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린저가 적은 ‘호밀밭의 파수꾼’ 읽어보셨습니까. 나 자신이 어른이 되어도 아이 같은 마음이 강하게 남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읽어 보세요. 주인공인 홀든 녀석의 말과 행동에 이입이 되고 마는 마법 같은 소설이에요. 아마도 이렇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미친 듯이 읽고 있는 건 샐린저가 글을 적을 땐 정신이 제정신이 아니어서가 아닐까. 군인으로 2차 대전 인가에도 참전을 했어요. 근데 막사가 폭격을 맞아서 허물어지는데도 책상 밑으로 들어가 타자기로 글을 썼어요. 뭐 그랬다고 합니다
.
비틀스의 존 레논을 죽인 살인범 마크의 손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들려 있었다고 하고, 멜 깁슨과 줄리아 로버츠가 나온 오래된 영화 ‘컨스피러시’에서는 멜 깁슨의 집 책장에는 호밀밭의 파수꾼만 가득 꽂혀 있어요. 멜 깁슨은 극 중에서 서점에만 가면 그 책을 사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이 영화는 지금보면 촌스럽지만, 영화학도들은 반드시 보고 연구를 하는 영화로 알려져 있어요. 그 속을 관통하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다는 겁니다
.
많은 작가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 비평이나 감상문을 써 내 놨어요. 영국과 미국에서 책의 제목이나 내용에 나오는, 같은 단어지만 받아들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죠
.
요컨대 비틀스의 ‘노르지안느 우드’는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받아들이고, 미국에서는 노르웨이 숲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한국은 대체로 하루키의 소설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
이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홀든 녀석의, 홀든 녀석 식의, 홀든 녀석대로의 욕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샐린저의 정신세계일지도 모르겠고....... 사실 책 속에 욕이 난무하면 그것대로 재미있습니다. 욕이라는 것은 잘 적어 문맥에 녹여낸다면 완전한 새로운 세계입니다. 소설가 한창훈의 ‘홍합’을 읽어보면 지역의 욕을 그대로 들을 수 있는데 마치 사운드스케이프가 가동된 것 같아요. 글인데 소리가 들리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욕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문체로 적어내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허’에서 꼬마 캐릭터가 욕을 사정없이 난발하는 장면에서 자막 버전 중에 욕을 아주 신랄하게 해석해 놓은 버전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직독직해로 참 재미있게 해석을 하여 자막을 넣었는데 번역한 사람이 꽤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예전에 어벤져스 1편도 욕 버전이 있는데 극장에서 제대로 된 번역보다 훨씬 재미있는 겁니다. 공부를 상당히 한 것 같아요
.
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도 홀든 만의 욕이 나오는데 지난 삼십 년 동안 천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합니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12월을 마녀의 젖꼭지처럼 춥다고 했는데 작년의 추운 날(러시아보다 춥다고 호들갑을 떨었던)을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날이었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은 한국에서만 이렇게 불리고 있어요. 다른 나라에서는 완전히 다른 제목으로 읽히고 있어요
.
이탈리아: 한 남자의 인생
일본: 인생의 위험한 순간들
노르웨이: 모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악마는 최후 순간을 취한다
스웨던: 기억의 순간에 나타나는 구원자
덴마크: 추방당한 젊은이
독일: 호밀밭의 남자
네델란드: 사춘기
.
책을 읽어보고 위의 제목들을 보면 아아 그래, 그럴 수 있겠군.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홀든 녀석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가 좋지만 이런 문장은 참 좋습니다. 마치 그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요
.
.
난 하품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하품이 멈추질 않는다. 이 방이 지나치게 따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졸리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