겅클
스티븐 롤리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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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인 겅클(Guncle)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단어의 외형이 이미 그 개념을 드러낸다. 게이 삼촌. 겅클은 또한 아이들로부터 거프(Gup; Gay Uncle Patrick)로도 스스럼없이 불리는데, ‘게이 삼촌 패트릭은 끔찍해하지만 굳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기꺼이 수용한 친근한 언어이기에 사용을 금지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동생 그레그의 아내였던 패트릭의 오랜 여자사람 친구였던 세라의 오랜 투병과 죽음은 이들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죽음을 앞두었던 아내의 상실에 대한 고통으로 이미 심한 알콜 중독상태에 빠져있던 그레그는 형 패트릭에게 아홉 살 메이지와 여섯 살 그랜트를 자신의 중독치료 기간동안 맡아 줄 것을 부탁한다.

 

자신의 배우자였던 조의 죽음에 대한 비탄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패트릭에겐 절망적인 부탁으로 느껴지지만 동생의 상태를 치유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인다. 인생의 중반에 어언 사년간 사막의 사유지에서 숨어 지내왔던 패트릭은 두 아이들과 상실의 고통을 서로 보듬고 직시하며 그 상황을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를 배워 나간다. 작품의 초입부터 뚜렷하게 도드라져 소설을 더욱 매혹적인 작품으로 이끄는 주요 동력이 있는데, 패트릭이 어린 조카 아이들에게 하는 말투(語調)의 양식이다. 그는 마흔 중반의 영화배우가 동료들과 나눌 때 사용함직한 언어를 그대로 들려준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말들은 친절한 설명과 그 말이 어떤 의미로 이야기 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세상에 대한 신랄한 경험의 말이지만 안전한 방식으로.

 

이것은 세 사람의 구십 일간 함께하는 일상에서 선언되는 십여 가지의 겅클 규칙으로도 드러나는데, 거프, 왜 다른 사람처럼 말하지 않아요?”라는 여섯 살 그랜트의 물음에 패트릭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들만의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지함만으로 흐른다면 이 소설은 다소 지루해버렸을 테지만, 아이는 삼촌이 하는 행위를 쫓아 거슬리는 행위를 하고, 패트릭은 이내 그런 조카에게 주의를 준다. 이때 어린 그랜트는 나 자신이 되고 있어요.”라고 받아친다. 아이만의 유머와 유쾌함이 깃든 수용 방식이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함께하는 법을 배워나가며, 슬픔의 비통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로의 이해를 넓혀가며 삶의 길을 밝혀나간다.

 

아홉 살 메이지의 당돌한 표현들은 소설의 흐름에 깊숙이 개입하여 아이들의 상실의 슬픔에 대한 이해의 워크북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삼촌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되죠. 안 되나? 안 되죠! 우리를 달래줘야죠, 그것도 몰라요?” 어린이답게 웃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걸 육아라고 생각지 않는 패트릭에 대한 세상의 진부한 언어를 장착한 아이의 항의다.

 


페트릭은 일상의 행위와 언어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체현토록 한다. 겅클 규칙 7, 이 집안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옷을 입는다. 남자 옷이냐 여자 옷이냐는 상관없다.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어때?”, 혹은 그건 여자가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 이 집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니? (...) 남자 일 또는 여자 일이라는 말조차 있어선 안 돼. 사람은 그냥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이들 대화로부터 독자는 편견없이 사랑하고 진정한 자아를 가꾸도록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도록 신중하게 선택된 언어임을 말하는 패트릭을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아이들과 삼촌 패트릭이 아이들의 엄마 세라의 생일을 기리며 케익에 세 개의 촛불을 켜놓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 장면이 있는데, 같이 할 수 없는 사랑했던 존재의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상실을 어떻게 자기 생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지를, 혹은 분리 할 수 있는지, 자기 내면의 진솔함을 당당하게 꺼내도록 함께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상실의 슬픔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패트릭은 아이들의 엄마, 세라를 향해 소원을 말한다. 너를 힘들게 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 네가 빛으로 가득하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길. 그리고 춤을 출 수 있길 바라...”, 그때 그랜트가 삼촌을 향해 그 소원 좋아요, 거프, 이 대화가 얼마나 아름다움으로 충만했는지, 존재에 대한 사랑과 아이들 마음에 대한 이해가 어우러져 인생의 이야기란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빅토리아 베넷의 언어와 함께 진실의 언어로 내게 새겨진다.

 

소설은 마음속을 맴도는 상실의 비탄을 함께 나누며,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나가는 아이들과 겅클의 성장기다. 아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아이에게 패트릭이 전하는 난 너희가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단다. 산다는 건 가장 드물고 귀한 일이야.”라는 아이들에게는 어렵게 들릴 말이지만 그 진정함에서 그것은 곧 자신을 향한 언어이기도 함을 읽게 된다. 동성인 배우자 조에 대한 상실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패트릭은 아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놀라운 생명선, 회복 탄력성을 발견하고,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길을 찾아낸다.

 

헐리웃을 연상케하는, 대중의 일상적 삶에 신선한 유쾌함을 던져줄 그런 통속적 소재의 이야기 전개를 보이지만, LA에서 직선거리 150Km 떨어진 주요 배경인 팜스프링스처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문화의 유머와 속도감, 기분좋은 감동만을 빼내 상실의 슬픔과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우아하게 직조해 낸 작품이라 하고 싶다. 아이들의 온 숨이 넘어갈 듯 까르르대는 그 즐거움에 함께 순수해지는 웃음소리, 이야기를 관류하는 가장 사랑하던 엄마, 그리고 연인과 아내의 상실이란 슬픔으로 인해 흐느끼는 자기 소외의 고통을 온전하게 품어낸 소설이다. 그 안에 깃든 마음 속 깊은 서로에 대한 의지와 용기의 감정, 그 사랑의 정체가 독자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환한 감동의 웃음을 지으며 춤추는 그들을 그려 보게 된다. 내면의 그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우린 힘든 여름 내내 우울하게 지내는 대신 파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겐 여러분이 필요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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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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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거늘.”

-사무엘 하126절에서

 

그래,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다는 성경 속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간절했던 열여섯 살 청소년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랑이야기는 주검과 그 주검의 봉분 위에서 왜 춤을 추었는지, 그 기이한 행동의 동기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의 글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 사랑과 주검이 대체 어떤 의미였는지를, 법원 판결을 위해 그 당사자인 헨리 로빈슨(이하 로 표기)이 망자에 대한 모독으로만 보이는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행위를 했는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하는 사회복지사의 몇 차례의 면담 시도 끝에 마침내 핼이 써 낸 집요하고 세밀한 자기 관찰기이며, 사건에 이르게 된 동기와 내용의 진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쓰고보니 지나치게 무겁고 밋밋한 형식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단코 주검의 어두운 무게가 짓누르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해변과 바다와 요트, 그리고 오토바이와 침실과 사랑과 질투가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그런 열정의 이야기다.

 

이렇게밖에 묘사하지 못한 것은 감상자의 문장과 문체에 대한 열악한 능력일 뿐, 소설에서 사용되는 어휘를 비롯하여 하나하나의 문장, 그리고 그 구성에 있어 기발한 유머와 재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연결하기 위해 구사하는 수정, 위안, 액션 리플레이와 같은 앞 선 기술(記述)을 거듭 부연 설명하는 문장 기교로서의 인터페이스는 물론, 사회복지사 보고서라는 제 3자 시선의 글이 틈틈이 교호(交互)하여 이야기의 긴장과 흥미를 견인하는 세련되고 우아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생동하는 정념의 열기로 들끓는다. 정말이지 스타일리쉬!한 소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이 열여섯 살 핼의 격렬하고 생생한 사랑의 이야기이자 그 설렘에 얽혀드는 비극의 긴장미를 말하는 대신에 조금은 사변적 감상을 쓰려고 한다.

 

모든 일은 2초 사이에 일어난다.”

 

핼은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한 문장, 한 순간의 굴복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은 / 한 시대의 분별로도 돌이킬 수 없도다.”를 인용하며, 모든 일에는 어떤 순간이 있음을, 돌이 킬 수 없는 지점,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가슴이 절로 울렁거리며 성큼 사랑에 다가서고 만다. 핼은 바다에 끌고 간 요트 전복의 순간, 그리고 그를 조난의 순간에서 구해준 친절한 또래 청년 배리 고먼을 바라보았을 때, 배리가 그에게 자신의 레코드가게 아르바이트를 권하며 함께 일하기를 제안 했을 때, 핼은 이미 배리에게 저항 할 수 없는 정념의 감정에 휩싸였다.

 

소설은 이처럼 자신을 잃은 채 온통 사랑에 몰두했던 열여섯 소년을 그린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핼이 쓴 사건과 사건에 이른 나날에 대한 성찰기이며, 바로 소설인 이 글을 쓰는 핼의 글쓰기를 통한 자기 발견의 여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진로선택과 그 선택의 당위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불가피하게 거쳐야하는 고통스러운 성장과제에 대한 꼼꼼한 자기 관찰의 목소리가 곳곳에 흩어져, 소설 혹은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경험의 경계를 초월한(메타적) 문장론이거나 소설론을 엿보게도 한다.

 

이를테면, 나는 나의 과거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정신기술로 배리의 눈, , , 몸의 움직임, 목소리의 근접 촬영분을 엄선해 모호한 의미를 탐색하고 많은 것을 발견한다. 육체로 이루어진 어휘를.”이라거나, 지난 일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다. 우리가 한 모든 말, 행동, 디테일, 소소한 단편, 그 단편들을 모아서 커다란 단편으로 묶으려고 한다. (...) 하나의 전체로, 어떤 의미가 있는. (...) 나에게 그를, 또 나 자신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마치 소설 쓰기의 훈련 작법을 소개하는 것 같은 문장들이다. 물론 이러한 문장들은 배리와 핼 자신의 사랑의 여정에 대한 빠짐없는 묘사를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핼의 정념으로서의 사랑 이야기는 청소년이라는 성장기 인간의 경험 부재의 미숙함에서만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열여섯 살 핼에게는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놀라움이었겠지만, 이것은 안다고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이성이 쉽사리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것과는 다를 것이다. 자극에 빠져들고, 이성을 잃고, 상대에 빠져드는 것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며, 또한 그 맥락과 상황은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어 우리를 도전에 몰아넣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핼이 배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겨 거친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배리가 핼에게 쏟아붙는 말들인데, 나는 네가 지겨워!”,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건 우리 둘이 무언가를 같이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나일뿐이지. 나의 전부에서 드러나는 핼의 사랑이란 관념이 빠져있는 오류의 지적이다.

 

어쩌면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라 말할 수 있는 만큼, 철학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핼은 모든 환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수한 구멍이 생겨나고 그 구멍으로 현실이 침투한다.”, 결코 자신은 죽음과 같은 관념에 매몰된 관념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자사람 친구인 카리는 그에게 너는 설익은 관념들을 사람보다 중요시하고, 너 자신의 한심하고 탐욕스러운 감정에만 온 관심이 쏠려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감상자인 나는 카리와 배리의 지적이 핼을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핼은 자신과 배리가 나눈 말(대화)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표정, 몸짓, 분위기,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나타났던 상황과 장소, 맥락에 이르는 드러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쓴 이 소설, 이 글에 대해서 앞에 적은 말들은 우리가 직접 한 말들이다. 하지만 우리 얼굴 뒤쪽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더구나 감상글의 모두에서 말한 바처럼 그는 이미 묘사한 글에 뒤이어 수정의 글을 다시 덧붙여 쓰거나, 자기감정이 투사된 글에 위안이라 하여 추가글을 보충한다. 이도 부족했던지 액션 리플레이라 하여 실제 발생했던 모든 언어와 행위, 상황 일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장면으로 철저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핼은 죽음의 관념에 사로잡힌 관념론자도, 인식론자도 아니다. 그는 마치 대상 그 자체의 나타남, 그것을 신뢰하는 현상학자에 가깝다. 그래야 핼이 배리에게 2초 남짓의 순간에 사랑에 빠져드는 것, 배리의 모든 몸체를 자기 지각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 설명된다.

 

배리의 무덤에서 춤춘 것? 사랑했던 친구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었으며, 그 친구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졌고, 그래서 그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비난과 함께 핼이 원한 건 배리라는 관념이라고 지적하는 카리의 말은 설명은 옳은데, 귀결은 전혀 잘못 된 것으로 보인다. 핼은 철저하게 대상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보살핌, 기댐과 같은 몸의 얽힘, 몸의 지각을 신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뢰가 속박이요, 소유욕이요, 지루함이라 말하며, 오토바이를 질주하며, 짜릿함의 일탈로 벗어나려는 배리의 행위는 이 세계와 인간, 그리고 여타 대상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요즘의 사랑들은 배리의 사랑처럼 금세 싫증내고, 그 익숙함, 그 얽힘에 깃든 제한된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자유란 본래 조건부의 자유이지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미 몸이란 것에 구속된 존재가 어떻게 몸을 벗어나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쉴 새 없이 짜릿하게 살 수는 없는 거야라는 말이야말로 진실의 일부를 담아낸 것일 게다.

 

아마도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만큼은.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까?”

- 이 문장보다 더 현상학적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결정적인 단서!, 핼은 나는 내 몸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것을 떠나게 된다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대목이다. 이 문장에 이어서 노화의 무수한 단점들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몸지각의 무뎌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해가 족할 것 같다. 이보다 인용 문장처럼 핼은 몸이 지각하는 것, 그것이 삶의 진실이기에 그 것을 떠난다는 것, 즉 죽음에 의해 주검이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 아니었을까? 49일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주검이 누워있는 무덤위에서 춤을 추는 것은 그와 한 약속의 이행이기도 하지만, 자기와 얽혀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이해했던 존재에 대한 상실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의식, 새로움을 위한 몸의 습관을 떨어내는 의식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무진장한 다양성을 경험 할 수 있는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의 지향을 위해. 카뮈의 말처럼 주검인 무덤, 그것에 대한 조롱과 모욕의 몸짓은 바로 이 새로운 몸들의 태어남이라는 지향의 몸짓인 것 아닐까?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썸머 85에서


결국 핼은 모든 것이 가라앉을 수 있는 시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더 많은 걸 쓰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현재에 파묻히지 않고 새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라며,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쓴다. 이 문장은 소설의 첫 문장인 나는 주검에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돌아가 조우한다. 나는 실존주의의 현상학자 샤르트르의 옅은 그림자를 이 소설에서 본 것 같다. 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영문학 선생 오즈번의 말처럼 핼이 쓴 이 글은 핼의 인생에 새롭고 의미있는 구심점이 되고있는 성찰적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통제하기 힘겨운 에로스의 뜨거운 에너지를 다루는 성장의 의례적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체험의 성찰을 통한 자기 발견의 철학적이며 문학적 행보라 말하고 싶다.  아무쪼록 이 사랑 소설은 이야기의 긴장감이나 생동감, 강력한 흡입력을 장착한 재능 넘치는 작품이다. 누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채로운 텍스트 구성의 맛깔스러움으로 이야기 전개에서 도망치기는 힘겨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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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의 구원 - 부서진 땅에서도 왕성하게 자라난 희망에 관하여
빅토리아 베넷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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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사랑, 10년의 꿋꿋한 희망의 기록

 

 

책은 야생의 삶을 실천하는 한 여인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리는 자기의 배움이며, 한 아이의 엄마로서 그 아이가 스스로의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지원자로서, 한편으론 그 아이가 이 지상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응원하는 조심스러운 걸음이다. 그러기 위해 엄마와 어린 아들은 살아가는 나날이 한 단위의 기쁨과 슬픔으로 이뤄져 있음을 이해하며, 서로의 사랑과 용기를 발견하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책의 상실과 고통,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삶의 어둠과 빛, 그리고 끈질긴 생동성이 발산하는 생의 경이로움에 대해 터무니없이 취약한 문장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 인생에 담긴 슬픔 속에 깃든 작은 사랑 행위들을 어루만지며 문밖 작은 공영주택 야생의 텃밭, 그 소박한 세상에 미소를 짓고, 우아,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는 아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삶에 감사하는 여인의 10년 기록에 나는 몇 차례 눈물을 훔쳐대야 했다. 그렇다고 감상(感傷)에만 젖어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 표제인 들풀은 아마 잡초(雜草)의 순화된 우리말 표현일 것이다. 주류의 언어에 내재된 인간 필요 중심의 편협한 의미를 피하려했음이리라. 빅토리아 베넷은 수시로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을 주사해야하는 당뇨병성 체톤산증이라는 불치의 병을 지닌 어린 아들과, 돌과 석면과 공장의 잔해위에 세워진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인 공영임대주택단지의 작은 집 마당에 야생의 정원을, 마법의 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귀족여성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 같은 화려하고 거대한 정원이 아니다. 값싸게 가꿀 수 있으며, 돌투성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야생의 정원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잡초의 정원’, 교란지에서 잘자라는 식물" 들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영어 사전에는 잡초를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이라 정의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혹시 달리 정의하고 있을까하여 찾아보았다. 한국산림청은 초목(草本)식물로서 묘포(苗圃) 또는 임지(林地)에 발생해서 임업상 해로운 것이라 하고, 한국어사전은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는 여러 가지 풀이라 하고 있다. 결국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의 시선에 의해 식물에 자의적 위계를 부여하여 배제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면 식물은 잡초가 되어 뽑히고 뭉개지고 폐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감상글부터 나는 잡초라는 단어 대신 책의 표제처럼 들풀을 사용하려 한다)

 

이것은 공영주택단지에 사는 저자의 가족을 비롯한 거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여되는 배타적 시선이다. 사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별, 이혼, 외부모, 가족돌봄, 질병, 노령, 직업불안정성, 실업, 저임금,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들을 다 같은 범주로 분류하여, 외딴 섬같이 분리하여 그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잡초(들풀) 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로서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온한 짓임을 은연히 강요하는 것이다. 야생의 정원을 가꾸는 행위는 처음부터 단지위원회의 퇴거 협박과 아울러 장애를 겪는다. 단지의 품위와 경관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이웃에 불쾌감을 조성하지 않으며 경관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어린 아들과 빅토리아는 도로의 틈새와 버려진 공장 잔해에서 피어나는 들풀들을 가져와 정원을 만들어 간다.

 

사람들의 뒤틀린 시선으로 인한 구별과 차별의 상황들은 이쯤에서 줄이련다. 저자의 글이 지향하는 것은 이런 부정성의 세계가 아니니 말이다. 주택 소유자와 주택임차자의 가축 돌봄에서조차 규제 적용의 범위가 달라진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는 규칙이 다른 것이다. 우리 집이 아니어서, 우리에게 집 지을 돈이 없어 차별받아야 하는 세계임을 이해한 어린 아들이 조용히 엄마 빅토리아의 손에 자기 손을 얹는다. 아이가 이 행위를 통해 이 세계에 적용되고 있는 하나의 규칙을 깨달았음에 무력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것 또한 아이가 이겨내야 할 경험임을 안다.


가시칠엽수, 빅토리아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심은 나무다. 6년이 되면 꽃이 피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다. 12년이다. 내 나무가 이제 엄마처럼 됐어. (...) 자단색 씨앗을 꺼내며 말한다. 그 씨앗을 어떻게 할 거야? 할머니를 위해 심자. (...) 탄생을 위해 한 그루, 죽음을 위해 한 그루(417)”

 

엄마는 아들에게 식물 알아보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들여다본다면 식물이 우리에게 자기 특징을 드러낸다고 알려준다. 나는 이 식물과 동물, 물질 등의 그 자체로 나타남이라는 비인간의 자기 발현 존재성을 고작 현상학, 실재론, 객체지향 이론의 책에서 이제야 배우고 있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그 어떤 채색된 철학보다 더 깊은 의미를 엄마와 함께하는 체험으로 습득한다. 자연 그 자체의 그러함에 따라 생산과 문화를 구축하는 파머컬쳐 농법을, 지속 가능한 원예의 원칙을 함께 공부하며 이 지상의 세계를 배워나간다.

 

핼러윈 데이를 맞아 빅토리아는 아이와 함께 마당에서 가꾼 들풀로부터 얻은 꽃잎과 줄기, 뿌리, 씨앗으로 잼과 과자를 만들어 동네 집들을 방문하기로 한다. 아이는 신이 났다. 자신이 엄마와 함께 만든 것을 선물로 누군가에 준다는 행위로, 아이는 문을 두드린다. 즐거운 핼러윈! 과자 드실래요?” 문을 연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게 사탕과 작은 장난감을 답례로 선물한다. 아이의 마음에 마을 사람들의 친절이 씨앗처럼 심겨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 세상의 진실이 가끔 가혹할지라도 이런 작은 일로 아이가 세상의 좋은 면을 보게 할 것을 기대한다.

 

아이는 자신의 병인 당뇨병과 싸우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것과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까다로운 파트너일 뿐이며, 그것과 함께 하는 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춤의 스텝과 루틴을 배워야하고 매일 빠지지 않고 춤춰야 하는 것일 게다. 아들의 희망은 엄마의 슬픔에 빛이 되어주고, 엄마의 용기는 아들의 비틀거리는 발을 지탱하여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때론 헛디디고 미끄러지며 실패할지언정 인생의 이야기를 춤추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동행한다.

 

아마도 원제목인 ‘All my wild mothers'야생의 어머니들‘, 혹은 야생의 여자들은 저자 빅토리아를 비롯한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그녀가 불공평한 세상에서 늘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알려주었던 여자들을 총칭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의 호출에 반응하며 함께 야생성을 칭송하고, 어둠 속에서 시를 짓고, 눈물로 시간의 상처를 함께 적셨던 사람들, 상실과 슬픔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이 비록 버거울지라도 함께 씨 뿌린 그녀들에 대한 애도와 경외와 감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아이의 위태로운 출산에 임박하여 언제나 그녀가 위협과 모욕과 궁박의 상태였을 때 마법사처럼 나타나 든든하게 방어 공격을 해주던 큰 언니의 죽음, 하나하나의 작은 행위를 통해 자기 꿈의 씨앗을 뿌려 육남매라는 멋진 정원을 만들어준 어머니의 돌봄과 죽음 등 상실의 슬픔 속에서 이 어지럽고 끔찍함에도 아름다운 삶임을, 그 삶에 감사해한다.

 

이 아름다운 글들 속에서 저자가 아들과 둘이 일식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사랑의 고통을 깨닫는 문장이 있다.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본다.

 

다음에 네가 이 나라에서 일식을 본다면, 그때 넌 지금의 할머니 나이와 같은 여든 두 살일 거야. (...) 엄마도 나랑 같이 볼 거야?

엄마가 그렇게 오래 살 것 같진 않아. 아이는 더는 말하지 않는다. 제 손으로 내 손을 덮고, 계속 붙잡고 있는다. 이것이 사랑의 고통이다. 사랑을 찾은 뒤에 그것을 떠나보내야 함을 아는 것, 그때까지는 서로를 계속 붙잡고 있는다. 계속 붙잡고 있는다.“ -345쪽에서

 

죽음은 시계가 조용히 자정을 넘기듯 은근슬쩍 다가온다.” 이별의 약속도, 사랑의 다짐도 없이. 우리 모두 빅토리아 베넷처럼 자기주도적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인생에도 수많은 작은 사랑의 행위들이 있었음을, 그것들이 이 기이하고 불순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고 지내는 힘일 것이다. 빅토리아는 마침내 미래를 두려워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그래서 그런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는다. 도달해야 할 행복 봉우리, 성취해야 할 완벽한 삶이란 없음을, 팔을 뻗었을 때 내 손을 잡을 사랑하는 그 누구와, 괜찮을 거라 말해주는 누군가 있으면 충분히 이 삶은 족할 것이다.

 

갈망과 결핍이 묘하게 또한 불편하게 병치된 공간인 거대한 은유이자 현실인 망가지고 버려진 곳에 무언가가 꿋꿋하게 생명을 키워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끈질긴 희망과 사랑의 찬가이다. 우리 모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겁고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거침없이 내습해 올 때가 있다. 빅토리아 베넷은 사물의 가장자리에서, 보도의 갈라진 틈에서, 단정한 부지의 경계선에서 우리가 모른 새에 자라는 들풀처럼 상호의존의 역사를 부정하며 배제와 소외가 거칠게 행해지는 세계일지언정 새 생명은 자라나 삶이 계속됨을 알려준다. 그리고 삶과 죽음 또한 계속되고 시간은 흐르고 또 흐르는 것임을.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척박한 땅을 갈고 마침내 세상의 경이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한 이 고결한 글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슬픔은 우리와 함께 산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우리의 나날을 몽땅 차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 빅토리아 베넷


도로 경계석, 배수구와 도로 틈새, 작은 흙무더기 등 들풀은 뿌리를 내리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 삶의 순환을 이어간다.  책의 저자 빅토리아는 이러한 들풀로 

야생의 정원을 가꾸었을 것이다. 촬영: 2024.9.9. 서울 선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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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 전하는 ‘안다는 것’의 세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신동숙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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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식은 왜 무지로 이끄는가?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우리네 사회에서 무언가에 대한 앎(지식)을 물으면 인터넷 검색창을 떠올리거나 스마트폰의 앱을 열어 계산하고 길을 물으며, 자기 고유의 기억이나 생각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멈추었다. 이젠 나아가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에게 물어 답변을 얻거나, 자신이 꾸미고 싶은 한 편의 글을 얻어내기도 한다. 우린 언제부턴가 계산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기계에 맡기고, 논쟁, 분별, 생각, 가치부여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지식의 탄생(Knowing what we know)은 이처럼 지식의 획득과 보관, 전달 및 확산이 기술의 발달, 특히 최근 1세기 남짓한 시간에 급격하게 새로운 단계로 변환함에 따라 인류가 꾸준히 존재할 사상과 감정, 도덕적 올바름을 대표하는 사실과 진실에 대한 지식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여야 하는지, 나아가 이 지식이 건전한 판단력이나 분별력을 가지고 행사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진정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선의 수단을 인식하고 채택할 수 있는 현명함이라는 지혜로 발휘되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영역은 점토 흙판에서 코덱스와 양피지, 종이라는 글의 기록 도구에서부터 도서관, 학교, 백과사전, 지식검증 수단인 시험, 인쇄술과 책, 사진과 신문, TV, 컴퓨터에 이르는 그야말로 광범위하게 아우르며, 이를 통해 지식의 생성과 획득, 보관, 전달 확산의 역사에 깃든 지식과 지혜의 발현에 있어 우리 인류의 태도는 신뢰할 만한 것인가를 묻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지혜의 발현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요인들로부터 인류 지혜의 미래는 어두운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의 제기라 하겠다.

 

1. 지식이란, 그리고 지혜란 무엇인가?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 34, T.S. 엘리엇,바위(The Rock)

 

지식에 대한 역사적 정의들이 시대별로 소개되고,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의 정의,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지식의 정의에 이른다. 그것은 사실이나 진실을 알고 있는 상태 또는 상황으로서, 그 사실과 진실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인식(옥스퍼드 영어사전)”이다. 그런데 이 지식이란 것은 실로 모호하기 그지없는데, ‘사실과 진실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인식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논쟁적인 세계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플라톤의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라는 아주 오래된, 오늘까지 인식론적 바탕이 되는 정의가 있긴 하다. 그러나 믿음의 조건, 참의 조건, 정당화 조건을 제 아무리 논의해 본들, 과연 이견없는 지식이 존재 가능할까?

 

사실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란 말 속의 믿음처럼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 T.S 엘리엇은 연극 바위(The Rock)의 한 대사에서 끝없는 발명, 끝없는 실험에서,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얻지만 고요함에 대한 지식은 얻지 못하고, (...) 모든 지식은 우리를 무지로 이끌고하며 넘치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혜와 삶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비탄조로 읊조린다. 학교, 도서관, 백과사전처럼 지식의 배움, 보관과 전달 수단의 오랜 역사적 발달이 이젠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지식확장의 진화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엄청난 지식 창출과 저장, 전달확산의 속도처럼 지식의 진위와 선택적 무지라는 부정적 문제 또한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식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고 하던, 사실 진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라고 하던 지식은 항상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어왔다.

 

신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책, 욕망, 개인적 악행, 개인적 호불호를 

선전하는 엔진이다.”  -360

 

실제 지금 한국사회에 벌어지는 신문, 방송 등 미디어는 그 지식의 품질에서 이미 신뢰를 상실하고 있듯, 지식이라 불리지만 그것에는 음모와 거짓말, 진실을 가리기위한 온갖 비도적적 거래가 넘실대고, 이익과 자기 선호에 따른 언론 소유주들의 탐욕과 악의로 인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조작된 지식들이 난무한다. 영국 총리를 낙선시키기 위한 데일리 메일의 악의에 찬 거짓 뉴스와 그 확산의 예에서부터 정치적 대의나 견해를 선전하기 위해 편향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방식으로 정보를 체계적으로 왜곡해 전파하는 프로파간다, , 정보, 지위와 권력의 욕구로 인한 학자를 비롯한 기업, 관료사회의 비뚤어진 지식의 조작 왜곡은 은밀하고도 교활하게 이루어져왔으며, 이루어지고 있다.

 

【「음모와 가짜 뉴스의 시대, 358쪽에서

 

물론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지식의 확산에서 완전한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경향과 편견, 편향성은 불가피할 것이다. 제아무리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려해도 미묘한 변화가 명백히 개입함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렇기에 지식이란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논쟁의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로부터 생각을 이끌어내고, 역사와 경험을 통해 이해한 바에 따른 생각과 비판, 설득에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 없이 이러한 태도와 분별능력이 가능하겠는가? 지혜의 미래가 어둡다는 저자의 문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인간 사회의 실제 때문일 것이다.

 

또 한 측면은 설혹 명확한 진실로서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그 지식이 어떻게 활용되는가에 따라 지혜로운, 혹은 현명한 사용인가의 문제이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러더퍼드는 원자력 현실화란 불가능하다며 핵분열의 실제 사용 가능성을 부정했다.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이 의견이 가증스럽고 우려스러웠으며, 아인슈타인에게 부탁해 핵분열의 중요성을 미 대통령(루스벨트,1933)에 알렸다. 이 새로운 현상은 (...) 새로운 유형의 매우 강력한 폭탄이 개발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훌륭한 의견은 경멸당했으며, 외면당하고 무시되고 기각됐다. 지식이 지혜로 발현되지 못한 인간 사회의 하나의 전형이다. 편의성과 정치적 계산과 보복의 욕구를 위한 결정이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억압하거나 차단시켜온 것이 지식에 대한 인류의 중대한 한 축이다.

 

지식은 겸손을 낳고, 무지는 교만을 낳는다. (...) 겸손과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 지에 대한 인식이 자부심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것이다.” -145

 

책은 17879월 필라델피아에 55인이 모여 논쟁한 연방헌법 입헌회의의 결과기록인 연방주의자 논집지혜가 유익하게 활용된 사례로 예시하고 있는데, 이 논집은 지금 우리 사회에 지식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떻게 사용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가 되어 줄 것 같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경쟁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음을, 하나의 통일된 사유로 통합하는 존경할만한 지식과 지식인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이와 달리 작금에 벌어지는 현실부정과 저급한 논쟁으로 국민을 분열과 사지로 몰아넣는 권력의 작태는 어떠한 현명한 자질(지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면교사의 예라 할 것이다.

 

2. 디지털 기억 상실증 -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세계


디지털 세계로의 변환은 인식론을 제치고 데이터(D), 정보(I), 지식(K), 지혜(W), DIKW라는 정보이론이 지식의 체계를 차지하게 이끌었다. 데이터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기호이거나 신호이며 표시일 뿐이다. 그리고 정보란 그저 눈에 들어오는 사실의 총합이다. 정보들이 결합하여 어떤 맥락과 의미를 가지게 되면 지식이라 할 것이다. 지혜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지식을 인간 개인과 사회에 소중한 유용성으로 발현한 것이다.

 

일례로 책상과 그 위에 책이 있는 사진 한 장과 책상과 책이 바닥에 있는 사진 한 장, 두 장의 사진이 있다. 각각의 사진들은 데이터고, 두 장의 데이터로부터 책상에서 책이 바닥으로 옮겨져 있다는 것이 정보다. 이것을 흔히들 사실(Fact)이라고 말한다. ‘그거 팩트니까 진실이야, 팩트를 보란 말이야, 뭐가 거짓이야?’ 라고들 마치 정보가 진실의 지식인양 말하곤 한다. 그러나 마침 CCTV가 있어 동영상에는 누군가가 지나가며 손에 닿아 책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제 책은 누군가에 의해 떨어진 것이며, 그 누군가가 왜 책을 떨어뜨렸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만일 그 장면에 시계가 있다거나 또 다른 맥락의 어떤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점진적으로 참된 지식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지식도 아니며, 그저 사실의 총합일 뿐이며, 정보들이 맥락과 결합하여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그리고 그 지식이 어떻게 활용되는가가 지혜의 문제일 것이다. 정보를 조작하거나 날조하고,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거짓 정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설혹 진실된 정보가 있어도 핵폭탄이 인류 자멸의 한 시작임을 알면서도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던 리처드 파인만과 같이 지식을 지혜롭게 사용치 않음으로써 그(원자 핵분열) 오용을 방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의 예와 같이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수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 그 정보들의 추측과 숙고, 반추와 고려, 상상과 평가 등 신중한 비판적 사고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오늘날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굳이 이러한 복잡한 노력을 요구하는 지식을 습득하지도, 설혹 습득한다할지라도 깊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알더라도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 기억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자판을 몇 차례 두들기면 검색한 단어와 설명들, 그리고 관련된 하이퍼링크를 통해 찾고자하는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온라인에서 찾은 지식은 찾자마자 곧바로 잊어버린다. 실제로 곧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디지털 기억상실증이라 부른다.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얻는 사람들의 조사에서 이들은 책에서 지식을 얻는 사람들보다 훨씬 엉성하고 얕은 지식을 습득한다.”고 한다. 그저 중요 항목만 표시하고 필요하면 다시 찾으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결국 스스로의 두뇌 신피질에는 아무것도 기억되어 있지 않아, 소위 인식론에서 말하는 선험적 지식은 물론 경험적 지식이 천박하게 된다. 이들과 진실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나 분별, 생각과 가치부여를 말한다는 것은 공허한 행위에 가깝다. 물론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지식의 본질적이고 인간 지식의 역사적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3. 맺는 말 - 지식은 왜 필요한가?

 

인류는 가히 경이적인 기술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했으며, 이미 상당히 깊숙하게 그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낙관주의적이고 낭만적 엔지니어와 연구자, 학자와 기업들은 말한다. 걱정할 것 없다. 인간을 대신하여 생각해주고 가치를 결정하는 기계가 출현하는 것은 오히려 신체능력을 대체한 각종의 기계장치들처럼 인간 뇌의 고된 노동에서의 해방이 될 것이며, 역사에서도 이같은 기술의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피해 없이 욕구 전이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순진한 낙관론에 공감하지 못한다.

 

기계에 인간의 신체적 활용과 정신의 작용을 맡기고 신체와 뇌의 모든 부담을 던진 채 잠재된 능력의 발견과 편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혜택을 과연 만끽할 수 있을까? 인간의 지각 범위를 넘어서는 초지능이 그 어떤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지니지 않은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까? 이 책을 읽다보면 지식의 습득을 위한 무한한 경험과 그 경험에 의해 축적된 인류의 빛나는 지식의 보관과 전달, 확산의 노력을 보게 된다. 학교에서 선조들과 선배들이 쌓은 지식을 전수받고, 그 지식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사유능력을 계발하고, 이렇게 체화된 지식을 통해 자기 삶의 건강성과 생명을 유지 존속시키며, 공동체와 결속능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인류의 보다 낳은 삶을 위해 기여하는 지혜가 어떻게 이 세계를 만들어 왔는가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인간 개체들 각각이 자기 지식의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면, 그 지식을 토대로 한 건전한 판단력과 분별력이라는 실제적 문제에 대한 명민한 감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의 사회는 허위와 거짓, 악의와 부적절함에 의해 조작 날조된 지식에 대해 속수무책일 것이다. 20세기 초 아메리칸 타바코 컴패니는 담배 판매를 신장키 위해 여성의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욕망을 자극해 판매고를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당시에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흡연을 금지했으나, 달리는 마차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무는 여성을 자유의 횃불이라는 인식의 선전을 대대적으로 실행한다. 이 선전은 불과 며칠 만에 담배 피는 여성을 자유의 불빛으로 이미지 조작을 함으로써 담배피우는 것이 곧 평등과 자유, 정의의 표상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선전이 대중에 확산되어 지식이 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지식이 대중에게 없었다는 점이다. 날조된 파렴치한 거짓 지식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기억과 생각의 세계에서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인터넷 검색기능의 접근이 쉬운 방법일지라도 지식은 인류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인간 조건이 아닐까?

 

오늘 지식이 처한 기술환경의 세계에 대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우리들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우린 답할 수 있는 것인가는 또 하나의 엄중한 물음이 되어 울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은 지식 생성과 보관, 전달과 확산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고귀한 고찰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지적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매혹적인 책이 되어 주리라는 믿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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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맡의 사유 - 초심자도 알기 쉬운 현상학 개념 읽기
심귀연 지음 / 경상국립대학교출판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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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늦게 객체지향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인간의 주체 독점적 권리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존재론적 실재론과 객체지향의 사고에 깊숙이 빠져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평평한 관계가 이 우주의 진실이며 본질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유를 읽다보면 그 뿌리인 현상학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특히, 메를로-퐁티의 몸지각과 몸틀을 토대로 한 세계 내 관계에 대한 이해의 아쉬움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인데, 물론 지극히 입문적 개괄서이기에 마음에 남아있는 과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그래서 내 읽기의 연속성을 위해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을 선택했다. 내 머리맡의 사유는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이다. 지각의 현상학을 읽기에서 배제한 이유는 학문적 접근의 야망같은 것은 애초에 없기 때문이고,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의 안내면 미진한 궁금증 해소에 족하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레비 R. 브라이언트와 그레이엄 하먼, 그리고 티모시 모턴이 바로 이 책으로 이끈 객체이론과 존재론 또는 사변적 실재론의 나만의 주인공들이다. 아마도 주체 없는 객체를 향한브라이언트의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2011는 내게 그 직접적 영향을 끼친 사유일 것이다. 레비 교수가 제기했듯, 인간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주장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에 관한 주장으로 전환하는 특이한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적처럼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의 근대철학 이래 현대인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존재자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들에 위계를 부여하려는 이 끈질기고 혐오스러운 망상은 이제 더는 이 세계를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위기에 처해있는 것 같다.

 

무수하게 인간과 사물, 동물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대상화 한 결과 기후온난화에서부터 심각한 경제적 문화적 양극화의 극단적 가속현상, 재화에 대한 헤게모니 쟁탈로 인한 적대화와 핵 전쟁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과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 인식은 그 신뢰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 우주에 대한 인식에 있어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대철학은 인간 보편적 특성인 이성적 능력으로 대상의 객관성을 파악하고 타자 문제를 증명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 근대적 기획은 스스로를 합리적 이성이라는 지식의 원천인 주관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다.

 


1. 현상학자들과 현상의 정의

 

나는 후설의 의식현상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근대철학이 인식론에 빠져 이분법적 주체와 객체 구도에 의해 지각활동의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하고, 기존의 모든 인식론적 편견이나 관념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를 직관하기 위한 현상 자체의 집중으로 전환적 사고의 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의 이해로 족할 것이다. (내 머리맡의 사유)은 주요 현상학 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퐁티, 네 철학자의 각기 다른 현상학의 차이를 소개하고, 현상학의 기술에 등장하는 개념어 스물아홉가지를 의미의 관계성을 가지며 설명하고 있다. 우선 내 입장은 존재론적 실재론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오늘의 우리들을 사로잡는 것은 인식론 우위의 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은 존재론적 철학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인식론자들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파악하기 위해 인식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여기에는 인간중심적 오만이 깃들어있다고 여겨진다. 인간인 자신들의 인식 판단에 의해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니 말이다. 그러나 돌, 나무, 이산화탄소는 인간의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미 거기 있다. 즉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 그자체로 있다. 현상학은 있음 그 자체인 현상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물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기 시현(示現),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는 바로 그것이 곧 실재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하이데거 또한 알리는 것 자체이지만 근원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 현상이라 정의하며, 마치 실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현상의 결여적 변양(變樣)’이라고 말한다. 즉 현상이란 자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존재자의 존재, 혹은 존재의 모든 변양이나 파생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현상의 배후나 이면에 어떤 다른 본질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나타남(현상)이란 수많은 나타남의 모든 연쇄를 가리키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의 전 존재를 독차지하는 그런 숨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샤르트르의 비판에 동조하며, 배후의 어떤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현상(나타남) 그 자체로 확실성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은 바로 이 나타나는 것, 바로 그것일 뿐이며, 나타남의 무한 연쇄에 의해 발견된다고. 아마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선언의 문장이 되리라.

 

드러난 자신이 곧 본질 자체다. 중요한 것은 나타남의 존재는 존재의 

나타남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실존 자체다.’”

 - Jean-Paul Sartre, 존재와 무

 

메를로-퐁티는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파고든다. 후설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라는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파악하려 했으며, 하이데거는 본질은 현상의 이면에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현상은 현상의 장에서 드러난다고, 중요한 것은 상황이며, 상황 속에 드러나는 것은 사물 자체이며, 이것이 곧 현상이다. 라고 말했다. 배후에 이면이란 것은 애초에 없으며, 현상은 상황 속에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다. 현상적 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비록 존재론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레비 R. 브라이언트의 비판처럼 하이데거의 존재론 부활의 시도는 그 의미를 철저히 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졌을 따름이며, 존재에 대한 현존재, 인간의 접근에 관한 심문으로서 현존재에-대한-존재에 대한 탐구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존재 자체 탐구는 인간에-대한-존재탐구가 되어버림으로써 인간 비인간 구분도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읽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존재론적 실재론에 가장 근접한 현상에 대한 접근은 단연 메를로-퐁티의 것이다. 이 책의 독서 동기가 현상학과 현상의 거친 개념 및 메를로-퐁티의 일차적 이해였으므로 2개 장으로 구성된 책의 1, 현상학자들의 현상학적 관점이라는 차이를 통한 성찰의 과정에서 이만큼의 수확으로 만족하리라. 2장은 현상학의 스물아홉 가지의 개념설명인데, 이 개념어의 설명 자체가 진행됨에 따라 현상학 이해의 단계적, 상호 연결적 이해의 심화를 돕도록 구성되어 있을뿐더러, 더욱이 해결코자한 내 물음의 개념어들을 중점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지적 해소의 과정이 되기에 충분했다.

 

2. 현상학의 개념어들

 

이 개념어들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사물 등 비인간과 서로 얽혀 나타나는 이 세계를 직시하는 데 많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이 세계우주에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변환해야 하는가를 성찰토록 안내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세계를 마주하고 있는가? 인간이 오만하게 주체의 자리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만물과 현상을 대상화함으로써 질서지우고 통제하려 한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읽어나가면 이들 개념들이 단순한 철학의 전문 용어만으로서의 소용이 아님을 깨우치게 된다. (부분적 감상의 진술로 몇 개의 개념으로만 정리하련다.)

 

2-1. 본질

 

데카르트를 출발로하여 흄과 칸트, 헤겔에 이르는 전통적 철학은 사실의 가능 근거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설은 구체적이면서 사실적인 주체의 주관성에서 본질은 획득된다고 주장하면서 본질은 체험하는 의식 내용까지 실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질은 판단중지를 통해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획득된다는 것이다. 메를포-퐁티는 존재란 사실 자체임으로 본질이 따로 있지 않다.”, 존재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그 자체로 있는 것을 인식대상으로 삼는 순간 수많은 왜곡이 담기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설명되는 순간 존재는 사실성에 벗어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일 테다.

 

2-2. 지향성, ~에 대한 의식

 

의식은 경험을 통해 순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종합한다.”, 이 말은 대상은 인식 밖에 있지 않고 인식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며, 의식 체험으로 드러나고, 인식과 인식 대상은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을 사유한다가 아니라 ’~을 할 수 있다라며, 전체적 통일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속체를 이루어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몸은 사물의 부름에 표상없이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몸이야말로 지각하는 몸이며, 주체-의식의 상관자로서가 아니라 행위하는 몸이며, 지향성이야말로 몸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사고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물 혹은 타인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 심귀연 교수는 사랑을 예로 제시하는데, 사랑은 계획도 생각도 아니며,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행위는 느낌을 수반하고 사랑을 함으로써 알려지게 되는 것이라고. 사랑은 관계에 있는 존재들을 사랑이라는 특별한 세계로 이끌어내는 것인데, 몸 없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느냐고, 몸 없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만큼 명료한 묘사는 없으리라.

 

2-3. 지각장(知覺場)

 

근대인식론은 경험에 의존한 지각을 정당화한다. 경험을 객관화하기 위해 대상을 적정 거리에 두고 고정시켜 변화를 제거한 채 인식한다. 이때 대상은 수동적 존재로 격하되고, 그럼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이 인식론의 근본문제이다. 경험할 수 없는 타자를 안다고 하지만 그것의 타당성을 확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객관성을 담보하는 이러한 순수 인상이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있다면 지각의 상황, 지각장(知覺場)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각이란 개별적이고 순수한 감각들의 연합이 아니라 온몸 지각이기에 공감각적이며,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모든 상황 속에 드러남으로써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각은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고, 몸인 지각이 세계에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라고 한다. 만지고 더듬고 살펴보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지, 결단코 이성 판단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교접 작용이자 짝짓기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2-4. 몸주체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대상도 객체도 아니다. 생리적 기계도 아니며, 인과율에 지배받는 물리적 몸도 아니다. 더구나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몸도 아니다. 몸은 지각하기도 하며 지각되기도 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대상이다. 몸은 주체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두 손을 맞잡아보라) 이로써 그 오랜 세월 배제되었던 존재 권리를 회복한다. 여기에 오늘의 신유물론적 사고의 토대인 객체지향 철학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몸들은 관계 속에서 세계를 열어간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몸을 객관화하고 밀어내는 순간 우리 몸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들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애라는 정상과 비정상 구분의 말처럼 망상이 출현한다.

 

몸틀(신체도식) 151쪽에서


2-5. 몸틀 (1)

 

어떤 몸들이건 그 자체로 고유성을 가진다. 몸의 상태가 어떻게 달라진다 해도 나는 몸인 나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의 달라진 나는 동일한 대상으로서의 영속성을 가진다. 설혹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가도 나의 동일성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 몸틀때문이라고 한다. 환지통, 시각장애인 등의 예시를 통해 역동적으로 변화가 가능한 몸틀을 확인하게 된다. 개조되고 확장되는 몸틀과 반복에 의해 습관이 됨으로써 드러나는, 스스로 공간성을 확보해가는 몸틀의 변신을 쫓는 우리의 눈길은 세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인지하게 될 것이다. 김초엽이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대한 바로 그 출발 사유이다.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만나 어색해 할 때 우리는 낯선 세계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식론의 세계에 고착된 사고는 그 낯선 세계의 이질감으로 곧 배제하고 장벽을 쌓아 올린다. 익숙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진정 관계 맺음을 통해 새로운 몸틀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시간을 참지 못한다. 줄곧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라는 근대 인식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의 예로 소개되는 지팡이 이야기를 짧게 옮겨 읽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시각 장애인의 지팡이는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부딪치고 넘어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팡이를 내팽겨쳐 버리면 영영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다보면 어느 순간 땅과 지팡이 끝의 위치가 가늠되고 자연스레 지팡이는 팔의 감각을 이어받는다. 물론 지팡이에 인간 몸이라는 다른 몸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몸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인간 비인간이 서로 얽혀들며 새로운 공간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세계는 지성에 이해 판단되는 그런 세계가 아닌 것이다.”

 

2-6. 몸틀 (2) - 장애와 결핍

 

인간은 몸의 존재이기에 결코 완전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을 희구한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다. 인간에게 몸이 없다면 장애란 애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완벽한 몸을 꿈꾸며 정상적 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도식으로 장애를 만들어 정상이 아닌 존재를 장애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존재론적 결핍을 전가하면서 결핍의 상태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결국 장애란 관계에서 겪는 트러블이라는 말이다. 장애는 몸의 속성이지 결핍이 아닌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들이 정치사회 곳곳에서 차별의 시선을 던지며, 배제를 당연시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몸의 존재자들이다. 그 몸은 다양하고 고유한 것이다. 본디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인 것이다. 장애란 이 세계에 없다는 진술이 진실이란 말이다.

 

2-7. 조건 지어진 자유

 

자유란 구속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몸인 인간에게 구속없는 자유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불가피한 대자존재(對者存在)이기도 하다. 다만 이때 누구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는 절대적 주체의 선택의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몸인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구속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조건 지어진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영혼을 말하는 자들은 정신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말하지만, 몸적 존재인 인간에게 그런 자유로운 영혼 따위는 없다.

 

몸인 나는 상황 속의 나이다. 몸인 수많은 존재들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 상황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상황 속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말이며, 이 참여의 힘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건 없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얼빠진 한 인물은 자신만의 자유에 빠져 말마다 자유 타령을 한다. 그 자유는 국민이 요구하는 책임의 조건을 못견뎌한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란 조건 지어진 자유임을 알지 못하는 우매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변신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자유이며 이 자유를 조건 지어진 자유라 말한다. 상황과 책임을 부정하는 자유를 외치는 것은 망상이외의 것이 아니다.

 

3. 맺는 말

 

이 책은 현상학 공부를 시작하는 입문자를 위한 개념 안내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은 현상학의 의미와 윤곽을 잡는 디딤돌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꼭 필요한 현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들을 마음에 각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늘의 현대철학들은 주체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중심적 사고인 인식론적 틀에 근거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너무 많은 공허와 왜곡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객체지향의 철학, 존재론적 실재론과 같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동등한 존재로 파악함으로써만 이 세계가 가능하리라는 사유가 그 토대의 철학으로 길을 이끌었다. 아마 이것도 이 책 스스로 그 자체를 드러낸 현상일 것이다. 내 몸지각과 서로 얽혀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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