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 일기 1 - 수박 서리
한즈 지음 / 좋은땅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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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 보면 서리도 종류가 참 많다. 뭐든지 꼼무니에 '서리'자만 갖다 붙이면 되니까.

수박 서리, 참외 서리, 땅콩 서리, 콩 서리, 밀 서리, 보리 서리, 감자 서리, 고구마 서리, 옥수수 서리, 감 서리, 살구 서리, 과수원 서리 그리고 닭서리에 돼지 서리까지. (-9-)

그래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여러 가지 이유로 옷을 벗지 않기로 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수박 서리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옷을 찾다가 날이 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무 어두워서 옷을 숨겨 둔 장소를 찾지 못한다면?

옷 당버이 무서워서 도망을 가 버리고 첪다면?

누가 내 옷을 입고 가 버렸다면? (-55-)

순간,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지금 수박밭 주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오늘 같은 그믐달이면 꼭 누군가 온다는 걸 경험상 잘 알고 있을 테니까. (-103-)

모기 때문에 도저히 이러고 있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모기에게 물어뜯기느니 도망가다가 붙잡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모기들은 날이 샐 때까지 피를 빨아 먹는 일을 멈추지 않겠지만, 고래 아저씨는 나랑 종류가 같은 인간이니까 어쩌면 조그만 인정이라도 베풀어 줄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불안감이 최고조에 이르며 ,가슴이 심하게 저리고, 점점 숨이 박혀 오기 시작한다. (-153-)

옆구리 콕에 대한 응답인가? 백설공주님은 내 넓적다리를 꼬집는다. 두 번씩이나.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그리 아프지는 않다.살짝 꼬집은 것이다.

아무리 살짝 꼬집어도 멍이 들지도 모르는데....

아참 ,지금 멍드는 걸 걱정할 때가 아니구나. (-193-)

어릴 적, 시골 외가에 가면, 수박서리를 여름철 단골처럼 했다. 지금과 달리 옆집과 옆집이 가까운 친인척관계였던 집성촌이었기에 가능했다. 외가 친인척이 가깝거나 멀거나 간에 일가가 명절이면 북적북적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농산물의 대표주자 수박서리가 절도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트럭을 끌고 가서 수박 서리를 하는게 아닌, 잘 익은 수박 한 동 꼭다리를 따서 가까운 원두막이나 바닥에 걸터 앉아서, 수박과 동거하다시피,얼굴에 수박 껍데기로 떡칠했으며, 먹고 남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고 돌아왔다. 놀거리 ,볼거리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시골생활이다.

한국 소설 『전학일기 1-수박서리』 은 그때를 기억하게 해주고 있으며, 익숙하면서, 친근감이 들었다. 수박이 맛있으면서도 나에게 매우 달콤한 음식이며,탄수화물로 배룰 채우기에 적당하였기 때문이다.책을 읽으면, 주인공은 1학년 전학을 왔으며, 동네에서 수박서리하는데 동참하였다, 옷을 벗고 수박서리르 하는 동네 사람과 달리 주인공은 옷을 입고 함께 수박서리를 하게 된다.서로 큰일 벌이듯 모의작당하듯 목적 달성하기 위해서 움직이게 되는데, 콩닥콩닥하면서도 ,수박 소리 하는 재미가 쏠쏠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뭄달이 되면, 몽달 귀신, 수박귀신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기억도 ,추억과 함께 했다. 수박ㅇ니라는 과일이 할로윈과 엮이느 이유다. 수박으로 인해 얽힌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으며,그 에피소드가 소설 『전학일기 1-수박서리』 을 풍성하게 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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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일기 1-수박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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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긴장 속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개정판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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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7 대 임금을 보좌하였던 명재상을 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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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긴장 속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개정판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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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는 하륜에 대해,"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 차림으로 묘당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일이나 내용의 기본적인 큰 줄거리)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충성스러운 말을 임금에게 아룀) 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 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라고 하여 책략가이면서 언어는 신중했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32-)

서거정이 조선 건국 초기에 담당했던 역할은 실로 주용했다. 그는 꾸준히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국가의 책무와 권한 등이 모두 문형을 맡았던 그에게 있었다. 그가 남긴 저술은 법전, 역사, 지리, 문학 등 방대한 양이었다. 실록의 졸기에서도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영화로운 삶을 살았던 서거정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81-)

왕의 총애를 업고 장녹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녀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다. 그녀 덕분에 장녹수의 주인이었던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은 계속해서 벼슬이 올라났는데, 이는 "왕이 이때 한창 장녹수를 사랑하여 그 말이라면 모두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벼슬이 올라간 것이다" 라는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143-)

그러나 이때도 선조는 "유성룡과 이산해 두 사람이야말로 국가의 주석이 되고, 사림의 영수가 될 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의지하고 존중하던 사람들이다"라고까지 하면서 이산해를 후원하였다.기축옥사는 동인 내에서 남인과 북인의 분립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유성룡과 우성전은 남인,이산해와 정인홍,이발 등은 북인의 중심이 되었다, (-267-)

이원익(1547~1634)은 조선의 관료로서 최고위 직책인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낸 진기록을 세웠다. 그것도 선조, 광해군, 인조의 3대에 걸쳐 한 정권마다 두 번씩 그 직책을 수행했다. 이원익이 영의정을 여러 차례 지낼 수 있었던 비결로는 행정력과 실무 능력의 겸비, 도덕성과 청렴성, 현실적 사고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도 총리나 장관의 인사청문회에서 여러 후보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곤욕을 겪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324-)

현대사의 김종필 전 총리와 가장 비견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필자는 조선 후기인조부터 숙종 대에 이르기까지 늘 정치와 사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우암 송시열을 주저없이 꼽는다. 송시열은 인조 대에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한 후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정치와 이념의 중심에 늘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433-)

신병주의 『참모로 산다는 것』 개정판을 읽었다. 이 책에서는 조선 시대 27대 임금의 영의정, 즉 참모의 역할과 참모가 지녀야 하 자질 , 태도, 역량, 그리고 그들의 길질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왕과 공동운명체였다. 왕의 성정과 일치하는 이들이 지략과 책략으로 만들어진 조선이 핵심 참모들이다. 그 시작은 태종의 참모역할이었던 정도전이다. 드라마 사극에서,그가 보여준 조선개국공신으로서, 조선의 틀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태종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똑똑하고, 잘난 참모가 겸손하지 못하면,권력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륜이 나오고 있으며, 이원익, 우암 송시열이 등장하고 있다. 선조 임금 때,선조 지근에 있었던 참모, 이원익은 첨렴결백한 백면 서생이었으며, 철저히 왕의 그림자로 움직였다. 결단과 충성심, 임진왜란 종식 후 광해군에 이어,인조에 이르기까지 그가 해왔던 참모의 약할은 귀감이 되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처세술 중 첫 번째로, 적을 만들지 말라에 해당되는 인물이 바로 이원익에 해당되고 있었다.

우안 송시열은 현재에 이르러 김종필 총리에 비견하고 있었다. 뚝심과 근현대사를 이해하는데 그 중심에 김종필 총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9선 국회의원이기도 한 김종필 총리가 김영상 대통령과 차이라면, 한 나라의 리더 ,즉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실록이 아닌 일기로 전해져 오고 있다. 두 사람의 운명은 참모와 함께 했다. 연산군 때는 장녹수, 광해군 때는 김개시가 있다. 그들은 역사학자 신병주는 실질적인 참모라고 했다. 여색에 빠져서 왕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것이며, 왕이 자신이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면,그것이 폐위 혹은 유배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을 제대로 수습못하고, 북으로 북으로 피난길에 올라갔지만, 율곡 이이, 이원익과 같은 명재상이 있었기 대문에,의 치부에도 불구하고 성군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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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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