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서 배워라 -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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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 개즈비는 오지가 많기로 유명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손꼽히는 깡촌인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여성 코미디언이다. 그녀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레즈비언인 데다 일반적인 한국 남성의 대여섯 배에 달하는 체격을 지니고 있다. 1994년도까지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지였던 호주가 이 거대한 여성에게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이란보다는 나았겠지만.


해나 개즈비는 그 시절 호주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였으니 사회생활이 원만할 리 없었고, 학업 성적도 우수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외톨이였고 졸업 후에는 무능력한 식충이였다. 서구 문화권에선 다 큰 성인이 직업 없이 부모의 집에서 동거를 하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한다. 2006년에 데뷔한 그녀는 <나네트>라는 문제적 쇼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다.


<차이에서 배워라>는 오늘날 출판업계가 지향하는 마케팅 전략에 맞게 그 내용과는 사실상 전혀 연관이 없는 제목이다. 그냥 해나 개즈비의 자서전이다. 문장에 유머가 넘치고 표현은 기발하다. 착즙기에 자기 인생을 넣어 있는 대로 불행을 짜내지도 않고 그 모든 역경을 극복했다는 영웅적 서사도 없다. 책으로 펴낸 누군가의 삶은 모든 이야기가 다 특별해 보이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인생일 뿐이다. 공감이란 결국 우리가 같은 처지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네트>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이유는 그녀의 코미디가 이 쇼를 기점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볼품없고 쓸모없는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탠드업 코미디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그 위에서 뚱뚱한 레즈비언이 관객의 지지를 받으려면 자신을 깎아내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나네트>를 시작했을 때 어떤 어려움을 겪었겠는가? 자기보다 밑에 있어야 하고, 그걸 소리 높여 인정해야만 자비를 베풀었던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의 분노가 시작됐다. 그녀의 쇼에 야유를 하는 관객들이 나타났다. 어떤 남자는 공연 중간에 그녀와 대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어떤 부부는 중간에 욕을 하며 나갔고 어떤 관객들은 환불을 요청하기도 했다. 아이러니는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성공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유심한 듯 무심한 듯 그녀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준 잔잔한 가족애가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삶을 특별한 시선으로 다시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땐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수렁에 빠져 어두운 골방에 처박혀 있으면 어느 순간 말없이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공간의 숨소리가 스스로 이야기를 해준다. 마치 나와 당신의 가족들처럼.


솔직히 넷플릭스 시리즈는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나는 책을 읽기 전, 읽은 후 각각 한 번씩 도전을 했지만 모두 완주에 실패했다. 번역의 문제일 것이다. 혹시 나처럼 그 쇼에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이라면, 감안하고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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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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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김연수를 모른 척해왔다. 유명세에 비례해 손이 가지 않았고, 묘한 거부감이 있었다. 여성 작가의 글을 잘 읽지 못하는 편이다. 특히 풍부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수록 따라가기가 어렵다. 읽어본 적 없으면서도 김연수에게는 비슷한 결이 느껴졌다. 하루키스러운 제목도 불호 리스트에 올리는 데 한몫 거들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니. 세계의 끝에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는 와중에 몇 권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장편 한 두 개, 단편 두어 개. 첫 장편을 읽었을 때, 확실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감성의 결은 비슷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흥미롭고 매듭이 잘 지어져 있었으며 특히 훅하고 다가와 심장을 찌르는 펀치라인이 절묘했다.


<오래된 미래>와 <너무나 많은 여름이>. 평생 김연수의 책을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연달아 읽은 적이 없었다. 이 연속적이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나는 이 남자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됐다. 그의 작품은 압도적이고, 나는 김연수를 좋아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한국 단편 소설들이 갖는 가학적 글자수 제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원하는 만큼 쓰고, 끝내야 할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이 쿨함에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책장을 넘기는 손은 가벼웠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에 등장할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 소설들은 낭독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제주문화재단의 초청으로 가파도의 레지던스에 머물고 있었던 때라고 한다. 낭독회는 체류 작가들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해가 저물면 가파도의 제주 시민들이 하나씩 서점을 찾아 들어온다. 중년 여성들이 많았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인문학서를 읽는 독서 모임의 회원들이라고 했다. 캄캄한 밤 위로 희미한 조명을 켠 뒤 평생 보고 살 일 없었던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다. 한 사람은 소설을 읽고, 한 사람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현실에는 낭만이 끼어들 데가 없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이 모습에 나는 자꾸만 몽글몽글한 색을 입히게 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그런 소설들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낭독회에서 같이 튼 음악 리스트도 있으니 찾아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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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타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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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트>를 읽으며 크게 놀란 건 내가 이 책을 읽었었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 책의 이름과 표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리송한 형이상학적 이미지, 제목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출판사는 열린책들이다.


이 챗의 첫 단어에서부터 끝 문장까지 나는 단 한순간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완전한 망각이 책을 읽을 때마다 신선한 축복을 내려주니 마냥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난다. 기억의 용량은 정해져 있고 새로운 것이 늘면 오래된 것을 내놔야 한다. First in, first out. 수십 년간 읽어온 그 아름다운 문장들이 영영 사라져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편으로 휑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튼 이 망각 덕분에 <프로스트와 베타>를 재미있게 읽었다.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들은 신화와 판타지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SF다. 하드 SF 애호가들에게는 끔찍한 취향이겠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로저의 소설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다. SF라는 단어를 아예 빼고 봐도 무방하다.


<프로스트와 베타>의 모티브는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천사와 악마의 대립이다. 지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핵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아마도 이런 일을 대비해 인간들은 AI를 만들어둔 것 같다.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고향별을 스스로 복구할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창조했으나 핵전쟁을 막을 정도로 온순하지는 않았던 인간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AI 시스템에 플랜 B까지 심어 두었다. 이야기는 이 계획이 얄궂게 틀어지면서 생기는 긴장을 다룬다.


들어보라, 태초에 솔컴이 있었다. 솔컴은 모든 AI를 관장하는 야훼와 같은 존재인데 무소 불위 하며, 전지전능한 신과는 달리 2차 창작물(신이 만든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했기에 인간은 솔컴에 심대한 결함이 생겼을 때 그를 대신할 디브컴을 만들어두었다.


인류가 멸망한 뒤 솔컴이 깨어나 지구를 관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핵 미사일 하나가 우연히 솔컴의 일부를 파괴한 게 문제였다. 이 파괴에서 깨어난 디브컴이 프로토콜에 따라 지구의 통제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의 훼손을 중대한 장애로 여기지 않았던 솔컴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 프로스트와 베타를 만들어 각각 북반구와 남반구를 관장케 한다.


당연히 디브컴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프로세스를 종료하고 휴면에 들어가는 대신 그는 자신만의 기계 군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군단은 솔컴이 재건한 곳들을 족족 파괴한다. 이 창조와 파괴의 무한한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디브컴은 상황을 반전시킬 절묘한 전략을 떠올린다. 디브컴은 프로스트에게 기계 한 대를 보낸다. 이 사악한 기계는 위대한 프로스트를 인간의 지식으로 '유혹'한다.


직유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가벼운 상징이 아쉬운 사람도 있겠지만, 재밌지 않은가? 우리가 좋아하는 명작들도 사실은 위대한 서사의 2차 창작물인 경우가 많다. 물론 <프로스트와 베타>는 단순히 구조를 넘은 유사성이 있다. 그렇다고 읽는 즐거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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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히트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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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대학시절 읽었던 책인데, 끔찍하게 지루했던 걸로 기억한다.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즐비했고, 하루키 특유의 쿨함과 자의식 과잉이 합쳐져 자아내는 허세적 분위기가 가득했다. 예컨대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섹스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나,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엄청난 미녀가 유독 하루키를 형상화한 캐릭터와 섬싱을 만들어내거나, 불현듯 경험한 에피파니에 의해 내 영혼을 구성하던 뭔가가 영원히 떨어져 나가고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는 없게 됐다는 식의 어쩌고 저쩌고 같은 얘기 말이다. 아무튼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고 있으면 생굴에 날계란을 풀어 먹는 것처럼 느끼하다.


그런데 근 30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웬걸,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아니 뭐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꽤 재밌었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그냥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었다. 느끼한 걸 아무리 먹어도 버틸 만큼 위벽이 탄탄해진 건지, 번역된 책을 거의 다 읽으면서 하루키를 인정하고 또 존경하게 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한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소파에 누워 후루룩 말아먹기에 좋은 책이다. 옆에 싱하 탄산수와 헤네시를 섞은, 이가 시릴 정도로 상큼한 하이볼을 더한다면 완벽한 주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 지금 좀 하루키스러웠나?


소설은 하루키가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루키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은 극히 일부분만 수정했을 뿐 소설이 어떠한 각색이나 과장이 없는, 근본적으로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책을 펼치면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섹스를 즐긴다는 그들의 고백에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한다. 이름 정도는 바꿨다 해도 하루키의 주변 사람들은 그게 누군지 다 알 텐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루키가 몸담은 초 유명인들의 사교계에서 이 정도는 애교인가 보구나, 하는 왜곡된 세계관을 갖게 된다.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하루키는 이 단편집을 통해 본인이 장편을 쓸 수 있을지 시험해 봤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대로 옮기는 형식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소설 앞과 뒤의 얘기가 달라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사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에 등장하는 하루키가 현실 세계의 하루키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게 촌스러운 발상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건 소설이고 그는 소설가 아닌가. 소설가란 시작부터 끝까지 다 거짓을 말해도 무관한 직업이다.


출간하여 독자 앞에 내놓는 작품이 뭔가의 연습이라는 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하루키의 일부 에세이와 소설들은, 내용상으로 비슷한 탓도 있겠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948년생의 작가가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결국 하루키의 작품들은 궁극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참 멋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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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
스테파니 그린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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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을까? 나라는 존재가 나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의 소유물을 내가 어떻게 다루냐 나라는 문제 앞에서는 꽤 복잡한 논의가 발생한다. 몇 가지 생각을 해보자.


자기 소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는 절대 권리라면 내가 내 몸을 어떻게 다루든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매춘도 정당한 상거래로 인정해야 한다. 내 몸을 내가 팔아 생계를 잇겠다는 데 누가 참견할 일이란 말인가. 권리는 오직 윤리와 도덕이 허용하는 선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장기 매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돈이 필요한 사람은 신장을 팔고 신부전을 앓는 사람이 그걸 산다. 이 거래에는 단 한 구석도 부도덕한 면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장기 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걸까?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부자들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여 인간성이 상실되는 결과를 두려워하는 걸까?


모호한 예시는 이것 말고도 많다.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만 해도 그렇다. 자기 방구석에서 평생 마약을 하다 죽는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금지할 만할 명분이 없어 보인다. 약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것도, 치료 시설에 들어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국가가 마약을 금지하는 이유는, 중독자가 많아지면 생산력에 공백이 생기고 그로 인해 세수가 감소하는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해 국가 체계가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비용의 문제지 윤리적 문제는 아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에 국가가 어느 수준까지 개입해야 옳은가 따지는 일은 이처럼 딱 부러지지 않는다. 적극적 개입을 옹호한다면 우리가 마약을 규제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술, 담배, 심지어 정제 탄수화물이나 단순당을 금지해도 딱히 반대할 근거가 없다. 반대로 완전한 자유를 허용한다면 코카인을 빨고 주식 거래를 하든, 자기 각막을 팔아 대출금을 갚든 아무 문제가 없다.


최근 각국에서 합법하되는 추세를 보고 있으면 안락사에는 후자의 논리가 따르는 것 같다. 삶의 결정권은 오직 자신에게 있으며 이를 막는 것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와 권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죽을병에 걸려 회생이 불가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있다. 이 결정의 밑바탕에는 우리 인간에겐 불필요한 고통 없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나는 이것이 불필요한 윤리적 수사라고 생각한다. 안락사를 살인으로 보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핑계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회생 불가의 병 말고도 인간의 존엄을 헤치고 정신적, 신체적으로 고통을 주는 상황이 셀 수 없이 많다. 왜 이런 사람들에게는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국가가 마약을 통제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이처럼 안락사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윤리 도덕적 고민보다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따지는 논리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인간보다 사회, 혹은 국가, 혹은 정부가 더 위에 있는 것이다. 안락사를 막는 건 국가의 폭력일 뿐이다.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안락사 지지자, 그것도 모든 대상에게 허용하자는 적극적 옹호자다. 그런데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 풍기는 냄새를 맡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나처럼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락사의 대상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보길 바란다. 예컨대 우리의 엄마, 아빠가 안락사를 원한다면? 당신의 사랑하는 딸이,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며, 왜 나를 이런 나라에서 낳았냐며, 조력 자살을 신청하겠다면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은가?


안락사에 대한 거부감은 책을 읽기 전 까지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면에서도 발생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진행한 조력 자살 사례가 꽤 많이 등장하는데, 그걸 쭉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묘한 감정이 든다. 동의를 했든 어쨌든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 행위는 그들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들은 남을 죽인 대가로 보험 수가를 받아 직업을 유지한다. 저자는 어느 날 안락사를 마친 뒤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었던 경험을 고백한다. 그녀는 이 대목에서 자신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얘기한다. 그녀만큼 나도 당황했다. 그녀의 고백을 들으며 내 마음속엔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 고여 들었는데 그게 불쾌감인지, 섬뜩함인지, 분노인지, 공감인지, 아니면 죄책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책 자체는 굉장히 지루한 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고백을 읽다 보면 책 내용과는 무관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확고한 신념이란 게 알고 보면 얼마나 얕고 연약한 것인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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