 속에서 다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인피니티 워를 두 편으로 제작했다면 그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의 활약도 더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와칸다에서의 전투에서 히어로들은 그간의 영화 속에서처럼 큰 활약을 하지 못한다. 100년 된 젊은 노인인 버키는 그런 엄청난 무기인 팔을 부착하고도 그저 엑스트라에 그치고 마는 모습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

인피니티 워에서의 타노스는 영화적인 작법에 따라가다 보니 어느 정도 인간화가 되었다. 고뇌를 하고 앞뒤를 척도 한다. 원작에서의 타노스는 손가락 튕기기만으로 우주의 반이 날아가는 미치광이자 전 우주의 악으로 나오지만 영화 속 타노스는 지구의 인간이 가지는 감정을 지니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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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줄여서 쓰려고 해도 안 되니 급,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물리적으로 충격적인 결말로 끝난 인피니티 워는 쿠키영상과 엔터맨과 와스프를 보면서 어벤져스가 이후 타노스와의 전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닥터스트레인지가 예지력을 통해서 말 한, 단 한 번의 승리를 알 수 있다. 엔터맨의 배경이 된 도시가 양자역학을 오래전부터 연구를 후원하는 도시로, 어벤져스 4에서는 당연하지만 양자역학으로 타노스와 대결을 하게 될 것이다. 우주의 물질을 바꾸고 눈앞의 고체를 기화시키고 상대를 무참히 무력하게 만드는 타노스라도 우주를 관통하고  흐르고 있는 엔트로피는 일정하기에 어벤져스는 양자역을 이용할 것이다. 우주, 자연의 흐름을 그 어떤 존재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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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게 써서 줄이고 줄였지만 단편소설 만큼 적어도 할 말 많은 어벤져스시리즈. 역시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어벤져스다. 영화 속 수많은 감동적인 장면이 많지만 그루트가 자신의 팔을 잘라 토르의 망치 손잡이를 만드는 장면에서 급 감격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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