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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 전하는 ‘안다는 것’의 세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신동숙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8월
평점 :
모든 지식은 왜 무지로 이끄는가?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우리네 사회에서 무언가에 대한 앎(지식)을 물으면 인터넷 검색창을 떠올리거나 스마트폰의 앱을 열어 계산하고 길을 물으며, 자기 고유의 기억이나 생각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멈추었다. 이젠 나아가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에게 물어 답변을 얻거나, 자신이 꾸미고 싶은 한 편의 글을 얻어내기도 한다. 우린 언제부턴가 계산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기계에 맡기고, 논쟁, 분별, 생각, 가치부여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지식의 탄생(Knowing what we know)』은 이처럼 지식의 획득과 보관, 전달 및 확산이 기술의 발달, 특히 최근 1세기 남짓한 시간에 급격하게 새로운 단계로 변환함에 따라 인류가 “꾸준히 존재할 사상과 감정, 도덕적 올바름을 대표하는 사실과 진실”에 대한 ‘지식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여야 하는지, 나아가 이 지식이 건전한 판단력이나 분별력을 가지고 행사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진정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선의 수단을 인식하고 채택할 수 있는 현명함이라는 ‘지혜’로 발휘되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영역은 점토 흙판에서 코덱스와 양피지, 종이라는 글의 기록 도구에서부터 도서관, 학교, 백과사전, 지식검증 수단인 시험, 인쇄술과 책, 사진과 신문, TV, 컴퓨터에 이르는 그야말로 광범위하게 아우르며, 이를 통해 지식의 생성과 획득, 보관, 전달 확산의 역사에 깃든 지식과 지혜의 발현에 있어 우리 인류의 태도는 신뢰할 만한 것인가를 묻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지혜의 발현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요인들로부터 인류 지혜의 미래는 어두운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의 제기라 하겠다.
1. 지식이란, 그리고 지혜란 무엇인가?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 34쪽, T.S. 엘리엇,〈바위(The Rock)〉
지식에 대한 역사적 정의들이 시대별로 소개되고,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의 정의,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지식의 정의에 이른다. 그것은 “사실이나 진실을 알고 있는 상태 또는 상황으로서, 그 사실과 진실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인식(옥스퍼드 영어사전)”이다. 그런데 이 지식이란 것은 실로 모호하기 그지없는데, ‘사실과 진실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인식’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논쟁적인 세계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플라톤의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라는 아주 오래된, 오늘까지 인식론적 바탕이 되는 정의가 있긴 하다. 그러나 믿음의 조건, 참의 조건, 정당화 조건을 제 아무리 논의해 본들, 과연 이견없는 지식이 존재 가능할까?
사실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란 말 속의 믿음처럼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 T.S 엘리엇은 연극 〈바위(The Rock)〉의 한 대사에서 “끝없는 발명, 끝없는 실험에서,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얻지만 고요함에 대한 지식은 얻지 못하고, (...) 모든 지식은 우리를 무지로 이끌고”하며 넘치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혜와 삶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비탄조로 읊조린다. 학교, 도서관, 백과사전처럼 지식의 배움, 보관과 전달 수단의 오랜 역사적 발달이 이젠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지식확장의 진화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엄청난 지식 창출과 저장, 전달확산의 속도처럼 지식의 진위와 선택적 무지라는 부정적 문제 또한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식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고 하던, 사실 진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라고 하던 지식은 항상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어왔다.
“신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책, 욕망, 개인적 악행, 개인적 호불호를
선전하는 엔진이다.” -360쪽
실제 지금 한국사회에 벌어지는 신문, 방송 등 미디어는 그 지식의 품질에서 이미 신뢰를 상실하고 있듯, 지식이라 불리지만 그것에는 음모와 거짓말, 진실을 가리기위한 온갖 비도적적 거래가 넘실대고, 이익과 자기 선호에 따른 언론 소유주들의 탐욕과 악의로 인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조작된 지식들이 난무한다. 영국 총리를 낙선시키기 위한 《데일리 메일》의 악의에 찬 거짓 뉴스와 그 확산의 예에서부터 정치적 대의나 견해를 선전하기 위해 편향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방식으로 정보를 체계적으로 왜곡해 전파하는 프로파간다, 돈, 정보, 지위와 권력의 욕구로 인한 학자를 비롯한 기업, 관료사회의 비뚤어진 지식의 조작 왜곡은 은밀하고도 교활하게 이루어져왔으며, 이루어지고 있다.
【「음모와 가짜 뉴스의 시대」, 책 358쪽에서】
물론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지식의 확산에서 ‘완전한’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경향과 편견, 편향성은 불가피할 것이다. 제아무리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려해도 미묘한 변화가 명백히 개입함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렇기에 지식이란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논쟁의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로부터 생각을 이끌어내고, 역사와 경험을 통해 이해한 바에 따른 생각과 비판, 설득에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 없이 이러한 태도와 분별능력이 가능하겠는가? 지혜의 미래가 어둡다는 저자의 문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인간 사회의 실제 때문일 것이다.
또 한 측면은 설혹 명확한 진실로서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그 지식이 어떻게 활용되는가에 따라 지혜로운, 혹은 현명한 사용인가의 문제이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러더퍼드는 원자력 현실화란 불가능하다며 핵분열의 실제 사용 가능성을 부정했다.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이 의견이 가증스럽고 우려스러웠으며, 아인슈타인에게 부탁해 핵분열의 중요성을 미 대통령(루스벨트,1933년)에 알렸다. “이 새로운 현상은 (...) 새로운 유형의 매우 강력한 폭탄이 개발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훌륭한 의견은 경멸당했으며, 외면당하고 무시되고 기각됐다. 지식이 지혜로 발현되지 못한 인간 사회의 하나의 전형이다. 편의성과 정치적 계산과 보복의 욕구를 위한 결정이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억압하거나 차단시켜온 것이 지식에 대한 인류의 중대한 한 축이다.
“지식은 겸손을 낳고, 무지는 교만을 낳는다. (...) 겸손과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 지에 대한 인식이 자부심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것이다.” -145쪽
책은 1787년 9월 필라델피아에 55인이 모여 논쟁한 연방헌법 입헌회의의 결과기록인 《연방주의자 논집》을 “지혜가 유익하게 활용된 사례”로 예시하고 있는데, 이 논집은 지금 우리 사회에 지식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떻게 사용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가 되어 줄 것 같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경쟁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음을, 하나의 통일된 사유로 통합하는 존경할만한 지식과 지식인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이와 달리 작금에 벌어지는 현실부정과 저급한 논쟁으로 국민을 분열과 사지로 몰아넣는 권력의 작태는 어떠한 현명한 자질(지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면교사의 예라 할 것이다.
2. 디지털 기억 상실증 -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세계
디지털 세계로의 변환은 인식론을 제치고 데이터(D), 정보(I), 지식(K), 지혜(W), DIKW라는 정보이론이 지식의 체계를 차지하게 이끌었다. 데이터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기호이거나 신호이며 표시일 뿐이다. 그리고 정보란 그저 눈에 들어오는 사실의 총합이다. 이 정보들이 결합하여 어떤 맥락과 의미를 가지게 되면 지식이라 할 것이다. 지혜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지식을 인간 개인과 사회에 소중한 유용성으로 발현한 것이다.
일례로 책상과 그 위에 책이 있는 사진 한 장과 책상과 책이 바닥에 있는 사진 한 장, 두 장의 사진이 있다. 각각의 사진들은 데이터고, 두 장의 데이터로부터 책상에서 책이 바닥으로 옮겨져 있다는 것이 정보다. 이것을 흔히들 사실(Fact)이라고 말한다. ‘그거 팩트니까 진실이야, 팩트를 보란 말이야, 뭐가 거짓이야?’ 라고들 마치 정보가 진실의 지식인양 말하곤 한다. 그러나 마침 CCTV가 있어 동영상에는 누군가가 지나가며 손에 닿아 책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제 책은 누군가에 의해 떨어진 것이며, 그 누군가가 왜 책을 떨어뜨렸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만일 그 장면에 시계가 있다거나 또 다른 맥락의 어떤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점진적으로 참된 지식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지식도 아니며, 그저 사실의 총합일 뿐이며, 정보들이 맥락과 결합하여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그리고 그 지식이 어떻게 활용되는가가 지혜의 문제일 것이다. 정보를 조작하거나 날조하고,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거짓 정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설혹 진실된 정보가 있어도 핵폭탄이 인류 자멸의 한 시작임을 알면서도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던 리처드 파인만과 같이 지식을 지혜롭게 사용치 않음으로써 그(원자 핵분열) 오용을 방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의 예와 같이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수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 그 정보들의 추측과 숙고, 반추와 고려, 상상과 평가 등 신중한 비판적 사고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오늘날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굳이 이러한 복잡한 노력을 요구하는 지식을 습득하지도, 설혹 습득한다할지라도 깊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알더라도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 기억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자판을 몇 차례 두들기면 검색한 단어와 설명들, 그리고 관련된 하이퍼링크를 통해 찾고자하는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온라인에서 찾은 지식은 찾자마자 곧바로 잊어버린다. 실제로 곧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디지털 기억상실증’이라 부른다.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얻는 사람들의 조사에서 이들은 책에서 지식을 얻는 사람들보다 훨씬 엉성하고 얕은 지식을 습득한다.”고 한다. 그저 중요 항목만 표시하고 필요하면 다시 찾으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결국 스스로의 두뇌 신피질에는 아무것도 기억되어 있지 않아, 소위 인식론에서 말하는 선험적 지식은 물론 경험적 지식이 천박하게 된다. 이들과 진실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나 분별, 생각과 가치부여를 말한다는 것은 공허한 행위에 가깝다. 물론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지식의 본질적이고 인간 지식의 역사적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3. 맺는 말 - 지식은 왜 필요한가?
인류는 가히 경이적인 기술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했으며, 이미 상당히 깊숙하게 그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낙관주의적이고 낭만적 엔지니어와 연구자, 학자와 기업들은 말한다. 걱정할 것 없다. 인간을 대신하여 생각해주고 가치를 결정하는 기계가 출현하는 것은 오히려 신체능력을 대체한 각종의 기계장치들처럼 인간 뇌의 고된 노동에서의 해방이 될 것이며, 역사에서도 이같은 기술의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피해 없이 욕구 전이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순진한 낙관론에 공감하지 못한다.
기계에 인간의 신체적 활용과 정신의 작용을 맡기고 신체와 뇌의 모든 부담을 던진 채 잠재된 능력의 발견과 편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혜택을 과연 만끽할 수 있을까? 인간의 지각 범위를 넘어서는 초지능이 그 어떤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지니지 않은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까? 이 책을 읽다보면 지식의 습득을 위한 무한한 경험과 그 경험에 의해 축적된 인류의 빛나는 지식의 보관과 전달, 확산의 노력을 보게 된다. 학교에서 선조들과 선배들이 쌓은 지식을 전수받고, 그 지식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사유능력을 계발하고, 이렇게 체화된 지식을 통해 자기 삶의 건강성과 생명을 유지 존속시키며, 공동체와 결속능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인류의 보다 낳은 삶을 위해 기여하는 지혜가 어떻게 이 세계를 만들어 왔는가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인간 개체들 각각이 자기 지식의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면, 그 지식을 토대로 한 건전한 판단력과 분별력이라는 실제적 문제에 대한 명민한 감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의 사회는 허위와 거짓, 악의와 부적절함에 의해 조작 날조된 지식에 대해 속수무책일 것이다. 20세기 초 아메리칸 타바코 컴패니는 담배 판매를 신장키 위해 여성의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욕망을 자극해 판매고를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당시에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흡연을 금지했으나, 달리는 마차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무는 여성을 ‘자유의 횃불’이라는 인식의 선전을 대대적으로 실행한다. 이 선전은 불과 며칠 만에 담배 피는 여성을 자유의 불빛으로 이미지 조작을 함으로써 담배피우는 것이 곧 평등과 자유, 정의의 표상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선전이 대중에 확산되어 지식이 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지식이 대중에게 없었다는 점이다. 날조된 파렴치한 거짓 지식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기억과 생각의 세계에서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인터넷 검색기능의 접근이 쉬운 방법일지라도 지식은 인류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인간 조건이 아닐까?
오늘 지식이 처한 기술환경의 세계에 대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우리들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우린 답할 수 있는 것인가는 또 하나의 엄중한 물음이 되어 울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은 지식 생성과 보관, 전달과 확산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고귀한 고찰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지적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매혹적인 책이 되어 주리라는 믿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