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갈 미술관이 최소 두 곳은 될 것 같다. 이중섭 미술관과 김창열 미술관이다.
이중섭 미술관은 아이들 어릴 때 가본 곳이라 다시 가도 좋을 것이고, 김창열 미술관은 2016년에 지어졌는데 외관만도 너무 멋져서 꼭 가보고 싶어졌다. 정우철 도슨트의 책을 페이퍼로 남겨놓았으니 도움이 되겠지?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
꼭 봐야 할 작품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깨닫게 됩니다. 대부분의 작품명이 ‘회귀‘라는 것을요. 제가 방문했을 때의 전시 제목도 ‘회귀의 품, 제주‘였으니까요. ‘회귀‘는 작가가 태어나고자란 토양과 풍토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작가의 작품에는 비슷한 모티프가 반복됩니다. 보시다시피, 물방울과 천자문이죠. 금방 사라질 물방울과 사라질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글자의 공존. 그 작품 중에서도 이 작품은 특히 위엄 있었습니다. 천자문은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던 향수와, 그 위로 있는 사실적인 물방울들의 얼룩이 참 영롱합니다.
*관련작품 회귀, 1997 회귀, 1987
*김창열 미술관의 제 2 전시관에 대한 설명인듯. 제 1전시관은 물방울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의 온라인 전시관으로 확인해 보았다. - P72
전쟁이 끝난 후 1957년에 박서보, 하인두, 정창섭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의 급진적인 앵포르멜, 즉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미술이자 구체적 형상을 강렬히 재현하려는 미술운동을 이끌었으며 한국 추상미술에 앞장섰던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물방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캔버스에 물감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 상처의 깊이를 표현하는 추상이 주된 기법으로 쓰입니다. 그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총을 맞은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도했습니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제사>, <상흔> 등이 있는데요,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지만 그 아픔만큼은 어떤 작품들보다 격하게 느껴집니다. 그 충격으로 당시 그림에는 총을 맞아 구멍이 뚫린 형상,총 맞은 육체를 연상시키는 <상흔>이란 제목으로 또 사람이 찢긴 듯한 이미지는 <제사>와 같은 작품으로 시각화되기도 했습니다.
*관련작품 제사, 1964 판자집, 1959 - P79
뜻밖에도 그의 제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1952년에서 1953년까지 1년6개월간 제주에서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육로로는 닿을 수 없고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 제주 제주는 그곳을 가는 여로부터 이미 타지의 감각을 불러 일깨우죠. 김창열 화백에게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은 반도를 떠나 도착한 제주가 좋았던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인생 전체로 보아 1년 6개월이 결코 긴 기간이라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그 기간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쌓은 행복의 밀도일 것입니다. - P84
물방울은 고단하던 유학 시기에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습니다. 그는 1970년대 초파리 근교의 마구간을 빌려 작업을 이어갔죠. 마구간을 빌려 작업했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있듯, 당시 그는 무척이나 가난했었습니다. 재료비도 아껴야 하던 시절이라 캔버스를 재활용해야 했는데요. 사용한캔버스를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도록 캔버스 뒷면에 물을뿌려두었습니다. 물감이 쉽게 떨어질 수 있게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햇빛에 캔버스에 뿌려뒀던 물방울이반짝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은 마구간에서 탄생한 셈이죠. - P85
빈 배경에 끊임없이 물방울이 변주되다가, 80년대 중후반이 되자 천자문이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이제 황혼기에 접어든 화가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 것일까요. 작품을 보며 배경의 빼곡한 천자문에는 무슨 뜻이 담겼을지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아마 전시를 보는 많은 분이 저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실 것도 같습니다. 작품 속의 천자문은 어떤 특별한 뜻을 가졌다기보다, 무작위로 쓴 기호에 가깝다고 합니다. - P87
미술관의 설계는 홍재승 건축가가 담당했습니다. 당시 "미술관이 신전 혹은 무덤같으면 좋겠다"라는 그의 요청에따라 건물 전체에 나뭇결 문양의 검회색 콘크리트를 사용했습니다. 간담회 당시 지팡이를 짚은 김창열 화백은 "이렇게 미술관을 갖게 되다니 고맙다"라며 여러 번 목이 메었다고 합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눈으로확인한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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