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이후의 세계 - 콘텐츠 폭식의 시대 어떻게 승자가 될 것인가
데이드 헤이스.돈 흐미엘레프스키 지음, 이정민 옮김 / 알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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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 넷플릭스와 그 뒤를 추격하는 여러 미디어 업체들 간에 벌어지는 한바탕 싸움을 들여야 본다.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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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밍 이후의 세계 - 콘텐츠 폭식의 시대 어떻게 승자가 될 것인가
데이드 헤이스.돈 흐미엘레프스키 지음, 이정민 옮김 / 알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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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의 선두 주자인 넷플릭스는 대체 언제 TV라는 “정규” 사업에 뛰어들어 스포츠 생중계나 뉴스를 송출할 것인지 월스트리트와 언론의 오랜 추궁에 시달렸다. 공동 CEO 테드 서랜도스는 넷플릭스에서 이런 방송을 스트리밍할 의향이 있는지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일단 시청자들은 우리를 엔터테인먼트 브랜드로 인식합니다. 물론 당신이 말하는 볼거리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끝내주게 재미있는 건 아니죠.” - ‘서문’ 중에서


(사진, 책표지)


<엔터테인먼트위클리>의 선임기자를 역임했던 데이드 헤이스, 20여 년간 엔터테인먼트와 빅테크 분야를 취재해 왔던 돈 흐미엘레프스키 이 두 사람이 책의 공저자이다. 책은 새로운 기준이 된 넷플릭스, 전쟁의 서막, 쇼타임, 리더의 반격, 대중과의 만남, 회복을 찾아 등 순으로 총 6부에 걸쳐 앞서가는 넷플릭스와 이를 추격하는 후발업체들 간에 펼쳐지는 미디어 기업들의 끝나지 않는 한바탕의 싸움을 소개한다.


새로운 기준이 된 넷플릭스


핵심 사업을 DVD에서 스트리밍으로 전환하면서 넷플릭스의 추천방식 역시 진화했다. DVD 때는 고겍 평가에 기반해 추론했다면 스트리밍으로 넘어와서는 고객들이 어떤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찾아 맛보고 또 몰아보기를 하는지 실시간 데이터를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넷플릭스가 우편 주문 시스템으로 빛을 못 보던 당시 영입한 인재들이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혁신할 기술적 역량을 선사했다. 헤이스팅스는 회사 설립 당시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초기 투자자이자 이사회 일원인 리처드 바턴은 2000년 초 헤이스팅스와 저녁 식사 중 넷플릭스의 DVD 대여 모델에 우려를 제기했던 일화를 기억했다.


“저는 ‘DVD라는 형태의 매체는 이제 사라질 게 분명해요. 시간문제란 게 명백해요. 결국 당신 회사도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끝장나고 말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들은 헤이스팅스는 ‘나는 이걸 우편 DVD-플릭스라고 하지 않았어요. 넷플릭스라고 했죠.’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는 아주 멀리 볼 줄 알고, 상당히 큰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능력의 소유자였다.


넷플릭스는 이후 1년간 DVD 우편 배송 사업을 본 딴 서비스 구축에 매달렸다. 구독자들이 온라인에서 영화를 주문한 뒤 야간 동안 파일을 다운받아 가정 내 디스크에 저장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유튜브의 부상으로 소비자들이 당장 영상을 볼 수 있는 스트리밍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보류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가 2017년 1월 출시한 서비스 왓치나우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인터넷 성능을 함계가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화질이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미디어플레이어가 설치된 컴퓨터에서만 시청이 가능했다.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이 사업을 중간에 훔쳐갈 수도 있었다.


(사진, 넷플리스의 깃발 130개국에 나부낀다)


AOL 타임워너


2002년부터 2006년까지 AOL 의장 겸 CEO를 지낸 조너선 밀러는 여러 인수안을 제안했던 때를 회상했다. 만약 이 중 상당수가 승인되었다면 회사는 물론이고 미디어와 기술 산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튜브가 등장한 2005년 말, 그는 샌프란시스코 포시즌스 호텔 바에서 유튜브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채드 헐리를 만났다. 사이트에 업로드된 동영상이 하키스틱 패턴으로 성장한다는 설명을 듣고서 곧장 적절한 금액대를 약 5억 5,000만 달러(7,150억 원)로 설정하고 행동에 돌입, 2006년 1월 타임워너 이사회에 유튜브 매입을 제안했지만 “꺼지라”는 말만 들었다. 당시 유튜브는 불법 동영상의 온상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이 매입을 성사시키는 데 혈안이 돼 있었기에 몇 달 후 다시 한 번 이사회에 제안서를 가져갔다.


“그때는 모두가 유튜브를 고소할 생각뿐이었어요. 나는 고소하지 말고 매입하자. 우리가 거기서 최고의 콘텐츠를 제공하면 승산이 있다고 호소했죠.”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안 돼’였다.


(사진, 유튜브 인수 비화)


월트디즈니컴퍼니


월트디즈니컴퍼니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연대기에 따르면 디즈니가 기술 역량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한 것은 스트리밍이 아직 등장조차 하지 않은 100여 년 전부터였다. 2005년 디즈니 CEO 밥 아이거는 애플과 두 건의 계약 체결을 통해 과감한 혁신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는 ABC TV 프로그램을 구입, 아이팟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애니메이션 선도기업 픽사를 인수하게 된 것이었다.


2005년 5월, 당시 디즈니-ABC텔레비전그룹의 사장 앤 스위니가 월요일 아침 스태프 회의에서 <위기의 주부들> 최종회를 무려 3천만 명이 시청했다는 희소식을 전하려 했다. 이에 앞서 ABC의 기술책임자 빈스 로버츠가 먼저 발언권을 얻어 5층 회의실의 DVD 플레이어에 조용히 디스크를 삽입한 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이 드라마의 출연진 에바 롱고리아, 테리 해처, 펠리시티 허프먼이 나타났다.


“내가 ‘빈스, 저건 최종회잖아요’라고 말하자 그가 이렇게 답했죠. ‘네, 방송이 나가고 15분 만에 온라인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었어요.’”


몇 년 후 스위니가 회상했다. “산통 다 깨졌죠…. 시청자 규모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뒤통수 맞았어요. 훨씬 많은 사람이 우리 작품을 봤지만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했고 그렇다고 광고주들에게 ‘이봐요, 사실우리에겐 1,000만 명의 시청자가 더 있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한 입 거리 퀵바이트(퀴비)


드림웍스 전 CEO 제프리 캐천버그의 원대한 이상은 앨런앤드컴퍼니 선밸리 콘퍼런스에서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여름 정기 회의엔 수많은 기술 및 미디어 계약에 관여하는 투자 은행이 주최함에 따라 많은 유력 인사들이 참가해 은밀하게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캐천버그는 스스로 “뉴TV”라고 명명한 휴대폰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자신의 비전을 내보였다. 요지는 헐리우드 스타의 영화 및 TV 프로그램을 7~10분 분량으로 휴대폰에서 감상하는 것이었다. 품질 기준을 높여 구독료가 아깝지 않는 숏폼 동영상을 고급화하려 했다.


3년여 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캐천버그는 한창 치열한 경주가 벌어지는 스트리밍 업계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름은 “빠른quick”과 “한입bites”을 합성한 “퀴비”로서, 애피타이저처럼 금세 먹어치울 수 있는 콘텐츠를 의미했다. 퀴비를 이끌 수장으로 CEO 메그 휘트먼을 직접 영입했다. 캐천버그는 디즈니 스튜디오 의장, 휘트먼은 하버드 MBA 출신으로 디즈니 전략 기획 그룹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할리우드 소식통과 퀴비에 가가운 사람들에 따르면 휘트먼은 죄뇌 중심 분석가인 반면 캐천버그는 우뇌 중심 스토리텔러였기에 플랫폼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충돌을 빚었으며, 한 할리우드 변호사는 일부 유명 임원들이 캐천버그의 워커홀릭 성향에 반발해 회사를 떠났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한 기사는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프로페셔널한 업무 관계가 스트레스로 파열을 일으켰다고 폭로했다. 휘트먼은 캐천버그가 자신을 무시하는데다 CEO는 커녕 부하 직원처럼 대하는 독재자라고 묘사했다. 기사에는 심지어 그녀가 그만두겠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적혀 있었다. 문화 충돌은 퀴비 초기부터 명백했다. 한 임원은 할리우드 문화에 익숙한 캐천버그가 사무실과 비서 등 보여지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가식 없고 소박한 실리콘밸리 감성의 휘트먼에게 반감을 일으켰다고 회상했다. 아무튼 ‘퀴비’가 미디어 산업에서 넷플릭스 콘텐츠의 대항마가 되기엔 아직 여러모로 부족했다.


(사진, 퀴비)


애플TV플러스


애플의 제품 프레젠테이션은 브로드웨이 연극의 구조와 달리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리듬으로 흘러간다. 오프닝은 언제나 애플 제품과 이 제품들의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를 환기하는 따듯한 감성의 짧은 동영상이 장식한다.


애플TV플러스의 콘텐츠는 과연 충분할까? 서비스가 제공하는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을 들며 일각에선 과연 구독자를 어떻게 유치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햇다. ㅁ몇 편의 오리지널 시리즈가 함께 공개되긴 하겠지만 맛있는 걸 먹으며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친숙한 영화나 TV 프로그램은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소니픽처스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하지 않았을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애플의 막대한 내부자금 보유를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배우 커뮤니티에는 애플이 프로젝트에 과도하게 관여하며 피드백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대본 지적도 남발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지나친 간섭이 일부 출연자들을 내모는 한이 있어도 세련되고 고도로 선별된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사진, 뒷표지)


넷플릭스의 적수는 누구일까?


적어도 미국에서 넷플릭스에 적수가 될 만한 기업은 디즈니뿐이었다. 디즈니플러스는 출시 2년 만에 50개가 넘는 국가로 서비스를 확장, 가입자를 1억 2천만 명 이상 확보했다. 이에 애널리스트는 2024년에 넷플릭스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가입자 수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사용자당 평균 수익은 넷플릭스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오징어 게임>, <브리저튼>처럼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킬만한 프로그램들이 디즈니에서 탄생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스트리밍 #방송 #미디어산업 #경제경영 #넷플릭스 #디즈니 #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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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03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님들 모두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http://aladin.kr/ei/UFT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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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02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새해에도 행복한 독서생활 기대할게요.
 
도쿄 트렌드 인사이트 - 일본에서 찾은 소비 비즈니스 트렌드 5
정희선 지음 / 원앤원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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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 멈추고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 소비자들의 행동과 심리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우리 옆에 있다. 바로 지난 30년간 디플레이션을 경험한 일본이다. 지금 일본의 20대와 30대는 성장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40~50대 또한 1980년대 일본이 세계 경제를 선도했다든가, 세계 시가총액 상위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는 이야기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 ‘지은이의 말’ 중에서




책의 저자 정희선은 거의 10년 동안 일본 도쿄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생활하면서 소비 트렌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소비 및 산업 트렌드를 분석하고 전달하는 일을 하는데 동시에 동아비즈니스리뷰, 패션포스트, 퍼블리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쓴다.


책은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선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힌트를 찾아보며, 2장에선 일본의 Z세대는 어떠한 특징을 보이는지 살펴본다. 이어서 3장에선 고령화 사회와 관련된 트렌드를 살펴보고, 4장에선 기술의 발달이 제품 생산과 서비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 5장에선 친환경 관련 비즈니스의 사례들에 주목한다.


저성장 시대


저성장, 고물가, 고환율 등은 2022년 하반기부터 경제신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들일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힘들었던 시간이 겨우 끝나나 싶더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재료값 상승,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인한 고환율 등 다양한 경제적 요인이 서민들의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의 경제 전망 또한 밝지만은 않다.


이미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며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동시에 출산율은 감소하고 고령화는 진행되고 있다. 구조적인 면에서도 앞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공간의 가성비


공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것은 집 안 용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기 오토바이를 제조하는 스타트업 아이코마ICOMA가 개발한 타타메루 바이크(타타메루는 ‘접다’라는 의미)는 이름이 의미하는 그대로 ‘접는 바이크’다.


(사진, 아이코마 오토바이)


도쿄에서는 자동차 및 오토바이를 주차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자기 소유의 아파트에 거주해도 월 1만~3만 엔(약 10만~30만 원) 정도의 주차비를 따로 지불해야 할 정도로 바이크나 자동차를 보유하는 것은 비용적인 면에서 부담이 된다.

타타메루 바이크는 주차장을 사용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이동수단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을 겨냥한 제품으로, 접으면 책상 밑에 들어갈 수 있는 여행용 가방 정도의 크기로 실내에 보관할 수 있다.


롤모델이 없는 세대


SNS로 연결되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Z세대는 자신의 캐릭터에 관해 항상 의식하는 세대다. 그 때문에 물건을 구매할 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상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D2C 브랜드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개성 있는 브랜드를 선호하는 행동을 통해 Z세대는 상품을 선택하는 기준의 하나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를 의식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D2C :제조업체가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판매


단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그 영역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 혹은 스토리의 인풋을 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제품이 사용감이나 기능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품의 철학, 문화 등에 대해 소비자들이 학습할 수 있는 체험을 디자인하는 것 또한 중요해질 것이다.


인지기능을 서포트하는 식품


치매는 발병하기 2~3년 전부터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경도인지기능장애’라고 불리는 건망증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 경도인지기능장애는 조기 발견하면 정상으로 되돌리거나 치매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진, 인지기능 서포트 식품)


치매 및 치매 관련 치료제, 그리고 이러한 정보들이 방송에서 자주 보도되면서 인지기능 향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소비자들이 늘었다. 기능성 식품과 마찬가지로 따로 시간을 내거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일상에서 섭취하는 제품으로 인지력 저하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DX로 팔릴 만한 상품을 만든다


이 외에도 최근 많은 일본의 소비재 업체들이 빅데이터, AI 기술을 활용하며 상품개발과 생산현장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치약, 음료, 식품과 같은 생활용품은 가격 인상이 쉽지 않다. 일본의 소비자들은 1엔의 가격 인상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기업은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부가가치를 높이면서 가격을 올리는 전략을 취한다. 소비 수준이 높아져만 가는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업은 지속적으로 고부가가치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있어 디지털 기술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남은 음식을 구출하다


온라인 몰 쿠라다시는 호텔과 레스토랑 등에서 사용하는 업무용 식품 중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수비자들에게 판매한다. 쿠라다시가 등장하기 전에도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제품을 인수해 판매하는 업체는 다수 존재했다.


(사진, 쿠라다시 쇼핑몰)


하지만 대부분은 매장이나 인터넷 할인점에서 팔아 치우고 그래도 남으면 결국 식품을 폐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쿠라다시는 판매 가격의 일부를 기부한다는 점, 그리고 정확한 가격 책정을 통해 상품을 남기지 않아 폐기물을 제로로 만든다는 점에서 제조자와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경제경영 #비즈니스인사이트 #도쿄트렌드인사이트 #정희선 #원앤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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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 대한민국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역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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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천 년간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역사가는 신채호였다. ‘1천 년간’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지난 1천 년간 역사학계가 숨기고 감춘 진실을 그가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 연구와 독립운동을 하며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여순형무소(뤼순형무소)에서 뇌출혈로 초라하게 사망했지만, 그의 외침은 지난 1천 년간 이 땅에서 나온 가장 인상적인 외침이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 <조선상고사>는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년)이 10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 투옥된 지 3년째인 1931년 6월부터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이다.


총 10편으로 구성된 책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그의 역사관을 시작으로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의 시대를 설명한다. 이는 단군, 기자, 위만, 삼국이라는 기존의 역사인식 체계를 대신하는 역사인식인 셈이다. 또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한민족韓民族 전체 관점에서 고구려·백제·가야·신라의 역사를 서술한다.


역사의 정의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파고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다. 조선사람은 조선을 ‘아’라고 하고,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을 ‘비아’라고 한다. 반대로 영국 등은 자신들을 ‘아’, 조선을 ‘비아’라고 할 것이다.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 어족중국 어족의 두 파派로 나뉘었다. 한족 · 묘족 · 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 민족 ·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 민족이 분화하여 조선 · 선비 · 여진 · 몽골 · 퉁구스 등이 되고, 흉노족이 분화하여 돌궐(신강족) · 헝가리 · 터키 · 핀란드 등이 되었다.


오늘날 몽골 · 만주 · 터키 · 조선 4개 민족 간에는 유사한 어휘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는 몽골제국 시대에 상호 작용이 많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고대사를 보면, 조선과 흉노의 인명 · 지명 · 관직명이 동일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상고 시대에 동일한 어족이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조선 민족의 동진東進


인류의 발상지를 두고 파미르고원이라는 설몽골초원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조선 민족이 어딘가에서 동진을 해왔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 고어에선 왕의 성씨를 해解라고도 하고 왕의 칭호를 ‘불구래弗矩內’라고도 했다.


해解는 태양이란 뜻에서 나온 것이고, ‘불구래’란 칭호는 태양의 빛이 붉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천국을 환국桓國이라 한 것은 광명처럼 환하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 조선 민족은 서쪽 파미르고원이나 몽골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진東進을 해왔다. 이들은 불함산(백두산)을 광명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이 부근을 ‘조선’이라고 불렀다. 조선이란 말은 광명을 의미하는 고어古語에서 나왔는데, 이를 후대에 조선朝鮮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대大단군왕검의 건국


조선 민족이 여러 아리라(강江 유역)에 분포하면서 이들 사이에 공통적인 신앙이 유행했다. 이른바 단군 신앙이다. 조선 민족은 우주의 광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태백산 수림樹林을 광명신의 근거지로 생각했다. 이후 번성한 인구가 각지로 퍼져나가자, 각 집단은 자신들의 거주지 부근에 태백산 수림을 모방한 수림을 조성하고 이를 ‘수두’라 불렀다. 수두는 신단神檀이란 뜻이다. 해마다 5월과 10월에 수두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한 명을 뽑아 제주祭主로 삼았다.


제주를 수두의 중앙에 앉히고 ‘하느님’, ‘천신’이라 부르며 제사를 올렸다. 소를 잡아 수두에서 제사하고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쳤다.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팔괘에 나오는 음획과 양획의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수두를 받는 부락들은 연합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했으며, 이때 가장 큰 공을 세운 부락의 수두를 최고의 수두로 숭배했다. 이를 신수두라 불렀으며, 다른 수두들은 그 휘하에 속했다. 삼한 역사에 나오는 소도가 바로 수두이다. 단군은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사진, 은나라와 한민족)


평양의 옛 이름은 왕검성이다. 신라 <선사仙史>(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에선 “평양은 신선인 왕검의 땅”이라 했고, 북위 역사서인 <위서魏書>에선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는데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했다. 왕검은 ‘임금’이란 뜻이며, 고대 조선에선 단군왕검을 종교적 교주로 신봉했다는 말이다.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대략 오륙백 년간은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였다. 기원전 5,6세기경에는 불리지弗離支란 인물이 조선 군대를 통솔하고 오늘날의 하북 · 산서 · 산동성 등을 정복했다. 그는 산서성 대현 부근에 국가를 세우고 불리지국이라 명명했다. <주서>의 불령지弗令支와 <사기>의 리지離支는 바로 이 불리지국을 가리킨다. 상고 시대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발해는 큰 호수였다. 불리지는 산동을 정복한 뒤 발해를 중심으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조선은 고죽국을 통해 불리지국과 연합하여 연나라와 진晉나라를 정벌했다. 그러자 연과 진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나라 군주 환공은 명재상 관중과 명장 성보의 보좌를 받아 당시 중국을 제패하고 있었기에 조나라 · 위나라 · 허나라 · 노나라 등의 10여 국가를 이끌고 연나라를 구출했다. 이리하여 조선은 군대를 철수하고 불리지 땅을 잃었다. 그래서 공자는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피발披髮을 하고 좌임左袵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피발은 조선에서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는 것을 말하고, 좌임은 조선에서 왼쪽으로 옷을 여미는 것을 말한다. 비록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관자>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조선은 서북 지방을 잃고 장기간 침체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기존의 학교 역사는 단군의 역사를 거의 신화 수준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중국 <위서>에 기록된 것처럼 , 고구려 건국 이전 2천년이 단군왕검의 원년이다. 아사달은 어디일까? 신채호 선생은 현재 하얼빈의 완달산을 가리키며, 이곳은 북부여의 고토古土로 단군왕검의 상경上京이었다고 말한다. 안시성 유적인 아리티가 중경, 지금의 평양은 남경이었다.


삼조선의 명칭 유래


기존 역사서에서는 삼조선 분립 사실을 빠뜨렸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란 용어를 단군 · 기자 · 위만의 세 왕조로 잘못 해석했다. 삼조선은 신 · 불 · 말, 세 한韓이 분립한 것으로,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불한과 말한은 부왕副王이었다. 삼한이 삼경에 각각 주재하며 조선을 통치했다. 신한 · 말한 · 불한은 이두로 진한 · 마한 · 변한이라 표기됐고, 신조선 · 말조선 · 불조선은 이두로 진조선 · 막조선 ·번조선으로 표기됐다.


신조선왕 모갑은 오늘날의 동몽골 지역을 공격, 선비족을 정벌하고 연나라를 공격해 현재의 하북성 친황다오시, 북경 부근, 산서성 대동부 등지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불리지 때의 고토를 회복했다. 이에 두려운 연나라왕은 신조선에 매년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후계왕 모을은 연나라 진개 장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이후 신조선의 모정왕은상곡, 어양 등자를 회복하고 동몽골 일대의 선비족을 복속시켜 국위를 회복했지만 흉노족 연제모돈의 난을 만나 국력이 쇠약해지고 말았다.


불조선은 신조선과 연합했다가 연나라에 패해 요동, 요서, 우북평 일대를 잃었다. 기원전 200년에 왕위에 오른 기준은 투항했던 위만의 배신으로 인해 도성인 왕검성을 버리고 잔여병력으로 바다 건너 월지국을 습격해 왕위를 찬탈했지만 마한 여러 나라 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말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평양이었다. 말조선은 이후 국호를 말한(마한)으로 변경하고 월지국(현재의 공주 인근으로 추정)으로 천도했다가 불조선왕 기준에게 멸망당했다.


고구려의 발흥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다. 추모왕으로 불린 그는 타고난 용력과 탁월한 활쏘기 솜씨를 지녔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전성시대의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한 뒤,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약 70리에 환도성丸都城(제1환도성)을 수축하고 서쪽 경영의 거점으로 삼는 한편, 국내성 · 졸본성과 함께 삼경三京으로 삼았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해 후세인들의 논쟁이 많았는데, 신채호 선생은 환도성이 3개나 있었는데 이를 구별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盛과 희熙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大 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의 사관들은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숨기는 습성이 있어서 항상 후연이 승리한 것처럼 기록했다고 한다.


(사진, 중국 사관들의 습성)


고구려 vs 수나라


통상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충돌하기 마련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패권은 고구려와 중국의 수나라 간에서 전쟁으로 나타났다. 서기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의 문제는 중국을 통일한 지 9년이었다. 계속된 풍년과 풍족한 군비軍備로 자만심이 가득했던 수나라는 모욕적인 서한을 고구려에 보냈다.


(사진, 을지문덕전)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대의 약점을 탐지하고자 항복 사신이 되어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 내부를 살피고 돌아왔다. 이때 우문술 등의 부대에서 굶주린 기색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후 수나라 군대를 유인할 목적으로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으로 도망가는 척했다. 이에 우문술 등은 매우 기뻐했다. 이러는 사이 수나라군은 살수(현재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까지 당도했다.


성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이후 우문술은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가 화살과 돌멩이가 비오듯 쏟아지자 철군을 시작했다. 살수에 도착하니 배가 한 척도 없자 얕은 강물임을 확인하고 건너기 시작했다. 수나라 군대가 강의 중간에 도착하기 전에 상류에서 모래주머니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물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다.


이런 상태에서 을지문덕 부대가 후미를 습격했다. 수나라 군인들은 칼과 활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도착한 후에 강을 건너 달아났다. 30만이 넘었던 우문술의 군대는 겨우 2700명만 생존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고구려 vs 당나라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한 수나라는 국력의 쇠퇴로 결국 패망하고 만다. 이후 새로운 왕조 당나라가 들어서고, 당은 약 20년 간 전쟁 준비를 한 후 당나라 대군들은 고구려 땅으로 침입했다. 당시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을 빼앗은 다음 곧바로 평양을 습격한다는 전쟁 계획을 수립했지만 수성전을 펼치는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양만춘의 결사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안시성 전투는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전쟁이었다.


양만춘이 쏜 독화살이 당태종의 눈에 명중되어 결국 당나라는 철군을 결정한다. 당태종은 ‘요동 전쟁을 그만 두라’는 유훈을 남기고 죽는다.


(사진, 김부식)


연개소문은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한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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