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는......
1921년에 《사이언스》에 발표한 <과학과 사이어소피>라는 글에서 그는 16세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기 전 브루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125)

마침내 우리는 성스러운 완모식 표본 앞에 당도했다. 표본 번호 #51444.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 Agonomalus jordani.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1904년에 일본 연안에서 발견하여 명명한 것이다. 유리용기 바닥에 놓여 있는 그것은 작고 검은 용 같았다. 
분류학자중 한 사람이 뚜껑을 돌려서 열고, 금속 집게 하나를 용기 안으로 넣더니 그 용을 집어서 공기 중으로 꺼내 들었다. 그녀가 잠시 그렇게 들고 있는 동안 녀석의 검은 비늘이 조명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고, 리놀륨 바닥 타일 위로 에탄올이 뚝뚝 떨어졌다. 이어서 분류학자는 그것을 내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나는 이렇게 신성한 무언가를 만지는 게 내게 허락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P98

고요한 오싹함이 나를 덮친다. 데이비드가 만난 수천 가지 물고기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로 선택한 단 하나가 왜 하필 이것이었을까. 
물론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운 건 분명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M. C. 에셔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두려움이다. 이 물고기의 형태에는 물리법칙에 어긋나 보이는 뭔가가 있다.
손가락으로 그 윤곽을 따라 짚어가며 기하학이 무너지는 지점이 어디인지 찾아봤지만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다. 
실제로 그 속명인 아고노말루스 Agonomalus는 "모서리가 없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A(없다) + gonias(각 모서리). - P99

분류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종의 물고기들이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 모서리가 없는 조던, 뫼비우스 띠처럼 두 개의 면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인 면, 두면 사이의 경계는 결코 찾을 수 없다. 데이비드는 왜 하필 이 생물이 자신을 반영한다고 느꼈을까?
이 선택에 일종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일까? 그토록 능숙하게 사람들의 마음과 일자리와 각종 상을 얻어냈던 친절한 남자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어두운 면에 대한 고백일까? 

그때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했다. - P99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지구가 어깨를 들썩였다.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산들이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갈라져 열렸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닫혔다!" 
이 말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인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지질학적 감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 시도다. 지진의 강도는 리히터 규모 7.9로 추정된다. 
47초만에 샌프란시스코시의 상당 부분이 붕괴했고, 지진으로 인한 붕괴와 뒤이은 폭발과 화재로 3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 P109

과연 여기에 어떤 단어들이 어울릴까?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 P111

여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이 올 자리다.
모든 곳에 물고기들이 있었다. 바닥 위 모든 곳에 유리 파편이 흩뿌려져 있었다. 가자미들은 떨어진 돌에 깔려 더 납작하게 뭉개졌다. 장어들은 무너진 선반에 깔려 절단되었다. 복어는 유리 파편에 찔려 살이 터져나왔다. 에탄올과 시체 냄새가 코를 쏘아댔다.
그러나 물고기들의 살집에 발생한 그 어떤 피해보다 훨씬 더 고약한 피해는 실존적 피해였다.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남은 표본들이 수백 개, 거의 천 개에 달했지만, 그 모든 표본의 신성한 이름표들은 모두 연구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 47초 사이에 창세기가 뒤집혔다. 그가 꼼꼼하게 이름을 지어줬던 물고기들이 다시금 형체 없는 미지의 존재들로 돌아갔다. - P111

데이비드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의 신중한 과학자, 다른 무엇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하는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그 지진의 명백한 메시지라 여겨지는 것에 귀를 기울였을까?
엔트로피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며, 그 어떤 인간도 결코 엔트로피를 멈출 수 없다는 메시지에?
아니다.
 바로 이때 이 불운한 작자, 이 경이로운 작자는 바늘을꺼내 우리 지배자의 목구멍을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런데 대체 그 아이디어는 어디서 온 걸까? 이름을 살갗에 곧바로 꿰매겠다는 아이디어 말이다. 데이비드의 내면 깊숙한 곳어디선가 솟아난 것일까? 소년 시절 해진 천을 꿰매 깔개를 만들던 기억 속에 있던 바늘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일까? 다른 누군가가 제안한 것일까? 동료? 학생? 아내? - P113

데이비드는 바늘에 실을 꿴 다음 바늘 끝을 파나마 망둥이의 목살에 찔러 넣어 반대쪽으로 뽑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표를 망둥이의 살갗에 곧바로 매달았을 것이고, 그렇게 망둥이는 짠 하고 다시 존재하는 상태로 되돌려졌을 것이다.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 혼돈의 그 작은 덩굴손 하나가 데이비드의 가차없는 끈기 덕분에 다시 질서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 P118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어떤 말을 속삭였을까? 자기가 평생 해온 작업의 파편들을 쓸어 담을 때,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물고기들을 던져버릴 때, 이튿날 밤 작은아들 에릭을 침대에 뉘일 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엄청난 양의) 번개와 세균과 지각변동이 잠복한 채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을 때, 자신에게 계속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 모든 일의 허망함에 짓눌려 으스러지지않기 위해 그는 정확히 어떤 말을 자신에게 들려주었을까?
나는 점점 더 필사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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