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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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작은 등대섬에서의 고립을 선택한 새뮤얼, 그리고 그곳에 떠밀려온 젊은 남자. 원치 않는 동거 생활은 긴 세월 외로움과 맞서 싸워온 그의 늙고 연약한 육체와 정신에 엄청난 불안을 야기한다.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이야기는 결국 파국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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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와 독재자의 형제들, 친구들, 사촌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동차 행진은 뭐가 다릅니까? 독재자도 자기 측근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대체 옛 대통령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독재자가 살육한 그 모든 사람은요?"
"오, 형제여, 진정해. 그만하면 됐어. 그분은 우리를 구해냈어. 교도소에서 그 긴 세월을 썩으면서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하나?" - P146

새뮤얼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죄수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볼까요?"
"말해봐." - P146

"나는 내 자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내 아들은 아직 아기입니다.
내가 광장 가두시위에 나가던 그날 아침 마지막으로 보았던, 내 어머니 품에 안긴 그 모습 그대로 작은 갓난아기입니다.
나에게 바깥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그 아기를 중심으로 그대로 서 있습니다. 내 여동생은 십 대이고, 내 아이의 어미는 여전히 석상 위에서 시위하고 있으며, 양친 모두 살아 계십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나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조차 잊습니다. 가끔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도 난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묻고 싶다고요." - P147

"그런 의문은 품지 말아야 해. 내가 말했듯 거울 속 그 남자는 스스로 충성심을 보여준 남자야."
새뮤얼은 고개를 돌려 다시 교도관을 쳐다보았다.
 "그런말 마십시오. 나는 나 자신 말고 누구에게도 충성한 적이 없습니다." - P147

그가 본 가장 작은 아기였다. 자그마한 몸에 낯선 노르스름한 기가 돌았다. 아기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새뮤얼은 아기를 안고, 냄새 맡고, 아기의 작고 연약한 몸을 느꼈다. 그다음 아버지가 말했던 자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어린것에게 자유가 어떤 의미가 될지. 새뮤얼은 말했다. "그래, 하겠어. 서약하겠어."
잠들어 있는 메리아 옆에서 레시를 안고 앉아 있는데 주마가 찾아왔다. 새뮤얼은 주마가 아기를 보러 온 줄 알았지만, 주마는 축하하는 대신 숨죽인 목소리로 바깥으로 나가자고 속삭였다.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새뮤얼은 가야 했다. - P192

섬. 섬. 섬은 새뮤얼의 것이다. 그의 그만의 것이다. 헛간 바닥의 흙을 맛본 사람도 그였으며, 이곳을 다듬고 길들이고 구축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사람도 그였다. 그는 섬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할 때다. 그는 충분히 친절을 베풀었고, 다른 사람들이 해줄 법한 것보다 많은 것을 주지 않았던가. - P241

 이제는 남자의 얼굴을 대면하고 말해야 한다. 공급선이 올 때까지만 이곳에 있을 수 있다고. 공급선이 올 때까지 남자는 소파에서 잠자고 내주는 옷을 입고 앞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더는 섬을 어슬렁거려선 안된다. 새뮤얼 방에 들어오는 것도, 위협이나 손가락질도 안되고, 물건을 제멋대로 만지거나 가져가서도 안 된다. 2주 후남자는 무조건 섬을 떠나야 하며 다시 돌아올 생각도 말아야한다. 남자는 환영받지 않는다. - P242

새뮤얼은 돌멩이를 내던지고 축구 유니폼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비가 그치고 하늘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푸른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새뮤얼은 시신 옆을 떠나 연신 손을 닦으며느릿느릿 오두막으로 향했다. 시신은 당분간 저대로 두어도 괜찮으리라. 내일 시신을 바다로 끌고 가 그것이 온 곳으로 표류해 돌아가게 할 것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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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관은 귀에 선 밋밋한 억양으로 단호하게 강제 퇴거 명령을 전했다. 통역관은 주민들에게 골짜기의 경작지는 식민주의자의 재산이 되었다고 했다. 
"총독의 명령에 따라 너희는 원숭이들이 사는 산악지역으로 돌아간다. 이 땅은 이제 너희게 아니다. 왕에게 영광을, 위대한 제국에 영광을" - P52

처음에는 아무도 통역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느 누가 그들을 움직이게 한단 말인가.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터전으로 삼은 이곳에서 몰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이 왔다. 남자들은 누구도 이곳에 남을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땅은 몰수되었다. - P52

새뮤얼의 가족은 숟가락 하나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의 어머니가 발이 채여 넘어지는 통에 업혀 있던 동생이 이마를 찧어 혹이 났어도 계속 달렸다. 내내 칭얼거리던 동생은 이제는 아파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럼에도 그들은 피와 침을 흘리면서, 불타는 골짜기의 시꺼먼 연기 구름에 쫓기며 저 앞 푸른 하늘을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 P52

도망치는 새뮤얼 가족을 기다리는 것은 이미 벌거숭이가된 황무지와 마을뿐이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자리처럼 눈길 닿는 곳마다 파괴되어 있었다. 그들은 먹을 만한 것을 찾아 대치는 대로 뒤지고 잎자루, 뼈, 도둑맞우 둥지를 뒤졌지만 끝내 주린 배를 잡고 밤을 새워야 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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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용정

둘은 비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쨌든 두 분 덕분에 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지난 몇 년간 지하활동을 했습니다. 정세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 순간이 바로 종말의 전야라는 걸 저는 유격구에서 배웠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당신은 이제 완전히 변절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박길룡이 혁명의 배신자라면 당신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군요. 응당한 대접을 내가 해주리다."
최도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최도식은 몸을 움츠렸고, 자전거가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 P333

"내사 절대로 이정희를 죽이지 않았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을 뿐이오."
최도식이 소리쳤다.
"그렇게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것일 뿐이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가 물었다.
"거야, 당신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이었지비."
"그 편지......." - P334

그가 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남자아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직 열 살도 넘지 않은 게 분명한, 최도식의 아들들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한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새 시대의 아이들. - P334

"그 편지, 내게 전해줘서 고마웠습니다. 그 얘기 하려고 왔습니다. 이제 가보죠. 어서 집으로 들어가세요."
그는 울고 있는 아이들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버지를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그는 우산을 그 집 앞에 던져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는 그 집 앞으로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저녁 내내 그는 비를 맞으며 용정 시내를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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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 태어나는 대부분의 조선 여자아이들이란 혀로 제 코를 핥는 당나귀보다도 못한 동물이었다. 그 아이들은 언제나 다른 남자의 소유물에 불과했으니 혀로 제 코를 핥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편 연기와 맞바꿔지고 마작패 몇 개 놓이는 위치에 따라 앞날이 결정되며 봄에 빌린 곡식 덕택에 낯선 곳에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 P120

 그게 여옥이처럼 어여쁜 여자아이라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루처럼 단단한 종아리로 뛰어다녀야만 하는 여자아이라면 결국 갈 곳이라고는 남양의 지주 집 뒷방에 갇혀 사진기를 향해 수줍은 듯이 가슴을 풀어헤치는 그 첩과 같은 인생이거나 몸값을 받을 수조차 없는 처지인데도 마작들에게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거나, 운이 아주 좋다면 용정의 술집에서 돈 많은 남자들을 농락하는 여인이 될 터였다. 혁명의 도리라는 건, 아마도 그런 처지의 자신이. 누구인지 그 여자아이들이 결국 깨닫게 되누 일을 뜻하리라.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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