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컬렉션 박스 세트 (리커버 특별판, 전4권) - 뉴욕 3부작 + 달의 궁전 + 빵 굽는 타자기 + 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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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물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폴 오스터의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 정말. 오스터 씨, 또 시작이네!" 하고 헛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예수님도 아니고 대체 뭐람... 말이 되냐구...!

하지만 나는 폴 오스터 이 작가를 너무 좋아한다.  작가가 그렇다면 나는 그냥 무턱대고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평소엔 그가 들려주는 환상적이고 이상한 이야기 속으로 기꺼이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은 십 수년 전에 사놓고 안 읽고 의심하고 이러기를 여러번.  폴 오스터의 컬렉션 박스를 구입하게 되면서 그 동안 미뤄두었던 그의 책을 홀린 듯이 읽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줄거리를 남겨놓을 생각은 없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독후 활동이 책을 읽고 줄거리를 남기는 거다. 으악 진짜 싫어ㅠㅠ).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영문 M이라는 글자를 연상케 하는 인생의 굴곡을 여러 번 그리는데, 거기에 또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우연이 겹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재밌어진다.  이건 줄거리로 남긴다고 해서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느꼈던 즐거움과 감동을 제대로 표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의 책은 무조건 읽어봐야만 진정한 재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원더 보이 월트(월터 롤리)는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고 공중에 떠올라 원을 그리며 곡예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계단을 오르는 듯한 곡예를 공중에서 보여주는 ㅡ 실제로 이런 공연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가서 보고 싶네.  공연의 구성을 읽기만 해도 굉장히 멋질 거 같다 ㅡ 공연을 하면서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를 조련하는 것은 예후디 사부님. 33 개의 어렵고 힘든, 그리고 조금은 황당하기도 한 단계를 거쳐 공중 부양을 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당연히 이 사람이 미친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당연히 떠 오른다. 말도 안되는 걸 알지만 이게 또 그럴 수 있다고 믿게 된다. ㅎㅎ   

   중력을 거스르는 월트의 능력은 사춘기가 되면서 엄청난 두통을 동반하는 고통으로 인하여 공중 부양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3K(큐 클럭스 클랜)의 폭도들에게 사랑하는 형 이솝과 수 아주머니가 살해 당하고, 예후디 사부님의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으면서 비범한 능력을 지닌 월트의 삶은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긴 어느 인생인들 예측할 수 있을 것이며 예측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언제나 의연하게 시련을 대하고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전력투구하는 월트의 자세는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시련 사이 사이마다 월트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또한 위트 넘친다. 이런 삶의 자세를 갖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그의 비범함ㅡ 혹은 위대함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ㅡ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재미와 감동만이 아니라 독자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독자를 끌어들이는 폴 오스터의 작품 세계는, 문학 작품(특히, 소설)이 지녀야 할 궁극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오스터가 나에게 선사하는 궁극의 가치, 작품성, 재미와 감동. 나는 여기에 앞으로도 계속 빠져 있지 싶다. 


   "내심으로 나는 몸을 띄워 올려 공중에서 떠다니는 데 어떤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이건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내면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집중만 한다면 누구라도 내가 원더 보이 월트로서 달성했던 것과 똑같은 위업을 다시 이루어 낼 수 있다. 


물론 그러러면 당신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자신을 증발시켜야 한다. 근육에서 힘을 빼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 다음, 눈을 감아보라. 그것이 요령이다. 그러면 당신 몸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팔을 펼치고, 당신 자신을 증발시켜 보라.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땅 위로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 (376쪽)



   그래서 나도 침대에 앉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봤다.   

당신 자신이기를 멈추고, 자신을 증발시켜야 하고, 근육에서 힘을 빼고(이건 된다).... 나의 영혼이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다구?... 아무리 해도 내 몸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가벼워지지 않는다. 물론 떠오르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ㅋㅋㅋ

침대에 가만히 앉아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요가 자세나 취할 수 있을 뿐이지 다른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하다 역시... ㅎㅎㅎ



   오늘 아침에 서가가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서 폴 오스터의 책이 몇 권인가 보니 전집 포함해서 총 16 권이다. 그 중 3 권은 겹치는 거니까 13 종 16 권이 되는 셈이다. 그 중 반은 읽었고 반은 아직이다.  그래서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뒤적뒤적하다가 <거대한 괴물>과 coolcat329님 리뷰 보고 지금은 읽을 수 있을 듯하여 <롤리타> 찾아 들고 내려왔다. 

<리바이어던>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데 나는 열린책들에서 간행된 <거대한 괴물>로 가지고 있다. 먼저 읽고 있는 책들 정리가 되면 읽어야 하나... 어느 날 갑자기 동해서 읽어버릴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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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5-31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폴 오스터 찐팬이시군요~ 저는 십여 년 전 <뉴욕삼부작>으로 오스터를 처음 만났는데 이해가 안 가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후에 읽은 <달의 궁전>은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죠.
그러고 보니 올해 <빵굽는 타자기>를 읽었네요. 작가의 입담에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은하수 2023-05-31 08:41   좋아요 0 | URL
저와 비슷한 경로를~~~하하하하
저도 어느 라디오 프로에서 신간소개하는 <뉴욕3부작> 처음 듣고 바로 읽었었거든요. 그땐 정말 이게 뭔가... 그러고 한동안 손이 안가다가 <달의 궁전>부터 완전 빠져서 줄줄이 찾아 읽게 됐죠! 어차피 전집에 있어서 <빵굽는 타자기> 곧 읽게 될거 같네요. 일단 <거대한 괴물>부터 시작했습니다^^
 

파란만장 M자 곡선을 그리던 인생이 끝나가는거 같다. 미스터 버티고 씨..


나는 그 집을 찾아내는데 좀 애를 먹었고,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자세히그 도시를 둘러볼 수 있었다. 옛날에 그 집은 도시 외곽의 텅빈 들판으로 이어진 비포장 도로변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이제는 주거 중심지로 변해서 주위에 다른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또 예전의 그 길도 코로나도 애비뉴라는 이름이 붙어 현대적인 시설들을 모두 다 갖추고 있었다. 보도, 가로등, 그리고 한가운데에 흰 줄이 쳐진 검은 아스팔트. 하지만 그 집은 썩 괜찮아 보였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회색빛의 11월 하늘 밑에서 지붕널들이 하얗게 빛났고, 예후디 사부가 앞뜰에 심었던 조그만 나무들은 거인처럼 지붕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누가 그 집을 소유하고 있건 관리를 잘 해온 덕분에 이제는 아주 고풍스럽고 역사적인, 지난 시대의 유서 깊은 저택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있었다. - P364

나는 차를 세워 놓고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늦은 오후였지만아래층 창문에는 불이 켜져있었다. 나는 거기까지 온 이상 내친김에 벨을 눌러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아주 못돼 먹지 않았다면 옛일을 생각해서 나를 안으로 들여집안을 한바퀴 둘러보게 해줄지도 몰랐다. 내가바라고 있던것은 단지 그것, 그저 한번 둘러보자는 것이었다. 현관문 밖은날씨가 꽤 쌀쌀해서 나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거기에서 있을 동안 내가 처음으로 그 집을 찾아들었던, 지독한 눈보라속에서 길을 잃고 초주검이 되었던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364

안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발소리를 듣기까지는 벨을 두 번울려야 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위더스푼 부인을 처음만났던 때의 기억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다름 아닌 위더스푼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시간이 좀 걸렸다. 더 나이가 들고 더 허약해지고 더 주름살이 많아진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더라도 바로 그 위더스푼 부인이 틀림없었다. 
나는 어디에서라도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1936년 이후로 체중이 단 1킬로그램도 불지 않았고, 머리칼은 여전히 붉은 기가 도는 빛깔로 멋지게 염색이 되어 있었고, 연한 파란색 눈은 여전히 푸르고 밝았다. 그녀의 나이는 그때 일흔넷 아니면 일흔다섯이었지만 예순 ㅡ 아무리 많게 봐야 예순셋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멋진 옷을 입고, 여전히꼿꼿한 자세로, 입에 담배를 물고 왼손에는 스카치 위스키 잔을 든 그녀가 문간으로 나왔다. 
누구라도 그런 여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뒤로 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변화와 재난을 겪었지만 위더스푼 부인은 늘 그랬던 것처럼 멋진 여자였다. - P365

그 나머지는 얘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눈물을 흘리고 저간의 일들을 주고받으며 자정이 넘어 한밤중까지 얘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코로나도 애비뉴에서의 올드 랭 사인(그리운 옛날)이었다. 그날 밤 우리가 했던 것보다 더 멋진 재회가 또다시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을 대강 그녀에게 얘기했지만, 그녀의 얘기도 내 얘기 못지않게 이상하고 예상 밖이었다. 그녀는 텍사스에서 시추 붐이 일던 기간에 수백만 달러를 곱절로 불리는 대신 석유가 안 나는 땅에 드릴을 박아 파산을 하고 말았다. 그 당시에는 석유 탐사 게임이 대개는 어림짐작이었는데, 너무 여러번 헛다리를 짚었던 것이다.
1938년이 되자 그녀는 재산의 10분의 9를 잃었다. 물론 그렇더라도 아직 가난뱅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뉴욕 5번가의 부유층이 아니었고, 몇 번 더 사업을 벌였다가 여의치 못하자 마침내는 짐을 챙겨 위치토로 돌아왔다.  - P366

나를 거기에 머물도록 하는 데에는 많은 설득이 필요 없었다.
관리인 일이라는 것은 임시변통으로 하는 미봉책에 불과했던 데다, 이제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자리가 생긴 이상, 나로서는 계획을 바꾸는 일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봉급은 물론 그중 사소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위더스푼 부인이 내게 빌리가 하던 일을 맡아 달라고 하자 나는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겠다고 대답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내게 자기집 부엌에서 냄비나 닦으며 있으라고 했더라도 나는 역시 그러겠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어렸을 적에 차지했던 바로 그 꼭대기 층 방을 쓰기로 했고, 그 사업의 요령을 일단 터득하고 나자 나는 그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 나는 위층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있다가 벽 저편에서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녀의 방으로 내려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음에는 그녀를품에 안고 잠이 들 때까지 얼러 주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같이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보니 나는 커다란 더블 베드에서 그녀 옆에 누워 있었다. 옛날 그녀가 예후디 사부와 함께 쓰던 바로 그 침대였다. 이제는 그녀의옆에서 잠을 자는 것이, 그녀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남자가 되는것이 내 차례가 된 셈이었다. 우리가 잠자리를 함께했던 것은 대체로 서로에게서 위안과 친밀감을 느껴 두 침대에서 자기보다는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이따금씩 침대 시트에 불이 붙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 P370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 그녀는 대체로 좋은 건강을 유지했다.
80대 중반이 되어서도 그녀는 여전히 저녁 식사 전에 두 잔의 스카치위스키를 마셨고, 이따금씩 담배를 피웠고, 거의 날마다 멋지게 차려입고서 초대형 캐딜락 승용차로 한바탕씩 달릴 만큼기력이 있었다. 그녀는 아흔 살인가 아흔한살까지 살았는데그녀가 어느 세기에 태어났는지는 영 확실하지가 않다 - 마지막 18개월 정도만 제외한다면 그녀에게는 삶이 그리 고단하지 않았다. 물론 죽을 때가 가까워서는 거의 눈멀고 귀먹어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그녀다웠다.
나는 그녀를 양로원에 집어넣거나 그녀를 돌봐줄 간호사를 고용하는 대신 사업을 정리하고 온갖 지저분한 일을 내가 직접 떠맡았다. 나 또한 그녀에게 그 정도 빚을 지지 않았던가? 나는 그녀를 목욕시키고,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고, 그녀를 품에 안아서 집 안을 돌아다니고, 일을 벌인 뒤마다 그녀가 한때 나를 닦아주었던 것처럼 그녀의 엉덩이에서 똥을 닦아 주었다. - P370

장례식은 나무랄 데 없는 행사였다. 나는 가왓돈이 나가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그녀의 재산 - 집, 차, 그녀가 직접 벌어들인 돈과 내가 그녀를 위해 벌어들인 돈 - 이 모두 내 것이 된 데다, 과자 단지에는 나를 앞으로 75년이나 100년동안 너끈히 지탱해 줄 여유가 있는 이상, 그녀에게 거창한 송별식, 위치토가 그때까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떠들썩한 파티를벌여 주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 P371

그것이 일년 반 전의 일이었다. 처음 두 달 동안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맥없이 집안을 서성거렸다. 나는 정원 일을 좋아해 본 적도 없었고, 골프는 두세 번 쳐보다 싫증이 났고, 일흔여섯 살 나이에 다시 사업을 시작할 열망도 없었다. 사업은 매리언이 있었기에 재미있었지만 그녀가 곁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캔자스를떠나서 세상을 둘러볼까도 생각했지만 내가 분명한 계획을 짤수 있기도 전에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구해 주었다. 사실 나로서도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날 아침 침대에서 내려올 때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채 한시간도 안 되어 나는 2층 응접실 책상에 앉아 펜을 손에 들고 첫번째 문장을 끼적거리고 있었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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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언어
박선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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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말하는 우아한 언어란 사진이었다. 우아한 사진과 필립 퍼키스의 우아한 사진 강의 노트...

중간 중간 사진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에 수록된 일부 내용들도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마음이 끌리는 글이었다. 



공원의 벤치나 숲속의 바위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내가 보는 대상에 따라 시야가 급속히 바뀌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여기서 저기로 시선을 돌린다.

다시 말하면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바라본

전체가 한 장의 사진으로 조합되어 마음속에

각인된다. 우리가 과학 시간에 들었던 지리멸렬한

설명과는 다른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나의 뇌와 눈은 얼마간 서로 공모자인 셈이다.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이런 짧은 글들... 



왜 장가 못 가느냐고 주변에서 핀잔 받던 내가

어느 사이엔가 1녀 2남의 어엿한 가장이 된

것이다. 아이들을 낳은 후로는 안고 업고 뒹굴고

비비대고 그것도 부족하면 간질이고 꼬집고

깨물어가며 그야말로 인간 본래의 감성대로

키웠다. 공부방에 있다 보면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는 소리가 온 집 안 가득했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몰래 아이들에게 달려가

함께 뒹굴기도 일쑤였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나는 이런 사람 사는 분위기를 먼 훗날

우리의 작은 전기(傳記)로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만 돌아오면 카메라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ㅡ 전몽각 <윤미네 집> 중에서



그런데 어젯 밤 이 글을 읽다가 갑자기 격하게 울컥해져서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내가 고 2 올라가던 18살에 돌아가신 젊디 젊으셨던 내 아버지.

그 아버지의 나이보다 18년만큼 더 나이를 먹어버린 나.

공교롭게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에 18년을 더하면 내 나이가 된다. 그런데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새로 나온 기계를 참 좋아하셨다. 집에서 음악을 들으시고 동그란 녹음 테이프가 돌아가는 녹음기와 마이크를 사서 노래 녹음도 하시고, 특히 카메라를 구입해서 사진 찍기를 좋아하셨다. 여동생과 나에게 예쁜 옷을 입게 하시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걸 즐기셨다. 그때 찍어주셨던 사진과 앨범은 아직 친정 엄마 집에 보관되어 있다. 엄마 보러 갔다 가끔 그 앨범들 보곤 했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취했던 포즈와 표정, 동네 집들과 길, 풍경들. 그리고 웃기는 건 우리가 들고 다니며 먹던 '죠니'라고 하는 과자까지 사진에 찍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다 기억이 나고 해 질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때가 초등학교 4~5학년 무렵이었는데 그 때 이후로 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셔서 요양 차 부산에 계신 친 할머니 댁으로 내려가 계시던 몇 년 간 우린 아버지의 카메라도 녹음기도 전축도 모두 잊고 살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고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하던 취미 생활 등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전율이란...



그 밤 갑자기 나의 작은 카메라가 생각이 나서 오늘 아침 다락방으로 올라가 카메라를 갖고 내려왔다.

좀 전에 충전이 다 된 카메라를 돌려보니 2019년 12월 남편과 베트남 여행가서 찍었던 사진들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걸 보았다. 코로나 이전의 시간에 멈춰 선 메모리 카메라...

오랜만에 들어보니 손 안에 쏘옥 들어오는 그립감이 꽤 좋았다. 

어디든 여행을 가면 내가 카메라를 챙기고 친구들과의 모임엔 항상 내가 찍사였기 때문에 카메라엔 당연히 욕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수동 카메라에서 디카를 거쳐 작은 디쎄랄  카메라까지 카메라의 변천사도 , 남아 있는 앨범들도 모두 추억이라고만 하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크다. 그런데 언젠가부턴 카메라를 챙기는 일상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카메라만(!) 들고 갔을 때의 아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카메라에 망원렌즈에 광각렌즈에 카메라 가방 등의 악세사리와 메모리카드, 후레쉬 등등등...  한 마디로 어깨 빠진다. 

이젠 나도 카메라를 버리고 핸펀 하나로... 따라서 사진 현상도 없다. 그러니 버려지는 사진도 많고 남아 있는 사진도 드물어져서 나만의 낭만은 사라진 느낌이다. 박선아 작가는 정리도 잘하고 정리된 사진을 커~~~다란 화면으로 돌려보던데...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옛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

우리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면 요즘의 신문물도 참 좋아하셨을 거 같다. 남아 있는 아버지 사진이 거의 없어서 너무 아쉽다. 사진은 추억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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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언어》 카메라에 남겨놓은 사진

한 ‘영역‘을 한꺼번에 전부 볼 수 있도록 눈의 근육을 풀고 뒤로 물러나 앉는다. 여기저기로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매우 엄격한 노력을 요구하지만 사진 찍는 연습으로 이보다 더 좋은 훈련은 없다.
ㅡ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중에서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중에서 발췌해놓은 글들이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 글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어 읽으며 자꾸 나도 모르게 ‘흠, 좋은데! 그렇지, 그렇군!‘ 이렇게 공감하게 만든다. 따라해보고 싶게... 하....

작가가 직접 찍었다는 사진도 찬찬히 오래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프레임 밖의 세상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카메라로 다시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 욕구가 새록새록 솟아난다. 우선, 이 밤이 지나면 카메라 다시 꺼내와서 메모리에 남은 사진이 뭘까 찾아봐야겠다. 마지막 사진이 언제적인지 너무 궁금하다!



프레임은 사진가가 조작한 시각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프레임이 사진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프레임 안에 들어온 것과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것, 프레임 안에서 빼버려도 상관없는 것은 무엇인지가 종종 사진에서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ㅡ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중에서


***내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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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카메라로 충분할까

대학 시절, ‘사진 미학‘이라는 강의를 들었고 첫 수업에 선생님은 일회용카메라로 사진 찍어오는 과제를 내주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화되며 DSLR 열풍이 불던 시기였기에 일회용카메라를 파는 곳은 많지 않았다. 여러 상점을 돌고 돌다가 안국역 근처 슈퍼마켓에서 먼지 쌓인 것을 한 대 찾았다. 손바닥에 딱 들어오는 작은 카메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레버를 돌린 뒤, 셔터를 누르니 "틱" 하고 볼품없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이런 카메라로 뭘 찍어오라는 걸까? 모두에게 디지털카메라를갖고 오라고 하면 부담을 가질까 봐 그랬나? 렌즈를 돌려가며 멋지게 찍고 싶은데..."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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